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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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3화



언니의 방을 나와 사방을 누비던 율리아나 공주는 부엌에서 오스발을 찾아내었다. 부엌의 대형 식탁에 앉아 하녀들과 무슨 한담을 나누던 오스발은 공주를 보며 천천히 일어났다.

“공주님? 웬 일이십니까?”

“죽다 살아났죠.”

“예?”

“눈치 없이 잉꼬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가 소리 없는 구박에 살해될 뻔했죠. 정말 무서웠어요. 그리고 율리아나는 조금 전의 사태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오스발은 피식 웃었다.

“그렇잖아도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까 해서 이곳에 왔던 참입니다만.”

“잘됐네요. 여기서 마시죠. 그런데 나 또다른 잉꼬 소굴에 들어온거 아니에요?”

율리아나는 황급히 도망치는 하녀들을 보며 말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공주의 시선을 따라가본 오스발은 곧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니오. 저 하녀분들과는 그냥 이야기나 좀 나누던 거였습니다.”

“방해 아니에요?”

“아닙니다.”

“음음. 오스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요.”

“말하라고요?”

“물론이죠! 당신은 내 노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건 나한테 의논해야지요. 그리고 나도 성실한 주인으로서 도와줘야 되고요. 알았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요거.”

탁자 위에 올려진 공주의 손이 치워지자 하얀 자마쉬 비단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이 곱게 두 번 접혀져 탁자 위에 올라와 있었다. 율리아나는 펴보라 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고 오스발은 천천히 그것을 펼쳤다.

“이건 뭡니까?”

“아하! 물으니 가르쳐주지요. 그건 손수건이라고 해요. 손 – 수 – 건. 용도는 자질구레한 것을 닦거나 훔치는 것이 원칙이지만 때때로 무능한 장수 들이 항복을 표시하고 싶을 때 사용하기도 하고 평소 지식의 습득을 게을리한 숙녀가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을 때도 사용하죠. 그걸로 입을 가리며 생긋 웃어버리면 완벽한 대답이 되거든요. 그리고 씩씩한 소녀의 경우엔 그걸 고전적인 사냥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어요. 잘생긴 젊은 신사 옆에 그 걸 떨어뜨리면 신사는 그걸 주워…

“당황하셨군요.”

율리아나 공주는 입을 다물었다. 손수건을 차분히 내려다보던 오스발은 다시 웃는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 또한 웃으며 말했다.

“선물, 선물.”

“그럼 왜 당황하셨는지요.”

“손수건에는 또다른 많이 알려진 용도가 있으니까.”

“기사에게 건네는 레이디의 징표 말씀입니까? 전 기사가 아니니 그런 의도로 오해될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공주님. 그런데 이건 무슨 글 인가요?”

오스발은 손수건 귀퉁이에 적혀 있는 글자를 가리켰다. 조금 전 유리가 수놓은 글이다.

“두 미란 오스발 에레로아. 유리.”

“엘핀인가요?”

“예. 나의 친구 오스발에게 유리. 그런 뜻이에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천만에요. 말로만 주인이지 해준 건 하나도 없는 엉터리 주인인데.”

오스발은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즐겁게 대답하기로 했다.

“주신 것이 없다니오. 제국의 모든 고독한 기사들이 탐낼 물건을 주셨잖습니까.”


7월 26일. 투란은 불타고 있었다.

폭발하듯 솟구치는 검은 연기 때문에 팔라레온의 아름다운 하늘은 재의 향연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밤 같은 어둠이 내린 가운데 갈라진 절규가 날카롭게 번득였다. 보무도 당당히 진군해 왔던 사트로니아군은 급히 소방대로 변신해야 했다. 그들은 열심히 물을 나르고 모래를 끼얹고 저지선을 구축하여 불길 앞쪽의 건물을 때려부수며 분투하고 있었지만, 투란 전체를 장작 삼아 타오르고 있는 불길은 그런 노력을 비웃듯 맹렬히 불타올랐다. 사트로니아 병사들 중에서도 연기에 질식되거나 화상을 입은 병사가 속출하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트로니아의 백부장들은 병사들을 독려하느라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 잔인한 재난을 목격한 사트로니아 병사들은 스스로 발벗고 나서 팔라레온인들을 돕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러 나 그들은 투란의 지리에 밝지는 못했다. 걸핏하면 오도 가도 못할 곳에 갇혀 불에 둘러싸이곤 하는 병사들을 보며 백부장들은 오히려 자신의 부하들 이 너무 열성적으로 날뛰지 못하도록 말려야 했다.

