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0장 : 새장 속의 왕 – 1화
내리떨어지는 산자락들 사이로 개울물이 맑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산골짜기의 돌멩이들은 평원의 돌보다는 훨씬 산의 정수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 위로 개울물이 흐를 때 나는 통탕거림은 탄생의 노래이자 필멸에 대한 좀 이른 장송곡이다. 데스필드는 산골 마을 앞의 돌다리 난간에 앉아 있었다. 다리 바깥으로 내민 그의 발 아래쪽에서 개울물이 통탕거리며 흐 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데스필드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뒤쪽, 그러니까 다리 상판 쪽에는 세 개의 배낭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물소리와 잘 어울리는 휘파람이 꽤나 길게 이어지고 나서, 데스필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리 저편의 오솔길은 침엽수들의 가지들이 우거져 작은 터널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데스필드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터널의 안쪽 어두운 곳에 서부터 두 시체가 나타났다.
살아 있냐고 물어보면 회의적인 대답을 할 테니 시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경은 노련한 도보 여행자가 되기 직전의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처해 있었다. 이 단계만 넘어서면 걸음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숨쉬는 것처럼 편안한 활동이 되겠지만, 아직 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이 시점이 가장 힘들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런 상태를 고도 1만 피트 지대에서 맞이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또다른 불운이었다. 데스필드는 측은한 표정으로 두 성스러운 이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무지막지한 노정은 파킨슨 신부의 ‘오발’에 대한 복수의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 었지만 데스필드는 자신의 앙갚음이 약간 과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뻤다.
오솔길을 빠져나온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가 앉아 있는 다리 난간까지의 거리가 마치 판데모니엄에서 패러다이스까지의 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헉헉거리며 걸어왔다. 데스필드는 몸을 돌려 난간에서 뛰어내린 다음 정중하게 박수를 몇 번 쳐줬다.
다리에 이르자마자 파킨슨 신부는 난간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고 핸솔 추기경은 아예 돌다리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배낭 무더기에 등 을 기대었다. 핸솔 추기경은 자신들의 짐까지 지고서 걸어온 데스필드에게 뭐라고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마음껏 원망했다.
“너, 허, 일부러, 휴, 빨리, 흐, 걸은, 허어, 거지?”
“제국어로 말하쇼, 제국어로. 그거 엘핀이오, 뭐요?”
“너일부러빨리걸은거지 – 익!”
숨이 차다는 이유로 단번에 고함 질러버린 파킨슨 신부는 곧 머리가 띵해지며 양쪽 관자놀이가 두개골 안쪽으로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앞이 캄 캄해진 파킨슨 신부는 비틀거렸다. 데스필드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데스필드는 신부의 허리 뒤쪽을 움켜잡아 재빨리 신부를 난간 위에 엎드리게 했다.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처치에 고마워하며 개울을 향해 구토하기 시작했다. 히죽 웃던 데스필드는, 그러나 파킨슨 신부의 구토가(幅吐歌)를 듣던 핸솔 추기경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보곤 황급히 그를 안아올렸다. 데스필드는 추기경을 난간 위에 패대기쳐 놓은 다음 두 사람이 개울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두 사람의 허리띠를 움켜쥐고는 먼산을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뭉게구름 하나가 유유히 흘러갔다.
잠시 후 두 성직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이 탈진한 상태로 다리 상판에 주저앉았다. 데스필드는 산골마을의 높은 지붕들을 가리켜보이며 두 사람을 다그쳤다.
“바로 저기가 마을이오. 다 왔다고. 조금 더 가서 쉽시다, 예?”
“나…… 농담이 아닌데, 정말 한 걸음도 더 걸어갈 힘이 없다. 데스필드……”
핸솔 추기경의 경우에는 아예 말도 할 힘이 없는 듯했다. 데스필드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배낭들을 휙 들어올렸다. 파킨슨 신부는 어딜 가냐고 물 었지만 데스필드는 그대로 마을 쪽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시간이 약간 지난 후, 데스필드는 덜커덩거리는 수레 하나를 끌고서 다리로 돌아왔다. 그러곤 아무 말도 없이 신부와 추기경을 수레 위에 안아올렸 다. 짐을 부리는 인부처럼 신속한 동작으로 두 사람을 짐칸에 얹은 데스필드는 그대로 수레를 끌며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파킨슨 신부는 눈물이 핑 도는 눈을 힘겹게 닦으며 낮게 속삭였다.
