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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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2화


그렇게 모든 나라들은 한 신생국의 운명을 주로 흥미 쪽에 비중을 두고 바라보고 있었다. 위협으로 인식되기엔 폴라리스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폴 라리스가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대륙의 내일을 의논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제국 천년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명멸했던 부초 같은 나라들 중 하나 로 끝나버릴지를 또라지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해적과 은퇴 선원들이 어떤 역사를 만들지를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임에는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라트랑에서만은 이 흥미진진한 아이의 미래에 대한 고려 같은 것을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들 바로 곁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한 성 인이 그들의 감성을 더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트랑 후작 에름은 두 통의 서신에 사인한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지금 바이스라와 레모의 지도자들도 똑같은 서신을 쓰고 있을 것이며, 그 수신인의 이름들 또한 똑같을 것이다. 두 통의 서신은 각자 록소나 의 국왕 빌레스와 다케온의 백작 네그리파에게 보내어지는 것이다. 전자의 내용은 그 훌륭한 회군 결정을 반갑게 여긴다는 것이며 후자는 근래에 당 한 끔찍한 고초에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삼국의 지도자가 똑같은 내용의 서신을 쓰는 것은 그들의 공조 체계를 천하에 알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에름 후작은 당장은 무용지물이 된 삼국 협정에 대해 생각하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의 나라가 대륙에 자랑하는 유명한 와인을 마시기 위한 동작 이었지만, 그의 손끝에는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디캔터가 닿지 않았다. 에름 후작은 고개를 돌렸다.

“이루미나?”

책상 옆에 서 있던 라트랑 후작 부인 이루미나는 조용히 웃은 다음 손에 든 디캔터를 유리잔에 기울였다. 이루미나는 잔을 채워 그녀의 남편에게 건 네었지만 후작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잔 더 부어요.”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 잔을 더 따랐다. 에름 후작은 와인잔을 들어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와 건배해 주겠어요, 이루미나?”

“무엇을 위해서지요, 에름?”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외의 즐거움들을 위해.”

후작과 후작 부인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잔을 든 채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에름 후작이 부인을 위해 지은 이 카밀궁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넓은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다. 단단한 돌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테라스는 해수면 위 3피트 정도의 높이에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스라기보다는 나루터처럼 보인다. 궁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조용한 만 안쪽이라 파도가 테라스 위까지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이 와인 잔을 들고 찾아갔을 때에도 궁전 앞바다는 물결조차 찾기 힘들만큼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후작은 바다의 공주라 불리는 부인에게 정원 대신 바다를 선물한 셈이었다.

테라스의 의자에 앉은 에름 후작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후작 부인을 위한 의자도 있었지만, 이루미나는 의자에 앉는 대신 후작이 앉 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에름은 빙긋 웃으며 부인의 손을 잡아 키스했다.

“설명해 주시겠어요, 에름?”

“빌레스 국왕이 회군했습니다.”

이루미나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에름은 두 손으로 부인의 손을 감싸쥐며 미소 지었다.

“마왕은 승세를 타서 진격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군대를 돌려버렸지요. 다케온의 자랑인 리저드라이더 부대를 두 번이나 격파하고 나서 말 입니다. 정말 훌륭한 결정입니다.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당신이 바이스라와 레모와 맺었던 협정을……………”

“아니오. 이루미나. 우리는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빌레스 국왕은 우리가 압박을 가하기 전에 자신의 결정으로 회군한 겁니다. 덕분에 우리도 볼 썽사나운 협박을 보낼 필요도 없게 되었고, 급하게 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뛰어다녔던 특사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그들도 일이 이렇게 품위 있게 끝 났으니 반가워하겠지요.”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루미나.”

“에름?”

“내가 마왕에게 재갈을 물려 록소나로 끌어다 놓았다면 당신에게 꽤나 잘난 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요.”

에름은 짐짓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루미나는 쾌활하게 웃었다.

“에름. 내가 지금보다 더 당신을 존경하길 원하나요?”

“아, 그건 곤란하지요. 그랬다간 나는 자신을 대천사 비슷한 인물인 줄 착각하게 될 테니.”

