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1화
그레이엄의 보고를 듣고 있던 법황 퓨아리스 4세는 약간 씁쓸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루와 망치가 서로 바뀌었군.”
“예?”
“서 브라도와 바스톨 장군의 위치. 서로 반대쪽에 있어야 어울리겠는걸.”
그레이엄은 고개를 갸웃했다.
“반대쪽이라고 하셨습니까?”
“바스톨 장군이 록소나에서 다벨군을 맡아 싸우고, 서 브라도는 폴라리스로부터 팔라레온을 쳤어야 어울리는 일이었지 않겠나. 그러면 바스톨 장군 이 휘리 노이에스를 붙잡아두는 동안 서 브라도가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해방시켜 다벨군을 손쉽게 고사시킬 수 있겠지. 그런데 지금은 돌격전의 대 가가 수비전을 준비하고 있고 수비전의 대가는 돌격을 시도하고 있어. 별로 어울리는 일이라고 볼 수 없군.”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하고 굳건한 군대 운용을 장기로 삼는 바스톨 장군은 모루라 할 것이다. 실제로 신생국이 건국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그것과 동맹을 맺을 정도니까. 반면 일격에 상대를 분쇄하는 것을 즐기는 서 브라도는 내리떨어지는 망치의 격렬함에 어울린다.
“하지만 서 브라도께서 꼭 모루 역할을 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그 분이 ‘망치’답게 록소나에서 다벨군을 분쇄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나도 그렇게 되길 원하고…… 뭐, 잘 되겠지.”
“예. 그럼 바이올 기사단의 건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니?”
“성하. 이제는 그들이 필요없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최고의 모루와 최고의 망치가 다벨군의 전횡을 막을 것입니다. 구태여 그들을 교회 기사단 으로 임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데샨 카라돔도 문제거니와 발도 로네스 경이 보내오신 서신도 겉으로야 그렇지 않지만 사실 퍽 불쾌해하는 내용이었
고……”
발도 로네스의 이름을 들은 순간 퓨아리스 4세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그 녀석이야 그 바닷가에서 바다사자처럼 짖어대라고 해. 건방진 자식. 제깟놈이 감히 법황의 서품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서신을 보내어와?”
“성하.”
“걱정 말고 그대로 진행해.”
“그들이 사용될 일이 있습니까?”
“각국에 질서 유지군이라는 말이 흘러들어가도록 해. 다벨군이 격퇴된 후 폐허가 된 팔라레온, 그리고 다케온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을 담당할 부대 라고 말이야.”
“록소나와 사트로니아가 언짢아할 텐데요. 싸우기는 그들이 싸우고 생색은 펠라론이 내려 한다고 불평할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녀석들을 타깃으로 지적하는 식으로 말을 만들란 말이야. 그래, 만약 사트로니아와 록소나가 다벨로부터 받을 전쟁 배상금 이외에 다른 것, 즉 팔라레온이나 다케온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면 법황이 직접 징벌하기 위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듯합니다.”
“상관없어. 그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레이엄은 말을 멈추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플로라 양은 어디 있습니까?”
“나도 정확하게 모르는 일이라 설명해 줄 수가 없군. 어쨌든 그녀는 지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레이엄은 정중히 인사를 건네곤 법황의 집무실을 떠났다. 그레이엄이 떠나고 나서 퓨아리스 4세는 잠시 책상에 놓은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서류 를 들어올렸지만, 법황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이 읽지도 않는 서류를 이렇게 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법황 은 고개를 내두르며 일어났다.
법황의 집무실 한쪽 벽엔 플로라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문에 다가선 법황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문 저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퓨아리스 4세는 결국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 들어오세요.”
퓨아리스 4세는 문을 열었다. 일종의 온실처럼 꾸며진 방이 나타났다.
기울어진 천장에선 유리창을 통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덩굴과 줄기들 사이로 수많은 꽃과 싱그러운 나뭇잎이 햇살을 담뿍 머금고 있 었다. 실내의 온도와 습도는 약간 높은 편이라 법황은 먼저 숨을 한번 들이쉰 다음 풀잎과 나뭇잎 사이로 플로라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법황은 플 로라가 바닥에서 일어날 때까지 식물들과 잘 어우러진 그녀를 찾지 못했다.
