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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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3화


하리야 선장은 탁자 위에 펼쳐둔 지도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친구 너무 빠른데요. 코피를 터뜨려주고 싶어도 어디 콧잔등을 볼 수가 있어야죠.” 바스톨 장군은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야는 한탄하듯이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 합리성에 기반한 정확한 순서라고 말씀하신 건 바로 이겁니까?”

“이것?”

“노예 말입니다. 팔라레온의 밀농장 노예들.”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휘리 노이에스가 노릴 수 있었던 것은 록소나와 팔라레온이지요. 내가 그였다 하더라도 팔라레온부터 노렸을 거요. 마왕의 그 무시무시한 기사들 보다는 팔라레온 쪽이 상대하기 쉬우니까. 그리고 팔라레온을 점령하면 이후 군량 조달이 쉽다는 장점도 있고. 하지만 나도 팔라레온의 노예들까지 는 생각 못했소. 그러고 보니 3국 중 가장 넓은 그 땅은 노예들에게 나눠주고도 남겠군.”

“그리고 팔라레온을 잡으면 다케온을 손닿는 거리 내에 둘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겠죠. 그걸 위해서 미리 마왕을 충동질해서 다케온을 약화시켜 둔 걸 겁니다. 치밀한 사전 작업이군요.”

“흐음, 동감이오. 틀림없이 그런 것이 있었겠지요. 마왕의 갑작스러운 침공과 갑작스러운 회군은 그런 것의 개입이 아니고는 설명되기 어려우니까.” 

“순서가 너무 잘 맞아서 소름 끼칠 정도입니다. 다케온이 버티지 못한다고 볼 경우, 그럼 다음 순서는 록소나인 겁니까?” 

하리야는 내키지 않는 표정 으로 탁자 주위에 앉아 있던 마지막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드디어 휘리 노이에스는 오 왕자의 검을 모두 모으는 것이군요.”

라미는 두 손을 모아올려 턱을 받쳤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며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 돼서는 안 되오.”

“동감입니다. 어쨌든 록소나가 맨 마지막이라는 건 마왕이 그만큼 까다롭기 때문에 마지막 순서로 돌려놓은 것이겠지요. 마왕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는 않을 겁니다.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장군님?”

“어쩌시다니?”

“제 생각으론 지금이 장군께서 팔라레온으로 들어가실 적기라고 생각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의 설명도 들어보고 싶군요.”

“해보지요. 휘리 노이에스는 노예 부대를 편성함으로써 투란에 주둔군을 남겨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둔군은 본대에 비한다면 그렇게 대병 력은 못 됩니다. 아마도 휘리는 폴라리스의 건국 소식이나 장군님의 소재 등은 아직 전달받지 못한 모양입니다. 우리는 그의 계획표에는 없는 존재였 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건 우리도 꽤 빠르다는 평을 들을 수 있는 기회 아닐까요?”

바스톨 장군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하리야의 말을 경청했다. 하리야는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투란 주둔군은 농성으로 맞서올 겁니다.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려 들겠지요. 하지만 본대가 돌아오기 전에 기습 작전으로 그들을 함락시킬 수 있다면 휘리 노이에스의 보급을 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를 팔라레온과 다케온 사이에 가둬버리곤 그 중간의 적당한 지점에서 말라죽게 할 수 있겠지요.”

“옳은 말이오. 더 이상의 작전은 생각할 수가 없군. 그렇다면 나는 출발 준비를 하겠소. 그것에 관해서인데……………”

“사트로니아군의 병참은 폴라리스가 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같이 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천 명은 현재로선 폴라리스 건국 작업에만 매달려야 합니다.”

“물론 알고 있소.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도 그것뿐이오, 선장. 아, 선장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요?”

하리야는 오래간만에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호칭입니다. 그리고, 동맹군의 이름은 주셔야겠습니다만.”

“물론이오. 선장. 나는 사트로니아 폴라리스 동맹군의 총사령관 자격으로 팔라레온에 들어가겠소. 당신네들이 아직 국기를 정하지 못했다는 것 이 안타깝군. 그 대신 나는 다른 모든 방법으로 그것을 알리겠소. 그러면 되겠지요?”

“만족합니다. 그럼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만.”

하리야는 라미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앉아 있던 라미는 하리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지적할 것이 없는 것 같군.”