부부는 함께 웃은 다음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루미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여 에름의 어깨에 기대며 속삭였다.

“정말 잘하셨어요, 에름, 당신이 한 일이 쓸모없어졌다 해도, 그리고 아무도 알아줄 수 없다 해도 나는 알고 있어요. 그걸로 만족하시지 않겠어요?” 

“이미 만족합니다. 내가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다행이네요.”

“무익한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이루미나. 사람들이 피를 흘려서는 안 됩니다. 하이낙스가 남겨준 것 중에서 유일하게 쓸 만한 것은 바로 그 교훈이 아닌가 싶군요. 그도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사람들의 분쟁이 영영 없게 하려고 선택한 수단이 바로 전쟁이었으니 그는 자가당착에 빠진 셈이었습니 다.”

“마법사였잖아요? 정신이 이상했을 거예요.”

“하하. 이루미나. 그가 좀 괴팍하긴 했지만 정신이상자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군요. 내 동생이라면 그의 일대기를 줄줄 불러댈 수 있겠지요. 그것도 입을 쓸 필요가 없는 다른 일 몇 가지를 해가면서.”

“그럼 이런 일을 할 땐 못하겠군요.”

에름은 어리둥절해하는 이루미나를 끌어당겼다. 이루미나는 곧 남편의 뜻을 이해했고,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내밀었다. 부부는 열정보다는 안온함 속에서 서로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루미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

“미안해요. 에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잖아요, 이루미나.”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이 없어요. 감정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요. 미안해요.”

에름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루미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아내가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잠깐 고민하던 에 름은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이루미나를 바라보았다.

“수영하지 않겠어요, 이루미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하고 싶은데요.”

이루미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에름을 바라보았다. 에름 후작은 그의 아내에게 윙크해 보인 다음 테라스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테라 스의 끝에 난간은 없었고, 이루미나는 기겁하며 일어났다.

“에름!”

에름은 그대로 창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당연한 결과로, 물보라가 튀어오르며 라트랑 후작은 바닷속으로 빠졌다. 어푸거리며 바닷물을 가득 들이마 신 에름 후작은 물을 걷어차고 팔을 휘저어대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더 많은 물을 뒤집어씌웠다. 에름 라트랑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몇 번이나 수면을 들락날락거리던 에름은 테라스 쪽을 얼핏 보았다.

어느새 옷을 벗어던지고 슈미즈 차림이 된 바다의 공주는 허공에 우아한 선을 그리며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에름은 짧은 순간 감탄을 토했다. 덕분에 손을 휘젓던 것을 잊고 에름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불안감을 느끼는 대신 눈을 크게 떴다.

푸른 바다 저편으로부터 그의 아내가 헤엄쳐 오고 있었다.

두 손을 옆구리에 꼭 붙인 채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남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루미나는 남편이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눈썹 을 곤두세우며 비난의 말을 토해내었다.

“보글보글보글!”

“보글, 보그르르……?”

에름 후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거품을 토해놓았다. 이루미나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남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이루미나는 힘차게 헤엄치며 남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물 밖으로 나오기 전의 짧은 순간, 에름은 아내의 슈미즈 아래 쪽을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격세유전되는 카밀카르 왕가의 신비가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날씬하며 길다란 꼬리. 맑은 물 속에서 마치 너울처럼 움직이는 지느러미. 바닷 물을 통과한 햇살이 부딪힐 때마다 수천 개의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비늘들………….

에름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숨이 가빠서만은 아닌 것 같다. 갑자기 짓눌리는 기분이 사라지며 에름은 물 밖으로 나왔다.

에름은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물방울을 흩뿌리고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루미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원망과 슬픔, 그리고 당황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름은 크게 웃으며 그의 아내의 두 볼을 감싸쥐고 입맞추었다. 아내의 입술에선 바닷물 맛이 났다.

이루미나는 남편을 다시 테라스에 올려놓은 다음 그녀 자신도 뛰어올랐다. 물고기의 꼬리는 다시 두 다리가 되었다. 에름의 견해로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다리다. 이루미나는 남편의 시선을 느끼곤 얼굴을 붉히며 슈미즈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옷이 젖어서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수영도 못하시면서!”

