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0장 : 새장 속의 왕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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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0장 : 새장 속의 왕 – 5화


시린 새벽, 까마득한 나무 그림자 위에 매달린 외로운 둥지.

지난밤의 이슬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반짝인다. 둥지 안쪽, 헝겊 무더기 같은 깃털 더미 사이에서 어린 매의 머리가 비비적거리며 튀어나온다. 올 봄 에 태어난 놈인 듯, 아직 그 어깨와 등에 보송보송한 솜털을 얹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 날개에는 바람을 희롱할 억센 깃털이 자랑스럽게 나 있다.

아침의 향기에 속아 눈을 떴건만 높은 하늘은 아직 어둡다. 그러나 지평선 가까이 낮은 하늘은 발그레한 빛으로 물들어 어린 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다. 다른 새끼들과 어미는 아직 노곤한 잠에 취해 있지만, 어린 매는 동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녘의 하늘에 태양이 나타났다.

창공을 향해 비상하기 전, 태양은 빛을 두 손 가득히 쥐어올려 대지를 향해 던졌다. 수줍은 소녀의 볼과도 같은 붉은 빛이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숲 의 머리를 빗질하는 빛, 강물 속으로 스며드는 빛, 바다를 불태우는 빛. 그리고 어린 매의 솜털 사이로 스며드는 빛.

이제, 날아볼 때가 되었을까. 바람이 매를 부른다.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이 위태롭다. 오른쪽으로 갸우뚱. 이크이크. 매는 비비적거리며 발을 떼지만 날카롭게 휘어진 발톱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곤 혹스러워한다. 어쩌나 어쩌나. 발톱에 걸리는 나뭇가지들이 아우성을 지른다. 삑 삑. 어린 매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퍼득인다.

햇살 머금은 솜털들이 홱 날아오른다.

다음 순간 어린 매는 아침 햇살 속의 그림자가 되어 날고 있다. 어린 매는 자신이 매라는 사실까지 잊어먹을 정도로 놀란다.

삐이 삐이- 익!

자마쉬는 이미 햇살 속에 새 날을 맞이하고 테리얼레이드는 아직까지도 새벽빛 속에 잠겨 있을 때, 도스 계곡에서 데스필드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높은 봉우리들은 아직 밤 속에 서 있었지만 햇살은 계곡을 거슬러오르고 있었다. 아침의 낮은 태양 때문에 곳곳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래 서 데스필드의 눈에 들어오는 도스 계곡의 모습은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 같았다. 바위틈에 맺혔던 이슬들이 음영 속에서 반짝였고 계곡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들은 햇살을 향해 메마른 손짓을 던진다.

데스필드는 앉은 채로 목을 몇 번 돌려보았다. 별로 반갑지는 않은 소리가 몸 안으로부터 들려왔다. 데스필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다음 동쪽 하늘을 보았다. 오늘의 날씨도 참 굉장하겠다고 생각하며 데스필드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싱잉플로라가 부르던 노래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려 했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하긴, 밤새도록 데스필드가 들었던 것은 노래가 아니라 말이었 다. 너무 많이 들어서 잊어먹을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그 사실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패러다이스와 판데모니엄의 일은, 그곳에 관심 있는 당신이나 신경 쓰라지. 패스파인더 본인관 상관없는 일이야.’

누구나 마지막으로 걸어야 하는 그 길에는 패스파인더가 필요없다. 만일 거기서 길을 잃는다면 지상 최대의 희극일 것이다. 그러니 데스필드에겐 가 장 관심없는 이야기였다. 데스필드는 몸을 일으켰다. 지독하게 더워지기 전에 이동하려면, 지금쯤 두 성스러운 패신저들을 두드려 깨워야 될 것 같다. 데스필드는 휘파람을 불며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두 성직자는 절대로 게으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성직에 종사한다는 것은 군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복사 3, 4년, 신학교 5년(말 그대로 목자 타입이라 느긋할 경우엔 10년), 부신부 5년 정도를 거치고 나면 절식과 금욕의 생활로 수척해지긴 하지만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된다. 어제 저녁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장의사들이 보면 반가워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아침 두 성직자들은 데스필드를 별로 괴롭히지 않고 쉽게 일어났다. 물론 투덜거리고 약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침 기도와 식사 등은 한 시간 만에 끝났다. 핸솔 추기경은 자신의 말대로 자기 짐은 자신이 지겠다고 나섰다. 파킨슨 신부 역시 같은 주장을 했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태양이 하늘 중심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구르기를 하고 있을 때 세 여행자는 야영지를 떠나 도스 계곡의 정상부를 향해 올라갔다.

