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6화
“에름 후작님.”
테라스에 서서 밤바다를 보고 있던 에름 후작은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는 율리아나 공주가 서 있었다. 에름 후작은 방 안쪽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방 안쪽에서는 바탈리언 남작과 오스발, 그리고 이루미나 후작 부인이 즐거운 표정을 지은 채 담소하고 있었다. 에름 후작은 처제를 향해 웃음 지었다. “왜 나오셨습니까, 공주님? 바닷바람이 찹니다.”
율리아나는 그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몇 번이나 방황한 다음에야 율리아나는 입을 열었다.
“저, 저 말이에요. 후작님. 그러니까……”
“예?”
“전, 에, 그러니까 전 조카를 볼 수 없지요?”
에름 후작은 그제서야 율리아나 공주가 왜 당황해하는 얼굴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공주도 언니의 남편에게 하는 말은 조심스럽 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그 당혹스러운 내용이라니. 에름 후작은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점잖게 외면했다.
“그렇습니다.”
“고마워요. 후작님.”
“무슨 말씀을. 고마워하실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고마워요. 어, 좀 옛날 일이지만, 언니가 시집간 다음에 1년도 지나지 않아 쫓겨올 거라고 말한 작자가 있었어요.”
“그랬나요?”
“예. 그리고 난 그 사람이 다른 곳을 볼 때 실수인 척하며 그 사람의 발등에다 화병을 떨어뜨렸어요. 발가락이 부러졌죠. 며칠 전에 꽃꽂이에 관심이 생긴 척하며 미리 갖다둔 청동제 화병이었거든요.”
에름 후작은 킥킥 웃고 말았다.
“그 가공할 계획 범죄에 대한 고해는 하셨습니까?”
“했어요. 신부님은 친절하게 제 죄를 사해 주셨지만, 다음 번엔 벽에 걸린 장식용 모닝스타를 이용해 볼 계획이라고 고백했더니 약간 난감해하시긴 하더군요.”
“설마, 하셨습니까?”
“아니오. 저도 의심이 생겼거든요.”
에름 후작은 부드러운 눈매를 약간 꿈틀거리며 ‘의심이라고요?”라고 묻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율리아나는 자신의 입술을 조금 잡아당기며 말했다. “전 후작님이 언니를 사랑한다는 것은 믿었어요. 예. 분명히 진실로 사랑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통이 더 커진다면, 그래도 후작님 이 계속 언니를 사랑하실 건지는………… 솔직히 미덥지 못했어요. 감정이라는 건 바뀔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 해도 후작님을 비난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일일 거예요.”
“……”
“그리고 후작님의 백성들을 상대로 언니를 계속 변호하시는 건 너무 힘드셨겠죠. 우리 언니는 후작님의 가문을 끝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반대가 심 했죠?”
“영특하신 공주님께서 짐작하는 정도입니다.”
“예. 하지만 3년 동안 언니가 보낸 서신에서는 그런 의심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게 더 불안하더라고요. 차라리 푸념 하고 슬퍼하는 서신을 보내왔다면 저도 덩달아 화내고 슬퍼하긴 하겠지만 불안하지는 않았겠지요. 이곳에 오면서 전 진짜진짜 불안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저는 후작님이 언니를 보는 시선을 봤어요. 그리고 언니의 얼굴이 폰스파 궁에서 보던 때와 똑같이 밝은 것도 봤고요. 언니를 여전히 사 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고맙고 기뻤어요. 그 말을 꼭 하고 싶어서 나왔어요.”
“공주님. 전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루미나가 제게 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그러니 제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그러신가요?”
“예?”
“저, 그러니까, 에…………… 봄, 그러니까 봄은 참 묘하죠…….”
에름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율리아나의 얼굴은 다시 붉어졌다.
“공주님은 짓궂군요. 저도 이상한 데가 없는 보통 남자고 그래서 때론 봄을 맞아 서로 머리를 부닥치는 숫사슴 흉내를 내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하 는 것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흐음, 짓궂은 것이 아니라 처녀의 호기심인가요?”
“흐으. 말씀하신 대로 저도 이상한 데가 없는 보통 여자라서요.”
에름은 웃으며 부인의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율리아나 공주가 의자에 앉자 에름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은월이 부서지는 밤바다를 보며 잠 시 할 말을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막상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말은 오래도록 생각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저는 이루미나를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하셔서 몸의 괴로움은 상관없을 정도로?”
또다시 나오는 대로 말해 버리고 만 율리아나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지만 에름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전 성자가 아닙니다, 공주님. 상관없다니오. 하지만 전 이것을 말하고 싶군요. 사랑과 고통이 꼭 길항작용을 하는 걸까요?”
