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4화
킬리는 왼팔을 하리야의 어깨에 두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림 시의 대로를 걸어갔다. 벨로린과 라미는 서로 손을 잡은 채 그들의 약간 앞쪽에 서 걸어가고 있었다. 다시 콧노래 몇 개를 연달아 부르던 킬리는 하리야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요?”
“말해 봐.”
“나 취했어요.”
“…………… 다른 사람에겐 알리지 않겠네.”
“그런 대로 마음에 드는 저녁, 거짓말, 다시 말하지. 근래 보기 드물 만큼 마음에 드는 저녁이었군요. 왠지 이건 내 성격에 맞는 것 같은데요. 좋은 배와 좋은 부하들은 모든 선장의 바람이고 또한 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음, 딸꾹. 하리야 선장. 고마워요. 이런 모험은 기대했던 적 없지만 맘에 드는데.”
“즐겁다니 나도 기쁘군. 난 자네나 돌탄 선장이 익숙지도 않은 일에 염증을 느끼면 어쩌나 고민했어.”
“돌탄은………… 그렇게 보일 거야. 암암. 하지만 그 친구도 속으론 재미있어하고 있어. 두캉가 선장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홀라당 걷어먹고 다시 배를 타고 도망쳐야 될 수도 있네.”
하리야는 조심스럽게 비관적 관측을 내보였다. 하지만 킬리는 그냥 웃었다.
“킬킬. 상관없소. 난 푸른 혼을 가졌어.”
킬리는 노래말로 대답했다. 하리야는 그 말에 미소 지으며 조금 전 들었던 킬리와 벨로린의 노래를 떠올렸다. 파티장의 모든 사람들이 넋이 빠졌을때 하리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주가 끝나고도 고요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고 그 고요 속에서 서서히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박수는 킬 리와 벨로린이 파티장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음악은 잘 몰라서 자네 솜씨가 좋다는 건 짐작만 하고 있었네. 하지만 아까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더군. 대단히 훌륭했어.”
“아, 벨로린의 솜씨였어요. 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벨로린이라.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은 도대체 누가 지은 건가?”
“그녀가 갑자기 말하더군요. 나는 벨로린이라고. 염소가 갑자기 입을 열어 나는 염소야, 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가.”
여름밤은 벌레들의 울음 소리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에 지친 다림 시의 이마를 쓰다듬었고 우주의 방랑자 같은 모습 으로 걸어가는 넷을 위해서도 불었다. 하리야는 앞쪽을 걸어가는 두 비인간을 바라보았다. 흰 뱀과 검은 꽃. 하리야는 갑자기 불가해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움을 떨쳐내듯이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머리를 부딪힌 킬리가 낮게 불평했지만 하리야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라미에게도 일을 줘야겠군.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녀들이 이렇게 관조하고 있는 것은 더 못 견딜 것 같군.
충차가 육중한 굉음을 울리며 다시 돌격했다. 쿠르르르 !충차의 앞머리가 성문에 부딪힌 순간 옹골차게 버티고 있던 피린데 성의 성문이 마침내 신음을 흘렸다. 대담하게도 방패 하나만을 의지하여 충차 위에 걸터앉아 있던 서 소팔라가 크게 함성을 질렀다.
“좋아, 한번 더!이제 끝이야!”
충차를 끌어당기는 노예병들의 어깨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어떤 노예는 방패까지 옆으로 던져버리고 두 손으로 충차에 매달려 끌어당겼다. 충 차가 다시 물러났다가 부딪힌 순간, 서 소팔라의 말대로 굵은 나무판자가 깨어지고 철판이 휘어지며 성문이 파괴되었다. 성벽 위에서 무성의하게 돌 과 끓는 기름, 그리고 희망을 쏟아붓던 다케온 병사들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들이 느낀 감정은 차라리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 쪽에 가까 웠다. 노예병들은 환호를 올렸고 소팔라는 경쾌한 동작으로 충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발 디딘 곳은 이미 피린데 성 안마당이었다. 소팔라는 롱 소 드를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외쳤다.
“돌격 —!강조해 두지만, 술창고와 미인은 돌격 대상에서 제외야!”
“야야! 대장님이 전쟁 안하겠단다. 돌아가자!”
