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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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1화


휘리 노이에스는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서 있기 힘들었던 서 소팔라는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마왕이 좀더 버텨줘야 하는 건데, 아쉽군요.”

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팔라는 스스로 자신의 말을 완성시켜야 되는 처지에 빠졌다. 소팔라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쉽게 물러날 거면 왜 쳐들어간 건지…………”

“시끄럽다. 서 소팔라. 생각하는 데 방해가 돼. 물러가라.”

서 소팔라는 바보같이 서 있을 바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한 다음 물러났다. 밖으로 나온 소팔라는 대기실에 앉아 있던 동생을 보게 되 었다. 서 소사라는 방문 쪽으로 눈짓을 보낸 다음 낮게 말했다.

“어때?”

서 소팔라는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머리 위쪽에 세워보였다.

“뭐든 들이받을 기세야. 뭘 보고하러 왔는지 모르겠다만 좋은 소식 아니면 조금 있다가 들어가.”

별로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은 아니기에 소사라는 도로 의자에 앉았다. 소팔라 역시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은 다음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휘리의 당번병이 두 장군에게 장군답지 못함을 비난하는 시선을 보내었지만 두 형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당번병이 듣건 말건 마음대로 말 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실망했다지만 마왕이 그렇게 물러날 줄은 몰랐는데.”

“어? 형도 알고 있었나?”

소팔라는 동생의 머리를 헤집으며 껄껄거렸다.

“물론이지, 아우야. 네 형을 무시하지 마라.”

“넘겨짚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한번 말해 보시지.”

서 소팔라는 손가락을 깍지껴 목 뒤를 받치며 말했다.

“넘겨짚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마왕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맺어버린 불침 조약은 뻔한 거 아니더냐. 팔라레온의 식민지 사업이나 하며 숨 을 좀 골랐다가 록소나와 다케온이 모두 비틀거릴 때 한꺼번에 잡아먹겠다는 것이었겠지. 제법 센스 있는 계획이라고 평가하겠어.”

“흐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마왕이 이렇게 도망칠 줄은 몰랐지만. 왜 그랬을까? 리저드라이더들이 겁났던 걸까?”

“그렇진 않을 거야. 피해를 입긴 했지만 두 번이나 그들을 격퇴했잖아. 평소 성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기세를 올려야 정상이야. 물론 우리 사령관 의 배신 때문에 속이 뒤집히기야 하겠지만…………… 화를 낸다면 몰라도 꼬리를 감추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관련해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

“그거? 아마 회군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마왕 자신이 퍼뜨린 소문이겠지. 재미있기는 하더라. 남루한 옷차림의 조그마한 은자가 그를 얕보는 마왕을 단숨에 때려눕히고는 그 전쟁의 무익함을 설파한다라…………… 성자들의 전설에서 단골처럼 나오는 패턴이잖아. 왜 꼭 궁핍해 보이고 조그마한 노인이 나 와야 되는지 모르겠어. 우람한 거한이 나오면 안 되나?”

“그런가? 앞으로 길을 가다 노인을 보게 되면 주의하겠어. 어쩌면 성자일지도 모르니까.”

소팔라는 낄낄거린 다음 아직까지도 그의 발을 노려보며 분노에 찬 시선을 보내는 당번병에게 윙크해 주었다.

“가져온 건 무슨 소식이냐?”

“법황이 서품식을 할 계획이라는군.”

소팔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누가 성자가 되는데? 그럴 사람이 있었던가.”

“성자 서품이 아니고 기사 서품이야.”

소팔라는 당황해 버렸다. 그는 테이블에서 발을 내리며 소사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의 동생이 지금껏 평온을 가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팔라는 낮은 목소리로 추궁하듯 질문했다.

“법황이 기사 서품을 한다니 뭔 말이야? 성기사?”

소사라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셈이지. 악덕하고 비열하고 야비한 금수들의 도당인 다벨에 성무 금지를 내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을 쳐부술 주님의 기사까지 준비하겠다는 거지. 아슬아슬하게 그 말은 안 나왔지만, 이젠 완전히 이단 취급이야.”