얼마 걷지 않아, 데스필드는 자신의 패신저들이 어제까지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걸음은 느리지만 리듬이 딱딱 맞았고 발디딤은 무거우면서도 큼직 했다. 각오가 서린 얼굴을 하고 걷기 시작했던 추기경과 신부도 자신들이 별 고통없이 숨을 쉬는 것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드디어 노련 한 도보 여행자가 된 것이다. 심지어 파킨슨 신부는 말을 꺼내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금 전부터 하늘을 흘끔거리던 신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매인가?”

말은 쉽게 흘러나왔다. 파킨슨 신부는 환한 얼굴로 핸솔 추기경을 돌아보았고 추기경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의 땅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파 란 하늘에서 검은 점이 동그라미치고 있었다.

“그렇구려, 형제, 매인 것 같소. 이 계곡에 들어와서는 처음 보는 짐승인 것 같군.”

추기경 역시 밝은 얼굴로 쉽게 말했다. 두 사람은 매를 보았다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서로에게 웃어보였고 상대방의 웃음을 보며 더 즐거워 했다.

“원은 완전성의 상징이지요. 저 난폭한 맹금마저도 주님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 이디오테우스가 그러셨지요. 신학서의 테두리를 장식할 염료를 얻기 위해.”

“신께서 훨씬 더 잘 만들어놓으신 신학서를 꺾는 무지몽매함이여.”

말 끝에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데스필드는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기에 따라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도 계속 무관심해할 수는 없었다. 유쾌하게 시작된 두 성직자의 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 튀기는 설전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제 산을 타면서 말하는 것쯤은 우습게 여기게 된 두 성직자들은 지난 며칠 동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을 모조리 나누겠다는 태도로 떠들어대었다. 오 랜 금욕 생활이 성직자들에게 남겨주는 것은 마르고 단단한 몸뿐만은 아니다. 먹거나 마시거나 자는 등 몸에 신경 쓸 시간을 모조리 정신으로 돌린 결과로 성직자들은 모두 왕성한 상상력과 치열한 토론열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로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 는 것이 자기 모욕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사소한 교리상의 문제를 가지고 끈덕지게 싸워대었다. 마치 린타와 아델토라도 되는 것처럼…………….

판데모니엄의 일곱 하이마스터 중 ‘이름’이 알려진 것은 린타에게 패배했던 황금의 조커 아델토뿐이다. 데스필드는 잠시 그 멍청한 악마를 비웃었 다. ‘인간을 상대로 아흐레 밤낮을 이야기한 것은 실수였어. 그냥 손가락으로 눌러버렸어야지.’ 어쨌든 어젯밤 이후로 데스필드는 판데모니엄의 하이 마스터들 중 또 한 명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좋은 말로 패신저들을 달랠 것이 냐, 아니면 여행 속도를 더 높여서 그들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후자의 경우에 매력을 느꼈다……………

그녀의 이름은

노래의 불꽃 벨로린.

우리는 슬픔으로

그녀를 찬양한다.


“그러고 보니, 라트랑 후작 부인이 바다의 공주님이었지요?”

라이온의 질문에 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의 왕국 카밀카르엔 세 명의 공주가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셋째인 율리아나 공주였지만 바다의 공주라고 불리는 것은 둘째인 이루미나 공주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것도 그 호칭뿐이다. 세기의 신부라는 화려한 이름은 역시 율리아나 공주에게 돌아갔다. (율리아나 공주 자신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세실은 까르륵거리며 심술궂게 말했다.

“그 이야기 들어봤나? 라트랑 후작이 결혼 신청을 보내었을 때 카밀카르에선 그가 뭔가를 혼동했다고 생각했다지?”

“셋째와 둘째를 헷갈렸다고 생각했다죠.”

“맞아 맞아. 그때 후작의 대답이 일품이었잖아.”

“멋을 너무 부려서 별로 근사하지는 않던데요.”

“젊잖아. 응? 그러고 보니 너도 젊은 나이인데 왜 그 지경이야?”

