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4화
“레모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는 다섯 개의 강국들과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나라의 입장을 이해해 줘야겠지.”
퓨아리스 4세는 무릎 위에 놓아둔 검을 만지작거리며 잡담처럼 말했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그들이 서 브라도를 도와주고 싶었다 해도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다벨군이 다케온까지 비워버리며 너무 빨리 움직였으니까요.”
“그래. 휘리 노이에스는 정복만 하지 통치엔 관심없는 놈 같아. 녀석이 원하는 건 혹시 이런 것 아닐까?”
말 끝에 퓨아리스 4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만지작거리고 있던 검을 몇 번 휘둘러보다가 그것을 높이 들어올렸다.
“사무이다크의 고원으로부터 아흔아홉 눈의 섬까지! 모든 땅과 모든 바다의 정복자, 휘리 노이에스!”
“어흠.”
“그, 그레이엄? 언제 들어왔어?”
플로라는 고개를 조금 돌린 채 킥킥거렸고, 손에 은쟁반을 든 채 문가에 서 있던 그레이엄은 정중하게 말했다.
“성하. 죄송합니다만 슈팔데는 법황청의 보물입니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여흥을 계속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다른 검을 준비할까 합니다만.”
“아니. 됐어. 안 할 거야.”
퓨아리스 4세는 붉어진 얼굴로 슈팔데를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법황의 서품식에서나 사용되는 그 펠라론의 보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레이엄은 법황이 로데인 백작이었던 시절부터 검에 대해 좋은 재능과 훌륭한 취미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았기에 그 시선에 약간 의아해했다. 슈팔 데 두 펠라론은, 그런 종류의 검이 대개 그렇듯이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것으로 무기라기보다는 장식품이며 무인의 질박한 기호엔 잘 맞지 않는 검 이다. 차라리 학자를 즐겁게 해줄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법황은 슈팔데를 책상 위에 있던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레이엄을 돌아본 법황은 그의 손에 들린 은쟁반에 두루마리가 얹혀 있음을 발견했다.
“뭐지, 그레이엄?”
“다벨 8군단장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플로라와 퓨아리스 4세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레이엄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퓨아리스 4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휘리 노이에스로부터 말인가?”
“그렇습니다. 읽을까요?”
그레이엄은 읽을까요라고 말하면서도 은쟁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팔팔한 나이의 법황은 서신은 직접 읽기 때문이다. 퓨아리스 4세는 그것이 단검이나 되는 것처럼 바라보다가 떨떠름한 얼굴로 서신을 집어들었다.
플로라는 근심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리고 그레이엄은 엄격한 얼굴로 서신을 읽는 법황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별 표정의 변화 없이 서신을 죽 읽어내 렸다. 그리고 한번 더 읽었다. 서신을 다 읽은 법황은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다음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이제 플로라와 그레이엄은 서신을 훔쳐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책상 위를 흘깃흘깃 바라보면서 법황을 쳐다보았다. 그때 법황은 갑자기 책상으로 돌아왔 다.
법황은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양피지와 펜을 끌어와 뭔가를 일필휘지로 주욱 써내려갔다. 쓰기를 마친 법황은 그것이 잘 마르도록 습지를 대고 몇 번 문지른 다음 그레이엄에게 내밀었다.
“답장일세. 그 자에게 보내.”
그레이엄은 정중히 그것을 받아들고는,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성하?”
“왜? 글씨를 못 알아보겠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죽어!’라는 한마디뿐이니..”
이번엔 플로라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법황은 알아보면 되지 않느냐는 얼굴로 그레이엄을 쏘아보았고 법황 비서관 그레이엄은 살포시 진땀을 흘 리며 말했다.
“제가 펠라론에서 법황 성하들을 모셔온 지도 40년 가까이 되옵니다만, 이러한….. 어…… 범상치 않은, 그러니까, 독특한 서신을 받았던 경험은 전 무하군요.”
“감사하지 않아도 돼. 쑥스러우니까.”
“……감사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성하. 이것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품위를 생각하십시오.”
“영면해! 라고 적을까?”