“설마 필마온 기사단이?”

“형님. 정신 차리시오. 필마온 기사단은 이미 교회 기사요. 뭘 또 서품하겠어? 게다가 퓨아리스 4세가 아무리 분통이 터진다 해도 그 해적놈들을 육 지로 끌어들이지는 않을걸. 우리를 끝까지 이단 판정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잖아.”

“그럼?”

소사라는 히죽 웃었다. 체념한 듯한 웃음이었다.

“아이언 블러드지.”

“애져버드!”

“그래. 그 친구들 이름이 또 바뀔거야. 법황은 그들에게 성 바이올의 이름을 따서 바이올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줄 모양이더군. 그래서 우릴 치게 할 생각이지. 머리 좋지? 성 바이올의 상징은 까마귀잖아. 그들은 은근슬쩍 푸른 까마귀 깃발을 다시 쓸 수 있을걸. 세상에서 제일 싸우기 더러운 것이 광신도인데. 그놈들은 자기가 죽어도 이긴 거라고 생각하거든. 아니, 이기는 것보다 죽는 걸 더 좋아하는지도 몰라…”

소팔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커다란 놀라움 속에서, 그는 아무래도 동생이 사령관을 만나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만을 떠올릴 수 있 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팔라가 예상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사라가 사령관실로 걸어들어간 후 소팔라는 휘리가 토해놓은 불길에 화상을 입게 될 동생을 위해 고약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태연한 모습으로 걸어나온 소사라는 그의 형을 미쳤냐는 듯이 바라봄으로써 소팔라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소팔라와 소사라 형제를 돌려보낸 휘리는 당번병에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령한 다음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휘리 노이에스는 투란궁의 아름다운 정원을 내려다보며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의 짜증은 자신의 작품이 망쳐진 데 대한 분노였다. 팔라레온 병탄까지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음 수순은 록소나와 다케온의 동시 공 략이 되어야 한다. 지켜야 할 곳이 너무 늘어나기 때문에 차례차례는 곤란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자신이 싸우지 않으면서도 적은 약하게 만들어두는 계획이었다. 그는 록소나가 동원할 수 있는 힘, 그리고 다케온이 반격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면밀히 계산해 보았고 록소나 쪽에 근소한 우세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근소한 우세일 뿐이므로 휘리는 그들을 싸우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의 판단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휘리는 빌레스 국왕이 마음을 바꿔버릴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사용한 재료들 중 가장 정교하게 그 성격을 분석했다고 생각했던 재료가 그를 배신한 것이다. 휘리는 떠도는 소문을 믿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혹시 어떤 고약한 악마가 그를 괴롭 히기 위해 은자로 변신하여 마왕의 면전에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휘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창가에 걸터앉았다. 팔라레온의 하늘은 고왔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긴 구름 흩어진 자락 아래

회색빛 대지를 덮은 흰 눈 위로

형벌의 바람 속을 쉼없이 달려가는

이리는 푸른 혼을 가졌다.

이토록 가소로운 세상, 이슬 속에 담긴 천년.

흩어진 웃음 조각. 돌아보지 않는 눈동자.

이지러진 달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이리는 푸른 혼을 가졌다.

어제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어질더분한 세상에서 묻은 때를 씻고

대지의 머릿돌 위에 서도 더 높은 곳을 찾는

이리는 푸른 혼을 가졌다.

지나온 길에 자취를 남겨 무엇할까.

떠오른 먼지 가라앉으면

피투성이 발자국도 사라질 테지.

먼지는 언제나 너무 많다. 너무나도…

“그거 무슨 노래지, 킬리 선장?”

킬리 선장은 류트에 손가락을 얹어둔 채 옆을 돌아보았다. 빙긋 웃던 얼굴은,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킬리

선장은 라미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미 옆에 검은 소녀가 서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검은 소녀는 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킬리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한 다음 덱체어에서 일어났다.

“혼 족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왜 데려오신 겁니까?”

“원하니까.”

킬리는 잠시 라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했다.

“원했…다고요?”