“모든 현명한 남편들이 그렇듯이, 아내를 믿었던 거죠.”

에름은 셔츠를 벗어 물기를 짜내면서 껄껄거렸다. 그가 다시 사랑하는 아내에게 들려줄 근사한 말을 떠올렸을 때였다.

“로 – 드 에름 — ?”

약간 난처한 듯한 고함이 들려온 순간 이루미나는 기겁하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고, 에름 역시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에름은 테라스 저편, 방 안쪽에서 벽을 보며 고함 지르고 있는 기사 한 명을 보게 되었다. 기사는 두 부부의 좀 지나치게 발랄한 모습을 보곤 황급히 몸을 돌린 모양이다. 에름은 재빨리 아내가 벗어던진 겉옷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무, 무슨 일인가, 서 레빌?”

서 레빌은 당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허락 없이 들어왔습니다.”

“아, 그래. 무슨 일이지? 야, 약속이 있었던가?”

에름은 아내의 겉옷을 등뒤로 돌렸고 테라스 아래쪽에선 흰 손이 올라와 그 옷을 움켜쥐었다. 서 레빌은 여전히 벽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로드 에름. 후작님을 뵙기를 간청하는 방문객이 있습니다.”

에름은 순간 짜증을 느꼈다. 별볼일 없는 방문객이면 서 레빌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터이고 그가 직접 만나야 할 중요한 방문객이면 당연히 사전 통 지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문 예고도 없이 찾아온 무례한 방문객 때문에 라트랑 최고의 권력자인 그들 부부가 방해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에름은 꾹 참으며 말했다.

“어떤 방문객이시기에 이렇게 급히 나를 찾아온 건가?”

“그것이……”

“언니!”

뭔가가 방 안으로 휙 뛰어들었다. 에름은 당황하여 셔츠를 끌어올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달려온 그것이 그의 옆을 지나칠 때 에름은 ‘안녕하세요, 후 작님’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의 등뒤로부터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에름은 기막힌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뒤로 돈 것의 수십 배나 되는 속도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주여, 이건 실수였나이다.’ 그의 등뒤에서는 그의 처제가 아내와 함께 물장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 유리!”

“룸 언니!”

에름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 레빌을 바라보았고 서 레빌은 두 손을 펼쳐보이며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는 뜻의 몸짓을 해보였다. 에름은 얼떨떨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테라스를 떠났다. 그때 열린 문 저편으로부터 남자 두 명이 걸어들어왔다. 남자들은 에름의 차림새에 당황하다 가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후작님. 저는 바탈리언 남작이라………… 합니다.”

에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이 저명한 문객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그 기념비적인 순간에 자신이 반쯤 벌거벗고 있을 줄은 꿈 에도 몰랐다.


“발사!”

대포가 다시 사납게 불을 뿜었다. 포신이 격렬하게 후퇴하며 파란 포연이 피어올랐다. 수십 회째 계속된 발사 때문에 포신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 라 있었다. 그리고 명쾌한 살해 의지의 날개를 단 포환들이 강 건너편의 참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포환은 땅을 할퀴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올렸다. 흙먼지와 모래가 피어올라서 참호를 덮쳤고 참호 안에서는 맹렬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다케온의 기사들은 천식과 더불어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들이 목숨과 거의 비슷하게 생각하는, 때론 목숨과 혼동하기도 하는 것이 기사의 품위다. 그 러나 포화 속의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으면, 게다가 여름으로 접어든 날씨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혹시라도 포환이 참호 안으로 들어올까 봐 전전 긍긍하고 있다면 기사나 보병이나 거기서 거기다. 다케온 기사들은 악에 받쳐서 외쳤다.

“저 빌어먹을 다벨 놈들은 대포를 다 부숴먹을 생각인가!”

그러나 초탄 발사 후 돌격을 감행했다가 부상을 입은 기사들은 그런 불평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빨리 2탄이 날아든 데 놀라고 있던 기사들에 게 숨돌릴 새 없이 3탄이 날아들었다. 그제서야 다케온 기사들은 자신들이 제국 역사상 최초의 연속 사격의 제물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는 허둥지둥 보병용의 참호로 돌아왔다. 참호 속으로 굴러떨어지면서도 기사들은 자신 있게 외쳤다.

