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0장 : 새장 속의 왕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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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0장 : 새장 속의 왕 – 2화


리저드라이더들은 그들의 사나운 목도리도마뱀들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덩달아 흥분하고 있었다. 만일 진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 를 찔러대기라도 할 태세였다. 군령으로 금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케온군은 리저드라이더들이 목도리도마뱀들에게 사용하는 흥분향을 자기 자신에 게도 사용하는 것을 완벽히 막지는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리저드라이더들은 그들 의 도마뱀에게 그것을 흡입시킬 때 ‘순수한 연대감으로 함께 흡입하고는 도마뱀과 똑같이 미쳐 날뛴다. 아마도 자기 최면일 테지만 그렇게만 설명하 기엔 목도리도마뱀과 리저드라이더들의 감정 공유에는 섬뜩한 면이 있다.

“쐐애애액!”

목도리도마뱀들은 적과의 거리가 터무니없이 먼 데도 불구하고 그 프릴을 펼치며 포효했다. 그리고 리저드라이더들 역시 안장 위에서 울부짖었다. 

“쐐애애애 액!” 

극도로 흥분한 리저드라이더들은 놀랍게도 목도리도마뱀과 비슷한 포효 소리를 내며 손에 든 무기를 휘둘러대었다. 더 시간을 지 체했다간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모두 지쳐 쓰러릴 것 같다고 판단한 리저드라이더들의 지휘관은 드디어 힘차게 손을 들어올렸다.

“무례한 마구간지기에게 남부 신사의 예의를 가르쳐준다! 돌격 !앞으로!”

목도리도마뱀들은 화살처럼 튕겨져나갔다.

화살처럼 어쩌고 하는 낡은 관용구가 이토록 사실과 가까웠던 적도 드물 것이다. 목도리도마뱀들의 강력한 뒷다리가 땅을 박찬 순간, 거칠게 할퀴어 진 대지가 자신의 권리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물론 대지는 자신의 권리를 다시 확인받았다. 땅이든 수 면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목도리도마뱀들도 허공을 달릴 수야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땅에 내려섰을 때 그들은 이미 수 로드 앞쪽의 땅을 디 디고 있었다. 강인한 꼬리는 약간 들려져 균형을 잡고 있었고 허공에 건들거리는 두 앞발에는 리저드라이더들이 취향대로 장착시켜 둔 무기들이 끔 찍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도마뱀들은 바깥을 향해 직각으로 굽힌 두 뒷다리를 좌우로 휘두르며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쐐애애애 애애애―애애액!”

두두두두! 땅이 울리며 도마뱀들이 피워올리는 먼지가 화산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비아냥거리는 것에서 삶의 완성을 느끼는 특출한 냉소주의자라면 그 모습을 보며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좌우로 힘껏 쳐올려지는 목도리도마뱀들의 뒷다리는 분명히 미학적이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나 그 동작에 내포된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을 테고, 꼬리를 제외해도 15피트 크기나 되는 생물이 그런 힘을 내뿜으며 달려온다면 그 모습에서 유머의 소지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록소나의 용감한 기사들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입에서 신음처럼 말과 기사의 수호성녀인 성 엑시아의 이름이 흘러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이저 내렷!”

철컹, 철컹. 기사들의 손이 얼굴 부근을 빠르게 움직였다. 호면(護面)이 내려지며 기사들의 시계는 이제 그들의 말과 마찬가지로 슬릿을 통해 보이는 모습, 즉 전방만으로 좁혀졌다. 옆에 서 있는 동료의 모습 같은 것은 사라지고, 이제 록소나 기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쳐죽여야 되는 적의 모습뿐이었다.

“랜스 앞으로!”

세워들려 있던 랜스가 구령에 따라 앞으로 내뻗어졌다. 다시 철컥거리는 금속성이 울려퍼지며 랜스의 자루 부분이 기사들의 흉갑 옆구리에 고정되 었다. 그 끝은 예리하게 번득였다. 지휘관은 마지막으로 대갈했다.

“성 엑시아여, 우리를 가호하소서. 돌격 !”

말들의 발굽 소리가 지축을 진동시켰다.

비극이 무제한의 속도로 피어올랐다.