“계속해.”

그의 목소리에 이어지듯 튀어나온 것은 라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킬리는 기겁한 눈으로 검은 소녀를 바라보았고 그랜드머더호의 갑판에 있던 다 른 해적들도 당황하여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 어? 네가 말을 한 거야?”

검은 소녀는 물끄러미 킬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래서 킬리는 더 놀라버렸다.

“마,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고?”

검은 소녀는 뻔한 말을 하는 건 얼간이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눈으로 킬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검은 소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 똑같았으므로 그건 순 전히 킬리 선장 자신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킬리는 당황해 버린 자신을 창피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 음. 뻔한 질문들을 계속했군. 좋아. 아, 아니 뭐가 좋다는 건 아니고. (이런 얼간이! 진정하자.) 들을 줄도 알고 말할 줄도 알면, 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지?”

검은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할 일이 없었는데.”

“어, 그런가? 맞아. 말할 일이 없으면 말할 필요가 없지. 그렇군. 그래. 말할 일이 없는데 말하면 안 되지. 아무렴. 라이온이 이 이야길 들었다면 자살 하려고 들겠군.”

그대로 내버려두면 킬리는 자신의 왼발을 깨문 채 공중제비라도 넘을 것 같았기에 라미가 끼여들었다.

“소개라도 하면 어떨까.”

킬리는 자신의 이마를 경쾌하게 때렸다. 경쾌하다는 건 보는 사람들이 그랬다는 것이고, 그 자신은 이마가 꽤나 아팠다. 킬리는 허리를 굽혀 무릎에 손을 짚고 웃었다.

“아, 그렇지. 그래. 안녕? 소녀여. 난 킬리 스타드 킬리 선장이라고 부르면 돼.”

검은 소녀는 물끄러미 킬리를 올려다보다가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벨로린.”

킬리는 당황하여 라미를 바라보았다. 라미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킬리는 일단 자신을 벨로린이라고 말한 소녀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살짝 키스했 다.

“벨로린? 누가 그 이름을 지어줬니?”

벨로린은 아무런 대답 없이 킬리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입은 왜?”

“응?”

“그거, 계속해 줘.”

킬리는 멍한 심정 속에서 사실을 깨달아갔다. 벨로린이 내민 손은 류트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고, 맙소사!) 그리고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벨로린 앞에서 류트를 탈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그 손을 붙잡아 키스했다…………….

“듣고 싶니? 베, 벨로린?”

“그래서 온 거야.”

이건 참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내가 들어본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던 피조물이 내 연주를 듣고 싶다고 말하다니. 킬리는 허리를 조금 펴며 멋적게 주위를 돌아보다가 얼굴을 확 붉히고 말았다.

흑기사호에서는 일항사 매슈가 정신 나간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슈는 말을 거는 대신 빠른 손짓을 물론 매슈는 당연하게도 오닉스 선장 다음으로 빠른 손짓을 보낼 수 있다 보내었다. ‘킬리 선장? 그 아이가 말하는 것 같던데, 말을 했습니까?’ 그 선장을 닮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매슈 가 그렇게 당황하여 손짓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킬리는 웃고 싶어졌다. 킬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매슈는 우당탕거리며 주승강구를 달려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닉스를 모시러 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유호에서는 아예 뻔뻔하게 망원경을 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식스 일항사의 모습을 발 견할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엄격한 식스는, 자신이 그렇게 한다면 다른 선원들에게도 똑같이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처럼 자유호의 선원들 전원에게 구경을 허락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하리야 선장과 사트로니아의 바스톨 장군(주여!)이 그들이 나누고 있던 뭔가 원대무비한 이야 기를 잠시 중단한 채 함께 그랜드머더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홱 돌린 킬리 선장은 돌탄 선장의 놀란 얼굴과 두캉가 선장의 호기심 어린 얼굴 을 보게 되었다. 트로포스 선장은 보트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그랜드머더호를 직접 방문할 모양이었다………… 목을 혹사시키며 사방을 둘러본 킬리 선장은 잠시 후 정말 원하지 않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세계 전체가 그를 보고 있었다.