“잘 논다, 군기 빵점이다. 에라이, 무식한 노예놈들아!”
서 소팔라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노예병들은 사납게 웃어대었다. 충차에 매달아둔 각자의 무기를 집어든 노예병들은 소팔라의 뒤 를 따라 피린데 성 안쪽을 향해 돌격했다. 성문 바깥쪽 먼 곳에서 성벽 위를 향한 사격을 지휘하고 있던 서 소사라는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궁병대의 마지막 사격이 실시되었고 그 뒤를 이어 다벨 중장보병들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노예병들을 이끌고 안마당을 가로지른 서 소팔라는 성벽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계단에선 다케온 병사들이 뛰어내려왔다. 방패를 위로 밀어올리며 그 아래로 검을 휘둘러 첫 번째 병사의 허벅지를 찢어놓은 소팔라는 숨돌릴 새도 없이 다음 병사의 턱을 방패 끝으로 애무해 줬다. 뭉개진 턱을 붙잡 고 비명을 지르는 두 번째 병사 뒤쪽으로 세 번째 병사가 뒤로 주춤 물러났을 때 이미 소팔라와 노예병들은 갤러리에 올라섰다. 약간 대담한 건지 약 간 자포자기한 쪽인지 알 수 없지만, 다시 흉맹하게 생긴 도끼 하나가 소팔라의 어깨를 노리고 내리떨어졌다. 하지만 소팔라는 도끼 아래로 파고들어 어깨로 충돌을 감행하여 상대를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 난폭한 난입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는 다케온 병사들을 향해 소팔라는 크게 외쳤 다.
“삶의 가장 신비로운 비밀을 가르쳐주마. 산다는 건, 손에 든 거 다 집어던지고 머리를 감싸안은 채 엉덩이를 하늘로 향하며 엎어지는 거다!”
서 소팔라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대다수의 다케온 병사들은 그 말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 소팔라는 사납게 웃은 다음 그를 따라온 노예병들에게 성벽 수비대의 처리를 맡기고는 갤러리를 따라 달렸다. 갤러리 저쪽은 피린데 성의 본관에 연결되어 있었다.
성벽 아래쪽에선 서 소사라가 다벨 중장보병대를 이끌고 안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갤러리를 달려가던 소팔라는 아래쪽을 흘끔 보고는 외쳤다.
“열셋이야!”
소사라는 성벽 위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동생에게 거짓말하면 벼락 맞소, 형님.”
그리고 서 소사라는 찔끔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형 을 외면했다. 롱 소드를 뽑아든 소사라는 중장보병대들을 지휘하며, 역시 림파이어 가문의 기사답게 가장 앞쪽을 달렸다.
소사라는 검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며 앞쪽으로 달려드는 다케온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마치 검 끝은 이렇게 사용하며 검날은 이렇게 사용하며 검신 은 이렇게 쓰는 법이라는 것을 친절히 보여주는 듯했다. 찌르고 베고 받아넘기는 모든 동작이 유혈의 폭풍을 이루었고 그의 앞을 가로막던 다케온 병 사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소사라는 검을 휘둘러 피를 뿌려낸 다음 간단하게 말했다.
“누워.”
다케온 병사들은 무기를 던지고 땅에 엎드렸다. 소사라는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곧장 본관의 정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네그리파 다케온 백작이 홀 가운데 꼿꼿이 서 있었다.
궁이 아닌 전투성인 피린데로 옮겨왔지만 백작은 갑주 대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보석과 황금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만든, 그야말로 다케온의 백작 정도나 입을 법한 화려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소사라가 멈춰 선 것은 그 화려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소사라는 네그리파 백작의 손에 들려 있는 횃불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백작의 등뒤에는 넓은 홀이 비좁게 보일 정도로 쌓여 있는 상자가 보였 다. 소사라의 등뒤를 따라 들어왔던 중장보병들도 그 상자를 알아보곤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 백작이 입을 열었다.
“네가 휘리 노이에스인가?”
백작의 어조는 침착했다. 소사라는 일단 투구를 벗은 다음 백작을 향해 경례했다.
“아닙니다. 백작님. 본관은 다벨 8군단 2중대장 소사라 림파이어라 합니다. 그런데, 그 뒤의 그건 뭡니까?”