프릴이 펼쳐지며 톱날같은 이빨들이 번득였다. 검이 살아 있는 몸으로부터 피를 퍼내고 도끼가 살아 있는 머리로부터 추억을 퍼내었다. 희망의 사그 라듬 위로 쏟아지는 핏방울들은 인간의 것이든 말의 것이든 목도리도마뱀의 것이든 모두 뜨거웠다. 어떤 악마의 가호를 받은 랜스는 두 마리의 목도 리도마뱀을 한꺼번에 꿰뚫기도 했다. 랜스 사용자의 기량보다는 격돌 순간 양자의 끔찍한 속도 때문일 것이다. 너무 흥분해 버린 목도리도마뱀 하나 는 앞쪽의 기사의 머리를 짓밟고 뛰어올라 그대로 록소나 기사들의 머리 위로 달려가기도 했다. 목도리도마뱀의 앞발이 자신의 말 머리를 부수는 순 간에도 도마뱀의 목을 겨냥하는 록소나 기사의 눈에는 인류의 역사가 그 장식술로 삼아온 영원한 슬픔이 엿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가. 대답해 다오.

찢어 발겨지는 몸들, 유혈의 강, 검날 위로 떨어지는 눈물. 이미 목이 쉬어버린 사내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 대신 불경하고 험상궂은 말들을 외치며 인간애라는 낡은 믿음의 장사를 치른다. 그러나 신이나 악마가 귀기울이는 흔적은 찾기 어렵고 포식을 기다리며 활공하는 독수리들만이 그 소리 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시끄럽고, 시끄럽고,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다.

구름이 모여들고

전투 후의 벌판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피를 핥던 파리들은 분개한 듯한 날개 소리를 내며 황급히 흩어져 갔다. 풀잎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얼룩졌던 핏자국이 다시 녹아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생명의 흐름과는 다른 것이다. 정신을 잃었던 병사의 볼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회색빛의 빗줄기 사이로 꿈틀 일어서는 병사의 모습은 유령 처럼 보인다. 그러나 빗방울이 걱정스럽게 그 볼을 두드려대어도 이미 죽음을 호흡하고 있던 많은 병사들은 일어날 줄 모른다.

쏴아…………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늦은 비다. 달무리는 분명히 하늘에서 어슴푸레하게 반짝였고 비는 확실히 왔지만, 그것은 부상자들을 괴롭히는 비였을 뿐이었다. 빌레스 국왕은 이 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우울한 빗소리와 부상자의 신음들이 록소나 국왕 빌레스가 받은 승전 축가였다.


땡땡땡! 강렬하게 울려퍼지던 종소리는 잠시 후 종 치는 이의 심정을 담아 종이 깨어져라 쳐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때대대대댕!

노스윈드 선단의 배 위에서는 일항사나 갑판장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귀함!귀함하라고! 빨리 달려라, 이 잡것들아!”

그리고 다림의 부두에서는 각자의 배로 달려가기 위해 인간의 한계 속도를 시험하고 있는 해적들의 모습이 줄을 이었다.

“비켜! 다 비켜!”

“비키라고 외치는 너부터 빨리 내 앞에서 그 엉덩이 치워!”

페가서스호의 갑판 위에서 하리야 선장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에 카드장을 든 채 달려오고 있는 해적은 틀림없이 펍 에서 카드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치마를 입으려 애쓰면서 달려오는 해적의 경우엔 그들이 어떤 노역에 종사하고 있었 는지 추리하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 다림 시내에선 바지를 입은 매춘부가 최소한 한 명은 될 것이다. 정신나간 듯이 달려오고 있는 해적들 사이에서 웬 선원의 등에 업혀 달려오고 있는 킬리 선장의 만취한 모습을 본 하리야 선장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들을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노스윈드 선단의 엄한 기율을 일부러 완화시켜 준 것은 다름아닌 하리야 선장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다림 시민들 과의 융화 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하리야 선장은 되도록이면 해적들이 적극적으로(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다림 시민들과 접촉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래서 노스윈드의 해적들은 최소 인원만 배에 남겨두고 다림 시내를 쏘다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작금의 사태는 모조리 하리야 선장의 책임이었다.

자유호 쪽으로 고개를 돌린 하리야 선장은 노성을 지르고 있는 식스 일항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자유호의 일항사!”

하리야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선원들의 귀함은?”

“물수리호는 완료된 모양이군요.”

