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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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1장 :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 – 7화


제국력 1024년 여름. 봄부터 시작된 소란은 작열하는 태양의 계절을 맞이하여 대륙의 남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 서막을 이끌었던 다벨의 휘 리 노이에스는 전격전으로 팔라레온을 휩쓴 다음 팔라레온의 내재적 불안 요소를 성공적으로 자극했다. 팔라레온의 불안 요소는 그 넓은 밀밭에서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노동 노예의 존재였다. 노예와 자유민의 비율이 어느 나라보다도 컸던 팔라레온의 특성을 성공적으로 일깨워낸 휘리는 그 힘을 이용하여 다케온에 맹공을 퍼부었다. 엄청난 부로 리저드라이더와 같은 고급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다케온도 록소나와의 전쟁 때문에 군사 력의 태반을 잃고 있었다. 물론 다케온의 부는 여전했지만, 군사력은 가게에서 돈 주고 구입하는 상품이 아니었다. 록소나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아직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다케온은 휘리 노이에스의 공격 아래 지리멸렬하게 무너졌다. 경이로울 정도의 정복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휘리 노이에스의 명성은 한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휘리 노이에스가 록소나를 다음 목표로 지적한 것에 대해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또한 그 여름 휘리 노이에스호(號)의 무사 항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전까지 다가온 휘리 노이에스의 칼날에 분통을 터뜨리며 서 하빈저를 못 살게 굴고 있던 록소나 국왕 빌레스는 자신의 땅에 유배되어 온 제국 인사가 누구인지를 안 순간 ‘명마가 용장을 만났도다!’라는 퍽이나 마왕다운 환성을 지르고 말았다. 만인이 박수를 보낸 회군 결정을 통해 제국 최고의 기병대를 보전할 수 있었던 마왕은 그것을 그대로 당대 최고의 기병 지휘관에게 넘겼다. 유배는 여기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현명한 조처였다. 유배 죄인인 브라도 켄드리드의 입장에서 그것은 일종의 백의종군이 며, 따라서 제국에 의한, 혹은 브라도 경 자신에 의한 록소나의 내정 간섭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늑대를 막기 위해 사자를 키우는 노 릇이라 떠드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서 하빈저의 침착한 한마디.

“서 브라도는 언젠가 유배를 끝내고 그의 가족이 있는 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 록소나의 무엇을 맡긴다 해도 그것은 단기 대출일 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폐하로부터 서 브라도를 임차받았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거의 사기로 여겨질 만큼 쉽게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병 탄해 버린 날강도 같은 자가 우리의 문턱까지 온 마당에, 도대체 이런 유익한 임차를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별로 용맹스러운 말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마왕의 가신들을 진정시키는 효과는 충분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는 ‘왕관을 던진 장군 바스톨 엔도가 신생국 폴라리스와의 동맹 아래 사트로니아군을 휘몰아 휘리 노이에스의 명줄을 노리고 있 었다. 사트로니아 – 폴라리스 동맹 소식을 받아든 사람들은 바스톨 장군이 신생국 폴라리스의 건국을 배후 조정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본국 사트 로니아에서 멀리 떠나온 바스톨 장군은 안정된 병참이 필요했고, 그래서 해적들을 이용하여 병참선으로 이용할 나라 하나를 급조한 것이다…………, 그 런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것이었다. 바스톨 장군에게는 실제로 나라 하나를 세워본 전과가 있었던 것이다.

각자의 명망도 명망이지만 그보다 40년 동안의 경쟁자로 더 잘 알려진 두 용장이 같은 목표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음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휘 리 노이에스에 대해 측은함마저 느꼈다. 활들이 너무 강해서 과녁이 박살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어쩌면 지도상에서 다벨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지 경까지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국인들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음유시인들은 초록빛 옷을 준비한 다음 록소나 지방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찬란한 두 거성과 새롭게 불타오른 한 신성의 웅대한 대결을 보기 위해 초록빛 옷을 준비하던 사람들 중에는 바탈리언 남작 역시 포함되었다.

“떠나시겠다고요?”

에름 후작은 질문보다는 확인하는 투로 말했다. 그는 바탈리언 남작이 그 험한 곳으로 가겠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습니다. 후작님.”

“위험하실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위험하지 않았다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름은 작은 웃음 소리를 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긴, 두 명장이 한 곳에 모인 것은 레프토리아 이후 처음인가요. 볼만하겠습니다.”