똑바로 일어난 플로라는 법황을 향해 목례했다. 녹색 머릿결이 햇빛 속에서 녹수정처럼 빛났다.
“성하?”
“아, 미안해. 하도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그제부터 계속 틀어박혀 있었잖아.”
“죄송합니다, 성하. 전 아무래도 시간 관념이 좀 다르군요.”
“그래, 무슨 성과가 있었나? 아니면 내가 방해한 건가?”
플로라는 대답에 앞서 온실 한구석에서 의자를 찾아 법황에게 내밀었다. 법황이 그 의자에 앉자 플로라는 화분들이 놓여 있는 대리석 대 위에 앉았 다. 그녀의 알몸 위에 쏟아지는 햇살은 눈부실 정도여서 법황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덩굴장미를 바라보았다.
“성과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가 없군요. 그녀는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예. 일단 그녀를 리포밍시킨 사람을 알아내었습니다. 알버트 렉슬러 선장이라는 분입니다. 노스윈드 선단의 퓨아리스……아십니까?”
4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알긴 알아. 알버트 ‘네일드’렉슬러 선장. 하지만 그 자는 돛대에 못 박힌 저주받은 시체인걸? 법황청 내의 약간 지나치게 열성적인 신부들과 추기 경들이 그 친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있지. 그런 지독한 악마의 역사는 펠라론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쳐부숴야 된다는 거지. 그 자들의 열정은 갸륵하지만, 난 가끔 그 자들이 펠라론엔 함대는커녕 보트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좀 고려해 줬으면 하고 바라지.”
“예. 저도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존재가 그녀를 리포밍시킬 수 있는지………… 벨로린의 이상야릇함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벨로린?”
“그녀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알버트 선장이라는 분이 그 이름을 줬을 리는 없는 것 같고, 다른 누가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화한 게 아닌가?”
“예. 그녀는 여전히 저의 존재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그녀는 제게 대답하고 있다기보다는 자신 속에서 떠오르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무 뻔한 질문 같은 경우 자신이 그걸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가 하는 식으로 의문을 표시하고 있지요.”
“아아, 그래 알았어. 다른 건?”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은 많습니다. 일단 그녀는… 활동에 제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야?”
“저처럼 물을 마시지도 않고 온몸으로 햇볕을 쬐고 있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과 똑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가설을 세워본다면, 그녀를 리포밍 시킨 알버트 렉슬러 선장이라는 분이 돛대에 못 박혀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욕망의 투사라고 할까요.”
“아아! 그 자신이 식물처럼 못 박혀 있으니까 그의 싱잉 플로라는 동물처럼 움직이게 되었다?”
“가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이………… 전 그녀의 의식에 접근할 때마다 상당히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살아 있는 시체에 의해 리포밍되어 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녀의 사고 체계는 퍽 이상합니다.”
“사고 체계가 이상하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 도무지 어떤 말로 설명해야 될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좋으니 느껴지는 대로 말해 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화분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온실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이마에 따갑게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플로 라가 나직이 말했다.
“무섭습니다.”
법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섭다고?”
“예. 그러나…… 끔찍한 것이나 흉한 것, 위험스러운 것을 대할 때의 무서움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긴장감 같은 것도 아니고요. 피하고 싶다는 생각 도 들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괜찮아. 음, 어쨌든 그녀가 아직 널 느끼고 있지 못한다면, 아직은 그녀를 통해 그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장은 접촉할 일도 없으니 상관없겠지. 좋아. 이제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그만해도 돼. 어, 그러니 그만 나오지 그래? ・그립더라고.” 법황은 뒷말을 꺼낸 것을 놓고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말하길 잘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플로라는 법황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이온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폴라리스, 재미있는 이름이잖습니까?”