바스톨 장군은 투란 외곽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불길과 싸워야 했기에 막사 하나도 설치할 시간이 없었던 사트로니아의 백부장들은 죄송스러워하는 얼굴로 장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 역시 이 끔찍한 화마 앞에서는 동정심 외엔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의 옆에는 로드 데자크와 그에게 돌아온 가신들이 망연한 얼굴로 투란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달려가는 소년, 미친 듯 도끼를 휘둘러대는 병사, 자식들을 끌어안은 채 불길 속에서 통곡하는 남자. 오그라든 갓난애를 부둥켜안고 있는 여인은 아직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로드 데자크는 기어코 주저앉고 말았다.

“주여, 주여!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이까!”

가신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 자신이 이미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라 데자크 공작을 부축하지 못했다. 오히려 함께 나뒹굴 지경에 빠져 끙끙거 리는 그들의 머리 위로 큼직한 손이 다가왔다. 데자크 공작은 굵은 팔에 붙잡혀 일어나서는 바스톨 엔도 장군의 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왕이었던 장군은 깊은 슬픔이 어린 엄격한 얼굴로 공작을 마주보았다.

“공작님. 정신차리십시오.”

“장군……… 난 도저히……… 어떻게 이런 일을……”

“로드. 공작님의 백성들이 그 아버지를 우러르게 하십시오.”

“장군.”

“첨탑이 무너지고 성벽이 불타올랐다면, 공작 자신께서 첨탑이 되시고 성벽이 되셔야 합니다.”

짧은 순간 데자크 공작은 자신이 사트로니아의 장군이 아니라 엔도의 왕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로드 데자크가 다시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냈을 때 그곳에서는 늙은 장수가 차분히 말하고 있었다.

“제 병사들은 그들을 이곳으로 피신시키고 피난소를 설치할 것입니다. 끔찍한 며칠이 될 것이니, 차라리 지금 좀 쉬어두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로드 데자크는 흠칫했다. 담담한 어조로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말하는 노장을 보며 데자크 공작은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톨 장군은 그제서야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공작가의 가신들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가신들은 공작을 부축하며 언덕을 떠났다.

언덕 아래로부터 백부장 하나가 달려왔다. 바스톨 장군은 그가 1중대 1백부장인 크로즐릭임을 알아보았다. 크로즐릭 백부장은 경례를 마친 다음 간 략하게 보고했다.

“포착했습니다. 하지만 증원군이 더 있어야겠습니다. 교본대로의 멋진 퇴각이었습니다.”

더블원 센츄리온다운 정확한 판단과 간결한 보고였다. 그가 앞뒤없이 추적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온 것만 봐도 장군은 퇴각중인 다벨군을 추적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할 수 없군. 도망치게 내버려둬. 불 끄기도 바쁘니까.”

활달한 성격의 크로즐릭 백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놈들을 잡아서 팔라레온인들에게 넘겨주고 싶습니다.”

바스톨 장군의 침착한 정신은 다벨군이 이렇게 큰 불을 낼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불이 이렇게까지 커져버린 것은 갑자기 거세어 진 바람과 건조한 날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여전히 침착했고, 그래서 부하들의 증오심을 적당히 자극해 두기로 했다.

“마찬가지 심정일세. 복수의 날은 내가 조만간 마련할 테니, 그때 열심히 싸워주게.”

“알겠습니다!”

투란에 치솟았던 불길이 그런 대로 잡힌 것은 다음날 오전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투란의 4할 이상을 불태우고 난 다음의 일이었고, 폐허가 된 투란을 보며 화려한 개선식을 기대하고 있던 사트로니아 병사들은 아쉬운 마음을 표시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실의에 빠져버린 팔라레온인들은 심지어 그들을 광복군이 아니라 훼방꾼으로까지 여기는 듯했다. ‘사트로니아 놈들이 오지 않았다면 다벨 놈들이 불을 놓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똑같은 놈들이야!’ 배은망덕한 처사였지만 바스톨 장군은 억울해하는 부하들을 조용히 달랜 다음 그들을 인근 도시로 보내어 구호물자를 모아오도록 지시했다. 그러곤 로드 데자크를 붙잡고 간단히 말했다.