“당신의 거취를 말해 달라는 뜻입니다. 라미. 당신은 우릴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목적은..”

“그것은 일단은 바스톨 장군과 그의 병사들에게 맡겨둘 수 있겠군. 나는 이곳에 남겠다.”

“사트로니아군과 함께 떠나시지 않을 겁니까? 내가 이해하기로 당신의 목적은 오 왕자의 땅을 통일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 신은 저곳으로 가서 휘리 노이에스를 ‘잡아먹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특별히 둔감한 사람이라 해도 하리야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음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라미는 둔감한 편은 아니었다. 라미는 하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싫은가, 하리야?”

“당신의 목적을 상기시켜 드렸을 뿐입니다.”

하리야와 라미가 일으키고 있는 불꽃을 보며 바스톨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라미는 다시 특유의 감정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적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하리야. 그리고 내가 너와 했던 약속은 그렇지 않을 텐데. 우리는 서로의 목적을 도울 것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나는 너희들의 건국을 돕고, 그 대신 내가 필요로 할 때 너희들을 사용할 권한을 원했지. 너는 그것에 동의했다.”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신 사트로니아군을 이용하셔도 되잖습니까? 그것이 훨씬 현실적일 텐데요. 당신의 목적도 빨리 성취할 수 있을 테고. 당신은 아직 우리를 도운 바가 없으니……”

“그건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기랄, 당신을 내세워 폴라리스가 식인 괴물을 숭배하는 나라로 알려지라고?”

바스톨 장군은 라미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미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 그대로였다.

“하리야.”

“예?”

“하리야.”

“뭐요? 말을 하시죠.”

“나는 키 드레이번이 아니다. 나는 복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나만의 방법이 있다.”

하리야는 라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뒤이어 계속된 라미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하리야는 경악 속에 굳어버렸다.

“나는 인슬레이버(enslaver). 유혹자이며 노예 제작자다. 둘은 같은 말이지. 나는 손쉽게 너를 나의 노예(slave)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것도 네가 일찌 기 겪어보지 못했던 커다란 환희를 주면서. 왜냐하면 나는 채찍을 든 노예상이 아니라 유혹을 통해 노예를 만드는 자니까. 그러므로 넌 그 상태에 완 벽하게 만족할 것이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게 될 것이다. 나로선 더 편한 방법이다.”

“당신은…… 내게 그럴 수 없어. 나는 주님의……….”

하리야의 헐떡거림에 대해 라미는 차가운 미소만을 보내었다.

“그럴 수 있어, 하리야. 별로 효과가 없으니 멍청한 체하지 말도록. 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키 드레이번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 당장은 그럴 생 각이 없지만, 나도 변덕이라는 악덕에서 자유롭진 못해.”

하리야는 모욕감과 패배감 속에서 몸을 떨었다. 라미는 그 모습을 보며 차분하게 결론지었다.

“너를 모욕하고픈 생각은 없다. 하리야.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불꽃 저편에서 아른거리는 것이 뭔지 확인하고 싶다 하더라도 네 눈동자 를 태워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바스톨 장군은 지금이 끼여들 기회라고 여기고는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큰소리를 내었다.

“두 분 모두 적당히들 하십시다. 전쟁에서도 무익한 싸움은 피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동지끼리 이렇게 다퉈서야 되겠습니까. 두 분 모두 서툰 모습 이 더 아름다운 젊은이는 아니잖소.”

라미는 빙긋 웃었다.

“그럼 내 거취는 다 말한 것 같군. 당장은 휘리 노이에스는 사트로니아군에게 맡기겠다. 사트로니아로서는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상관없겠지. 만약 사트로니아가 실패할 경우엔 난 내가 원래 고려해 두었던 수단인 폴라리스를 사용하겠다.”

하리야는 으르릉거렸다.

“폴라리스는 당신 것이 아니오.”

“계속 멍청한 체하는군, 하리야. 그건 효과가 없다니까. 약속이 있었음을 부정하진 않겠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뭐든 도울 것이다. 네가 나를 사용하 건 사용하지 않건 그건 네 자유지만, 난 필요하다면 그 약속에 따라 얼마든지 폴라리스를 사용할 것이다. 덜 억울하고 싶다면 나를 사용하라고 권하 고 싶군. 동료 선장들을 괴롭히는 건 그만두고 말이야.”