“뭘로 보이나, 서 소사라?”
“제가 보기엔, 백작님. 겉보기엔 화약 상자처럼 보이는군요. 안에 화약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들어 있지.”
중장보병들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백작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 애써 참고 있었지만 그런 심정은 소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충 봐도 쉰 상자 는 되는 것 같다. 저게 폭발할 경우 피린데 성 전체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다벨 8군단이 가진 화약을 다 끌어모아도 저 압도적인 양에 비한다면 폭죽 밖에 안 될 것이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백작님?”
“휘리 노이에스를 데려와라.”
“사령관님을 말씀이십니까, 백작님?”
“그래. 놈을 데려와.”
소사라는 다시 한번 네그리파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조금 후 그가 깔끔하게 돌아버렸다고 판단했다. 속으로 쓸모없는 짓이라 여기면서도 소사 라는 차분한 어조로 그를 설득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작님. 하지만 그 분을 모셔오기 전에, 그 횃불을 제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허튼소리 하지 마!”
“그 횃불을 제게 주시지 않으면 사령관님을 모셔오기 어렵습니다. 백작님.”
소사라는 꼬박꼬박 백작님이라는 말을 붙여 네그리파의 주의가 휘리가 아닌 자신에게 쏠리도록 했다. 그것은 성공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다음 계획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네그리파 백작은 소사라를 노려보며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 놈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여기에 불을 붙이겠다. 이곳까지 왔다는 건 너희놈들 태반이 성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겠지? 어떤가?”
소사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병사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의 눈이 이층 난간을 향했다.
성벽 갤러리를 통해 들어온 소팔라가 그곳에 서 있었다. 소팔라는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인 다음 조용히 백작의 뒤편을 향했다. 소사라는 일단은 병사에게 말했다.
“가서 사령관님께 백작님의 말씀을 전해 드려라.”
명령을 받은 병사는 죽었다 살아난 얼굴을 하고선 벼락처럼 뛰쳐나갔다.
그 동안 소팔라는 이층 난간을 주욱 돌아 백작 뒤편까지 와 섰다. 소사라는 그 모습을 살짝 훔쳐보았지만 별로 희망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의 형에겐 활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활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백작을 저격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백작은 화약 더미 바로 앞에 서 있었고, 만약 그가 쓰러지 면 횃불은 곧장 화약에 옮겨붙을 것이다. 이층 난간에서 백작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팔라도 곤혹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갑 자기 주먹을 움켜쥐더니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물론 어디 가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던 소사라는 침묵한 채 네그리파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어깨의 떨림은 뚜 렷이 보일 정도였다. 소사라는 그에게 말을 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엔 질문이 가장 좋다.
“백작님. 사령관님께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하는 것? 그런 것은 없다. 녀석은 이곳까지 오기만 하면 돼. 그러면 녀석이 할 일은 끝나.”
서 소사라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 다음은 자폭이라는 건가?
“왜 이러십니까. 백작님.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승패가 이미 갈린 마당에 이것은 신사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도 없잖습니 까.”
“이 날강도 같은 놈! 감히 그 입으로 신사도를 말하는 거냐? 내가 비록 똑똑하지 못해서 이런 지경까지 와버렸다만 아직까지 모를 줄 아느냐? 네놈 들이 빌레스 국왕을 꼬드겼다는 것!”
소사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차분히 네그리파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적은 일단 시간을 버는 것이고 따라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따 위에는 관심없었다. 그의 바람대로 네그리파 백작은 점점 언성을 높여가며 계속 말했다.
“네놈들이 이 땅에 쳐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불침 협정을 깨뜨린 그 처사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내가 쓰러지고 나면 다음 차례가 누구인가를 생 각해 보게 되었을 때, 난 그 소름 끼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이제이였단 말이지? 그렇게 무섭게 싸워댄 나와 빌레스 국왕은 모두 휘리 녀석의 장 기판 위에서 놀아난 장기말들이었단 말이지? 악마 같은 놈, 용서할 수 없어!”
네그리파 백작은 갑자기 뒤쪽으로 횃불을 휘둘렀고 소사라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백작은 횃불로 화약 상자를 가리켰을 뿐이다.