라이온으로서는 의외였지만 키 드레이번은 의외로 여겨질 만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라이온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죽고 싶지 않아요!’ 등의 말을 외쳐서 키 드레이번을 한숨 짓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실의 경우엔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이토록 편안하게 이 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시 주위를 훔쳐보는 세실을 향해 라이온이 핀잔을 줬다.
“세실. 주위를 훔쳐보는 건 좀 그만둡시다. 예?”
세실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미쳤어.”
“연중행사로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도 있어요.”
세실은 신음을 흘리며 술잔을 움켜쥐었다. 술잔 속엔 유명한 라트랑 와인이 담겨 있었지만, 세실은 마시지 않았다. 카밀궁이 저 멀리 보이는 이 라트 랑 제일 도시 라트라인에서 취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라트라인은 모든 점에서 완벽한 항구였다.
파일럿(導船士)이나 선주들에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낭만가들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항구의 향기가 있고 항구의 노래가 있고 항구의 슬픔 과 기쁨이 있었다. 라트라인에서는 모든 일은 중요도가 아니라 흥미도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흥미도의 기준은, 점잖은 이들은 약간 당혹하겠지 만 그런 대로 멋진 것이었고 멋진 사내들에게 호평받는 것이었다. 그곳은 다음날 동틀녘에 결투 약속이 잡힌 사내들끼리 술잔을 마주치며 상대방의 장점을 조용히 말해 주고 서로 상대방을 그리워하게 될 것을 말없이 확인하는 도시였다. 그곳엔 수십년 전부터 그곳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 곤하는 바텐더들이 주점마다 있었고 수십년 전부터 그곳에 고꾸라져 있는 것 같은 전설적인 주정뱅이들 ·톰이나 잭, 혹은 애꾸눈 릭일 수도 있다 •이 구석진 벽에 등을 기대고 테이블 위에 발을 던진 채 주점 문을 들락날락하는 선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선 너머로 부터 찾아드는 꿈꾸는 사내들이 매일 수줍게 문을 열고 들어서기에 항상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고급 선원들과 그보다 더 많은 부두 노동자들이 흥에 겨워 술잔을 던져댄 주점 벽엔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도 흉내낼 수 없는 복잡한 얼룩 무늬가 번져 있었다. 기교가 아닌 세월 에 의해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노랫소리는 언제나 충분히 소란스러웠고, 항구의 아가씨를 꼬셔보려는 수다스러운 일항사들이 넘쳐나지만, 희미한 조명 아래 보이는 상대방의 얼굴에서 일항사들은 언제나 고향에 두고 온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세실은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 좀 제발 낮춰라. 선원들이 저렇게 득시글거리는데 너희들을 알아보면 어쩔래?”
그러나 키는 세실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폴라리스라.”
“그래서 말입니다만, 선장님.”
키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왜.”
“돌아가시지 않겠습니까?”
술잔을 들어올리던 키는 그것을 잠시 멈춘 채 술잔 너머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그 시선을 살짝 피했고 키는 잠시 후 술잔을 단숨에 비웠 다. 라이온은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오라고 초청한 적도 없다고 말씀하실 거죠?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조언 삼아 들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해봐.”
“이제 율리아나 공주를 죽이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메인 게스트였던 발도 로네스가 아니라 엉뚱한 광대인 휘리 노이에스가 설치고 있으 니까요. 따라서 율리아나 공주는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버린 거죠. 그렇다면, 카밀궁 안에 있는 그녀를 노리는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오히려 폴라리스에서 선장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 나는 그곳에 없을수록 좋다는 거 모르나?”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한 내용이다. 키가 돌아간다면 폴라리스는 제국의 공적 제1호가 된다. 현 재 동맹중인 사트로니아를 난처하게 할 것은 당연하거니와 제국으로부터 공격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건국 작업에 열심인 하리 야의 지도적 위치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뒷말은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앞쪽의 것은 어떻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지요?”
“아아.”
“그럼 돌아갑시다, 선장님. 무익한 일이기만 하다면야 좋겠지만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세실도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온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라이온의 말이 맞아, 키 드레이번. 지금쯤은 다림이나 록소나에서 출발한 소문이 우릴 따라잡았을 거야. 아무리 마왕을 함구시켰다 하더라도 우릴 봤던 부하 녀석들이 있어.”
