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5화
알레미지우스 평원은 탁 트인 전장이었다.
고저차도 거의 없고 언덕이나 강 등의 전술적인 고려가 있을 수 있는 지형도 없었다. 가느다란 시냇물과 약간의 갈대밭이 있었지만 거의 무시될 수 있을 정도였다. 굳이 장애물이랄 것을 찾아보라면 지금 바탈리언 남작이 앉아 있는 절벽 정도일 것이나 너무 높고 가팔라서 군사를 움직일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고원의 바위 위에서 바탈리언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벨군을 맞이하는 브라도 경으로서는 이곳보다 더 나은 전장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기병들에겐 거의 완벽한 전장이었다. 남작의 우필이 날카 롭게 달렸다.
‘노장은 이곳을 전장으로 결정한 것만으로도 젊은 장수에게 충분한 보답을 했다. 나이 지긋하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가 삼가고 조심하는 것은 당 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흔히들 피가 끓는다고 표현하는, 자제력과 비겁함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나이의 젊은이가 모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가 능성에도 불구하고 삼가하고 조심하는 것은 정녕 대단한 일이다. 젊은 서 하빈저는 그 높은 지위로써 객원 참모인 서브라도를 얼마든지 억누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또한 노장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아 록소나군을 불명예스럽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 브라 도를 감탄시켜 그로 하여금 록소나군을 존경하게 하는 예의를 보였으니, 고명한 노장을 위해 베풀어진 서 하빈저의 이 훌륭한 자제력에 대해 서 브라 도는 당연히 최상의 보답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레미지우스 평원으로 다벨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서 브라도는 서 하빈저와 록소나군에 대해 충분한 보답을 한 셈이다.’
바탈리언 남작은 잠시 우필을 멈추고 동쪽, 즉 다벨군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특등석이라는 생각을 되뇌이며.
그러나 이것을 또다른 젊은 장수의 객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휘리 노이에스의 입장에서 기병들의 기동력이 극대화되는 이러한 전장은 단연코 피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보급이 단절되었다는 압박감이 그를 이런 불리한 싸움으로 몰아낸 것일 수도 있다. 팔라레온을 잃고 다케온에 안 정된 보급선을 구축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온 다벨군은 분명 보급에 심각한 괴로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빠른 시간 내에 승부를 보아야 될 필 요성은 이해된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전장으로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마저 없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휘리는 알레미 지우스 평원의 회전에 응했다. 그렇다면 휘리는 당대 최고의 기병 지휘관과 제국 최고의 기병들의 조합을 이런 탁 트인 전장에서 상대할 자신이 있었 던 것이거나, 아니면 전술한 대로 서 브라도의 유인에 빠진 것이리라. 제국 최고의 기병대를 맞이하여 다벨군이 펼친 진형을 볼 것 같으면 거기선 하 나의 장점이 보이기는 한다. 적어도 동쪽에 위치한 그들은 해를 등지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풍이 불고 있으므로 바람을 안고 싸우게 된다 는 점은 그들의 또다른 문제거리였다.’
바탈리언 남작은 우필과 종이 뭉치를 내려놓고 잉크병으로 눌러 날려가지 않게 해놓은 다음 평원을 천천히 조망해 보았다.
양군은 거의 진형 구축을 마무리한 상태였다. 동쪽에 위치한 다벨군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막대한 대포의 숫자였다. 전방에 흙무더기를 쌓아올린 다음 그 뒤쪽으로 100문 가까운 포병대가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약 50피트 가량의 약간 긴 거리를 두고 그 뒤쪽으로 2,500명의 중장 보병대로 구성된 본진이 중앙 배치되어 있었고 1,000기의 중장기병과 800기의 경장기병이 각자 좌측과 우측에 서 있었다. 그리고 2,000명의 노예 부대와 1,000명의 경장보병은 본진의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최초로 팔라레온을 침략할 당시의 8군단 병력은 7,000이었다. 그것이 팔라레온과 다 케온과의 전투에서 손실을 입고 주둔군을 분리시키는 바람에 대폭 줄어 있었으나 팔라레온의 패잔병과 다케온의 패잔병, 그리고 노예병 등을 끌어모 은 덕분에 7,300의 병력으로 록소나군에 대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록소나군은 거의 순혈의 기병 부대였다. 대기병 최강의 부대라는 리저드라이더 부대를 두 번이나 격파했던 2,500기의 중장기병이 창 을 곧게 세워들고 전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로 각자 500기, 700기의 경장기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뒤쪽으로는 2,000명의 중장보병과 1,000명의 경장보병이 횡대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500명 가량의 궁수대가 뒤쪽으로 보인다. 도합 7,200의 병력으로 숫자에 있어서는 다벨군 과 비슷하다. 그러나 기병대의 숫자에선, 다벨 역시 많은 기병을 끌어모았음에도 불구하고 3,700 대 1,800으로 록소나 쪽이 두 배가 넘는 숫자를 자 랑한다. 역시 마왕의 군대다운 모습이었다. 물론 보병의 숫자로는 5,500 대 3,000으로 다벨군이 훨씬 많지만 다벨군의 보병 중 2,000명 가량은 노 예병이므로 기병에서의 열세를 만회할 정도라곤 볼 수 없다. 따라서 다벨군에게 있어 유리한 점이라곤 바탈리언 남작이 지적한 대로 해를 등지고 싸 운다는 점과, 100문이나 되는 대포의 숫자뿐이다.