“이해는 합니다. 힘든 일을 당했던 사람들이니 이해해 줘야지요. 제 병사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불길과 싸웠 던 점을 투란 사람들이 계속해서 무시한다면, 저는 병사들로 하여금 팔라레온을 위해 싸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외엔 할말이 없군요. 바스톨 장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스톨 장군은 화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데자크 공작의 입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이 나온 순간부터 그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기로 결정했 다. 별 설명이 없이도 말이 잘 통하던 하리야 선장에 대한 추억을 잠시 떠올렸던 장군은 공작을 위해 차분히 설명했다.

“앞으로 길고 어려운 나날들이 올 겁니다.”

“뭐라고요? 팔라레온은 해방되었고 다벨군은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로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휘리는 싸워서 얻은 팔라레온을 쉽게 내줬습니다. 한번 버텨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것은 장차 있을 록소나와의 대결을 위해 모든 힘을 끌어모으기 위해서겠지요. 팔라레온의 수복은 그의 계획표에서 그 다음으로 돌려졌을 뿐입니다. 그것이 합 리적인 순서죠.”

“합리적이라고 하셨습니까?”

“등뒤에 서 브라도를 둔 상태에서 팔라레온을 쥐고 있어봐야 짐밖에 안 될 테니까요. 손에 든 것이 아까워서 내려놓지 못하면 상대의 칼을 막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는 팔라레온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완벽하게 포기한 것은, 바로 지금 같은 상황 속에 우리 를 처넣어 괴롭히기 위해서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광복군과 모든 것을 잃은 해방민들 사이의 갈등 말입니다. 우리들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광복군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은 봐주지 않겠다는 심정인 팔라레온인들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로드 데자크가 뭐라 항변하려 했으나 바스톨 장군은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병사들 중엔 광복군이라고 어깨에 힘주는 자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전 제 병사들을 믿지만 그들에게 환상을 품지는 않습니다.”

바스톨 장군의 예상대로 우리 팔라레온인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외치려 했던 로드 데자크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바스톨 장군은 약간 부드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따라서 휘리 노이에스가 투란을 이렇게 비워준 것은 우리들을 골탕 먹이면서 자기 자신은 서 브라도를 상대할 준비를 하려는 게지요. 영리한 사람 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소.”

“그럼 휘리의 계략은 대충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의 농간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우린 그가 예상하지 못했을 길을 찾아봐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바스톨 장군은 설명하는 대신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가리켜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짚은 곳을 본 데자크 공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로드 데자크는 다 시 고개를 들어 장군을 바라보았고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 자신도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여기게끔 했지만, 우리의 적은 휘리 노이에스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적을 상대할 것입니다.”


투란에 주둔하고 있던 다벨군이 다케온으로 이동하고 있는 동안, 휘리 노이에스의 지휘를 받는 다벨 8군단의 본대는 록소나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 다. 짧은 기간이나마 다케온이 비게 되는 것이지만 휘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록소나에서 기다리고 있을 서 브라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 다. 그리고 서 브라도 역시 록소나로부터 빌린 군대를 몰아 차분히 다케온과의 접경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레모로 보낸 참전 요청에 대한 회 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벨군의 진격이 빨랐기 때문에 서 브라도는 록소나군만을 가지고 다벨군을 막아볼 작정이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서 브라도는 록소나군의 지휘관이 아니라 객원참모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록소나의 빌레스 국왕 역시 작은 인물은 아니었다. 마왕은 서 브라도와 기세 싸움, 혹은 헤게모니 쟁탈전 따위를 감행할 리가 없는 사람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서 하빈저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국 최고의 무인을 참모로 쓴다는 사실에서도 별다른 유혹을 느끼지는 않았다. 서 브라도는 그 젊은이의 참을성 에 경탄을 보내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남작? 저 나이 또래라면 반대하기 위해서 반대하고 억누르기 위해서 억누르려 하는 것이 당연하잖습니까. 나 또한 그랬고요. 존경스러운 젊은이군요.”

바탈리언 남작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국 기사단장 서 브라도를 턱끝으로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그 젊은이의 품성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듯합니 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애송이 젊은 상관을 모시면서도 태연자약하신 브라도 경의 모습에서도 저는 감탄을 느낀답니다.”

“젊은 하빈저 장군이 저렇게 나오는 바에야 내가 삼가고 조심하게 되는 건 당연하잖습니까.”