키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라이온과 세실은 테이블 위로 상체를 내밀며 키의 대답을 기다렸다. 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술병을 붙잡았다.
그러곤 그것을 잔에 따르는 대신 라이온의 머리에 내려쳤다.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술병이 박살났다. 라트랑 와인이 핏방울처럼 튀며 술병 조각이 사방으로 날았다. 경악해 버린 세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 는 사이, 스르르 미끄러진 라이온이 바닥에 쓰러졌다. 쿵. 주위에 있던 선원들과 주당들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키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며 일어난 키는 테이블을 돌아 라이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들에게 다가서려던 선원들은 주춤하 며 멈춰 섰다. 라이온의 도움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키는 두 손도 아닌 한 손만으로 라이온을 일으켜세웠다. 키의 면전까지 끌어올려진 라이온이 정 신을 차리며 약한 신음을 흘렸다.
“이봐, 거기! 무슨 짓이야!”
바텐더가 바 뒤에서 노성을 질렀다. 키는 바 쪽을 흘끔 보더니 그대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비틀려버린 라이온이 다시 무너졌지 만 키는 라이온을 질질 끌면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때 선원들 몇 명이 키의 앞을 막아섰다.
“어헛! 거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상관마.”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헛, 사람을 그렇게 때려서 어쩌겠다는 거야?”
키는 두번 말하는 대신 그대로 앞을 막아선 선원들을 밀치며 걸어갔다. 갑자기 밀려난 선원들은 곧 험상궂은 얼굴이 되어 키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허? 이거 뭐하는 자식이기에. 사람 말이 말 같잖아?”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 술이나 마셔, 얼간아.”
키의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질질 끌려가던 라이온이 힘들게 꺼낸 말이었다. 입장이 우습게 되버린 선원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고 키는 어깨를 잡아뺀 다음 다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세실은 술값을 테이블에 얹어둔 다음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하지만 따라나올 필요는 절대 없다고 강조하며 재빨리 주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세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을 뻔했다.
“우오오옷! 제기랄, 아프다고요. 우 – 썅! 좀 살살해요! 아이 이이익!”
라이온을 치료하던 세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키에게 그토록 참혹하게 맞을 때는 비명은커녕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얌전히(?) 맞던 라이온이었다. 세실은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으며 붕대의 매듭을 질끈 묶었고 라이온은 다시 죽는 소리를 내었다. 세실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서 라 이온을 바라보았다.
“이야기 좀 하자. 불편하면 누워도 좋아.”
라이온은 사양 않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여관의 초라한 침대는 라이온의 몸을 받아들이며 삐걱거렸고 라이온의 몸에서도 제법 요란한 소리가 났다. 세실은 누운 라이온의 흉측한 모습을 보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꼬락서니 걸작이다.”
“우리 어머니도 날 낳아놓곤 그만 감격했지요. 그래서 난 하마터면 ‘주여제가정말이절세미남을낳았나이까’라는 퍽 길다란 이름을 갖게 될 뻔했습니 다. 껄껄껄!”
“돈 놈들과 같이 다니다 보니 정말 미칠 지경이군. 왜 그렇게 맞았냐?”
“첫 번째가 너무 강렬해서 그 다음부턴 피할 새도 없더군요. 하!”
“왜 화를 안 내는 거야?”
“돌았으니까. 몰랐어요?”
“까불지 말고 말해 봐.”
라이온은 히죽 웃으며 손을 올렸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던 그의 손은 붕대에 걸렸고 그래서 라이온은 고통 때문에 이맛살을 잔뜩 찡그렸 다. 세실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따지고 보면 요청받은 바도 없는 억지 동행이고, 그러니 내가 선장님에게 이리 가라느니 저리 가라느니 할 수야 없는 일이잖습니까.”