“고마워, 데스필드.”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데스필드는 조금 후에야 대답했다.
“뭐, 두 당신 다 오늘은 꽤 잘해 줬으니까 본인도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핸솔 추기경 역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위액 때문에 입안이 쓰린 데다가 눈앞이 빙빙 돌고 있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수레에 얹혀서 가는 길 이지만 그래도 산길인지라 수레가 덜컹거릴 때마다 신부와 추기경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어야 했다.
조금 후 탈진해 버린 두 사람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쯧쯧! 그래서 수레를 달라고 하신 거군. 흘리고 온 게 사람이라고 말하지 그랬소. 그럼 나라도 같이 갔을 텐데. 혼자서 끌고 오셨소?”
“별로 무겁진 않수.”
“그러고 보니 숨소리도 고르군. 산사람이오?”
“패스파인더요.”
역시, 과연, 어쩌고 하는 말이 짧게 이어졌다. 그리고 두 성직자는 힘센 팔에 의해 들어올려지는 자신을 느꼈다. 핸솔 추기경은 자신을 들어올린 사 내의 수염 텁수룩한 얼굴을 보며 고맙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과연 똑똑히 말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산골 마을에 이른 저녁이 찾아왔을 때에야 핸솔 추기경은 처음 보는 곳에서 깨어났다.
학자이기도 한 핸솔 추기경은,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머릿속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물이라는 내용의 성명서 한 편을 탈고하고 말았다. 물을 찾아 일어나던 핸솔 추기경은 침대 옆의 땅이 맨바닥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맨발에 흙을 묻히며 돌아다니던 추기경은 방 안을 한 바퀴 일주하고 나서야 침대 머리 쪽에 놓여진 조그만 질그릇 주전자를 발견했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성급한 손놀림에 적지 않은 물을 앞가슴에 흘렸지만, 어쨌든 핸솔 추기경은 주전자 부리에 입을 댄 채 물을 다 마셨다. 다시 침대에 주저앉은 핸솔 추기경은 입가를 닦으며 방안을 관찰했다. 조금 전엔 물 이외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창문은 방 안쪽을 향해 불그스름한 저녁노을을 뿌리고 있었다. 굵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었고 돌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벽난로는 여름인지라 사 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핸솔 추기경 자신은 속옷 바람으로 두툼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둑어둑한 방안을 방황하던 그의 눈이 조금 후 그의 옆에 누워 있는 파킨슨 신부를 발견했다. 파킨슨 신부는 파리한 얼굴을 한 채 잠들어 있었다. 그를 깨울까 생각하던 추기경은 신부 역시 일어나면 목 이 마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핸솔 추기경은 침대 주위를 살폈고, 조금 더 어두운 곳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자신의 신발과 겉옷을 발견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추기경은 한 손에 빈 주전자를 들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추기경은 잠시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앞을 바라보았다.
울타리 안쪽으로 좀 넓은 텃밭이 있었다. 그리고 그 텃밭에서는 타오르는 메밀꽃들이 붉은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의 머릿속 학자 영역은 그 순 간에도 조파된 여름메밀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지만 추기경은 여전히 그것을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양탄자로 느꼈다. 그래 서 핸솔 추기경은 메밀밭 가장자리에 앉아 입에서 연기를 뿜어대는 데스필드를 보았을 때 그가 불타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데 — 스필드! 데 — 스필드 군!”
데스필드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핸솔 추기경은 그의 당혹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손에 쥐어진 작은 파이프를 보고선 자신이 참 말 도 되지 않은 상상을 했음을 깨달았다. 데스필드는 추기경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도 밟으셨소, 예하 당신?”
“아니, 아니오. 난 잠시 당신이..
“데스필드! 무슨 일이냐!”
다음 순간 데스필드는 메밀밭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고 그 모습에 놀라 뒤를 돌아본 핸솔 추기경 역시 기겁하며 쭈그리고 앉았다. 속옷 차림으로 핸 드건을 휘두르며 달려나온 파킨슨 신부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조준하려 애쓰고 있었으며, 그 눈은 아직까지도 반쯤 감겨 있었다. 핸솔 추기경 과 데스필드가 고래고래 고함 지르고 악을 써대는 것은 파킨슨 신부가 이성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를 더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이었다.