법황은 진심인 것처럼 되물었고 그레이엄은 다시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역시 거의 전설적인 비서관이었고 따라서 그레이엄은 가까스로 법황의 의도가 명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그러나 문장과 단어의 선택은 자신이 맡겠다는 내용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화가 풀린 퓨아리 스 4세는 플로라와 그레이엄을 위해 휘리의 서신을 읽어줄 정도의 아량도 되찾게 되었다.
“근계. 성하의 미욱한 종 휘리 노이에스가 무릎을 꿇고 하례드리며 성하의 아들딸의 말을 대신 전해 드립니다. 어리석음으로 통치하고 폭압으로 군 림하는 지도자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 등의 주민들의 신음성이 주님의 미간을 찌푸리게 할 지경이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눈물 흘리시던 신도 중의 신도이신 다벨 공작 프란체스코 메르데린께서 소인으로 하여금 그들이 잃었던 것을 그들의 품에 되돌려주고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것을 그들의 어깨에서 치우게끔 명하셨습니다. 이에 소인은 모자란 재주 대신 주님의 정의를 실 천한다는 사명감으로 어리석고 무례한 양치기들을 멀리 쫓아내고 주님의 선한 양들을 주님의 목초지로 이끌었나이다. 이를 성하께 보고드림은 저의 기쁨이자 동시에 성하의 기쁨일 것이라 사료되어 이렇듯 붓을 들었사오니, 성하께선 저들의 광복을 축하해 주시고 저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셨으면 감사하겠나이다. 아울러 이 새로운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 그들을 축복하고 주님의 길로 이끌 추기경을 임명해 주신다면 그것은 다시 없을 기쁨일 터,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에 어울리는 덕과 지와 헌신을 보여온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공작께 추기경의 위를 서임하심이 적합할 듯……… 이 개놈 의 자식이!”
결국 분을 참지 못한 퓨아리스 4세는 서신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점점 높아지던 법황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플로라와 그레이엄은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내동댕이친 서신 위에서 발을 구르며 서신을 짓밟아대고 있는 부활의 법황의 모습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법황은 팔짝 팔짝 뛰면서 외쳤다.
“뭐라고? 이러이러한 땅을 접수했으니 축하해라. 그리고 축하 선물로는 추기경 자리가 좋을 테니 그것을 내놔라? 그레이엄, 취소다! 그대로 적어보 내라!”
“음. 어흠. 퍽 무도한 서신임은 확실하군요, 성하. 그러나 개를 향해 짖어대는 것은…..”
“이 자식이 나를 미치게 만들잖아! 지금 이놈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난 개라는 욕을 들어도 좋으니 놈의 다리를 물어뜯어줄 심정이란 말이다!”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왈왈거리는 법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레이엄은 무수한 단어들을 허공에 날려보냈다. 평소라면 일주일 정도 사용할 말들을 한꺼번에 소모해 버린 다음에야 그레이엄은 법황을 진정시켜 의자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레이엄은 슈팔데와 서신과 답장을 챙겨든 다음 녹초가 된 얼 굴로 방을 나섰고 플로라는 동정심 어린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숨을 들이켰다. 법황은 비서관이 나가자마자 벌떡 일어났 던 것이다.
플로라는 재빨리 집무실을 주욱 둘러보고는 빠르게 말했다.
“그 산호 문진은 절대 안 됩니다.”
“그냥 뭐 묻었나 싶어서……………
“아리스 3세의 초상화도 안 됩니다.”
“액자가 약간 비틀어진 듯하여…….”
플로라의 적극적인 개입에 힘입어 법황 집무실의 집기들은 잔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박살내지 못한 퓨아리스 4세는 그만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방 안을 뱅글뱅글 돌게 되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플로라는 언젠가 좀 저렴하고 깨부숴도 상관없는 물건들 몇 개를 집 무실에 갖다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요즘 유행하는 시쳇말처럼 정말 ‘휘리 노이에스의 서신 같다’로군요. 왜 그런 서신을 보내었을까요.”
“무엄하게도 법황과 알력을 벌여보고 싶다는 거지. 괘씸한 놈!”
“단지 그런 이유에서일까요?”
“그게 아니면 뭐겠어? 이 얼어죽을 자식은 성무 금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어. 제기랄, 다벨군의 군목들이 축복도 못해 주고 있는데 도 불구하고 자신이 연전연승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는 거잖아!”