하리야는 아무 말 없이 라미를 노려보았다.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의 주의를 끌었다.

“하리야 선장. 그럼 병참에 대해 의논합시다. 지금 사트로니아 함대에 실려 있는 식량은……”

바스톨 장군에겐 놀라운 일이었지만 하리야와 라미는 더 이상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회의에 임했다. 라미는 다시 조용히 듣기만 하는 자세로 돌아 갔고 하리야는 언제 말다툼을 벌였냐는 듯이 빠른 속도로 논의를 전개시켰다. 바스톨 장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가 끝난 것은 밤 늦은 시간이었다.

폴라리스 임시 정부 청사(전 다림 총독부 건물이며, 그래서 여기저기 부서진 곳이 많았다)에서 걸어나온 바스톨 장군은 수행원들과 함께 부두를 향해 떠나갔 다. 사트로니아군은 아직 상륙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림 시내의 인구는 현재 노스윈드 해적만으로도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사트로니아군이 진지를 설영할 만한 땅이 없었다. 덕분에 사트로니아군은 상륙하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트로니아 – 폴라리스 동맹군이 정식으로 공표되게 된다면 그들도 곧 육지를 밟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곧장 전쟁터로 떠나야겠지만.

정부 청사 앞에서 바스톨 장군을 배웅하던 하리야는 몸을 돌려 라미를 흘끔 바라보았다.

“물수리호로 가실 거죠?”

“아니. 벨로린은 킬리 선장과 함께 카밀카르 대사관에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곳으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카밀카르 대사관 킬리 선장은 그곳에서 뭐하는데요?”

“넌 동료 선장들이 뭐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모양이군.” 

라미는 하리야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곤 미소 지었다.

“하긴, 어젠가는 오닉 스가 나에게 너의 소재를 묻더군. 확실히 네 소재를 물었던 건지는 자신할 수는 없군. 나는 그의 손짓을 알아보기가 참 어려웠다.”

하리야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약간 웃을 수 있었다. 라미는 웃자락을 추스르며 말했다.

“폴라 대사가 그를 초청했다. 킬리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어쨌든 폴라 대사는 다림 외곽의 대토지 소유주들을 불러다 놓고 파티를 개최한 모양이야. 킬리와 벨로린은 초청 가수인 셈이지.”

“아…… 조합 말이군요. 킬리 선장이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농산물 쪽에 이야기할 대표자가 없어서 농업조합이라도 하나 만들어 줘야겠다고 하더군요. 그겁니까?”

“아마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라미는 하리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리야는 그 눈길을 피할 듯이 고개를 움직였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라미는 조용히 말했다.

“안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일이 많을 텐데.”

“중요한 건 다 결정되었으니 오늘 밤엔 일이 더 없습니다. 저도 킬리와 벨로린의 노래를 듣고 싶군요. 파티에는 초청받지 않았지만.” 

라미는 피식 웃었다.

“현재 다림 시내에서 7인 평의회 의장을 쫓아낼 곳이 있을까. 하지만 난 걸어갈 생각인데. 그리 먼 곳도 아니니.”

“그럼 저도 걸어가죠.”

“그렇다면 좋아.”

하리야와 라미는 카밀카르 대사관을 향해 걸어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고요하지는 않았다. 노스윈드 해적의 습격 당시에 입었던 상처를 재건하기 위해 여기저기의 중요 장소에서 철야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건 작업에는 노스윈드 해적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도의 외관을 아름답게 꾸민다는 자긍심보다는 선장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수도의 이름이 정해진다면 해적들도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 테지만 아직 수도의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기에 이 도시는 여전히 다림이라 불리고 있었다.

횃불을 환히 밝혀놓고 일하던 해적들은 거리를 걸어가는 하리야 선장의 모습을 발견하곤 인사라도 건네기 위해 일손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 옆을 걷고 있던 라미의 모습을 보자 그들은 뭔가 묘한 미소를 지은 다음 그들을 못 본 체했다. 하리야는 그런 모습들에 짜증을 느꼈다.

“저 바보 녀석들은 당신을 무서워할 줄도 모르는군요.”

“무슨 말이지?”

“녀석들은 내가 당신과 교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녀석들에게 당신의 실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와 당신을 연결짓지는 않을 텐데.”