식스 일항사는 특별히 비아냥거린다기보다는 푸념하듯 말했다. 하리야 선장이 성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들을 퍼부어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물수리호의 형제들이 항상 배에 붙어 있다는 건 나도 잘 아네. 기다리지 말고 앞바다로 나가게!”

“지금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누구든 좋으니까 키 큰 친구 하나에게 검은 코트를 입혀서 선교에 세워. 알았나!”

하리야의 의중을 짐작한 식스는 두말없이 몸을 돌렸다. 명령이 노예장에게 전달되었고 최고 전투 속력을 요구받은 노들은 선체를 수면 위로 떠오르 게 할 정도로 강렬하게 물을 때렸다. 곧이어 자유호는 육중한 선체를 뒤틀며 앞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리야 선장의 뒤에서 약간 근심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은 키 드레이번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 것이다. 그런 장난이 통할까?”

“통할 거요.”

“그렇게도 키 드레이번을 믿나? 저들은 오히려 좋아하며 쏠지도 모르는데, 자유호가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키 드레이번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나는 키 드레이번의 안목을 믿고 있지요.”

“안목?”

“식스는 키 드레이번이 뽑은 일항사요. 그는 최소한 귀함이 완료될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줄 거요. 그리고 당신 말인데……

하리야는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라미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도와준다고 했지요?”

“어떻게 할까?”

“수면 아래에서 발포가 개시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그 이후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라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뱃전 위에 올라섰다. 다음 순간 요란한 물보라가 솟아올랐고 그 물보라가 가라앉았을 때 하리야는 푸른 물속 저편으 로 사라지는 희고 굵은 동체를 언뜻 보았다. 하리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선 행동의 우선 순위가 면밀하게 매겨져 있었고 그 순위에 서 자유호의 전진, 대사의 배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당연히 강철의 레이디의 점검이다.

“그랜드머더호! 그랜드―머더호! 킬리 선장의 상태는 어떤가?”

“3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새신랑만큼이나 말쑥하게 만들어놓겠습니다!”

그랜드머더호의 요리사가 뭔가 인간이 먹어선 안 될 것 같은 시커먼 액체를 큰 잔에 따르며 대답했다. 그의 발치에는 킬리 선장이 불쾌해진 얼굴을 한 채 큰대자로 누워 있었다. 하리야 선장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그랜드머더호의 조타수가 비장한 얼굴로 킬리 선장의 입을 벌렸다. 하리야는 그랜 드머더호의 갑판원들이 그들의 선장에게 먹이려는 것이 뭔지 대충 짐작할 것 같았고, 그래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자신도 급히 술에서 깨어나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저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맨정신의 하리야 선장에게 저걸 먹이려 든다면 코가 으스러질 각오쯤은 해둬 야 할 것이다…….. 잠시 후 킬리 선장의 애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하리야는 킬리를 위해 짧게 기도한 다음 그랜드파더호를 돌아보았다.

“돌탄 선장!”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쏠까?”

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떠 있는 10개의 마스트를 보던 하리야는 거리를 어림해 보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맙소사, 이 거리에서도 가능한가?”

“카능해. 약칸 모차라킨 하치만, 파람이 토와추커튼.”

“아, 쏘지는 말게. 일단 사격 준비 갖추고 기다려. 강철의 레이디 하나는 쓸 수 있단 말이지. 제발 빨리빨리 좀 승선해라!”

그 동안 앞바다로 나간 식스는 하리야 선장의 예견대로 시간을 끄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의 깊게 사정 거리 바깥에서 자유호를 정선시킨 식스는 갑 판원들에게 석궁을 준비시키는 한편 포수들에게도 발포 준비를 시켰다. 하지만 대포를 쏘지는 않은 채 식스는 깃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키 드레이번이 정체불명의 선박들에 고한다. 그 자리에서 멈춰라. 더 이상 접근하면 공격하겠다.’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란하다고까지 말해도 좋을 엄포였다. 식스 같은 노련한 뱃사람이 상대방의 정체를 모를 리는 없었지만 그는 일부러 ‘정체불명의 선박들’이라는 신호를 선택했다. 과연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식스의 눈에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정체가 친절히 소개되었다.

‘우리는 사트로니아 함대다.’

흘끔 봐도 짐작할 수 있었던 거다, 이 친구들아. 사트로니아 함대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식스는 짓궂게 웃으며 깃발 신호의 나머지 를 기다렸다.