“이건 내가 어제의 적이었던 빌레스 국왕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다. 이 성이 쉽게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 우쭐거리고 있었겠지? 당연하지. 난 이 미 너희놈들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만 남겨놓고 나머지 군대는 다 해산시켰으니까!”
“우리들과 함께 자폭하기 위해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화약을 꽤 많이 준비하셨군요. 하긴, 어린애들도 다이아몬드로 공기놀이를 한다는 땅의 주인이시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셨겠지만. 하지만 무의 미합니다. 스스로를 돌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백작님.”
“웃기지 마라! 나를 현혹할 생각이냐?”
하지만 사실 소사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불 같은 성격의 백작이라면 진짜로 키 드레이번에게 그런 제안을 했을 법도 하다고 생각 했다. 다케온 지방 ‘전체’의 다이아몬드 채굴권은 좀 과장이겠지만.
“뭐라고 말해도 내 결심은 확고하다. 난 이렇게 쓰러지더라도 너희 다벨놈들이 더 이상 세상에 해를 끼치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정신없이 떠들던 백작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소사라는 이상하다는 듯이 백작을 바라보았고 백작은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때 소사라도 뭐가 이상한지를 깨달았다. 네그리파 백작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등 전쟁터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전투가 끝났다 하더라도 이렇게 조용해지지는 않을 것 이다. 소사라와 네그리파 백작이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교환하고 있을 때 본관의 문이 열리며 다벨 중장보병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소사라는 놀랐다.
병사의 모습은 희한했다. 어디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까지 떨군 채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왔다. 걸음까 지 약간 비틀거리며 걸어온 병사는 먼저 소사라에게 경례했다. 그 경례하는 태도도 절도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힘없는 모습이었다.
“사령관의 전언입니다. 소사라 중대장님.”
목소리도 이상했다. 소사라는 그를 꾸짖기에 앞서 의혹에 찬 어투로 질문했다.
“뭔가?”
“다벨군은 모두 성 바깥 안전 지대까지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네그리파 백작이 혹 마음을 바꾼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전사(戰死)는 군인의 명예임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사라는 입을 쩍 벌렸고 그건 네그리파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사라와 함께 있던 다벨병들도 기막힌 얼굴이 되거나 혹은 비명을 질렀다.
“우릴…… 팽개쳤어!”
다벨 병사들 중 어떤 이들은 그대로 본관 밖으로 달아나기도 했지만 네그리파 백작은 경악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전령이 백작을 향해 몸 을 돌렸다.
“그리고, 네그리파 백작님.”
“…왜?”
“백작님께는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서신이라고?”
병사는 풀죽은 모습으로 – 소사라는 그제서야 병사가 왜 그런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병사는 흔히들 말하는 ‘돌아오지 않는 전령’이었던 것이 다 – 품속을 뒤적이더니 곧 하얀 종이를 꺼내었다. 병사는 터덜터덜 백작에게 걸어가 그것을 내밀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서신을 내려다보던 백작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크핫하하!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이렇게까지 지독한 놈일 줄이야. 부하들까지 배신하는 건가? 서 소사라, 안됐군. 휘리 녀석에게 있어 자네라는 존 재는 나나 빌레스 국왕과 똑같았어!”
소사라는 뭐라 대답할 생각도 못한 채 다만 창백한 얼굴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
“그 개자식이 나에게 뭐라고 적어보냈는지 읽어주지. 기다려, 서 소사라!”
흥분한 백작은 거칠게 손을 내밀었고 그래서 전령은 서신을 떨어뜨렸다. 전령은 내키지 않는 듯이 땅에 떨어진 서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령은 서신을 주워드는 대신 갑자기 앞으로 돌진했다.
전혀 뜻밖의 기습이었고 그래서 백작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전령은 백작의 복부에 단검을 꽂아넣으며 동시에 다른 손으론 백작의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백작은 반항하려 했지만, 그러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간단히 횃불을 뺏긴 백작은 배를 움켜쥐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전령은 횃불을 높이 들어올리며 다른 손으론 투구를 벗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사라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령관님!”