“오래는 못 간다. 대포가 깨지고 말 테니까.”

그러나 수십 회째의 사격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그 말은 왠지 신빙성이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포화 사격이었고, 그래서 몇 번인가 응사하던 다 케온의 대포들은 이미 오래전에 결딴난 상태였다.

포격이 잠깐 멎은 순간 용감한 기사 하나가 참호에서 고개를 내밀고 고함 질렀다.

“이 빌어먹을 다벨 놈들아! 대포 다 부술 작정이냐? 그따위 맞지도 않는 대포 집어치우고 전사답게 싸우잔 말이다!”

“너 항문으로 휘파람 불래?”

강 건너편에서 대꾸의 말이 들려온 순간 용감한 기사의 전우들은 기사의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져야 했다. 용감한 기사는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난동 을 부리고 있었고 한 상상력 풍부한 취사병은 잠시 저 기사를 요리에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대꾸가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았다면 용감한 기사는 아예 정수리로부터 용암을 뿜어대었을 것이다.

강 건너편에서 휘리 노이에스는 낄낄거리며 몸을 돌렸다. 포병대 쪽을 흘끔 바라본 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의 말이 맞긴 하군. 슬슬 대포 깨질 때가 되었지?”

“그렇습니다. 팔라레온제 치고는 꽤 오래 버티는군요?”

소팔라는 한가롭게 대답했다. 하지만 소사라는 약간 근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웬만하면 깨버리지는 말지요. 아깝잖습니까. 사령관님.”

“서 소사라. 안됐지만 저건 벌써 대포가 아니라 고철덩이라고. 지금쯤은 포신 안쪽이 엉망이 되어 있을걸. 탄착점이 제멋대로잖아.”

“그렇습니까?”

소사라는 입맛을 다시면서 아까워했다. 휘리는 소팔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작전대로 간다. 서 소팔라.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소팔라는 지휘소가 있던 언덕에서 달려내려갔다. 휘리 노이에스는 소사라 쪽을 바라보았고 소사라는 깃발을 들어올렸다.

“포격, 중지!”

지루하게 계속되던 포격이 마침내 멎었다. 대포가 폭발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던 다벨 포병들은 성호를 그으며 재빨리 대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강 건너에서는 얼굴 전체를 분노로 물들인 다케온 기사들이 참호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시 말에 오르려던 다케온 기사들은 순간 아연함을 느꼈다.

말을 달릴 수가 없었다. 무자비하게 계속된 포격은 강변 주위의 부드러운 땅을 엉망진창으로 파헤쳐 놓았다. 마치 거대한 쟁기로 갈아 엎어놓은 것 같았다. 말을 달리게 하기는커녕 사람도 제대로 달리기 어려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의 다벨군 측에서는 이미 도하를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케온군의 사령관은 신음을 흘리며 기사들에게 하마(下馬)를 명령한 다음 그런 지독한 땅도 달릴 수 있는 유일한 부대에게 진격 명 령을 내렸다.

다케온의 자랑 리저드라이더들이 전열로 나섰다.

그러나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록소나와의 전투에서 두 번이나 패했던, 그리고 두 번째는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리저드라이더 부 대는 아직 그 압도적인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케온 사령관 또한 리저드라이더들이 적의 예봉을 꺾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끌어주는 것 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에게는 기사들을 하마시키고 중장보병을 전진시키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리저드라이더들은 사령관의 뜻을 이해했고, 기합 보다는 포효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내며 강 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돌겨 ᅳ 억!”

목도리도마뱀은 수면마저 달릴 수 있는 그 기동성을 십분 발휘하며 움푹움푹 패인 땅을 평지처럼 치달아 삽시간에 강변 가까이까지 도달했다. 강 건 너편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팔라는 감탄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좋아, 약속은 다들 기억하지? 도마뱀 꼬리 하나만 잘라와도 자유다. 기사의 갑옷을 가져오는 자에겐 토지까지 따른다. 백부장급 이상의 머리를 가 져오는 자는 당장 귀족이다. 알겠냐?”