그들은 록소나 진지 내의 외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와인 한 병과 딱딱한 빵, 그리고 치즈를 나눠먹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튼튼한 말과 한 자루 검을 준비하여 록소나군을 따르고 있었지만 종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록빛 옷을 걸친 음유시인의 자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작은 스스로 음식을 준비해야 했고 그래서 식사량이 시원찮았다. 그날 오후에도 피곤한 발을 주무르며 나무 그늘에서 록소나군을 바라보고 있는 바탈리언 남작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때 서 브라도가 그런 음식들을 들고 그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당황하는 남작에게 그것을 건네며 서 브라도는 한쪽 눈을 찡긋한 다음 그것을 ‘노병의 전리품’이라고 불렀다. 당대 제일의 문객이었던 바탈리언 남작은 서 브라도가 취사반으로부터 그것들을 슬쩍 해왔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바탈리언 남작은 이것이 일종의 탐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거리낄 것 없음을 조용히 내비 쳤다. 그러나 서 브라도는 남작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서 브라도는 ‘단지 전쟁이라는 인류의 악에서부터 교훈 이라는 장미를 피워올려 후대에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만을 가졌을 뿐’이라는 남작의 설명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어쩌면 받아들이는 척한 건지 도 모르지만. 그래서 서 브라도가 ‘내일 일정을 말해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도 남작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제게 그런 것을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오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미리 알면 좋을 텐데요. 며칠 봐왔습니다만 힘들어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말했다.

“군대를 따라다니려니 힘들긴 합니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출발할지 미리 말씀해 주신다면 편하기야 하겠죠. 하지만 전 그런 정보를 원하지 않습니 다. 위험한 일이니까요.”

“난 당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남작. 당신 같은 분이 다벨을 위해 간첩 일을 할 리는 없죠.”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생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따라온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리겠습니다.”

“난 당신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서 브라도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묘한 웃음기를 놓치지 않았다. 남작은 조용히 브라도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브라도는 그야말로 팔 자 편한 노병처럼 벌렁 드러누웠다. 남작은 그의 주변을 잠시 살피곤 쓴웃음을 지었다.

제부르카스 장군의 말에 의하면 노병은 빵가루를 흘리지 않는 병사다. 싸움이 목전에 다가와도 할일은 차분히, 흔들림 없이 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바탈리언 남작은 서 브라도의 주변에서 빵조각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남작은 나무 위의 새들이 분개한 듯이 지저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 브라도는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더 귀찮게 해도 되겠습니까?”

“귀찮다니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전 이 전쟁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현장 인물과의 이야기는 환영입니다.” 

“그럼 난 당신을 괴롭히게 되겠군요.”

“예?”

“난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나 할 겁니다. 그걸 절대로 글로 남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신다는 전제 하에 어쩌시겠습니까?” 

“이런, 브라도 경.”

브라도는 껄껄 웃었고 바탈리언 남작은 자신이 정말 곤경에 빠져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작은 머리를 긁적인 다음 말했다.

“신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면 되겠습니까?”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서 브라도는 당장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바탈리언 남작이 옆에 풀어두었던 안장을 가져와 다리 아래에 받치고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댈 때 까지도 서 브라도는 조용히 나뭇잎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탈리언 남작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윽고 브라도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못 미더워지는 경우라는 것이 있지요. 남작. 당연했던 것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별 신경 쓰지 않고 대해왔던 것들이 끔 찍하리만큼 낯선 것이 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소름이 끼치는.”

“축복의 시간이죠.”

“아니. 저주의 시간입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는 항상 제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올라가는 것이 힘들지만, 더 높은 산봉우리에서 바라본 지평은 더 넓을 거 라 믿기에 산등성이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그건 문객의 태도인가 보군요. 나는 무사라 불리길 원하는 자라서, 데샨 카라돔에선 ‘무사’라는 말이 ‘무식쟁이’라는 욕으로 쓰인다는 거 아시죠? 하하하. 어쨌든 나에겐 그것은 저주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키 드레이번에게 복수를 빼앗긴 날이었습니다.”

“예. 괴로우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괴롭다라. 예, 괴로웠지요.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브라도 경.”

“이해가 안 될 겁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정확히 그랬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 부위죠.”

서 브라도는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그 평온한 동작을 보며 바탈리언 남작은 흠칫했다. 서 브라도는 그 부분에 자국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키 드레이번에게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후였습니다. 주변도 다 정리한 다음 서재에 앉아 단검을 꺼내들었죠. 지금도 기억납니다. 비가 오고 있었 지요. 가느다란 빗방울이었습니다………… 검 끝을 여기에 갖다댄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모르겠군요.”