키는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없다는 기분만을 느꼈다. 세실은 겉모습이야 그렇지 않지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마법사였고 라이온은 (어쨌든) 바다 사나이였건만, 두 사람은 마치 주말에 교회 앞에서 만난 젊은 부인네들처럼 죽이 잘 맞아서 가십거리를 교환하고 있었다. 키는 두 사람을 무시하며 말의 속도를 높였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키를 곧잘 따라옴으로써 그를 좌절시켰다.

세 사람은 팔라레온 땅을 지나 지금은 다케온의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케온과 록소나를 가로지르는 디즐 강 유역에 펼쳐진 평원을 따라 달리다가 디즐 강의 하류 부근에서 라트랑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디즐 강 유역은 말을 달리기 좋은 땅이었고 라트랑까지는 최단 거리인지라 세 사람의 선택은 잘못된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알지 못하고 있 었던 것은, 그곳이 전력을 재정비한 다케온과 마왕 빌레스가 서로를 향해 으르릉거리고 있는 땅이라는 점이었다.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이야기를 걸 어볼 처지가 못 되는 그들은 록소나와 다케온의 전쟁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강변 언덕 하나를 넘어섰을 때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이 활을 겨눴을 때 라이온은 제국의 공적 제1호의 대륙 여행이 들켰다고만 생각했다. 그 가 용맹한 함성을 지르며 — 뒤로 돌아 달리지 않은 것은 병사들의 외침 때문이었다.

“정지! 정체를 밝혀라!”

키 역시 그 외침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말을 제자리걸음 시키며 키는 병사들을 관찰했다. 여덟 명 정도의 병사들은 모두 활을 들고 있었고 그들을 빈틈없이 겨냥하고 있었다. 키는 일단 조금 전 고함을 지른 병사를 향해 차분하게 대답했다.

“라트랑으로 돌아가는 여행자요. 당신들은?”

“말에서 내려!”

키의 눈이 확 불타올랐다. 병사들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고 라이온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해적들을 가호하는 성인이 계시던가 하는 따위의 망상을 잠깐 해보았다. 키는 명령한 병사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한번 더 묻겠는데, 당신들은 뭐요? 강도?”

“어, 말에서 내리시오. 우리는 전쟁중이란 말이오.” 

말투가 한 계단쯤 올라갔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겠소. 내리시오!”

키는 말에서 내렸다. 세실과 라이온 역시 말에서 내린 다음 고삐를 쥐고 섰다. 병사들은 아직까지 활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조금 안심하는 얼굴들이 되었다. 키에게 명령을 내리던 병사는 자신이 골도 백부장이라고 밝히며 질문했다.

“신원을 증명할 것이 있소?”

“말했듯이 우린 여행자일 뿐이오. 그런데 전쟁? 다벨과 팔라레온의 전쟁 말이오?”

골도 백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를 보다가 미심쩍게 말했다.

“아주 멀리까지 여행을 갔던 모양이군. 어, 난 당연히 우리들이 누군지 짐작할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거요.”

“그러셨소?”

“우린 빌레스 국왕 전하의 군대요. 지금 다케온과 전투중이고.”

라이온과 세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키 역시 눈꼬리를 조금 올렸다 낮추며 중얼거렸다.

“록소나와 다케온이 전쟁을?”

키의 반응을 본 골도 백부장은 이들이 간첩이거나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키의 반응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긴 간첩이라면 이렇게 대 낮에 보라는 듯이 달릴 리는 없겠지. 더군다나……… 다음 순간 골도 백부장의 사고는 딱 정지해 버렸다.

키와 라이온은 록소나 병사들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키는 라이온을 돌아보았고 (너 또 무슨 황당한 짓 했냐?) 라이온 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키를 쳐다보았다. (선장님의 정체가 들킨 것 아닐까요?) 그러나 조금 후 키와 라이온은 모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어쨌든 키와 라이온은 세실을 젊고 날씬한 여자로 생각해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록소나 병사들은 목말라하는 눈으로 세실을 바라보았고 라이온은 이 불쌍한 이들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세실은 팔짱을 끼고는 병사들의 시선을 일일이 마주 받아주었다. ‘풋내나는 녀석들이 까불고 있군.’ 골도 백부장은 세실을 흘끔거리며 키에게 말했다.

“음. 잘 몰랐으니 여자도 있는 여행객이면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오셨군. 어떻소? 우리가 보호해 드리지.”