다행히도 핸드건의 도무지 대책이 없는 파괴력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파킨슨 신부 자신이었고, 그래서 신부가 얼떨결에 암소나 거위 등을 쏘아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전되고 나서 파킨슨 신부는 오두막의 벽 아래 놓여 있는 긴의자에 앉아서 껄껄거리게 되 었고 데스필드는 그 앞에서 옷을 털며 투덜거렸다.
“여기가 어디냐?”
“이름은 없고, 그냥 도스 계곡 직전의 마을이오. 한 서른 가구 정도 사는 모양이더군. 여기선 밤에 싱잉 플로라의 노래도 희미하게 들려온다던데요? 해가 지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직접 들을 수도 있겠지.”
“여기 주인은 어디 있지?”
“조금 전에 염소 한 마리 끌고 갔소. 저녁식사 때 대접하려고 잡으러 간 것 같은데, 사실 불필요한 일이지.”
“불필요하다니?”
“두고보면 알 거요.”
데스필드의 예언은 정확했다. 그날 저녁,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는 오래간만에 보는 ‘아궁이로부터 나와 식탁에 올라온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고기도 제대로 삼키지 못해서 집주인을 상심시켰다. 하지만 플레리라는 이름의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산 증세일 겁니다. 너무 빨리 높은 곳으로 올라오셔서 그런 거지요.” 파킨슨 신부는 염소 뒷다리를 들고 신나게 뜯고 있는 데스필드에게 저주 섞 인 시선을 날려보냈다. “귓속이 멍멍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아, 예. 두 분 다 물을 많이 드시고 푹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핸솔 추기경은 질 좋은 와인을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이거 죄송하군요. 플레리 씨. 음식 대접을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어, 아시는군요? 그렇지만 여기서도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건 똑같이 실례입니다. 그런 실례를 할 수야 있겠습니까.”
플레리는 사람좋게 웃으며 두 성직자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물인 와인을 한 병 더 꺼내와 테이블에 놓았다. 집 뒤에서 떠온 차가운 샘물을 와인 에 타서 파킨슨 신부에게 건넨 플레리는 의자를 삐딱하게 놓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럼 ・・ 이 자리를 식사 자리 대신 이야기 나누는 자리로 만들까요. 두 분 모두 빨리 주무시고 싶겠지만 식후에 곧장 누우면 더 힘드실 겁니다. 위 에 부담이 없어야 잠이 잘 오죠. 그리고 낮에도 많이 주무셨고, 이야기나 좀 하지요. 이렇게 급하게 올라오신 건 뭐 때문입니까? 싱잉 플로라를 구하 시기 위해서입니까?”
핸솔 추기경은 데스필드를 보았지만 데스필드는 여전히 걸신들린 듯이 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가 배고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추기경은 좀 의 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추기경은 데스필드가 먹을 수 있을 때 꽉꽉 채워두는 성격일 거라 짐작했다.
“아닙니다. 주인장. 우린 도스 계곡을 지나서 제국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치즈 조각을 씹고 있던 플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도스는 위험합니다. 나리.”
예하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겠지만, 어쨌든 추기경임을 밝힌 적이 없으므로 플레리가 저렇게 부르는 것은 추기경의 행동거지에서 배어나오는 품격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우리 패스파인더가 그쪽으로 가자더군요.”
“패스파인더가 찾은 길이라면 저로선 특별히 할말은 없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만 부인이나 자녀분은 없습니까?”
“혼자 삽니다. 나리.”
핸솔 추기경은 약간 이채롭다는 듯이 플레리를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수염이 아니더라도 40대는 넘겨보이는 연배였다. 그런 사내가 이런 곳에서 이 렇게 큰 집을 혼자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에겐 의외로 느껴졌다. 어쨌든 그와 파킨슨 신부가 잠들어 있었던 침대는 분명히 두 개였다. 핸솔 추기 경은 그 점을 지적했고 플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딸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산 아래쪽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협하기로 했죠. 적당히 떨어져 살면 나도 그들이 보고 싶어질 테고 그 들 역시 나를 보고 싶어할 테니까요.”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함께 살면 보기 싫어진단 말입니까?”
“예.”
플레리가 그렇게 말할 때 그의 얼굴엔 자조와, 그것보다 더 희미하지만 더 시선을 끄는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핸솔 추기경은 고개를 갸웃했고 플레 리는 잠시 후 설명했다.