“예?”
“사랑이 크면 다른 사소한 것은 견딜 수 있다. 혹은 사랑 때문에 눈이 먼다. 정말 그럴까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제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전 이루미나를 사랑합니다만 그것 때문에 그녀를 한번 안을 수도 없는 고통을 잊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커지더군요. 하지만 그녀를 안을 수 없다 는 고통 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그래서 전 그 두 가지 감정을 똑같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기로. 둘 다 정직한 저의 감정이고 그래서 둘 다 저에겐 소중한 겁니다. 전 영원히 이루미나를 사랑할 것이고, 그녀 때문에 겪는 고통 때문에 그 사랑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모르겠군요.”
“저도 더 이상은 설명할 수가 없군요. 제 경험에서 느끼는 것들이라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에름은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며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소스라치는 기분을 느꼈다.
에름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다시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율리아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말 했다.
“공주님?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예? 아, 아니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에름은 그런가 보다 하곤 다시 밤바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율리아나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에름 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부드럽고 선량한 형부. 율리아나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본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에름 후작의 모습 위로 떠오른 키 드레이번의 모습은 너무 또렷했다.
키는 손수건으로 복수의 검신을 닦고 있었다. 매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던 세실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보라고, 키 드레이번.”
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실은 대답할 때까지 목소리를 조금씩 높일 것인가 아니면 당장 고함을 지를 것인가를 놓고 짧게 갈등했다. 그리고 후자를 선택했다.
“키 드레이번! 피는 그만 닦아! 다 닦였으니까. 내 쪽을 돌아봐!”
키는, 그러나 다시 한번 복수의 검신을 닦은 다음에야 그것을 칼집에 꽂고는 세실을 돌아보았다. 세실은 불끈 쥔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왜 죽인 거야!”
세실은 라이온이 치우고 있는 시체를 가리켜보였다. 천 찢어지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왔다. 라이온은 그들의 옷을 찢어 끈을 만든 다음 그 몸에 커다란 돌을 묶고 있었다. 키는 복수의 칼집에 다시 천을 휘감으며 대답했다.
“장님인가? 그들은 나를 공격했다. 그래서 죽였다. 놈들 자신도 납득할 이유라고 생각되는데.”
“마지막 녀석 말이야, 마지막 녀석! 그 녀석은 칼을 버렸잖아. 살려달라고 그랬잖아!”
“살기를 바랐다면 처음부터 공격하지 말았어야지. 앞뒤가 안 맞는다.”
“자비심이라는 것이 있잖아!”
“살해욕이라는 것도 있다.”
세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기만 했다. 복수를 다시 감싼 키는 그것을 어깨에 멘 다음 세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자비심이 더 중요한 거야.”
“왜.”
“뭐?”
“왜 그게 더 중요한 거냐고 묻고 있다.”
“왜가 어디 있어? 그냥 더 중요한 거야!”
“머저리 같은 화법 사용하지 마. 그럼 난 그냥 덜 중요하다고 말해 줄 테니까.”
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그의 무미건조한 태도 때문에 세실은 키가 그저 라이온이 시체를 처리할 동안만 대답해 줄 작정이라는 것을 알 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좋아, 제기랄. 그게 사람이 더 사람다워지는 감정이기 때문이야. 자비심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을…”
“그 웃기는 말은 잠시 접어두고, 왜?”
“뭐가 또 왜야?”
“왜 사람다워져야 되나.”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또 머저리 화법이군. 그렇다면 난 사람이 꼭 사람다울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겠다. 이유는, 네가 이번엔 생략했던 ‘그냥’이고.”
“그냥이 아냐! 사람은, 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사람다운……”
키의 비웃는 시선을 보며 세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사용했던 ‘당연히’라는 말은 ‘그냥’과 똑같은 말이다. 키는 얼마든지 물어올 것이다. 왜 그 게 ‘당연’한가.
“빌어먹을, 그러고 보니 넌 지금 수도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쓰고 있군. 그렇게 왜, 왜, 왜를 계속한 다음 제일 원리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 그 건 나도 알아.”
“그런가. 나는 몰랐는데.”
“살인은 죄야!”
세실의 말에 키는 아예 경멸감까지 드러내며 말했다.
“몰랐나 보군. 난 해적이야.”
“무법자라고? 그런 말이 아냐. 법 따위가 어떻게 되었건 살인은 죄야. 그렇잖아.”
세실은 이런 한심한 말을 하면서 거의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키는 넌더리를 내었다.