“홀홀단신으로 미리온 산맥을 넘어와 준비되어 있던 군대를 단숨에 움켜쥔 브라도 켄드리드와 차분하게 교두보를 마련하고 병참을 위해 나라 하나 가 생길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린 바스톨 엔도………… 두 장군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모습은 이제 두번 다시는 못 보게 될지 도 모릅니다. 그 분들의 연세가 있으니까요. 도저히 안 갈 수가 없군요.”

“즐거운 마음으로 남작의 참전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예. 꼭 살아돌아와 기록을 남기죠. 그리고 라트랑에서 출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고마운 선물이 되겠군요.”

바탈리언 남작은 에름 후작에게 인사를 남기고 테라스를 떠났다. 후작의 방에서 나온 남작은 통로에서 커다란 책을 들고 걸어오는 오스발과 마주쳤 다.

“오스발? 어디로 가는 길인가.”

오스발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공주님께서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다달라고 하시더군요.”

“자넨 글을 모르잖아. 어떻게 책을 찾았나?”

“그래서 제가 간 겁니다. 특정한 책이 필요하셨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거나 공주님께서 직접 고르셨겠지요. 저에게 아무거나 뽑아오라고 하셨습니 다.”

“심심파적 삼아 읽으실 모양이군. 그런데 그런 용도라면 책이 너무 두꺼운 거 아닌가?”

“공주님께서 무조건 두꺼운 책으로 가져오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걱정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니 공주님 마음에 안 드는 책일지도 모르고. 얼핏 안을 들여다봤는데 도표 같은 것이 없는 걸로 봐서 최소한 장부 같은 건 아닐 거라 믿고 골라온 겁니다.”

“아아. 그렇잖아도 공주님께 가는 길이니 함께 가세나. 어디 무슨 책인지 볼까.”

바탈리언 남작은 오스발과 함께 걸으며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받아들었다. 그러곤 곧 미소를 지었다.

“이건, 희한하군. 사로프레의 ‘레프토리아 회전기라.”

“안 좋은 책입니까?”

“아니. 좋은 책이지. 최소한 이 책은 레프토리아 회전의 결과를 놓고 하이낙스가 악인이라서 패배했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는 않으니까. 그 사건에 관 련된 서적들 중 거의 절대 다수는 그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걸로 만족하지만 말이야. 내가 놀란 건, 어쩌면 나도 이것과 비슷한 책을 쓰게 될지도 몰라서 그래. 같은 등장인물들도 몇 명은 나올 테고.”

“예?”

“나 록소나로 갈 생각이네. 오스발.”

“록소나? 그곳은 전쟁 직전이잖습니까. 제가 듣기로 어떤 쟁쟁한 장군님이 그 땅에서 다벨군을 박살낼 준비를 하고 계시다던데요.”

“제국 기사단장인 서 브라도야. 그리고 내가 거기로 가는 건, 전쟁을 보러 가는 거니까 당연하잖아.”

“연대기를 쓰실 생각이신가 보군요.”

“그래. 아, 아냐. 쓰든 못 쓰든 보기는 해야겠어. 쓰는 건 그 다음의 일이고. 꼭 쓸 거지만 말이야.”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발자국을 더 뗀 다음 남작이 다시 말했다.

“자네 덕분이야. 오스발.”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날 새벽, 자네가 가르쳐줘서 알았네. 내가 언어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현재를 보는 걸 좋아한다는 거야. ‘현재’라는 걸 글로 옮겨놓는 것보다 더.”

“그러신가요.”

“그렇게 생각하니 언어의 문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네. 그래, 과도든 명검이든 상대를 벨 수 있으면 무사에겐 좋은 검이겠지. 칼이 어 쩌니 저쩌니 하는 건 풋내기 무사의 핑계거리일 테지.”

“제가 한 일은 없을 겁니다. 남작님이 찾은 대답은 남작님 속에 있지 않았을까요.”

“사람 참 겸손하긴. 어쨌든 좀 화끈하게 살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네. 그러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나. 아, 내가 전쟁을 찬성하는 건 아니야. 어차피 연대기 작가는 정확하게 쓸 뿐 찬성이나 반대를 표하는 건 후대인에게 맡겨야 되지.”

공주의 방이 가까워 왔을 때, 남작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그리고 전쟁 구경하면서 틈틈이 소품 하나도 써볼 생각이네. 제목은 ‘한 노예 이야기’정도로 생각해 뒀지만, 약간 단조롭지? 주인공은 해적선 에 납치된 모레이디를 구출해 낸 어떤 노잡이 노예일세.”

남작은 오스발의 황당해하는 얼굴을 보곤 큰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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