우우이 제기랄! 내가 이런 상황에서 탄젤론 토끼가 되어야 된다고? 세계에 대한 관찰을 끝낸 킬리 선장은 간절한 염원을 담아 벨로린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벨로린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킬리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킬리는 거절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여기, 덱체어에 앉으십시오. 라미 님.”

“선장은?”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킬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왜 자신이 라미를 덱체어를 앉히고, 벨로린을 살짝 들어올려 물통 위에 앉히는지 알 수 없 었다. 그리고 킬리는 뱃전에 걸터앉았다. 킬리는 차분히 류트를 껴안았고, 현 위에 얹혀진 자신의 손가락을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질문을 던지고 있 었다. 정말 그러려는 건 아니지?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지는 말자구.

킬리는 현을 뜯기 시작했다.

류트의 선율이 고요한 바다 위로 퍼져갔다. 노래만은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킬리는 입을 다문 채 손가락만을 잽싸게 놀렸다.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듣고 있던 벨로린은 이상하다는 듯이 킬리를 바라보았다. 류트는 독주용 악기라기보다는 역시 반주용 악기였지만 킬리 선장의 좋은 솜씨 때문에 그럭저럭 들어줄 만한 연주가 되었다. 하지만 벨로린은 불만스러웠다.

다음 순간 킬리 선장의 손가락이 현에 얽힐 뻔했다. 벨로린이 입을 연 것이다.

달려온 길에 흔적은 남겨 무엇하리.

하얗게 드러난 뼈다귀 위로

은린의 물방울이 물거품치면

이름은 언제나 부질없다. 언제라도.

지는 태양은 다시 떠올라도

낙엽 떨어진 나뭇가지에 새잎이 돋아도

쓸쓸한 바다에 물결은 한이 없어도

죽음 다음은 망각뿐. 안 죽을 건가?

마지막에 떠올릴 기억은 필요없다. 

수만년의 돌에 백년을 새기지 않는

터져버린 심장으로 맥박치며 달리는

이리는 푸른 혼을 가졌다.

노래가 끝났다. 킬리는 류트에 손을 그대로 얹어둔 채 멍한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로린은 오히려 킬리 선장의 류트 쪽이 참 신기 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벨로린? 그 노래는 어떻게 알고 있지?”

“그 남자가 부르는 것을 들었어.”

“그 남자? 누굴 말하는 거야?”

벨로린은 고개를 들어 킬리 선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 표정은 킬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들이 그 를 향하고 있었고 킬리 선장이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비난과 의아함 두 가지뿐이었다. 나머지는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벨로린은 잠시 고 민하다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말이야.”

“나? 어, 내가 부르는 걸 들었다고? 하지만 뒷부분은 못 들었을 텐데.”

하지만 벨로린은 이미 흥미를 잃은 얼굴이 되었다. 벨로린은 다시 류트를 바라보다가 앉아 있던 통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킬리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킬리는 당혹하여 벨로린을 바라보다가 다시 라미를 쳐다보았지만 라미는 덱체어에 기대어앉은 채 하늘만 보고 있었다.

킬리 선장은 뱃전에 앉아 있었던지라 뒤로 도망치지는 못했다. 벨로린은 킬리에게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어 킬리의 가슴에 안겨 있던 류트를 살짝 건 드렸다. 벨로린이 건드린 건 류트의 몸체였고 그래서 벨로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벨로린은 다시 손을 뻗었고, 이번엔 현을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울리자 벨로린의 얼굴도 환해졌다. 킬리 또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킬리는 류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만져볼래?’ 하지만 벨로린은 자 신의 앞으로 다가온 류트를 보더니 두 손을 등뒤로 돌리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거 해줘.”


노련하고 필요한 만큼의 행동력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의사를 존중할 줄도 안다면 전설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제일 선결 과제는 국가 수립이라는 것에 바스톨 장군과 하리야 선장은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사트로니아 함대는 모두 바스톨 장군에게, 노스윈드 함 대는 모두 하리야 선장에게 찬성했다. 물론 그들은 두 남자가 태양이 셋이라고 주장해도 별 고민 없이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6월 33일. 하리야 헌처크 선장은 신생국의 건국을 세계에 공포했다. 놀라운 행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포스 선장의 논평 한 마디.