“그렇다치고,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나.”
세실은 말을 잊은 채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의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뒤쪽에서 풍덩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라트랑 국경 감시대원의 시체를 바다에 던진 라이온은 손을 털며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던 키는 말에 올랐다. 키는 말 위에서 세실을 내려 다보며 말했다.
“말에 타라.”
“키 드레이번 설명해 줘.”
“뭘 설명하라는 건가.”
“아무거나 설명해 줘! 그, 그래. 그냥 자기를 좀 합리화시켜 봐. 제발!”
“자기 합리화?”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기 합리화하는 놈들이 싫었어. 하지만 그것조차 내팽개친 이 무시무시한 녀석에 비한다면 그 녀석들은 차라리 사랑스 러울 정도군. 키는 세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문득 그리움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세실은 눈을 크게 뜨고 키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가 보았던 것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키는 어느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세실을 보고 있었다.
“네가 해.”
“뭐?”
“네가 필요한 거라면 네가 해. 네 마음대로 날 합리화한 다음 날 이해했다고 생각해 버리면 될 거 아닌가. 네 경우엔 경험도 훨씬 많았을 테니 더 쉬 울 텐데.”
세실은 입을 쩍 벌린 채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발끈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답게 세실에게 두 번 말하지는 않았 다. 그는 말을 돌려 이미 해안 절벽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달리려던 라이온이 세실에게 외쳤다.
“세실. 어서 말에 타요. 빨리 갑시다.”
세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허둥지둥 말에 올랐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오스발.”
“예, 공주님.”
“누구 사랑해 본 적이 있어요?”
“공주님. 제가 있었던 곳에는 여자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관두죠. 내 얼굴 빨개졌죠? 창피해라. 다음에 언제 나 놀려먹고 싶어지면 내가 방금 했던 말 은근히 암시하면 되겠군요. 한두 번 정도는 겸 연쩍게 웃어줄 테지만 계속 그러면 나 화낼 거예요. 나 시끄럽죠? 아마도 지금쯤은 알고 있을 텐데요. 나 당황하면 말 많아지는 거 잠깐. 그건 ‘평소 때도 말이 참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표정인가요?”
공주의 말 중간에 몇 번인가 대답을 해보려던 오스발은 그냥 포기하고는 멀거니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고개를 떨구고는 잠시 산책로만을 내려다보았다. 오스발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곤하시면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피곤한 거 아니에요. 잠깐 얼굴 좀 진정시키려고 이러고 있어요. 그러니까 좀 기다려 봐요.”
“이해하겠습니다만 그렇게 아래만 보시며 걸으면 위험합니다.”
“그렇겠군요.”
율리아나는 해죽 웃었다. 그녀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고 곧 찾던 것을 발견했다. 율리아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을 들어올려 산책로 옆에 있는 퍼걸러를 가리켜보였고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오스발은 손수건을 꺼내어 돌의자의 먼지를 털었다. 의자에 앉은 율리 아나는 퍼걸러 중앙의 돌탁자에 팔을 고였다.
“당신도 앉아요.”
오스발은 차분히 돌탁자를 사이에 두고 율리아나 공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율리아나는 만족했다는 듯이 웃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리를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놔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공주는 후자일 거라 생각했다) 퍼걸러의 돌기둥 아랫부분은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송림 저편으로부터 기분좋은 목향이 풍겨왔고 그 너머론 바다의 철썩거림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오스발은 승마복 차림을 하고 있는 율리아나 공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옷차림에 맞추어 말채찍까지 들었지만 실은 말은 있지도 않다. 공주는 귀찮아했지만, 그녀의 의상을 담당한 후 작 부인의 시녀장은 그런 시녀장만이 할 수 있는 권위적인 태도로 어린 공주를 주눅들게 한 다음 그것을 들고 가게끔 만들었다. 어쨌든 그 시녀장에 게 감각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라트랑 식의 흰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손엔 말채찍을 든 공주의 모습은 소녀라고도 부르기 어 렵고 처녀라고도 확언하기 힘든, 퍽 묘한 뉘앙스가 묻어났다. 하지만 그 시녀장은 거꾸로 든 채찍 손잡이에 헌팅캡을 씌워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공 주의 지금 모습을 봤다면 신음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접시돌리기를 하는 광대처럼 그렇게 모자를 빙글빙글 돌리던 율리아나 공주는 모자와 채찍을 돌탁자 위에 내려놓곤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사랑을 해본 적은 없어도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쯤은 해봤겠죠?”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나 어제 저녁에 아주 이상한 사랑을 하나 봤어요. 두 남녀는 서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면 그만이니 원래는 참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지 만, 그 두 사람이 저와 관련된 사람이라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그 두 남녀가 누구입니까?”