“그럴 필요는 없소.”

“아니, 아니오. 이곳은 전쟁터란 말이오. 다케온 놈들이 당신네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 말입니다.”

“바로 그러니까 싫소.”

“뭐요?”

“나는 당신네들과 함께 있다가 다케온 병사들에게 발견되기라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소. 싸움이 벌어지면 위험해질 테니까. 말씀 고맙지만 여행은 우리끼리 계속하겠소.”

키의 직설적인 말에 대해 골도 백부장은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골도 백부장과 다른 병사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키는 등자에 발을 올렸다. 그때 였다.

“골도 백부장!”

높고 사나운 고함이었다. 병사들은 기겁하며 몸을 돌렸고 키는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몇 명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기사들 가운데에는 투구 대신 간소한 금관을 쓴 사람이 노기충천한 얼굴을 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빌레스 국왕인가.

순식간에 달려온 기사들은 병사들 앞에서 말을 제자리걸음 시켰다. 전쟁터라 그런지 병사들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마왕은 키를 흘끔 바라보고는 골도 백부장을 향해 말했다.

“이들은 뭔가?”

“아, 라트랑인입니다, 전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자넨 뭐하고 있는 건가? 간첩이거나 밀정일지도 모르는 자들을 함부로 보내주려는 건가!”

“그, 그렇지만, 전하. 여자도 있고 해서…………”

“이 멍청한 놈. 수녀를 데리고 다녀도 조사는 해봐야지! 조사했나?”

골도 백부장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빌레스 국왕은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내고는 키를 향해 말을 몰아왔다.

키는 말머리가 자신의 가슴 앞 1피트 거리에 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마왕은 말 위에서 쌀쌀맞은 눈으로 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록소나의 국왕 빌레스다. 그대는 뭐 하는 작자인가?”

“전하. 저는 라트랑에 사는 칼이라 합니다. 팔라레온의 투란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에 전쟁이 벌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전하께서 이곳에서 전쟁중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뒤의 남녀는?”

“제 동생과.” 키는 조금 전 죽이 잘 맞아 노닥거리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생의 아내입니다.”

라이온은 마음속으론 절규를 내지르고 있었지만 겉으론 천연덕스럽게 세실의 어깨에 팔을 얹었고 세실 또한 자연스럽게 라이온에게 기대었다. 빌레 스 국왕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잃고는 다시 키를 돌아보았다. 마왕의 눈이 키의 어깨에 잠시 머물렀다.

“등의 그것은 뭔가? 검인가?”

키는 뱃가죽이 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알아볼까 싶어 천으로 두른 채 매고 다니던 복수에 마왕의 시선이 닿았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풀어보라.”

라이온은 찔끔한 표정이 되었다. 세실 역시 초조한 표정으로 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키는 복수를 푸는 대신 마왕을 쏘아보았다.

“싫습니다.”

“뭐라고?”

“검을 견식하고 싶으시다면 정중히 요청하십시오. 왕이라도 예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빌레스 국왕의 눈꼬리가 둥글어졌다. 미소를 짓던 국왕은 등자에서 오른발을 뺐다.

그리고 그 발이 키의 얼굴을 걷어찼다.

다행히도 국왕의 철화(鐵靴)는 다른 기사들의 철화와는 달리 대보병 공격용의 스파이크가 박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판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마 찬가지였고 그래서 키는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세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라이온은 재빨리 손을 뒤로 돌렸다. 그러나 골도 백부장이 그 모습을 보았다.

“멈춰!”

골도의 검이 먼저 뽑혔고 그러자 칼자루를 쥐었던 라이온의 손이 멈췄다.

빌레스 국왕은 그대로 다리를 안장 위로 돌려 말에서 내려섰다. 갑주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마왕은 허리에서 롱 소드를 뽑아들며 키에게로 다가 섰다.

“이젠 황야의 부랑자까지도 나를 능멸하는군.”

마왕을 호위하고 있던 하빈저 부관은 투구 속에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그의 왕을 저 지경으로 만든 휘리 노이에스를 저주했다. 빌레스 국왕은 노성을 질렀다.

“이 천박하고 오만한 녀석, 한 자루 칼을 차고 있으니 무사라고 주장할 셈이냐? 나는 왕이다! 왕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더냐! 네가 왕에게 예가 어 쩌니 했단 말이냐!”