플로라는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플로라는 법황의 혜안에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 곧 자랑이군요. 그렇다면……?”
“그러니 내가 여기서 떠드는 건 자신에게 간지러운 일도 못 되니 좋은 소리 듣고 싶으면 차라리 자기한테 협조하라고 말하는 거잖아. 이 때려죽일 놈의 자식!”
플로라는 그제서야 휘리의 서신을 이해했다. 그 공손하면서 어이없는 서신은, 그런 내용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협박 편지였던 것이 다.
“무서운 자로군요.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정말 섬뜩합니다. 어떻게 다벨의 병사들은 축복을 받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휘리 노이에스를 위해 싸우 는 걸까요?”
“메르데린 스쿨이다.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이 자기 나라를 거대한 사관학교처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 말이야. 그게 효과를 나타내는 거 지. 그 덜떨어진 황제병 환자 녀석은, 그래도 할 건 해두는 치밀한 놈이란 말이야. 그게 바로 정신병자라는 증거이긴 하지만!”
“전 한 가지가 의아합니다.”
“뭐가?”
플로라는 이 말이 법황의 화를 가라앉힐 것인지 더 북돋을 것인지 판단해 보려 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의 서신에서 노이에스 장군은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록소나는 아직 정복되지 않았잖습니까? 게다가 그곳에선 브라도 경께서 기다리고 계시고요. 전투가 벌써 일어난 걸까요?”
플로라는 기뻤다. 법황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멈춰 섰기 때문이다.
“어라? 아니.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녀석은 록소나를 이미 가진 것처럼 적어 보냈군. 이게 무슨 의미지? 서 브라도가 록소나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플로라는 더더욱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법황은 의자에 주저앉은 다음 생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플로라는 법황이 생각할 때 필요한 것 — 다량의 술 – 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부활의 법황 퓨아리스 4세는 부활의 선행 조건을 완료했다. 부활하려면 물론 반쯤 죽어야 한다.
“언젠가 봤던 꼴이군. 항상성을 가진단 말이지?”
세실은 푸념하듯이 말했다. 키 드레이번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카밀궁을 쏘아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몸을 세차게 때리고 있는 이곳에서 세실은 치마를 부여잡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돌아가자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동의도 받지 않고 따라나선 길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해뜰녘, 밤새 부어오른 라이온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던 세실은 키 드레이번에게 따지기 위해 그의 방을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서 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세실은 당황하여 ᅳ 세실은 그가 단신으로 카밀궁으로 쳐들어 갔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키에겐 이미 그 런 전과가 있었다. 여관을 뛰쳐나왔고 다행히도 대로 저편을 걸어가는 키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실은 얇은 치마 한 장을 걸친 채 바닷바람이 세차게 솟아오르는 절벽 위까지 키를 따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세실은 키가 왜 이곳 으로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라트라인 외곽의 이 절벽은 바로 카밀궁이 위치한 만을 둘러싸는 곳이었다. 이 곳이 있기에 카밀궁에는 바람 한 점 새어 들지 않았지만 덕분에 이 곳에는 절벽에 부딪힌 바람이 맹렬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키는 그 바람 속에 꼿꼿이 선 채 카밀궁을 쏘아보고 있었다.
뒤집힐 것 같은 치마를 다시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리며 세실은 이것이 자신과 라이온의 신세를 잘 단순화시킨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동의 없이 따라 나선 동행은 앞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마음대로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라이온과 세실은 떠나지 못한다. 세실은 자신에게 푸념처럼 질문했다.
‘왜? 관두고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갈 수도 있어. 거기서 깡패와 불량배, 건달들의 레이디가 되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내 인생에 가장 즐거웠던 시기만 생각하며 진짜 예쁘게 늙은 할멈처럼. 발사된 포환에 매달려봐야 같이 죽기밖에 더 하겠어.’
“라이온이 많이 부었어. 홍역하는 어린애 같던데.”
“뭘 말하려는 건가.”
대답할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세실은 약간 당황했다. 키는 여전히 절벽 아래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세실이 들은 목소리는 키의 것이었다. 세실은 다 시 치맛자락을 추스른 다음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서 말했다.
“미안한 척해 봐.”
“싫어.”