쉽게 말하자면, 내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당신 같은 괴물을 사귀겠냐는 뜻이다. 라미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였다.

“너도 무서워하기 때문 아닐까?”

“예?”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 저런 시선도 가능하지 않겠나.”

역시 쉽게 말하자면, 괴물에게 괴물이 어울리는 건 당연하니까 저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겠냐는 뜻이다. 하리야는 붉으락푸르락하며 입을 다 물었고 라미는 소리 없이 웃었다. 공사 현장에서 멀어져 다시 어둠과 고요 속으로 걸어들어갔을 때 하리야가 말했다.

“말해 두겠는데 말입니다.”

“응.”

“그거・・ 말입니다.”

“응.”

“만약에 말입니다. 에, 그러니까.”

라미는 재촉하지 않았다. 하리야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다음 다시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유혹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가 찾아온다면……말입니다.”

“찾아온다면?”

“그런 때가 찾아온다면………… 당신 말에 따라 유추해 본 결과 그 일을 당하고 나면 난 자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지도 못하게 될 것 같으니, 그럴 필 요가 생긴다면. 나를 유혹하는 대신 차라리 날 죽여주십시오.”

라미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함께 걷자고 한 것인가.

“왜 그걸 원하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가?”

“뭐가 말입니까?”

“침착하게 생각해 봐. 물론 네 말은 옳다. 내가 약간의 조처만 취한다면 넌 네가 아닌 나를 위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며 거기서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조금 전 자의라고 말했지만, 어떤 것이 자의냐고 묻지는 않겠다. 그때가 되면 넌 그것을 자의에 의한 행동 이라고 여길 것이다.”

“제기랄….”

“그런 상황이 왠지 낯익지 않나?”

“뭐요?”

“나 대신 키 드레이번이라는 이름을 넣어본다면?”

하리야는 심장이 멎을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그는 격하게 외쳤다.

“그건 다릅니다! 나는 자의에 따라 키 선장님을……”

하리야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들은 어느샌가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대로에서 밤의 깃털들이 그들의 어깨 위에 소복이 쌓이고 있었고 달빛은 드러냄보다는 감춤을 통해 그들의 얼굴을 다시 그리고 있었다. 라미의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하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했지. 그때가 되면 그것을 네 자의라고 여기게 될 거라고. 그렇다면 지금과 뭐가 다르겠는가. 모든 것을 키 드레이번 위주로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을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 똑같지 않은가? 그리고 난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만족감도 줄 수 있으니 넌 더더욱 그 둘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리야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라미는 하리야의 그림자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뗐다. 하지만 하리야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라미의 발걸음이 몇 번인가 더 떼어졌을 때였다.

하리야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저 앞에서 걸어가는 라미의 등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느닷없이 외쳤다.

“당신, 날 속였어!”

“하하하……!”

경쾌한 웃음 소리가 돌아왔다. 라미는 제자리에 선 채 어깨까지 떨며 웃고 있었고 하리야는 그 뒷모습을 보며 덩달아 웃고 말았다. 하리야는 오른손 으로 허리를 짚으며 왼손으론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이런. 까딱하면 속을 뻔했잖아. 아니, 속인 건 아니군요.”

“그래. 이미 말했었지.”

“그래요. 당신은 키 드레이번이 아니지. 그처럼 할 수는 없고, 당신 자신의 방법을 쓰는 거지요. 흐음, 아직 이해는 못하겠지만…

라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흰 옷자락이 부드럽게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자신을 향했을 때 하리야 헌처크 선장은 미 소를 지었다. 라미가 처음 보는 진짜 미소였다.

철탑의 인슬레이버는, 마치 개구쟁이 소년이 그러하듯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와! 생각은 천천히 해보고. 킬리와 벨로린이 기다리겠어.”

실제로 킬리는 하리야를 별로 기다리지 않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파티장 안으로 들어간 하리야가 발견한 것은 얼굴이 붉게 된 채 큰소리로 웃고 있 는 킬리의 모습이었다. 킬리는 긴 의자 하나를 차지한 채 벨로린과 둘이서만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에는 그 의자에 합석하려는 야망을 지나치게 드러내 고 있는 무수한 젊은 숙녀들이 보였다. 하지만 킬리는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 모든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듯했다. 하리야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상대 에게만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미소를 던져준 다음 최대한 빠르게 킬리에게 다가갔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하리야가 킬리에게 제대로 말이라도 걸 어볼 수 있게 된 것은 파티장에 들어선 지 20분이나 지난 뒤였다.