키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입술을 훔쳤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와 손에 묻어나왔다. 키는 그것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마왕을 올려다보았다. 마왕은 롱 소드를 그의 가슴에 겨누고 있었다.

“용서를 빌어라!”

그러지 않겠다면?”

퍽! 잔인한 소리와 함께 키는 다시 뒤로 나가떨어졌다. 쇠신발에 맞은 얼굴과 땅에 부딪힌 뒤통수 중 어느 쪽이 더 아픈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빌 레스 국왕은 씨근거리며 걸어와 키의 가슴을 내리밟았다.

“미천한 놈, 선택 같은 것은 없다! 용서를 빌게 해주는 것은 왕의 자비다.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죽이고 네 동생 녀석에겐 네 시체를 먹이겠다. 그리고 네 동생의 여편네는 내 병사들에게 봉사하게 하겠다!”

왕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던 록소나 병사들은 그 마지막 말에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왕과 함께 달려왔던 기사들도 세실을 흘끔 쳐다보았다. 세실은 어이가 없었고 라이온은 낮게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키는 빌레스 국왕의 발에 밟힌 채 차분하게 마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회를 주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보겠지요.”

“물론이지.”

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바보요, 빌레스 국왕.”

“뭐라고?”

다음 순간 키는 마왕의 발을 붙잡아 옆으로 팽개쳤다. 마왕은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몇 번 주춤거려야 했고 그 틈에 굴러 일어난 키는 등에서 검을 빼 어 그대로 휘둘렀다. 빌레스 국왕 또한 녹록치 않은 인물인지라 제때에 검을 뿌려 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덕분에 키의 첫 번째 공격은 마왕의 목을 날리는 대신 그 롱 소드를 부러뜨렸다.

마왕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검을 바라보다가 다시 키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격돌 순간 찢어진 천이 옆으로 떨어져내리며 복수의 화려한 검신이 드러났다. 빌레스 국왕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네 사망 증명서지!”

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마왕에게 육박한 다음 그대로 마왕을 끌어안으며 쓰러졌다. 그러곤 그 몸에 올라탄 채 부러진 마왕 의 검을 움켜쥐어 그 목에 가져다대었다. 하빈저 부관이 비명을 질렀다.

“전하!”

“움직이지 마!”

검을 뽑아들던 기사들과 활을 들어올리던 병사들 모두 찔끔하며 손을 멈췄다. 키는 부러진 칼을 빌레스 국왕의 목에 갖다댄 채 복수로는 사방을 경 계하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서툴게 움직이면 빌레스의 목숨은 없다. 모두 무기를 땅에 버려라!”

록소나군은 하빈저를 쳐다보았고 하빈저는 입술을 깨문 채 키의 명령대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키는 다시 마왕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라이온! 세실! 무기를 전부 수거해.”

라이온과 세실은 아무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빌레스 국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키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키는 그 얼굴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 리고 그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크으윽!”

“전하!”

키는 부러진 검을 빌레스 국왕의 오른쪽 어깨에 꽂았다. 록소나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키는 이미 빌레스 국왕의 목에 복수를 갖다대고 있었다. 복수의 칼끝을 마왕의 목에 댄 채, 키는 천천히 왕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앉아라, 빌레스.”

빌레스 국왕은 오른쪽 어깨를 움켜쥔 채 일어나 앉았다. 어깨의 통증 때문에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지만 키는 복수의 칼 끝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바보 늙은이 같으니. 난 기회를 줬다. 네가 걷어찼지. 빌레스.”

빌레스 국왕은 키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후벼팔 듯이 찔러오는 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는・・・・・・?”

“말해 봐.”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키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제국의 공적 제1호다.”

록소나 병사들 사이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록소나인들도 키의 공포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공적 제1호. 제국 전체의 적이 그들의 왕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고 병사들은 라이온과 세실마저도 공포 어린 시 선으로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갑자기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보이려 애썼고 세실은 그런 라이온을 비웃었다. 빌레스는 힘겹게 말했다.

“정말 키 드레이번이냐?”

“그렇다.”

“네가 육지에는 왜…………?”

“왜 올라왔냐고?”

“그, 그래.”

키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을 보던 빌레스는 그것이 경멸감이라는 것을 깨닫곤 당황해 버렸다. 키는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서 말했다.