‘바스톨 엔도 장군이 키 드레이번에게 말한다.’

식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는 그 고명한 무장이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식스는 그들이 자신처럼 바스톨 엔도 장군의 이름을 빌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 동안에도 깃발 신호는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목적은 전투가 아니다. 보트를 보낼 테니 공격하지 마라.’

식스는 잠시 기다렸다. 과연 10척의 롱 갤리어스들은 제자리에 정선했고 그 배들 사이에서 조그만 보트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식 스는 재빨리 뒤쪽을 향해 외쳤다. 

“보오드! 안으로 들어가!”

키 드레이번과 비슷한 신장을 가졌다는 이유로 검은 외투를 걸치고 으스대고 있던 갑판원 보오드는 황급히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식스는 고 물 쪽으로 달려간 다음 부두 쪽을 향해 손짓 신호를 보내었다. 다행히도 망원경으로 식스를 보고 있던 트로포스가 그 신호를 보았다. 트로포스는 페 가서스호를 향해 그 신호를 전달해 주었고 하리야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바스톨 엔도 장군? 어, 그렇다면 팔라레온 해방군인가? 저 자들이 여기엔 왜 온 거지?”

사트로니아의 보트가 자유호에 닿았다. 식스는 일단 몇 명의 갑판원들에게 검을 뽑아들게 한 다음 올라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분명히 사트로니아 해군으로 보이는 수병들 몇 명과 선장 하나가 약간은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갑판에 올라왔다. 무리도 아니다. 그들은 자 유호에 올라온 것이다. 선장은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누가 지휘자냐는 듯이 둘러보았고 식스는 그제서야 앞으로 나섰다. 선장은 식스를 바라보며 고 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나는 사트로니아 해군의 엔도호 선장 파이크 롱버드 벡스요.”

“자유호의 일등 항해사요. 선장님께서 직접 오셨다고?”

“그렇소. 당신이 일항사라면, 키 드레이번은 어디 있소?”

“당신들이 암살자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장님을 뵙게 해드리겠소?”

이 말을 위해 식스는 일부러 몸수색을 하지 않았다. 파이크 선장은 피식 웃었다.

“헛. 선장을 어떻게 암살자로 쓰겠소?”

“내가 볼 수 있는 건 선장 복장을 하고 있는 한 명의 사트로니아인일 뿐이오.”

파이크 선장은 기어코 불쾌한 얼굴이 되었다.

“키 드레이번이라는 자, 알고 보니 겁쟁이군.”

“말을 삼가시오.”

“그런 말이 듣기 싫으면 낯짝을 내놓으면 될 거 아닌가!”

“그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소.”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건가, 일항사?”

“내가 알고 있는 말투 교정법은 불행히도 모두 폭력적인 것들뿐입니다.”

“뭣이 어째?”

식스로서는 너무도 기쁘게도, 파이크 선장은 식스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며 계속해서 오만불손한 언사를 내뱉었다. 자유호의 해적들의 얼굴이 붉으 락푸르락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트로니아 수병들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르르 빠져나갔다. 사트로니아 수병들은 그들의 선장의 허리라도 찌르고 싶었 지만 식스는 그들이 나서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파이크 선장에게 말을 시키며 부두 쪽을 훔쳐보았다.

마침내 부두 쪽에서 노스윈드 함대의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으로 환호를 질렀지만, 식스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선장님은 이 배에 안 계시오.”

“뭐라고?”

“안 계시다고 했소. 중대한 볼일이 있으셔서 다림 시내에 계시거든. 전할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 내가 전할 테니까.”

“그럼 진작 말해야 했을 것 아닌가! 제길, 떠날 테니 키 드레이번을 불러다 놓도록! 다시 오겠다!”

파이크 선장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식스는 재빨리 눈짓을 보내었고 그 순간 지금까지 분을 참느라 반쯤 돌아버릴 지경이었던 사내가 표범처럼 움직 였다.

파이크 선장은 시야를 가로막는 넓은 가슴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올린 파이크 선장은 꽤나 높은 곳에 있는 아피르 족 전사의 얼굴을 발견하곤 허옇게 질려버렸다. 그에겐 안된 일이었지만, 그 아피르 족 전사는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너무나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스는 느릿하게 말했다.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 군을 소개하겠소. 나는 칸나 군이 그 말하기 곤란한 습관을 버렸다고 믿지만, 때때로 어린 시절의 습관은 꽤 오랫동안 남는 법이라지요?”