“싱잉 플로라 때문입니다.”
“아아.”
“아내와 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죠. 하지만 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소리가 없는 곳에선 제가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들었던 소리니까요. 음, 전 아내에게 제 문제를 설명하고 분란거리와 함께 사느니 그냥 떨어져서 살자고 제의했습니다.”
“노랫소리가 어째서 분란거리가 됩니까?”
“됩니다. 나리. 저는 그 노래를 듣다가 아내나 딸이 하는 말을 못 듣곤 무슨 말을 했냐고 되묻는 일이 있지요. 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 것만큼 사람 을 화나게 만드는 것도 드문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잠시 이상하게 생긴 구름만 보고 있어도 아내는 또 그 노랫소리를 듣고 있냐고 핀잔을 주 지요. 아내 역시 싱잉 플로라는 낮에 노래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이란 건 화가 치밀 땐 그런 당연한 사실도 잊어버릴 수 있는 모양 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전 함께 살며 매일 서로에게 화를 내느니 약간 떨어져 살더라도 서로 보고 싶어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말했지요. 아내와 딸도 동의했 지요. 아마 딸 쪽이 더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남자애들한테 어떻게 보이느냐가 지상 최대의 문제인 나이거든요. 그런데 이 마을의 남자애들이란 것 들은 모두 밤이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서 근사한 연애 상대는커녕 적당한 이야기 상대도 못 됩니다. 껄껄.”
“그 노래가 그렇게 요사스러운 것입니까.”
무심결에 질문했던 핸솔 추기경은 플레리의 얼굴을 보곤 헛숨을 들이켰다. 플레리는 딱딱하게 말했다.
“전 지난 42년 동안 한번도 그게 요사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기분 나쁘셨던 모양이군요. 하지만 나로선 사람의 올바른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라면 그게 좋은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럼 사랑도 나쁜 것입니까?”
플레리의 질문엔 공박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반박하기 위한 대답보다는 토론하기 위한 대답을 생각하느라 잠깐 시간을 지체했 다. 그때 플레리가 말했다.
“직접 들어보시는 편이 낫겠군요, 시작되었습니다.”
핸솔 추기경은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론 산골 지방의 뿌연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오후에 그를 경탄하게 했던 메밀밭은 젖빛 융단으로 바 뀌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떠도는 별들은 반딧불이일까?
그리고 그 노래가 먼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커리돈 왕가의 아홉 번째 왕이며 대륙 최고의 말 조련사이자 가끔씩은 자신이 미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쑥스러워서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는 남자는 천막을 요란하게 걷어붙이며 밖으로 달려나왔다.
그 바람에 촛불이 꺼질 뻔했다. 이 흉악 무쌍한 전쟁터에서 국왕 대신 화살을 맞겠다는 심정으로 따라왔던 시종장과 시종들은 황급히 수건과 담요 등을 챙겨들며 ・그 시종들은 경애하는 국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뒤따라 나왔다. 그들의 짐작대로, 마왕 빌레스는 그대로 말구유에 상체를 들이박았다. 풍덩!
대포에 명중당한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물방울이 위로 치솟았다. 마왕은 그대로 꼼짝을 하지 않았으며 수면 위로는 공기 방울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시종들은 약간의 씁쓸함도 배어 있는 표정으로, 하지만 공손하게 수건과 담요를 든 채 시립했다.
“푸우하!”
격한 숨소리를 토하며 마왕이 다시 일어났다. 마왕의 얼굴과 가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말구유에 비치던 달빛이 몇천 조각으로 갈라졌다. 잠시 후 빌레스 국왕은 갈기 같은 그 긴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다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빌레스 국왕은 두 손으로 말구유를 짚은 채 앞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에 무서운 웃음이 떠올랐다.
“흐음. 그 어린 놈이 나를 능멸했다는 말이지?”
시종장은 차분히 다가가 빌레스 국왕의 머리 위에 수건을 널어놓은 다음 다시 조용히 물러났다. 빌레스 국왕은 뭔가가 눈앞을 가리자 기분 나쁘다는 듯이 그것을 집어들어 땅에 내동댕이쳤다. 시종장은 다시 차분히 다가와 땅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든 다음, 새 수건을 얹어놓았다.