“맞는 말이다만 그게 술병으로 이마를 강타당할 만한 일이냐? 게다가 이 끔찍한 폭력은………… 억울하지 않아? 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사실은 선장님이 복수로 내려치지 않으신 것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세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미치겠어.”
그리고 세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 침대에서 라이온의 손이 뻗어나왔다. 손목을 잡힌 세실 은 뒤를 돌아보았고 라이온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짐작하는데,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생각 하는데?”
“선장님께 가서 따져볼 생각 아닙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왜? 그 미친 자식이 나한테도 이럴까 봐?”
“일단 앉아보시죠, 세실. 나 팔 아파요.”
세실은 라이온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라이온은 두 팔을 머리 뒤로 돌려 베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어오르고 찢어지고 긁힌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평온한 얼굴로 라이온은 말했다.
“나를 때리면서도 선장님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하면?”
“토해 버릴 거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못 써먹겠군요.”
“나 현기증 느낄 거 같으니까 말 그만 돌리고 말해봐.”
“이봐요. 맞은 사람은 나라고요. 내가 가만히 있겠다는데 당신이 나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럼 키가 널 죽여서 토막내더라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까? 엉?”
“………그때는 좀 말려주시죠.”
세실은 라이온이 누워 있던 침대를 꽝 걷어찼다.
“너도 그렇고 키도 그렇고 도통 모르겠다. 왜 화를 안 내는 거냐?”
라이온은 체념하듯이 말했다. “각오했던 일이니까.”
“각오? 어떻게 그런 일을 각오할 수 있었냐?”
“키 선장님이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이 그거 하나뿐이었으니까.”
“상대방의 두개골을 깨버리는 게? 말도 안 돼.”
“제기랄, 처음부터 이 추적행은 합리성의 제단에 봉헌된 예물은 아니었잖습니까!”
세실은 미간을 찌푸리며 라이온을 내려다보았다. 라이온은 두 손을 앞으로 돌려 얼굴을 가렸다.
“뭘 설명하고 뭘 대답하라는 겁니까, 예? 나한테 그런 것 요청하지 마세요. 나도 힘듭니다.”
기나긴 세실의 일생에서, 어떤 사람의 가면에 금이 가며 그 너머의 무엇이 언뜻 보였던 경험은 꽤 많았다. 그러나 그 너머의 무엇의 모습은 항상 그 보다 화려한 가면이 일으키는 착시 효과 때문에 흐릿하고 뒤틀려 있었다. 한때는 세실도 그런 것에 매달렸던 적이 있고 그러고는 그 사람을 다 이해 한 척한 적도 있지만 (녀석은 사실 그런 놈이었어) 이제는 그런 짓 포기한 지 오래였다. 설령 상대방의 가면이 완전히 깨진다 하더라도 그녀 자신의 가면 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실은 라이온에게 다시 한번 다가서보았다.
“넌 누구냐?”
“나? 라이온입니다. 포기해 버리고 망각해 버려야 마땅할 것들을 아직까지 끌어안고 사는 자신을 비웃어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얼간이입니 다. 차갑기만 한 육지에서 길 잃고 슬픔을 느끼는 갈매기입니다. 비우기에도 애매하고 그냥 놓고 보기에도 못마땅한 반쯤 찬 쓰레기통입니다.” 세실은 얼굴을 가린 라이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핥은 세실은 촛불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머리카락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 순간 방 안의 사 물이 저 뒤로 쑥 물러나며 암흑이 찾아들었다.
암흑 저편으로부터 라이온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팔 내려 필요한 것이 어둠이었으면.”
침묵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세실은 라이온의 숨소리를 들어보려 했지만 그녀 자신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다시 라이온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주무시죠. 치료 고맙습니다.”
“너 자는 것 보고 갈 테니 신경 쓰지 마.”
“나 외롭지 않습니다. 세실리아.”
“알아. 그냥 내가 이래야 안심할 것 같아서 그래.”
세실은 다리를 꼬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오래지 않아 밤으로부터 스며나온 빛이 서서히 사물의 윤곽을 덧칠하기 시작했다.
라이온은 갑작스럽게 말했다.