“이웃에 싸움을 걸고, 칼 끝으로 부당한 사과를 받아내고, 무사의 예를 비웃고, 죄없는 여행자를 죽이고, 그 육친에게 육친의 시체를 먹게 하고, 남 편 있는 여인을 능욕하려고.”

빌레스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이건 비난인가? 하지만 빌레스는 왠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키는 그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래서 빌레스는 네놈 또한 잔인무도한 해적이지 않더냐 따위의 말은 떠올리지 못했다. 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러나 빌레스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복수의 칼 끝은 늙은 왕의 목을 매섭게 찔러대고 있었고, 키는 냉엄하게 말했다.

“일어나라, 형제. 나와 함께 가줘야겠다.”

“노스윈드!”

부관 하빈저가 비명을 질렀지만 키는 냉랭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아, 알겠습니다. 인질이………… 예. 필요하시겠지요. 저, 그런데 전하께선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내가 그 분을 모시면 안 되겠습니까?”

키는 잠시 하빈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빈저는 대해적의 시선을 거북해하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누구냐?”

하빈저는 투구를 벗으며 대답했다.

“하빈저라고 합니다.”

“서 하빈저. 인질은 한 명이면 충분해.”

하빈저는 잠시 키를 바라보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의 손이 내려오며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하빈저는 허리로 손을 가져가 검집을 푼 다음 검도 땅에 던졌다. 맨손이 된 하빈저는 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 나는 인질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를 모시게 해주십시오. 전하께선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당신이 안전해진 다음에 전하를 풀어준다 하더라도 전하께선 말을 몰 수 없으십니다. 그러니 내가 전하를 보필하게 해주십시오.”

“전하라고 했나?”

키는 대답 대신 이상한 말을 했다. 하빈저는 눈살을 찡그리며 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그럼 이 자는 너의 왕이란 말이군. 그리고 넌 이 자의 명령을 따른단 말이겠지. 주인이 시키면 아무나 강간하겠군. 넌 발정난 개새끼냐?”

하빈저의 성실해 뵈는 얼굴에서 표현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노가 그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불길 같은 노성을 토해놓는 대신, 하빈저는 낮게 말 했다.

“그것은 그 분의 원래 모습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절대로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십니다. 한 악마 같은 이의 농간에 빠지셨기에 잠시 이성의 가닥을 놓치신 것일 뿐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그런 지독한 유혹에 빠져, 예, 당신 말대로 자신의 백성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노여워하시고 슬퍼하시다가 그렇게 되신 겁니다.”

빌레스 국왕은 당혹한 얼굴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빈저…”

하지만 하빈저는 키를 바라보며 말 을 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런 전하의 모습을 증오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키 드레이번 선장. 그 분이 내 왕이냐고 물었습니까? 대답하 겠습니다. 그 분은 내 왕이십니다.”

빌레스 국왕은 눈물 어린 눈으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키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악마 같은 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마법에라도 걸렸다는 건가?”

“마법보다 더 음험한 것이오. 길게 설명해야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관둬.”

키는 다시 빌레스 국왕을 돌아보았다.

“아니란 말이지.”

키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라이온과 세실은 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열 명도 훨씬 넘는 병사들과 기사의 존재뿐이었다. 그들이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말을 꺼내려 했을 때 키가 빠르게 말했다.

“하긴 혼자선 말 타기도 힘들겠군. 좋아, 서 하빈저 갑옷을 벗고 빌레스의 갑옷도 벗긴 다음 함께 말에 타도록. 라이온! 활을 들어ㅡ “

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마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하를 겨냥하라.”

하빈저의 얼굴이 밝아졌다. 빌레스 국왕은 입술을 깨문 채 키를 쳐다보았다. 키는 검을 옆으로 조금 치우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 를 덧붙였다.

“불쌍한 녀석.”

“뭐라고?”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나, 빌레스?”

마왕은 키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빈저는 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혹 그의 왕에게 위해가 되는 질문은 아닌가 의심하며 조마조마해했다. 하지만 키는 단조롭게 말했다.

“아마 없겠지. 네 새장은 너무 단단하고, 그 열쇠는 네게 있지 않다. 새장을 떠날 수 없다면 새장과 더불어 행복해야겠지. 네 새장을 껴안고 네 나라 로 돌아가라.”

몇 분 후 록소나의 병사들은 무장 해제를 당한 채, 멀어져 가는 대해적과 그들의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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