칸나는 입맛을 다시며 씨익 웃었다. 사트로니아 수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고 파이크 선장은 쥐어짜듯이 외쳤다.

“무, 무슨 짓이냐!”

“왔다가 그냥 가시면 섭섭하잖소. 왜 키 선장님께 직접 말해야 된다는 거지요? 나한테 말해도 됩니다.”

그로부터 2분 후, 자유호를 향해 최고 속도로 나아가던 페가서스호 위에서 하리야 선장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손짓을 보게 되었다.


“여행하기엔 좋은 날씨입니다.”

라이온의 말에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세실은 라이온이 하늘의 날씨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무슨 말이야?”

“온통 전쟁통이니 제국의 공적 1호가 옆을 지나가도 신경 쓸 수 없는 날씨란 말입니다. 키 선장님이 육지를 여행해야 된다면 이보다 좋은 날씨도 없 겠군요.”

세실은 이해했다. 그러곤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앞쪽의 언덕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는 스무 개 남짓 되는 기둥이 서 있었다. 세실의 기나긴 연대기에서 저것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된 페이지는 제법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 가가지 않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세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도 그것이 무슨 기둥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앞쪽에서 언덕을 바라보던 키는 고삐를 잡아챘다. 말은 불평하듯 투레질을 한번 한 다음 언덕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언덕 아래를 지나치면 서 키와 세실은 언덕 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온은 그것이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것처럼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라이온은 언덕 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살아 있어요!”

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멈춰 세웠다. 세실은 어느새 언덕 위로 달리고 있었고 라이온은 벌써 안장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시체를 파먹고 있 던 까마귀들이 라이온을 향해 깍깍거렸지만 라이온은 팔을 휘둘러 까마귀를 쫓아버렸다. 라이온이 나이프를 꺼내었을 때 언덕 아래쪽으로부터 낮고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려는 건가?”

“풀어줘야죠!”

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라이온 역시 알고 있을 테고, 알면서 하는 행동이니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키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언덕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 동안 라이온은 나이프를 휘둘러 조금 전 기침을 했던 여인을 기둥에서 풀어내었다. 밧줄에서 풀리자마자 여인은 라이온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다.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여인 역시 온몸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인 것 같다. 라이온은 그녀를 똑바로 눕히고선 화살을 뽑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지금 화살을 뽑으면 상처가 덧날 것이라고 판단한 라이온은 일단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안장에 서 뛰어내린 세실이 황급히 그녀의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수통의 물을 입 안에 흘려넣을 때, 그제서야 도착한 키가 느릿하게 말했다.

“내 신발끈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세실과 라이온 모두 흠칫하며 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아무 대답이 없자 키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가 저편으로 걸어갔 을 때에야 세실은 작게 투덜거렸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눈앞에서 사람이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걸 어떻게 못 본 체하고 지나간단 말이야?”

라이온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세실. 바쁜 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벨군의 추적을 당하게 됩니다. 아니면 다른 팔라레온인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거나.”

세실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라이온을 보고는 다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기둥에 매달린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여인은 틀림없이 다벨군에 의해 매달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벨군은 기둥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눈을 뒤집고서 그녀를 풀어준 자를 찾아다닐 것이다. 세실은 입술을 깨물 었다. 그때 그녀의 등뒤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세실은 소름이 쫙 돋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키 드레이번이 어깨에 시체 하나를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라이온과 세실이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키는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여인 이 매달려 있던 기둥에 시체를 묶었다. 시체를 다 묶은 키는 어깨를 털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라이온과 세실은 그제서야 키가 맨 끝에 있는 기둥으 로부터 시체를 풀어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키는 자신의 말로 돌아간 다음 밧줄을 꺼내었다. 말 세 마리와 비어 있는 기둥을 연결한 다음, 키는 그때까지 언덕 위에 있던 두 사람을 향해 한심스 럽다는 듯이 으르릉거렸다.

“거기서 살 건가?”

라이온은 황급히 여인을 안아든 다음 언덕을 달음박질쳤다. 라이온과 세실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키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이랴아!”