군대식의 우렁찬 대답 대신 결의에 찬 끄덕임이 돌아왔다. 서 소팔라는 그 핏발선 눈동자들을 보고는 씩 웃으며 팔을 들어올렸다. “가자!”

“와아아 !”

강물 속에 뛰어든 리저드라이더들은 그들을 향해 돌격해 오는 부대의 모습을 보며 놀랐다. 검과 도끼 등의 무기는 가졌지만 갑옷 등은 전혀 착용하 지 않은 부대가 거친 머리를 흩날리며 맨발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예 상의까지 벗어버리고는 농기구를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리 저드라이더들 사이에서 격노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노예들!”

리저드라이더와 노예 부대는 얕은 강물 위에서 격돌했다.

목도리도마뱀은 전방에서 다가오는 적을 보며 그 프릴을 떨쳤다.

“쫴애애 액!”

하지만 기병들에게는 가공할 효과를 나타내는 목도리도마뱀의 프 릴도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노예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리저드라이더들은 노성을 지르며 노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목도리도마뱀의 앞발이 휘 둘러질 때마다 노예들의 머리가 박살나고 그 가슴이 갈라졌다. 강물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고 물보라 튀는 소리 사이로 비명이 요란했다. 그러나 리 저드라이더들은 노예 하나를 쓰러뜨릴 때마다 다른 노예 두서너 명이 도마뱀에게 달려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가벼운 복장을 한 노예들은 도마뱀 의 안장 위까지 뛰어올라 리저드라이더들의 목을 노렸다. 어떤 노예는 목도리도마뱀의 다리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개미떼가 그보다 훨씬 더 큰 쥐나 새 등을 공격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담한 노예들은 철벅거리며 강을 건너 다케온의 중방보병을 향해 돌격해 갔다. 구렁투성이가 된 땅을 힘겹게 돌진해온 다케온 중장 보병들과 기사들은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노예의 모습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들은 팔라레온의 넓은 밀밭에서 채찍 아래에서 일하던 노동 노예들이 었고, 평생을 계속되어온 불평등에 의해 단련된 살해욕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라는 대가까지 약속받은 상태였다. 그들은 팔라레온에서 가져온 대 포 전부를 파괴할 정도의 사격을 가해서 그들만을 위한 전장을 만들어준 휘리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왈칵 솟아나온 피들은 곧 유혈의 강이 되었다. 밀 그루터기처럼 무참히 베어진 수족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다케온 중장보병의 육신 위로 다시 도리깨와 큰낫과 쇠스랑이 쏟아졌다. 노예들의 놀라운 활약 앞에서는 그들 가운데 서서 수준 높은 검술로 사방의 적을 베어내리고 있는 소팔라의 분전이 무 색해질 정도였다. 노예 부대를 통솔하고 있던 소팔라는 어차피 지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속편하다고 생각하며 사병처럼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휘리 노이에스는 노예 부대의 엄청난 활약을 보면서 환호하고 있지 않은 유일한 다벨군이었다. 전장을 세심히 관찰하던 휘리는 곧 고개를 끄 덕이며 다시 소사라를 돌아보았다.

“좋아, 서 소사라, 시작해!”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휘리 노이에스는 자신이 그렇게 공들여 준비한 노예 부대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불신은 정확했다. 훈련받은 병사들과 달리, 전투 초반 폭발적 인 힘을 보였던 노예들은 곧 지구력의 감퇴를 보이며 주춤하기 시작했다. 반면 그들에 비한다면 베테랑 병사라 할 수 있는 다케온군은 꿋꿋하게 버티 며 스스로 진형을 구축하여 노예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군대의 훈련이라는 건 기실 싸움을 잘하게 하는 훈련이 아니라 싸움을 오랫동안, 그리고 차분히 할 수 있게 하는 훈련이다. 사기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노예들은 분노하는 것에도 빨랐지만 공포를 느끼는 데도 빨랐다. 주춤거리는 한두 발 자국이 곧 정신없는 뒷걸음질이 되고 그 뒷걸음질이 곧 무기까지 팽개친 도주가 되어버리기 직전, 그리고 다케온 보병대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 올랐을 때,

정확한 시간에 돌격했던 다벨 중장보병대가 전장의 우회기동을 성공시켰다.