빌레스 국왕은 대범해 보이기 위해 떠올렸던 웃음을 포기하고는 투덜거리며 머리와 상체를 닦았다.
“하빈저 부관!”
시종들과 함께 달려나왔지만 늘상 옆에서 보는 그들과는 달리 마왕의 이런 모습을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래서 처음 목격한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고 있던 하빈저 부관이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마왕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둔 채 하빈저 부관을 쏘아보았다.
“노이에스 놈이 다케온과 불침 협정이 맺은 것이 정확히 언제였나?”
“6월 5일입니다, 전하. 그리고, 옥체를 보전하시길.”
“옥체인지 급체인지 하는 건 열심히 씻고 닦고 하고 있으니 걱정 마.”
·황공하옵니다. 전하.”
빌레스 국왕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둔 채 좌우로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시종들과 하빈저는 목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충성스럽게 국왕의 모습을 바 라보았고 멀리 서 있던 보초병들은 이 모습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마왕은 여전히 왔다갔다하며 질문했다.
“땅꾼 놈들은 언제쯤이면 도착하지?”
“리저드라이더 말씀이십니까? 빠르면 내일 저녁, 늦어도 모레까지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나를 잡아먹겠단 말이지. 그래, 좋다구. 좋은 기백이다.”
하빈저 부관은 마음속으로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그가 차마 전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말똥내 나는 늙은이’의 몸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썰어 목도리도마뱀들에게 나눠 먹이자고 결의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마왕은 다시 대포처럼 고함질렀다.
“발 달린 뱀이나 타는 것들이 감히 나를 무서워할 줄 모르고!”
훔쳐보던 보초병들은 기겁하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마왕은 계속해서 리저드라이더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열심히도 오락가락했고, 하빈저 와 시종들은 그들 중 누가 마왕에게 천막 안으로 들어가시면 어떻겠냐는 말을 꺼낼 것인가를 마음속에서 점쳐보고 있었다.
리저드라이더들에 대한 폄하와 모욕의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빌레스 국왕은, 그러나 마음속으론 그 욕설들을 전부 되끌어와 자신에게 퍼붓고 있었 다.
‘어리석은 늙은이!’
은근한 말 한마디에 속아 대군을 이끌고 록소나로 와버린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국왕께서 다케온의 머리를 누르면 제가 그 허리를 치리다. 그리 고 저 오만한 광부 놈들에게서 그들이 독식할 권한이 없는 다이아몬드를 빼앗아 전하의 말 편자를 장식하시길. 참으로 무서운 유혹이었지만 빌레스 국왕도 한번 정도는 조심해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다케온과 국경을 대하고 있지 않은 다벨이 어떻게 그 허리를 치겠다는 것이냐?” 그러자 휘리는 마치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팔라레온을 정복해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 신속한 정복에 놀랐지만 그중 가장 크게 놀라고 감동받 은 이는 다름아닌 빌레스 국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케온에 쳐들어왔고, 지금 오도가도 못하게 된 상황에 빠져 있었다.
휘리 노이에스가 다케온과 불침 협정을 맺어버린 것이다.
빌레스 국왕은 그제서야 휘리 노이에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국왕은 그 깨달음에 경악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시종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빌레스 국왕은 고개를 돌리는 대신 손을 들어 귀찮다는 듯이 흔들어보였다.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종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 유혹은 몇 가지나 되는 노림수가 겹쳐져 있는 한 수였다. 휘리는 그 말 한마디로 마왕의 관심이 팔라레온이나 심지어 다벨 본토에 돌아가는 것을 막았고, 그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다케온을 바쁘게 만들어줬으며, 이로써 팔라레온을 장악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게다가 부록 삼아 다이아 몬드 채굴권까지 받아내었다. 마왕은 솔직히 혀를 내두르고 싶었다. 악마 같은 놈!
“전하.”
“왜?”
“외람됩니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대처 방안은 조속한 회군이라고 생각됩니다.”
빌레스 국왕은 오락가락하던 것을 멈추고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하빈저는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국왕의 출정 결심에 기겁한 왕가의 원로들이 제동 장치 삼아 데리고 갈 것을 강요했던 왕실의 먼 친척 뻘 되는 젊은이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원로들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었다.