세실도 황급히 자신의 말과 라이온의 말을 독려했다. 밧줄이 팽팽해지고 나서 얼마 후, 기둥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뽑혀나왔다. 기둥이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오자 키는 말의 목을 쓰다듬어준 다음 라이온에게 다가갔다. 키는 손을 내밀었고, 라이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여인을 건네었다. 여인을 안아든 키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언덕 위로 가서 기둥 자국을 지워라. 라이온.”

“아…… 예! 선장님!”

라이온은 부리나케 언덕 위로 뛰어갔다. 키는 여자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인상을 찌푸린 다음 거칠게 화살을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바라보고 있던 세 실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인의 몸에서 튀어나온 화살을 마치 가지를 쳐내듯 대충 부러뜨린 키는 세실을 향해 말했다.

“말 위에 올라가.”

세실은 황급히 말 위로 올라갔다. 라이온은 그녀의 무릎 앞에 여인을 올려다주며 말했다.

“잡아.”

“많이 흔들릴 텐데.”

“흔들리지 않게 해. 잡아.”

세실이 두 손 들었다는 표정으로 여인의 허리를 붙잡자 키는 자신의 말로 돌아가 안장 위에 올랐다. 키는 손을 뻗어 라이온의 말 율리아나의 고삐를 쥐며 말했다.

“가자.”

“자, 잠깐. 라이온은?”

“벌이야. 가자.”

키는 자신의 말과 라이온의 말을 출발시켰다. 세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출발시켰다. 세 마리의 말 뒤로 기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끌려가 자 언덕 위에서 땅을 다지고 있던 라이온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세실은 말을 달리며 한 손으론 여인의 허리를 단단히 쥔 채 탄복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똑똑하네? 기둥 자체를 뽑아버리면 하나가 없어진 것은 표시가 안 난단 말이지?”

키는 아무 대답 없이 앞쪽만 바라보았다. 세실은 빙긋 웃었다.

“이보라구, 다벨군이 쫓아올 거란 생각은 못했단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도 머리 굴리는 작자가 이상한 거 아냐? 뭐, 어쨌든 고마워. 음. 이 여자도 고 마워할 거야. ………… 이봐. 조용히 있으면 무섭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키는 세실의 말을 받아들여 입을 열었다. 

“계속 떠들면 벌받는 사람이 하나 늘 거다.”

세실은 찔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기둥 자국을 다 지운 라이온은 이제 기둥이 일으키는 먼지를 다 뒤집어쓰며 달려오고 있었다. 으음. 이 나 이에 저 꼴을 당하는 건 아무래도 볼썽사나운 일이겠군.

기둥을 끌면서 가는 것이라 말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그래서 라이온은 키의 눈치를 보다가 율리아나에 살짝 올라탔다. 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반 시간쯤 달려간 후에 키는 손을 들어올려 일행을 서게 한 다음 기둥을 풀어 수풀 속에 차넣었다. 기둥을 처리한 키는 다시 달려갔다.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외딴 곳에 있는 반쯤 불탄 농가를 발견한 키는 일행을 서게 했다. 그리고 언덕을 떠난 이후로 처음 입을 열었다.

“라이온. 조사해 봐.”

라이온은 찍소리도 내지 않고 집 안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라이온은 창가를 통해 밝은 얼굴로 손을 저었고 키는 세실에게서 여자를 받아든 다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를 침대에 눕힌 키는 세실에게 그녀를 간호하게 한 다음 말들을 끌고 헛간으로 걸어갔다.

헛간에 말을 숨겨놓은 키가 집 안으로 돌아오자 라이온과 세실이 여인을 간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키는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 다. 세실은 여자의 이마를 닦아주며 말했다.

“이 아주머니 귀족이었을 거야. 손발 좀 보라구.”

“어떤가.”

“화살을 뽑아야겠는데…

키는 의자 하나를 찾아낸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아서는 구경해 줄 테니 마음대로 해보라는 것처럼 세실과 라이온이 하는 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라 이온으로 하여금 나이프를 뽑아들게 한 세실은 나이프를 향해 짧게 중얼거린 다음 손가락을 빠르게 튕겼다. 잠시 후 나이프가 새빨갛게 달구어졌고 라이온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여자에게 손수건을 물리고 나서, 세실은 여자의 상체를 지그시 누르며 라이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심호흡을 한번 한 라이온은 곧 여인의 몸에 나이 프를 꽂아넣었다.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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