다케온 보병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노예들의 앞뒤 없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밀집 대형을 짜고 있던 다케온 중장보병대는 다벨 중장보병 대의 돌격을 미연에 막을 수 없었다. 공터나 다름없는 측면 공간을 이용하여 돌격한 소사라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다벨 중장보병들을 다케온군의 측면에 풀어놓았다. 그것은 재정비에 들어간 다케온군의 허리를 무참히 꺾어놓는 일격이었다. 다케온군이 측면 쪽에 가해진 그 일격에 휘청거리는 순간 사그라들던 노예 부대의 사기가 다시 폭발했다.

“으아아아!”

짐승 같은 함성과 함께 노예들은 다케온군에게 달려들었다. 도마뱀 하나에 자유, 갑옷 하나에 토지, 그리고 백부장급 이상이면 곧장 귀족이다. 가진 것이라곤 목숨 하나뿐인 노예들은 거칠 것 없이 달려들었다. 다케온군은 귀신같이 달려드는 그 모습에 먼저 질려버렸고 얼어붙은 팔다리를 제대로 추스리지도 못한 채 쓰러져 갔다.

그들 가운데서 다시 크게 검을 휘둘러 다케온 중장보병 하나를 쓰러뜨린 소팔라는 잠시 호흡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황은 휘리의 작전에서 한치의 벗어남도 없이 전개되고 있었고 소팔라는 자신이 할 일은 그저 개인적인 무용(武勇)을 펼쳐보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등뒤로부 터 부드러운 야유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시길, 형님. 그러다 목 떨어지겠군. 늙었나 보지?”

소팔라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투덜거렸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라, 얼간이, 너하곤 두 살 차이다.”

하지만 소팔라는 호흡이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다음에야 고개를 돌렸다. 소사라는 피와 살이 튀는 전장 한가운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넌 지휘 안하고 거기서 뭐하냐? 나야 지휘할 일도 없지만.”

“글쎄. 나도 별로 그럴 일이 없군. 한마디 해줬더니 눈을 뒤집고 싸우는데.”

“뭐라고 말했는데?”

“나의 솔직한 심정을 들려줬지.”

“솔직한 심정?”

“다벨 정예병이 팔라레온 노예에게 뒤지는 것을 보면 슬퍼질 거라고.”

소사라는 그렇게 말해서 형을 웃긴 다음 허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롱 소드를 뽑아든 소사라는 관찰하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척척 걸어간 소사라는 책꽂이에서 책이라도 뽑아드는 듯이 간단한 동작으로 다케온 중장보병 하나를 베어내렸다. 그러곤 그의 형을 흘끔 돌아보며 말했다.

“하나야.”

“뭐, 뭐야? 난 안 세고 있었단 말이다!”

“그럼 충고하는데 지금부터라도 세는 편이 좋겠군.”

그 시점에서부터 전투는 별다른 변화 없이 다벨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포로는 별로 없었는데, 그 수급을 탐낸 노예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 들까지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이다. 휘리는 자신이 원하던 바였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포로까지 먹여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전투 후 서 소팔라는 동생보다 두 명 적게 쓰러뜨린 것을 알게 되자 세지 않았던 것까지 치면 자신이 이긴 거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형을 멀뚱히 바라 보던 서 소사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래. 형이 이겼어’라고 말해 버림으로써 그의 형을 더 참담한 지경에 빠뜨렸다.

그렇게 해서 휘리 노이에스는 다케온과 맺었던 불침 협정을 반 달 만에 폐기해 버렸다. 그리고 다케온 백작 네그리파 다케온에게는 ‘휘리 노이에스! 이 아비 없는 광대 자식, 죽여버릴 테다, 뼛조각까지 씹어먹어주겠어!’ 등의 교양인답지 않은 잠꼬대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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