하리야는 킬리 옆에 앉아 있는 벨로린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벨로린은 아무 표정이 없이 얌전히 과일만 집어먹고 있었다. 하리야는 벨로린의 반대쪽 에 주저앉은 다음 거두절미한 채 말했다.

“어떻게 됐나?”

킬리는 갑자기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봐요, 하리야 선장님. 이걸 알아야 해요. 난 정말 노력했어. 하지만 다림의 지주들이란 것들은 모두 지독한 고집쟁이들이었어요. 난 조합을 만들 면 훨씬 좋은 값에 작물을 팔 수 있을 거라고 열심히 설명해 줬지요. 젠장. 얼마나 열심히 설명했던지 내가 내 말을 다 믿게 될 정도였어. 그랬는데 그 친구들이 뭐라는지 알아요? 농산물이야 잘 팔면 돈이 생기고 제 값에 못 팔면 자기가 먹으면 된다는 거야. 어이구!”

“그래서?”

“별수 있습니까?”

킬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리야는 그런 킬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잠시 후 그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하리야는 덩달아 웃 으며 말했다.

“성공했군?”

킬리는 들고 있던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한꺼번에 비우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점에 있어서 용서해 줘야 할 것이 있는데, 사실은 사트로니아군 출정 소식을 흘렸습니다.”

“흐음. 적당히 했으리라고 믿겠지만, 왜 그래야 했는지 설명 좀 해주겠나?”

“사트로니아 군량으로 얼마나 쓰일지는 주님과 바스톨 엔도 장군만이 알 테지만, 그게 엄청난 양이 될 것임은 당신들도 짐작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 들이 머리 터지게 경쟁해 봐야 혼자서는 사트로니아 군량 못 댄다. 게다가 서로 경쟁하면 값이 떨어질 거다. 구매자인 우리 입장에서야 값을 떨어뜨 려 주면 행복해하겠지만 그 행복은 당신들과 공유하기는 조금 어려운 종류의 행복 아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조합을 만들어서 군량을 대는 편이 좋 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농장마다 돌아다니며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식으로 구매할 필요가 없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 아니랴……………”

“마지막 말엔 나도 찬성이야. 성공을 축하하네.”

“아아. 그런데 하리야 선장. 파트너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게 하는 거 아니오?”

하리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킬리를 바라보다가 곧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킬리는 갑자기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고는 벽 가까이에 조용히 서 있 는 라미를 가리켜보였다.

“레이디 라미가 외로워 보이는데요.”

“………주사로 받아들이겠어. 그러는 자넨 파트너를 어디 둔 건가?”

“여기 계시잖습니까.”

킬리는 턱으로 벨로린을 가리켜보였다. 하리야는 두 손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자네와 벨로린을 데리러 온 거야. 쓸데없이 붙잡혀서 시간을 좀 잡아먹었지만, 이만 돌아가자구. 자넨 제법 취했어.”

“아아, 그런가요. 그럼 잠깐만.”

킬리는 앞쪽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유리잔 두 개를 주워들었다. 벌떡 일어난 킬리는 그 유리잔들을 가볍게 몇 번 부딪혔다. 카랑카랑!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려퍼지자 파티장 안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주의가 킬리에게로 집중되었다.

“신사, 숙녀, 그리고 신사인 척하는 난봉꾼과 숙녀인 척하는 말괄량이 여러분. 아쉽지만 전 이만 떠나야겠습니다. 방금 들어온 긴급 첩보에 의하면 폴라리스의 건국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톱상어와 결탁하여 제 배의 화장실에 구멍을 뚫는 폭거를 감행할 계획이라 합니다. 그래서 전 구멍을 막을 의 용 불가사리들을 모집하러 가야겠습니다.”

하리야는 약간 위험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파티장의 다른 손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적당히 취한 그들은 킬킬거리고 웃으며 킬리 에게 박수를 보내었다. 킬리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보이곤 의자에 놓아두었던 류트를 들어올렸다. 기계적으로 과일만 들어올리던 벨로린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건 여러분께 드리는 제 마지막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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