“외우기 좋은 건국 기념일이군.”

신생국의 통치 체계는 기묘했다. 과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한 임시 정부라는 이름 아래 설치된 신생국의 통치 체계는 일종의 과두정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최고 의결 및 집행 기구는 노스윈드 선단의 일곱 선장으로 구성된 평의회였다. (사람들은 7인 평의회에 키 드레이번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을 많은 의미가 담긴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하리야 헌처크 선장이 그 평의회의 의장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통치 기구는 작은 정부를 꿈꾸는 이 상주의자가 보았다면 기립박수를 보낼 만큼 빈약했다. 신생국은 다림 총독부의 통치 기구를 약간만 손질한 다음 그대로 물려받았고 다림 총독부의 통치 기구 자체가 워낙에 간소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국방과 치안을 맡는 것이 노스윈드 해적이라는 사실은 가장 강력한 준군사 집단이 그들 뿐이므로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꽤나 당혹하게 만들었다. 각국의 광대들과 재담가들은 해적에 의해 유지되는 치안이라는 것을 꽤 오 랫동안 유효한 레퍼토리로 써먹을 수 있었다.

다림의 원 소유권자인 레갈루스의 반응은 생각 없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레갈루스는 신생국의 건국을 축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생국이 레갈루스에 대해 항만세 및 관세 영구 면제, 그리고 최혜국 대우라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레갈루스는 항구가 필요했던 것이지 본토에서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진 곳의 땅조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영토욕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어찌 보면 해적과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바다가 전부 그들의 영토라고 여기는 사람들 은 지상의 땅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과격하게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악독하고 무지한 해적놈들의 무리가 언필칭 자신을 나라라고 하며 열국과 같은 반열에 서겠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저 어리석고 무도한 해적놈 들을 위하여 개발된 유일한 발명품인 교수대만이 정의와 이성을 지키는 우리들이 저들에게 보낼 수 있는 건국 선물일 것이다.”

하리야는 그 욕설들을 모두 접수했고, 말없이 미소만 지어보였다. 정의의 군대가 그들의 국경선을 밟는 것은 당장은 달로 뛰어오르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국경선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나라들은 모두 전쟁중이므로. 따라서 그들이 제아무리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함 지른다 한들 거위 떼들의 꽥꽥거림보다 더 무가치한 일이다.

하리야 선장은 오히려 외부보다는 내부 쪽의 반발을 염려했다. 다림시는 강인한 사나이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은퇴 선원이라는 것은 다 늙어 이 빨이 빠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서 은퇴할 수 있을 만큼 대가 세고 수완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림시의 햇볕 좋은 길거리에 앉아 있는 사내들 중 열에 아홉은 그런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런 사내들이었기에 스스로를 기만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힘 대 힘 의 대결에서 패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힘으로는 졌을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하지는 못하리’ 따위의 말을 순수한 코미디로 즐길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일단은 햇볕이나 쬐며 신생국의 앞날을 냉정히 지켜보기로 결정한 듯했다. 하리야 선장으로서는 가장 큰 시름을 던 셈 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때이른 은퇴에 무료해하다가 다시 모험을 찾아 하리야의 건국 사업에 참가해 보기로 한 이들을 얻게 된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바 닷일을 하기에 힘이 부쳐 은퇴한 사내들은, 그러나 평생 모아둔 재산을 까먹으며 사는 생활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바다에선 돈 쓸 일이 없다. 도박만 멀리 할 수 있다면 가장 게으른 은퇴 선원도 남부럽지 않게 여생을 정리할 재산을 모을 수는 있다.) 바다로 돌아가기엔 힘들었지만 모험에는 목말라 있었던 선원 출신자 들은 그것을 일종의 도락거리로 생각하며 하리야에게 접근해 왔다. 선원과 해적이지만 그들에겐 바다를 무서워하며 사랑했던 사나이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말재주가 없어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들을, 하리야는 열렬히 반겼다. 그것은 다시 한번 제국의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장 어이없게 만든 것은 신생국의 국명이었다. 노스윈드 해적들 사이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소문에 따르자면 그 이름을 최초로 꺼 내놓은 것은 트로포스 선장이었다고 한다.