“애초에 선장님은 이 추적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떠나려 했었죠.”
“그랬지.”
“비합리적이라고요.”
“그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거대한 비합리를 볼까요. 안타깝게도 자연계보다는 인간계에서 더 잘 찾아집니다. 전쟁이 있죠. 전쟁에 합리를 말하며 뛰어든 작자는 어떻게 될까요?”
“너처럼 피투성이 시체가 되겠지. 그리고 그건 잘못된 일이야.”
“잘못된 일이라. 그건 ‘죄’입니까?”
“그래.”
“인간의 죄?”
“그래.”
“어째서?”
“모르겠어.”
“모른다는 건 답이 안 됩니다. 모든 전쟁에 뛰어든 모든 이상주의자가 피범벅이 된다면,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수십억 번 의 아침에 태양이 떠올랐으니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것은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키에게 합리적인 충고를 했던 라이온이 이렇게 박살나는 것 또한 그저 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 잘못되었다고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거 냐?”
“법칙에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물건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아십니까? 그것 때문에 특별히 무거 운 물건은 많이 쌓지도 못해요. 하지만 아무도 그걸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만, 법칙처럼 된 것에는 좋다고도, 나쁘다 고도 말하지 않아요.”
키는 어두운 여관방 안에 앉아 있었다.
밤의 라트라인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빛들이 그의 방 창문으로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캄캄한 방 안에서 빛을 받은 얼굴 윤곽만이 어슴푸레하 게 떠올랐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키의 눈은 도시의 불빛을 뛰어넘어 저편, 도시 외곽쪽의 만 안쪽에 고고히 자리잡고 있는 카밀궁을 잡아챘다. 라 트랑 후작이 카밀카르에서 온 그의 아내에게 선물한 궁이라 그런 이름을 가진 궁은 어쩐지 치마를 살짝 걷어올리고 바다에 발목을 담가보는 소녀처 럼 보인다. 지배자의 건물이라기보다는 동화 속의 외로운 공주님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아름답고 소박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후작의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다. 다림에서처럼 그들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릴 수도 없다. 궁 안에 가 족 예배당이 있고 후작은 궁 안의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서 미사를 드린다. 이곳까지 왔고 이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섰지만, 키는 더 이상 다가설 수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 계속 있을 수도 없다. 록소나인들이 그를 보았다. 당장은 목전에 도래한 다벨군에 맞서 싸우는 일 때문에 키에 대한 추적은 하고 있지 않지만 록소나와 라트랑은 바로 이웃지간이다.
키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창턱에 두 손을 짚은 키는 밤 저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빛 속으로 보이는 카밀궁의 모습을 살폈다. 높은 것은 아니지만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한 담장, 숲 사이로 검게 보이는 산책로, 별관들과 마당, 본관.
그리고 본관으로부터 바다로 나온 테라스.
키의 눈은 테라스에 고정되었다. 사실 본다고는 할 수 없다. 너무 멀어서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모습이지만 키는 어떤 바텐더로부터 그 테라 스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좋은 망원경이 있다면, 그곳에서 헤엄치시는 후작 부인을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보통 밤에 헤엄치신다네.’
저곳이라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 바깥쪽으로부터 오랫동안 헤엄치면, 다림에서 라이온이 이미 해보였던 일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다의 공주인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그녀가 그곳에 있다면? 그녀는 머메이드고 물 속에선 도저히 상대가 안 될 것이다. 그녀가 궁 안에 습격을 알린다면 바다에 뜬 암살자는 꼼짝없이 화살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키는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오스발!’
고함 대신 키의 두 팔이 양쪽으로 튕겨나왔다.
키의 두 손이 양쪽 창가를 부여잡았다. 고개는 떨구었지만 시선은 앞을 겨냥한다. 손끝으로부터 시작된 경련이 어깨를 타고 흘러들어 상체 전체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떨린다. 달빛은 그의 등뒤 방바닥에 일그러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손톱에 긁힌 벽도제가 힘없이 바스라지며 떨어져내렸다. 이윽고 창문 전체에서 불길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키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