“묻지도 않는 말을 해주는군, 하빈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빌레스 국왕은 무의식중에 손을 올려 다시 머리를 닦으면서 하빈저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원군이 되어주리라 생각했던 다 벨군이 움직이지 않게 된 이상, 아직 다케온 내부에 깊숙이 들어오지는 않은 지금이 회군하기엔 가장 좋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지휘관들을 불러오도록. 대응 태세를 의논하겠다.”
하빈저는 국왕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리저드라이더들에게 맞서 싸울 생각이십니까? 이제 여름입니다. 목도리도마뱀들은 거의 날아다닐 겁니다. 우리 말들은 그 모습에 기가 죽어 제대 로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요.”
“그 덩치 큰 도마뱀을 잡아서 군량으로 써야겠다. 고기가 꽤나 나오겠지.”
하빈저는 지금 농담하실 때냐는 눈빛으로 그의 국왕을 바라보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밤인지라 하빈저의 눈빛이 제대로 보 일 리가 없었고, 더 안 좋은 점은, 빌레스 국왕이 그의 얼굴 대신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흐음. 좋은 날씨군.”
“전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팔라레온을 상대로 했던 휘리 노이에스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다케온은 팔라레온과는 다릅 니다. 그들은….”
마왕의 오른손으로부터 수건이 갑자기 날아왔다.
하빈저의 목 뒤로 한 바퀴 돈 수건은 마왕의 왼손에 붙잡혔고 빌레스 국왕은 그대로 수건을 앞으로 콱 끌어당겼다. 가장 성질 사나운 종마도 아직 자 유자재로 다루는 마왕의 솜씨다. 하빈저는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앞으로 끌려갔다.
빌레스 국왕은 수건을 올가미처럼 움켜쥔 채 하빈저의 얼굴을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숨이 막혀 시뻘게진 하빈저의 얼굴을 향해 빌레스 국왕은 또렷 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묻지 않은 것을 계속 말하는데, 그 노이에스 놈이 정말 영리했다는 건 나에게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는 지휘관을 불러오라 고 했다. 상관이 두 번 말하도록 만드는 부관은 부관 자격이 없어.”
하빈저는 창백해진 얼굴을 어깨 사이에 파묻은 채 급히 떠나갔다. 빌레스 국왕은 그가 수건을 돌려주지 않고 목에 건 채 떠난 것에 대해 짧게 혀를 찬 다음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화환을 둘러쓰고 있었다. 빌레스 국왕은 그 모습을 보며 약간은 애처로운 만족감을 느꼈다. 휘리 노이에스는 그를 속일지 몰라도, 저 달무리는 그를 속이지 않으리라.
“나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것 없으시오, 파킨슨 신부?”
핸드건을 홀스터에 꽂았다 갑자기 빼서 전방을 겨냥하는 핸솔 추기경은 도대체 신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포를 빨리 뽑는 연습을 하는 건가? 그렇다면 핸드건을 도로 꽂아넣을 때 저렇게 빙글빙글 돌리는 이유는 뭘까? – 행동을 되풀이하던 파킨슨 신부는 핸솔 추기 경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추기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부는 또다시 손가락으로 핸드건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그것을 홀스터에 꽂아넣었다.
“부탁?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넘겨짚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난 왠지 당신이 성직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말 끝에 핸솔 추기경은 허공에 성호를 그어보였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성직자가 성 직자를 필요로 하는 성사엔 어떤 것이 있지?
“고해 말씀입니까? 예하. 기도는 항상 하고 있으며 질문은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만, 전 아직까지도 제가 주님의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리고 그 주제에 대해선 신성 펠라론에 도착할 때까지 거론하지 않기로 약속해 주셨던 것 같은데요. 추기경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아, 나도 그건 알고 있소. 나는 초조해하지 않아요. 성하를 친견하게 되면. 관둡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 데스필드 군에 대한 일이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의아해졌다.
“예? 데스필드요?”
“파킨슨 신부. 짧은 기간이지만 난 당신과 데스필드 군을 보아왔고, 당신이 데스필드 군을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주님의 목자가 그 신도들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소. 그리고… 도대체 부랑아나 뒷골목 잡배들이나 할 만한 무지막지한 행동들은 뭐요? 신도의 몸 주 위로 핸드건을 쏘다니. 법황청은 교회의 보물이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면 질겁할 것이오.”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핸솔 추기경의 말을 이해했다. 신부는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었다.