“실패한 농담이나 주워담아서 빨리 꺼져버려.” 두캉가 선장의 반응이었다. 오닉스 나이트 선장은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외의 모든 행동으로써 신음하는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돌탄 선장은 좋아했다. “좋은 이름인테? 난 찬성하겠어. 크커 내카 매일 열심히 포는 커치. 하하 하!” 그러자 킬리 선장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한번 바라본 다음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리야 선장은 찌푸린 눈으로 트로포스 선장을 바라보다가 고 개를 돌렸다. 일종의 옵서버로 참석중이었던 바스톨 엔도 장군은 당황하여 말했다.

“왜 나를 쳐다보시오?”

“실제로 나라를 한번 세워보신 분이잖습니까.”

“어, 아시겠지만 난 그저 내 이름을 따서 지었을 뿐이오. 내 용병단의 이름이 그거였기에. 그리고 난 여기서는 발언권이 없을 텐데. 내가 여러분들의 건국에 아무런 협조도 드릴 수 없다는 건 잘 아시지 않소.”

“물론 사트로니아의 협조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감상만 들려주십시오.”

“개인적으로 말이오?”

“예.”

“글쎄올시다. 국명은 중요한 것이지요. 신생국의 경우 어쩌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하지만 내 견해로는 이렇소. 한 집단의 이름은, 그 구성 원들이 모두 좋아하는 이름이 가장 좋다고. 너무 당연한 말이었지요?”

“흐음.”

하리야 선장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오른 것을 알아차린 두캉가 선장은 당혹하여 외쳤다. 

“웃기지도 않아. 모두들 알다시피 이곳은 대륙 최남단이 라고.” 

그러나 하리야 선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두캉가 선장은 목소리를 높여 “알버트에게도 물어보자고!” 등의 방해 작전을 펼쳤지만 물수리호로 보내어진 질문에 대해 물수리호의 선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리야는 그것을 찬성의 의미로 판단했다.

그래서 신생국의 국명은 선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별의 이름을 따서 폴라리스라고 정해졌다. 대륙 최남단의 국가에 북극성의 이름을 붙인 이 처사는 다시 한번 광대와 재담가를 열광케 했다.

모든 신생국가의 골치 아픈 일들은 폴라리스에도 예외없이 찾아왔다. 7인 평의회의 일을 맡게 된 선장들은 눈에 핏발이 설 때까지 일을 했지만 일은 끝이 없었다. 말이 7인 평의회였지만 실제로 일하는 선장은 네 명뿐이었다. 배를 떠날 수 없는 알버트 선장과 말이 안 통하는 오닉스 선장, 그리고 아 직 회복이 끝나지 않은 트로포스 선장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부족한 세 명 분의 업무는 자유호의 일항사 식스가 대신 맡아야 했다. 그는 총독부의 통 치 기구를 파악하고 이양받는 작업을 맡았으며, 그다운 엄격함으로 나흘 동안 철야 작업을 한 다음 졸도해 버렸다. 그가 졸도한 다음 그 일을 대신 맡 은 페가서스호의 도일 일항사와 흑기사호의 매슈 일항사는 식스가 처리하고 있던 일의 방대함에 질겁해 버렸다. (뒷처리만 맡으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래서 그들은 졸도한 식스를 놀릴 수는 없게 되었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은 합쳐서 열대여섯 개쯤 되는 위원회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간혹 자신이 출석할 위원회를 혼동했다. 킬리 스타드 선장이 교육위원회에서 퇴장하며 남긴 푸념 한 마디.

“난 사람들이 교육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어. 좋은 일이야. 하지만 교육은 사실을 가르쳐야 되는 거 아니던가? 왜 우리가 해적이 아니라 피 치 못할 사정으로 육지에서 도망친 혁명가나 영웅이 되어야 하는 거지?”