“커프스 단추가 짝짝이일지도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황당한 표정으로 서 브라도를 바라보던 바탈리언 남작은 짧게 웃었다. 서 브라도는 손을 다시 내려 팔베개를 하며 말했다.

“죽은 내 아내는 항상 그것을 탓했죠. 내가 언제나 커프스 단추를 짝짝이로 채운다고. 그것도 꼭 중요할 때만 그런다더군요. 아내의 말이 맞았지만, 난 한번도 그 버릇에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사실을 떠올렸을 땐 항상 커프스 단추 따위는 구할 수 없는 곳에 서 있곤 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그때는 내 방 안이었죠. 정복을 입는 건 대개 집 밖의 일이라 커프스 단추가 짝짝이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는 내 집 안이기에 커프스 단추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소매를 바라보았죠.”

“그래서· ..?”

“역시 짝짝이더군요. 그렇게 웃지 말아요, 남작. 허헛. 나도 그땐 웃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소매를 바라보다가 난 손에 들린 단검을 보았죠.”

“단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목을 찌를 단검. 그때 난 문득 그것이 엄청나게 불합리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불합리하단 말씀입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으음, 이렇게 생각되더란 말입니다. 복수도 내 목을 찌르지 못했는데 다른 검이 내 목을 찌를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 이 야기 아십니까?”

“그 검이 주인의 목을 찌른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

“예. 어쨌든 복수도 찌르지 못한 내 목을 다른 검이 찌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칼에 대한 의리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난 그게 뭔가 말이 안 되는 상황처럼 느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난 단검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을 책상에 던지며 난 이제 어떤 칼로도 내 목을 찌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난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잘했다고요?”

“목숨을 끊는 것은 잘못된..”

“내가 그때 깨달은 것 하나 더 말씀드리리다.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동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지 에 대해 생각하며 오싹함을 느꼈습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안쓰럽게 서 브라도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조롱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트로니아의 바스톨 장군이 멋지게 말해 줬지요. 왕관을 던진 그를 조롱하는 작자들에게 그는 왕이 된 적도, 될 수도 없는 자의 말이라고 말해 줬습니다. 멋진 말이잖습니까? 조롱을 던지는 자는 조롱받을 정도의 인격밖에 가지지 못했음을 정확히 지적했지요. 그런 자들의 말은 신경 쓸 가치조차 없어요. 하지만 칼을 잃은 무사를 바라보며 친절한 듯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작자들………… 무시해 버릴 수도 없기 에 일일이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듯이 대해 줘야 된다는 건 정말 못 견딜 일이었지요.”

바탈리언 남작은 서 브라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반려를 잃은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위로의 말이 있겠는가. 위로 따위 집어치우고 날 좀 내버려두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그걸 내뱉을 수 없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가 고작일 뿐.

“하지만 그게 우리 사는 법이잖습니까. 브라도 경. 상대방이 바라지도 않을 참견을 해주고, 진심일 거라 믿어지지도 않는 참견을 받아주면서 그래도 따스하게 살아야 되잖습니까. 그렇잖으면 너무 외롭고 황량하지 않겠습니까.”

서 브라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국 기사단장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바탈리언 남작은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나이로 따지든 행하여온 일로 따지든 서 브라도와 그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바탈리언 남작이 사과하려 했을 때 서 브라도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남작의 말, 편자는 튼튼합니까?”

“예? 아, 예.”

“알레미지우스 평원 동쪽엔 아주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있지요.”

“그렇습니까?”

“절벽에서 허공을 향해 불쑥 튀어나왔는데, 마치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처럼 생긴 바위입니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알레미지우스 평 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죠. 올라가는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올라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건장한 남자에게도 하루 정 도는 걸리지요.”

“그런가요.”

“조연사는 모레 아침엔 날씨가 좋을 거라 주장하더군요. 난 때로 그 작자들이 그저 때려맞추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곤 합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의혹이 담긴 시선으로 서 브라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뭐라 말하려 할 때 서 브라도가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남작.”

“아, 예……”

서 브라도는 바탈리언 남작에게 손인사를 해보이곤 막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바탈리언 남작은 그 걸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작은 서브라도가 준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 시간 후, 록소나 진영의 경비병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가는 바탈리언 남작을 목격했음을 보고했다. 그가 정탐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라 의 심해 본 사람은 많았지만 서 브라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겐 급한 용건이 있었겠지. 그리고 그가 뭘 알아내었겠는가. 간첩질을 하려면 내부로 들어와야지. 내버려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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