다벨 병사들 중 일부는 격심한 긴장 때문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지만 강단이 있는 병사들은 소사라와 마찬가지로 격정에 찬 환호를 내질렀다. 전령이 투구를 벗어들자 그 아래에서는 휘리 노이에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휘리 노이에스는 투구를 땅에 떨어뜨린 다음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네그리파 백작 역시 다벨 병사들의 환호를 들었다. 그는 배에 꽂힌 단검을 움켜쥔 채 휘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피거품과 함께 말소리가 힘 겹게 흘러나왔다.
“네가…………… 휘리 노이에스냐?”
휘리는 싱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네그리파 백작. 위험한 장난을 치셨더군요.”
“병사………… 들을 진짜 물러나게 했…………나?”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철수시키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대로 점화시켰다 면 우린 모두 가루가 되었을 겁니다.”
다벨 병사들은 밖을 내다보곤 확인의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바깥에서도 환성이 들려왔다. 네그리파 백작은 다시 뭐라 말할 듯이 입을 벌렸다. 노력 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지만, 그러나 네그리파 백작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그저 헐떡거리며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휘리를 올려다보 았다. 휘리는 약간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할말은 많지만 일단은 치료부터 끝내고 말합시다. 백작.”
백작은 간신히 말했다.
“그냥………. 죽여!”
휘리는 슬픈 얼굴 그대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교훈이 컸을 텐데도 아직 깨닫지 못하셨군, 백작. 이제는 똑바로 알아두시오.”
“뭐・・・・・・야?”
“내 허락이 없으면 당신은 죽을 수도 없소.”
네그리파 백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굉장한 자부심의 표현에는 소사라마저도 감탄해 버렸고 다벨 병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사령관의 모습이 마치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바로 그 순간, 그들 모두의 머리 위로부터 괴성이 터져나왔다.
“받아라-앗!”
휘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뭔가 불투명한 것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전망 좋은 자리에 있었기에 소사라는 이층 난간으로부터 쏟아진 폭포수 같은 물줄기를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물줄기가 끝났을 때 다벨 사령관 휘리 노이에스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서 있었다.
소사라와 다벨 병사, 그리고 배에 단검을 꽂은 채 땅에 쓰러져 있던 네그리파 백작마저도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완전히 물에 젖어 와 들와들 떨고 있던 휘리는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닦아낸 다음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서 소팔라가 커다란 물동이를 든 채 경악하고 있었다.
“사, 사령관님?!”
휘리는 신음을 흘린 다음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홰를 바라보았다. 물론, 불은 꺼져 있었다. 휘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이디어군, 서 소팔라….. 푸우! 그래. 정말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물을 준비할 수 있었나? 이, 이층에….목욕탕이라도 있었나?”
사령관에게 물벼락을 씌워버린 서 소팔라는 잔뜩 당황한 채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오. 사령관님. 그러니까, 물을 모으는 게 좀 힘들긴 했습니다. 예, 한번에 불을 끄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물을 많이 준비해야 하잖습니까? 그렇죠. 방마다 돌아다니며 세면실을 다 조사했고 또한 화병이란 화병은 다 뒤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층뿐만 아니라 삼층까지 돌아다니며…..”
“아, 그래. 알았네. 수고했어, 서 소팔라.”
소팔라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허둥대다가 그냥 경례를 붙였다. 휘리는 다시 한번 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낸 다음 풀죽은 어조로 말했 다.
“제법 멋있어 보일 수도 있었는데.”
“지금도 대단히 멋있으십니다.”
소사라는 절대 비아냥이 아닌 진심으로 대답했다. 휘리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준 다음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어갔다.
“나 일단 옷 좀 갈아입어야겠네. 이 옷을 빌려준 병사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 뒷수습하고………… 그리고 백작을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휘리는 다시 미소를 지은 다음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갔다. 소사라는 동정심 가득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휘리가 문 밖으로 나가자 이층 에서 그의 형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사라.”
“왜, 형?”
“물 모으긴 정말 힘들었어.”
“아, 그래. 엉뚱한 곳에 쏟아붓긴 했지만.”
“진짜 힘들었다고.”
“그래, 알았어. 기발한 생각이었어.”
“그렇지? 기발했지?”
“그래.”
“그러니까, 내가 물을 모으기 위해 침실의 요강까지 이용해야 했다는 건 비밀로 해줘.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서 내 것도 좀 섞어야 했지…………”
소사라는 숨이 막힐 때까지 웃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