그에 대답한 돌탄 선장의 한 마디.

“이퐈, 킬리. 폴라리스의 토로 넓이를 얼마로 켤청하튼 크게 무슨 상콴이치? 마차만 탈릴 수 있으면 퇴는 커 아냐? 크 친쿠틀은 크게 중요한 컷처럼 말하턴테, 왜 충요한치는 말해 추치 안터라코.”

“자네 교통위원회에 갔었나?”

“아니. 산업위원회. 그 차틀은 교통위원회를 흡수하려고 눈이 펄캐쳐 있터쿤. 첸창!”

그리고 선장들 중 최연장자인 두캉가 선장은 인력 수급을 맡아서 찬성파와 참견꾼을 가려내고 반대파와 불평분자를 구분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낮았던가 하는 깊은 고민 속에 빠져버렸다.

평의회의 수장인 하리야 선장은 대외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 대외 업무라는 것은 그 말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일이었다. 하리야 는 다림 주재의 각국 대표부들을 차례대로 방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실 하리야는 각국으로 통하는 채널로 그 대표부들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공 공연히 드러낼 만큼 무지하지는 않았는지라 당분간 무접촉으로 일관하는 정책을 세웠다. 하리야 선장의 대외 업무는 그보다 좀더 복잡한 일이었다. 모든 신생국가의 고민에 더하여, 하리야에겐 사트로니아 함대를 처리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도 자명했다. 다림 만에 떠 있는 사트로니아 함대의 존재는 신생국 폴라리스의 목에 들 이댄 칼날이나 다름없다. 그 의미를 짤막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다림을 노이에스 정벌 전쟁의 전진 기지로 제공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다면, 사트로니아는 폴라리스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신생국 폴라리스의 첫 번째 대외 사업은 대 사트로니아 전쟁이 될 것이다.’

하리야는 불쾌한 기분 속에 위궤양을 일으키는 대신 그것을 자신의 목적과 합일시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어쨌든 사트로니아가 원하는 것은 폴라리 스가 아니라 휘리 노이에스다. 그리고 휘리 노이에스는 폴라리스 바로 바깥에서 전쟁중이다. 따라서 사트로니아군을 폴라리스의 국경선 확립에 이용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하리야는 다벨의 정복 전쟁을 탐지하며 사트로니아군을 개입시킬 기회를 찾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건국 사업 을 완료 – 물론, 진짜 완료라고 말하려면 훨씬 많은 시행착오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하자마자 전쟁 사업에 몸을 던지는 하리야 선장을 보며 동 료 선장들은 경탄을 보내었다.

그리고 하리야는 이 모든 일을 공개리에 진행시켰다. 그랬기에 폴라리스 주재의 대표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를 쉽게 작성할 수 있었다. 보고 서들을 받아든 각국은 사트로니아의 의지가 해적들을 인지해 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휘리 노이에스의 견제를 위한 거점을 원하는 것이라 판단 하고는 일단은 사트로니아의 의지를 그 정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당장은 폴라리스의 건국에 반대하고 나서지는 않았고, 각국 대 표부들을 존속시켜 둔 하리야는 즐거워했다.

그리고 퓨아리스 4세 또한 즐거워했다.

“사트로니아와 폴라리스에 축복 있으라! 노병의 도끼가 아주 제대로 때렸군!”

법황은 펜을 들어 벽의 지도에 큼직하게 폴라리스라고 써놓으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보던 플로라는 약간 조바심을 느꼈다.

“성하. 그런 행동은………… 성하께선 폴라리스를 인정하실 생각이십니까?”

“할 거야.”

“그들은 해적이자 제국의 공적 제1호…”

“아니, 틀려. 키 드레이번의 이름이 빠져 있다. 그 해적놈들도 머리는 있단 말이야. 물론 그놈들 중 상당수는 여러 나라에서 수배중인 범죄자지만, 제국의 공적은 없어. 인정할 수 있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모든 이들에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처사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걱정 마.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좀더 뒤의 일이 될 테니까. 지금은 기회를 줄 뿐이야.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나 역시 당장은 폴라리스를 규탄할 수는 없잖아, 플로라?”