“그럼 죄의식에 몸부림쳐 봐.”
“싫어.”
정확하게 돌아오는 키의 대답을 들으며 세실은 장난기로 두 눈을 번쩍거렸다.
“많이 봐줬다. 그럼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그 절벽에서 몸을 던져봐.”
실망스럽게도 이번엔 키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키가 못 들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지만 세실은 한번 더 말해 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때 키가 말했다.
“신에게 빚진 것은 없다.”
“뭐야?”
“신에겐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
세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키의 코트자락은 아우성처럼 펄럭이고 있었지만 그 등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세실은 손바닥 을 조금 문지른 다음 두 볼에 대어보았다. 볼은 차가웠다.
세실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정면 승부라고.’ 세실은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럼 오스발에겐?”
키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정면 승부로 결정한 세실은 지체 없이 2탄을 발사했다.
“달아난 모든 노예를 죽여야 하는 주인은 없어. 오스발이 너에게 진 빚은 뭐지?”
율리아나 공주를 빼돌렸지.”
“허? 이봐, 키 드레이번. 날 속이고 싶거든 좀더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게 좋을걸. 그건 이유가 아냐. 너도 알고 있는….”
“내가 너에게 진 빚은 뭐냐?”
세실은 잠시 말을 잊었다.
절벽 위에 돋아난 풀잎들이 사납게 흩날렸다. 절벽 끝에 선 검은 고목의 모습이던 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키는 창공을 향해 말했다.
“넌 왜 날 따라다니는 거냐. 마법사 세실리아.”
더 이상 치맛자락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세실은 땅바닥을 둘러보았다. 덩굴이 뒤덮인 통나무 같은 것을 발견한 세실리아는 그 위에 걸터앉아서는 절벽 끄트머리에 선 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키는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세실은 치맛자락을 무릎 사이로 쑤셔넣으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나는 알고 싶어.”
“뭘.”
“네가 무엇인지.”
“하나 만들어 가져.”
“……만들라고?”
“그래.”
“보통은 나도 그렇게 해. 인상을 만들고 느낌을 만들고, 그래서 내 속에 하나 만들어놓은 다음………… 상대방을 만나면 그를 보는 대신 내 속에 있는 것 을 꺼내보지. 그러곤 상대방 대신 내 속에 있는 그와 대화해. 그리고 그걸 대화라고 믿지. 때론 그걸 사랑이라고 믿기도 하고 증오라고 믿기도 하 고………… 그래. 나도 그렇게 해.”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어.”
“그런가.”
“믿을 수 없지만……… 진짜 안 돼. 마치 백과사전 같은, 시집 같은… 씨앙, 요약본이 안 만들어진다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설명해 봐, 키 드레이번.”
“멍청하기 때문이겠지.”
“너 대패질 할 일 있으면 혓바닥으로 하지? 못된 녀석.”
“받아들일 수 없으면 걷어차면 될 거 아닌가.”
“내 열쇠인 것 같아서 걷어찰 수가 없단 말이다! 멍청아!”
“열쇠? 무엇으로의.”
“몰라. 아직 열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어.”
“역시 멍청하군.”
“넌 그런 느낌 가져본 적 없어, 키 드레이번?”
“무슨?”
“정말 이게 전부인가 하는 느낌 말이야. 정말, 정말….. 이것뿐인가 하는 느낌. ‘다 그런 법’이라는 정말 끝내주게 훌륭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걸로도 설명이 안 되는………… 그 초조함과 불안함 말이야! 그냥, 그냥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죽을 때까지만 살고 다 산 다음엔 죽으면 그만인 것인가 하는………… 그것뿐이야? 그러기엔, 그러기엔 그 알 수 없는 곳, 세상이라는 장막을 걷기만 하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곳으로부터 배어나 와 내게 스며드는, 스며드는 그것이……”
키의 어깨가 천천히 돌아갔다.
키는 몸을 반쯤 돌린 채 땅바닥에 앉은 세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소맷자락과 바지는 바람에 부대껴 맹렬히 떨고 있었고 그 머릿결은 검은 불꽃처럼 파르락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얼굴과 그 멀게 보이는 얼굴에서도 더욱 멀어지는 눈동자는 저주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세실은 그 시선을 마주보며 나직하게, 하지만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뭔가가 있어?”