“맞추지는 않았습니다.”
“파킨슨 신부, 제발! 이 무슨 풋내기 수도사나 꺼낼 대답이란 말이오. 굳이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성전의 율법까지 논할 것도 없이, 당신은 봉사와 희생과 순종을 맹세한 사람이잖소? 형제께서 스스로 한 맹세를 어기고 있음을 내가 지적해야만 하겠소?”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약간 진지해지기로 결심했다. 핸솔 추기경은 근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혹시라도 그를 깔보거나 그를 증오하거나 한 것은 아니오? 그를 업신여긴다거나 조롱한 것은? 성직자에겐 그런 마음가짐조차도 죄가 되는 것 아니 겠소.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잠깐 동안 자신을 억누르려고 노력했고, 실패했다.
“그럼 신도를 죽여버리는 것은?”
추기경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들기름 등잔에서 피어오르는 약한 빛은 그것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도를 암살하려 한 주제에 군자연하지 말라는 의미인 거요?”
“예하. 어쨌든 우리는 협정을 맺었습니다. 예하께선 제가 질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런 질문에 대해 가장 높은 권위로써 대답해 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펠라론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 또한 동의했고요. 그래서 예하와 저는 그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발 제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변명하지 않을 테니까요. 변명하고 싶은 생각 은 없습니다.”
“형제여 당신의 말이 나에겐 퍽 위험하게 느껴져요. 성직에 몸을 담은 이가 확신을 가질 곳은 오로지…………”
“그만하십시오! 제가 예하께 율리아나 공주 암살건에 대해 후회하거나 변명하실 것이 있으시냐고 물어보고 싶어지기 전에!”
핸솔 추기경은 입을 다물었다. 파킨슨 신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온 파킨슨 신부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잠시 호흡을 골랐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튀어나오길 바라는 욕설들이 목젖을 간지럽혔다. 분 노는 격심했지만, 신부는 그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노의 목적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던 파킨슨 신부는 저쪽 어둠의 장막 아래 에서 데스필드의 모습을 발견했다.
데스필드는 메밀밭 가장자리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에 떨어지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뒤로부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멈춰졌을 때 데스필 드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차분히 말했다.
“핏대 올리지 마쇼, 신부님 당신. 고소 적응하는 데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들리더냐?”
“산 속은 고요하거든.”
파킨슨 신부는 작게 투덜거린 다음 데스필드의 옆에 앉았다.
산이 고요히 호흡하는 밤기운이 골짜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가끔씩 파이프를 입가로 가져갔다가 희푸른 연기를 날려보내었다. 그리 고 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 하지만 데스필드의 말대로 산 속은 고요했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감각을 믿기가 어려웠다.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청각은 주위가 고요하다고, 바람의 맥박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말 없이 기다리는 시간들의 끝에서 파킨슨 신부가 입을 열었다.
“데스필드.”
“예?”
“사효적 효력(事效的 效力; ex opere operato)이라는 말을 아느냐?”
“대충.”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안다고? 그럼 인효적 효력(人效的效力; ex opere operantis)이라는 말은?”
“역시, 대충. 서로 반대 의미죠, 아마? 성사의 효과는 그 성사를 주관하는 당신이 성총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법도와 규칙의 올바른 수행에서 나온 다는 말일걸. 그 반대가 인효적 효력이고, 교회는 인효적 효력을 부정하고 사효적 효력을 인정하지요. 그러니까………… 급한 상황에서 살인강도범 당신 이 해준 세례라도 그 행위가 정확한 규칙을 지켰으면 그 세례 성사는 유효한 것이지요. 사효적 효력이니까.”
“허! 정확한 대답이다. 너 신학교에도 다녔냐?”
“본인의 과거 행적이 궁금하쇼?”
“아니, 됐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파이프 한 대를 다 피운 데스필드는 담뱃재를 털어버린 다음 그것을 셔츠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두 다리를 편하게 뻗은 다음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좋아요, 신부님 당신. 들어보리다.”
파킨슨 신부는 솔직하게 말했다.
“뭘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데스필드.”
“글쎄. 당신이 한 일은 마음에 들어요, 신부님 당신. 괴로워하지 마쇼.”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성직자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 교회는 인효적 효력을 부정한단 말이야.”
“어째서 그런 거요?”
“신학교는 안 다닌 모양이군.”