“룸 언니와 에름 후작님.”
“예? 좀 둔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분들은 보기 좋은 부부처럼 보였습니다만.”
“그렇죠그렇죠그렇죠? 바로 그게 이상한 거라고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뭐 비밀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거니까 말해 주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히 알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룸 언니가 바다의 공주라고 불 리는 건 카밀카르의 공주이기 때문도 하지만, 그보다는 언니가 머메이드이기 때문이에요.”
오스발은 당혹한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노잡이였던 오스발은 머메이드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고, 그 중에선 말하는 당사자 조차도 믿기 힘들어하는 이야기도 많았다. 오스발의 표정을 보던 율리아나 공주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메이드는 그렇게 괴물 같은 건 아니에요. 적어도 카밀카르 왕가에서는. 왜냐하면 카밀카르 왕가에선 가끔 그런 사람이 태어나거든요. 늙은 시녀 들은 왕가의 어린아이들에게 왕가의 어떤 조상님이 해변에 올라온 인어와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지만, 믿기가 좀 어려워요.”
“왜지요?”
“바로 그것이 문제의 핵심인데, 나 창피한 말 할 거니까 잠시 눈 감고 있어요. 예. 좋아요. 머메이드는 물 속에서만, 그러니까 머메이드의 형태로 바 뀌었을 때에만 사랑을 나눌 수가 있거든요. 이제 눈떠도 돼요.”
오스발은 눈을 떴다. 그러곤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에름 후작님은……”
율리아나는 뭐라 대답할지 생각해 두지 않았고, 그래서 약간 이상하게 대답했다.
“물론 물 속에선 숨을 쉬실 수가 없죠.”
“……”
당황해하던 율리아나는 이야기의 방향을 약간 바꿨다.
“언니 꼬리는 참 이뻐요. 어릴 때 룸 언니는 내 찬양의 대상이었고 질투의 대상이었고 조그만 꼬마에게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첫 번째 교사였죠. 같이 수영하러 갈 때마다………… 아니, 돌아오고 나서 이틀쯤 뒤엔 난 꼭 뭔가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화를 내게 되죠. 그러다가 와 ᅳ 악 울음 을 터뜨리며 속마음을 털어놓죠. 나에겐 그런 멋진 꼬리가 주어지지 않은 건 불공평하다는 거지요. 나 정말 못된 아이였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사리분별을 못하시던 때였잖습니까.”
“그래도 룸 언니에겐 내가 정말 밉게 느껴졌을 거예요. 룸 언니 역시 어릴 때였으니까요. 자기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 운명을 가지고 싶다고 떼를 쓰는 동생………… 어땠겠어요? 하지만 룸 언니는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요. 내가 언니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던가, 그리고 언니가 얼마나 놀라운 참 을성으로 나를 대해 준 것인가를 알게 된 것은 철이 들고 나서였지요. 정말 창피해서 눈, 코, 입 다 떼버리고 싶더라고요.”
오스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표현이 좀 과격하십니다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왜 에름 후작님과 룸 언니의 모습이 이상한 것인가를 알겠죠?”
“예. 두 분은 정상적으로 부부 생활을 할 수가 없으시군요.”
“그래요.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줄 수가 없다는 문제도 문제지만………… 그것 말고 외부적인 문제도 있었겠죠. 라트랑인들이 우 리 언니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두 사람 사이에서는 후작가의 다음 세대가 태어날 수 없어요.”
“그렇군요.”
“그러니 에름 후작님에게는 안팎으로 문제가 있었을 거예요. 자기 자신의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불평으로부터 아내를 지켜야 되는 문제. 그런 데, 당신도 알아보았듯이 두 사람은 편안한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고요. 필요한 건 대충 다 말해 준 것 같으니, 오스발. 적당한 가정 하나 말해 봐 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오스발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돌기둥의 이끼를 바라보았다.
“좀 동화적이기까지 한 가정입니다만, 에름 후작님이 진짜 신사였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런 무수한 곤란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들을 홀로 이겨내 며 후작 부인에겐 상처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셨다고…………… 그래서 후작 부인의 얼굴에 슬픔이 떠오르지 않도록 보호했다고 해야 하나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제 후작님한테 고맙다고 말했고요.”
“후작님께서 뭐라 하시던가요.”