키는 그저 옆눈으로 세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고 세실은 그 얼굴을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해석할 수 없었다.
“있다면 말해 줘. 아니, 말해 달라고 하지 않겠어.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돼. 네가 보여주길 바라며………… 이렇게 따라다니고 있단 말이야. 너무 오래 연기해 둔 죽음도 이젠 그리워지고 있어. 이건 동정해 주길 바라는 건 아냐. 미련한 짓을 더 하고 싶진 않다는 뜻이야.”
세실은 숨을 골랐다.
“너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그냥, 그냥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고 체념해 버리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아. 한 번의 실망이었다 면 그렇게까지 좌절하진 않겠지만, 두 번이나 실망하는 건 견딜 수 없을 거야. 제길, 생각해 보니 네가 나빴어. 이건 네 잘못이야. 키 드레이번. 네가 나에게 무슨 빚을 졌냐고 물었나? 그게 네 빚이야. 내게 다시 가능성을 보여준 거.”
세실은 고개를 약간 떨구며 킥킥 웃었다.
“억지 부린다고 말하지 마. 진짜 억지 부리는 거니까. 첫 번째는 어떻게 됐냐고? 바보같이 죽어버렸지. 그 자도 너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남자였지. 너무 늦게 도착한 친구를 원망하지도 않은 채 죽었지. 얼간이들은 그가 대범해서 그랬다고 믿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작자는 처음부터 친 구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었거든. 너처럼.”
키는 ‘친구’라는 말에 ‘구두 뒷굽’이라는 말을 듣는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세실을 바라보았다. 세실은 그 얼굴을 보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알버트 렉슬러? 아마 그럴 테지. 알버트 선장이 네 유일한 친구겠지. 그래, 그럴걸. 이제 완벽하게 똑같아! 그리고 아마 너도 알버트 렉슬러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그를 걷어찰 거야. 리포밍된 싱잉 플로라를 걷어찼던 그 작자처럼! 플로라에게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고, 지독한 일이었어! 그 불쌍한 것은…. 어쩌다 그렇게………… 아냐. 알면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라. 그건…………”
세실의 혼자말은 계속되었다. 키가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세실은 그 나이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오래 계속된 생에서 얻은 너무 많 은 경험들에 짓눌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추억 속의 사람과 혼동하며 혼자말을 하는 모습. 그렇게 계속되던 세실의 말에 흥미를 잃은 키가 다시 고개 를 돌리려 했을 때였다. 키는 갑자기 세실의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대로 계속 가. 난 보기만 하면 돼.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신경 쓰지 마.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그냥, 그냥 그대로 가. 그렇잖아도 그럴 생 각이겠지만. 젠장. 혼란스러워 죽겠어. 내가 왜 이럴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 그러니까 하고픈 말은.”
키는 반쯤 돌리던 고개를 멈춰 어깨 너머로 세실을 쳐다보았다. 세실은 손을 뻗어 풀잎을 뜯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듯했다. 세실은 갑자기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다 털어놓고 나니까 속 편하다는 거야.”
“좋겠군.”
“걱정하지 않겠어. 넌 보여줄 거야. 믿어.”
세실은 빙긋 웃은 다음 바다를 돌아보았다. 외해의 바다는 육중한 잔물결로 반짝이고 있었고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정신없이 미끄러졌다. 세실이 치 맛자락을 추스르며 일어나려 했을 때 키가 말했다.
“거기 있어.”
“뭐?”
“거기 앉아 있으라고.”
세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키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키는 여전히 몸을 반쯤 돌린 자세로 서 있었다.
“앉아 있으라니? 왜?”
키는 대답하는 대신 등에 매고 있던 헝겊 꾸러미를 풀어내렸다. 물론 저 안엔 복수가 들어 있다. 세실은 섬뜩함을 느꼈지만 키는 복수를 허벅지쯤에 내려둔 채 그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실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각자 상자를 메고 나타났다. 그렇게 큰 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헉헉거리며 꽤나 힘들게 올라오고 있었다. 세 실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들도 키와 세실을 발견했다. 사내들의 얼굴에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사내들은 상자를 내려놓고는 서로를 잠시 쳐 다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허? 여기 웬 사람이지?”