“사트로니아를 난처하게 할 테니…

“바로 그거야! 사트로니아를 난처하게 할 테니. 기가 막히잖아? 다른 나라들도 사트로니아를 난처하게 할까 봐 잠깐 동안은 입을 닫고 있단 말이야. 아주 멋지다고!”

“하리야라는 분, 꽤나 지혜로우신가 보지요.”

“그래. 아주 좋은 때를 이용하고 있다.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나라들이 전부 전쟁중인 때를 골라, 그들을 처리하고 싶어하는 유일한 나라의 도움 을 끌어내어 나라를 일으켰어. 사트로니아는 하이낙스에게 워낙 심하게 당했던지라 두번 다시는 그런 꼴을 당할 수 없다고 신경이 곤두서 있지. 폴라 리스호는 거의 최고의 바람을 타고 있어. 나도 도움을 좀 줘야겠어. 좀 조용한 걸로. 자극적이지 않지만 확실한 걸로. 어디 보자. 하리야 헌처크 개인 에게 보내는 축하 서신? 아냐. 이건 자극적이야…………”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법황을 보며 플로라는 방긋 웃었다. 법황은 그 웃음을 보며 덩달아 웃었고 아주 오래간만에 법황 집무실의 분위 기가 밝아졌다. 그러나 퓨아리스 4세는 다시 지도를 돌아보았고, 갑자기 웃음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휘갈겨놓은 글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굉장하지?”

“예?”

“정말 굉장하다고. 나라 하나쯤 뚝딱 세울 수 있는 작자를 거느리고 있단 말이야.”

플로라는 법황의 말에서 생략된 단어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플로라는 법황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퓨 아리스 4세는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등을 보고 있나, 플로라?”

“그렇습니다.”

“뭐가 보이나?”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의 모습입니다.”

“지상 최고의 머저리겠지. 얼간이라고 해도 좋고.”

플로라는 잇자국이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평온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성하. 제가 사람의 일을 이야기한다면 우스운 일이겠지만 말씀드리고자 하니 용서하십시오. 성하께서 느끼는 감정들을 비하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누구나 느끼는 감정입니다. 감정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퓨아리스 4세는 고개를 떨구었다. 양탄자의 무늬를 감상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지만 그 눈은 실제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서 있던 법 황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플로라는 집무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흉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자하다는 말의 현현인 것같이 생긴 선대 법황 퓨아리스 3세의 흉상이었다. 어떻게든 그 지위에 어울리는 위엄을 더해 보려 애쓴 조각가의 노고는 눈물겨운 것이었지만, 그 흉상에서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퓨아리스 3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푸근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역대 법황들의 흉상 중에서 어린 신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흉상이기도 하다.

흉상을 쳐다보던 법황이 갑자기 움직였다.

퓨아리스 4세는 흉상 쪽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이 흉상을 붙잡은 순간 플로라는 눈을 감았다. 퓨아리스 4세의 고함이 요란하게 터져나왔다.

“아리스 3세,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려고 죽다가 살아나?”

와장창! 플로라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퓨아리스 4세는 깨어진 흉상의 잔해 속에서 헉헉거리며 서 있었다. 플로라는 이 집무실에 있다가 법황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것들의 리스트에 퓨아리스 3세의 흉상을 추가한 다음 나직하게 말했다.

“만족하십니까?”

“후, 후우. 좀 낫군. 망할, 음흉한 노인네. 언젠가 꼭 한번 이렇게 해주고 싶었어.”

“만족하신다니 다행이군요.”

퓨아리스 4세는 플로라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나 곧 그 미소가 사라졌고 퓨아리스 4세는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엄에게………… 음음. 이봐. 플로라. 어쩌지? 저, 그러니까 팔이 걸려서 그랬다고………… 믿어줄까?”

플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법황은 울상이 되어 흉상의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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