데스필드는 피식 웃었다.
“동냥 바가지 들고 다니는 수도사님 당신들도 때론 본인의 패신저가 되곤 하오. 그 당신들은 종교적 열정이 지나쳐서 본인에게 참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 정도라서 피곤하더군. 어쨌든 그런 당신들은 본인으로 하여금 몇 가지 관념 정도는 외우게 했지. 됐소? 계속합시다. 어째서 그런 거 요? 성직자 당신은 왜 규칙을 지켜야 하지? 옳은 일이라면 규칙 같은 거 잠시 접어두는 융통성도 필요하잖소.”
“사효적 효력이란 말이 때때로 꽉 막힌 말처럼, 어쩌면 규칙 자체에 대한 숭상처럼 보인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아무리 훌륭한, 예를 들 어 성 페이루스가 강림하셔서 집전한 미사라도 그게 규칙에서 틀리면 엉터리 미사인 것이고 포악한 살인강도가 집전한 미사라도 올바르게 행하여졌 으면 효력이 있는 미사라………… 이상하게 들리지?”
“그렇소.”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흐음.”
“어떤 주인이 노예에게 일을 시킨다고 하자. 착하고 똑똑한 노예가 엉터리로 일하는 것과 못되고 어리석은 노예가 주인이 시킨 대로 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이겠느냐?”
“착한 노예 당신이 한 일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일 수도 있잖소. 주인 당신이 시킨 대로 한 건 아닐지 몰라도.”
파킨슨 신부는 킥킥 웃었다.
“그렇지. 그 주인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하지만 만일 그 주인이 절대로 틀릴 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아. 주님 당신 말이군요.”
“그래. 성사를 수행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고 비할 데 없이 선량하고 일개 군단쯤의 성령이 임하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사람이 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틀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 말이다. 무류의 인간이란 건 없는 법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독신이다.”
설명을 끝낸 파킨슨 신부는 입을 다물었고 데스필드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 주위를 살펴보던 데스필드는 달이 하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데스필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고지대에서 비를 맞으면 두 성직자 당신들은 결딴날지도 모르는데. 골치아프군. 비가 지나가길 기다렸 다가 출발해야 할까?
파킨슨 신부가 상처에 아파하는 부상자처럼 말했다.
“나는 배교자일까?”
데스필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부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교회가 내 속에 있다는 생각은 내가 테리얼레이드 교구 신부라서 가지게 된 망상은 아닐까? 희망 없는 전도에 매달리고 반드시 무너질 교회를 끊임 없이 신축하는 동안, 나는 그 무의미하게 보이고 미련스러워 보이는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런 관념을 자신에게 선물해 버린 것 아닐까?”
“신부님 당신.”
“혹시 나는 펠라론이 내게 고마워해야 된다고 믿어버리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펠라론이 하는 일을 심판할 권리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무릎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파킨슨 신부의 목소리는 깊고 우울했다.
“어느 당신이 다른 당신을 죽이는 일은 나쁜 일이오. 어떻게든.”
“어쨌든 그건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 가장 나쁜 독신이 될 수 있다. 데스필드, 악의적으로, 혹은 이기적 욕심에 의해 율법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독신이지.”
“젠장. 뭐가 그렇게 지랄같이 어렵소? 썅! 그럼 뭐가 좋은 것이고 뭐가 나쁜 건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성전에 비추어 판단하면 되지. 성전의 율법엔 다 나와 있다.”
“그럼 됐군! 본인이 알기로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소. 당신이 한 일은 그 율법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고, 괴로워할 것이 뭐요?”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편하겠냐.”
“저 노래 때문이오?”
데스필드의 질문은 내용상 갑작스러웠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들어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던 데스필드는 어두운 골짜기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 노래 때문이군. 좋을 대로. 본인은 저곳으로 패스를 설정했소. 꼬리는 못 뺄 거요.”
“무슨 말이냐?”
“지금 저곳으로 가기 싫어서 이상한 소리 하고 있다는 거 다 아니까 적당히 하라는 말이오. 아시겠소?”
“무슨……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데스필드는 손가락을 세 번 빠르게 튕겼다. 흡사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동작인지라 파킨슨 신부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데스필드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만하고 들어가 누우쇼. 밤이 깊소. 내일 걸어가려면 고민은 누워서 해보는 편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