세실은 뭐라 대답할까 하다가 키에게 넘겨버리기로 했다. 키는 차분하게 말했다.
“좋은 아침이오.”
“어, 그렇소. 좋은 아침이군.”
“경치 구경하러 온 사람들 같진 않군. 웬 짐을 그렇게 가져온 거요?”
“어허!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시오. 댁들은 그럼 경치나 보러 온 거요?”
세실은 말을 하던 사내 뒤편으로 다른 사내들이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자신을 흘끔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어이구, 미련한 꼬마놈들. 주제에 사내라고……………’ 등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키가 대답했다.
“그렇소. 재미있는 경치더군. 이상한 것도 발견했고.”
“헛? 이상한 것?”
“나는 이 높은 절벽 위에 대포를 가져다놓은 게 누군가 궁금했거든. 아마 화약 상자와 포환 상자를 들고 온 놈들과 같은 인물들이겠지.”
사내들이 일사불란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황당해하던 세실은 문득 키의 말에 들어 있던 ‘대포’라는 말에 주의를 돌렸다. 대포라니? 문득 세실은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덩굴이 덮여 있는 길다란 통나무 같은 것. 세실은 기가 막힌 얼굴로 재빨리 덩굴을 뜯어내었다. 그러자 굳이 두드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금속성의 포신이 나타났다. 키는 차분하게 말했다.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는 레모 산이지. 옮기는 데 밤새도록 걸렸겠군.”
“허. 힘들긴 했지.”
키는 씨익 웃었다.
“암살은 아닐 테고, 그럼 뭐지.”
세실은 벌떡 일어나 절벽 저편을 바라보았다. 높이차가 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카밀궁과 절벽 사이는 탁 트인 공간이다. 탄도학에 자신 있는 자라면 허공에 적당한 포물선을 그린 다음 카밀궁을 저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한계일 뿐, 암살을 원한다면 차라리 활을 준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들은 설명하는 취미는 없었다.
“죽여!”
세실은 외치려 했다.
‘멍청이들, 그냥 항복해!’
그러나 세실은 그 말이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실은 세 명의 사내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두 명은 얼굴과 가슴에 치명상을 입었고 등에 칼을 맞은 사내는 한 명뿐이었다. 도망치려다가 칼에 맞은 세 번째 사 내였다.
키는 그 세 번째 사내를 발로 뒤집었다. 사내는 경련을 일으키며 신음을 내질렀지만 키는 잔인하게 그 가슴을 내려밟은 다음 질문했다.
“설명할 거 있으면 하고 죽어.”
“지옥에서…… 보자구.”
키는 핏 웃었다.
“보고 싶은 생각 없어. 그러니 내가 찾아갔을 때 낯짝 내밀지 마.”
키는 사내의 가슴에서 발을 떼곤 그들이 내려놓은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세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신음하는 사내들을 돌아보다가 외쳤다.
“어떡해! 사람들 불러올까? 응?”
키는 아무 말 없이 복수를 한 바퀴 돌려 거꾸로 쥐고는 상자의 뚜껑과 몸체 사이에 지렛대처럼 쑤셔넣었다. 그의 팔이 약간 움직이자 상자 뚜껑이 뻐 개지며 그 안에 든 것이 나타났다. 키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내용물을 살폈다. 잔뜩 화난 얼굴로 키에게 걸어간 세실은 따지듯이 물었다.
“그게 뭔데?”
키가 내려다보고 있는 상자 안에는 이상하게 생긴 쇳덩이가 들어 있었다. 세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환이야?”
“그렇다.”
“무슨 포환이 그렇게 생겼어?”
“작렬탄이다.”
“뭐?”
“포환이 폭발한다는 뜻이야. 포환이라기보단 포탄이라고 불러야겠지. 드디어 이걸 만들어내었군.”
“포환이 폭발해? 쇳덩어리가 어떻게?”
“폭발하게 만들어놨으니까.”
“……젠장! 너 매일밤 잠들기 전에 가슴에 손 얹고 내일은 무슨 말로 다른 사람들 복장 뒤집어줄까 고민해 보고서야 잠들곤 하지?”
키는, 바로 그것이 세실이 원하는 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피식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