“자신은 그 고통 이겨내려 한 적 없으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시더군요.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후작님은 이렇게 말한 것 같아요. 사랑 은 사랑이고 고통은 고통이다. 서로 길항 작용을 하지 않는…………… 그러니까 한쪽 때문에 다른 쪽이 방해받지는 않는다. 고통 때문에 사랑이 식는 것도 아니고 사랑 때문에 고통이 약화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나의 감정이다.”
자연스럽게 말을 이은 오스발은 공주의 동그래진 눈을 보게 되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알았죠?”
“말씀하신 것 들으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만.”
“어?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럼 난 비자연인인가 보군요. 그게 왜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네요.”
오스발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글쎄요. 말씀 들으니 저는 이렇게 이해되는군요. 에름 후작님이 후작 부인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 아닙니까? 그 사랑 때문에 생기는 고 통을 구태여 부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갈등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는 건 언제나 선택의 문제잖습니까. 이것 아니면 저것.”
“졸리니까 책을 덮고 잠을 자느냐, 읽던 책을 마저 읽느냐.”
“하하. 그 경우라면 주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선택이 내려지면 행동에 들어가겠지요. 그런데 하나를 선택해도 해야 할 행동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왜 두 가지이죠?”
“선택한 길에 대한 긍정도 있겠지만,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부정도 하겠지요.”
“부정?”
“예. 선택한 것을 꾸준히 밀고 나가겠지만, 마음 한구석으론 자기 자신에게 합리화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훨씬 나은 거라는 식으로, 그 길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는 식으로, 합리화는 그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방식에 대한 긍정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방식에 대한 부정도 꽤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음, 음. 그러니까 잠을 자기로 했다면 졸리니까 그런다는 이유 말고도, 안 자고 책 읽어봐야 머리가 멍해서 이해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이유도 필요 하다는 거죠?”
“공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제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택되지 않은 방식에 대한 부정을 잠깐 볼까요. 이미 포기된 방법이지만, 사실은 그것도 그 자신이잖습니까. 다른 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죠. 따라서 그것은 사실은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그 러나 사람은 자기 부정당하는 것을 싫어하죠. 그래서 부정을 계속하면서도 진짜 그게 필요없었을까? 그게 나빴을까? 하고 한두 번은 되물어보게 되 는 거죠. 그걸 간단하게 뭐라고 하나요?”
“후회!”
“그렇습니다. 후회는 선택되지 못했던 자신의 반란이겠지요. 아무리 선택을 잘했어도 한두 번쯤은 생겨나게 마련인 의혹이나 후회는, 부정된 자신이 긍정받고 싶어서 일으키는 반항 아닐까요.”
“와아!”
율리아나 공주는 크게 감탄했다. 오스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결국, 행동에 있어서 뭐가 옳으냐 뭐가 그르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이유가 못 되겠지요. 그것보다는 자기가 긍정되느냐 부정되느냐의 문제 아닐까 요.”
“자기가 인정되는지 안 되는지가 중요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이나………… 정의 같은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믿을 수 없습니다.”
“적긴 하지만, 죽을 때까지 선을 지키는 분들도 있잖아요.”
“바로 그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예?”
“선을 지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선은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산을 지킨다거나 바다를 지킨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하 지만 성을 지킨다거나 집을 지킨다는 말은 있지요. 같은 것 아닐까요? 무너질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는 것은 절대적인 힘이 아닙니다.”
“좀 무서운 말이군요.”
“공주님도 후작님의 선을 믿지는 못하셨잖습니까?”
율리아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고 율리아나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나도 후작님을 못 믿고 언니를 걱정했던 거예요. 아무리 후작님이 언니를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이 계속해서 고통을 이겨내어 줄 거라고 믿지는 못했지요. 그건……”
“선의 힘을 믿지 못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렇군요. 후작님도 인간이니까 계속 자기 부정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군요. 나는 무의식중에 그걸 알았고.”
“예. 후작님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후작 부인을 계속 사랑하신다면 그건 옳은 일이고 신사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계속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될 테니 그것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끝까지 가지는 못하게 될 겁니다. 공주님께서 걱정하신 대로. 하지만 후작님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구분하는 대신 그 두 가지가 다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셨고, 둘 다 부정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래서 후작님은 계속해서 후작 부인을 사랑하실 수 있으신 거겠지 요. 계속 자기 부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산이나 바다는 부정한다고 부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산이나 바다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화를 내 거나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없지요. 후작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음………… 한 마디만 수정하겠어요.”
“뭔가요, 공주님?”
“산이나 바다가 단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없다는 거.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을 하나 알아요.”
“누군가요?”
“침착하게 미쳐버렸던 당신 전 주인. 상당한 혐의를 둘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