전투가 시작된 것은 이슬이 마르는 시각, 제2시 무렵이었다.
먼저, 록소나군의 전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특등석에서 바라보고 있던 바탈리언 남작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록소나군은 돌격하지는 않았 다. 도합 3,700기나 되는 기병들은 일사불란하게 다리를 들어올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마치 퍼레이드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 병대와 궁수대 역시 천천히 걸어갔다. 이에 대해 다벨군은 일단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양쪽의 거리가 600피트 가량으로 줄어들었을 때 최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록소나군의 뒤쪽에 있던 궁수대가 걸음을 멈추고 활을 당겼다. 빗발처럼 쏟아진 화살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다벨의 최전선을 강타했다. 최전선에 있 던 다벨 포병대는 이에 응수하듯 대포를 발사했다. 하지만 600피트는 대포의 사정거리를 약간 벗어난 거리다. 따라서 적군 중앙의 중장기병을 겨냥 하여 발사된 다벨 포병대의 포격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록소나군의 궁수대는 흙무더기 뒤편에 있는 다벨 포병대를 간단히 명중시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대포보다 훨씬 긴 사정거리뿐만 아니라 적군을 향해 불고 있는 서풍도 도움이 되었다. 다벨 포병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화살에 당황 하여 피하기 바빴고 다벨 포병대가 주춤거리는 기색이 보이자마자 록소나군 가운데서 우렁찬 돌격 신호가 솟아올랐다.
“성 엑시아의 말채찍에 걸고, 돌격!”
바탈리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주먹을 불끈 쥔 채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성녀 엑시아가 말채찍으로 후려친 듯한 모습이었다. 3,700기의 기병이 폭발하듯 돌진했다. 곧게 뻗은 창과 중장기병의 갑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빛 섬광이 어우러져 강철의 격류가 알레미지우스 평원을 치달아 다벨군에 쏟아지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궁수대로 상대편의 유일한 장 점인 포병을 봉쇄시키고 바로 그 순간 3,700기의 중장기병이라는 막대한 힘을 개방시킨 서 브라도의 전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었다. 산의 뿌리까 지 뒤흔들어놓을 듯한 굉음과 함께 돌격하는 수천 기의 기병은 가장 서 브라도다운 모습이었고, 적어도 그 순간 록소나군의 승리를 의심할 사람은 아 무도 없을 듯했다.
“좋아, 모두 튀어! 달음박질에 자신 없는 자식들은 그냥 엎드리고!”
다벨군의 최좌익에서 나타난 서 소팔라는 이렇듯 친절하게 외쳐준 다음 횃불을 들어올렸다. 그가 횃불을 들어올리는 것을 신호로 본대를 형성하고 있던 다벨 중장보병대는 즉각 뒤로 물러났다. 뒤쪽의 전우 때문에 물러날 수도 없었던 최전열은 그냥 머리를 감싸쥐고 납작 엎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벨군의 최우익에서는 역시 횃불을 든 서 소사라가 나타났다. 그리고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들은 형제들만이 할 수 있는 타이밍으로 동시에 땅 에 횃불을 내려찍은 다음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불꽃은 땅에서 탁탁 튀다가 곧 맹렬한 속도로 화선을 이루기 시작했다. 화선은 다벨군의 포병대가 쌓아놓은 흙무더기를 향해 수렴되었다. 압도적인 기세로 달려오던 중장기병들은 다벨군의 최좌익과 최우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못했지만 높은 곳에 있던 바탈리언 남작은 그 모습을 똑똑 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그러나 비명은 그보다 더 큰 폭발음 때문에 묻혀버렸다.
록소나 중장기병의 제일파가 도착한 순간, 흙무더기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100문의 대포가 포진하고 있던 흙무더기는 그대로 화산이 되어 작열했다. 다벨군 최전선에 불의 강이 생긴 형상이었다. 가장 앞쪽에서 달려오던 록 소나 기병들은 폭발에 정면으로 노출되었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탄화되어 허공으로 치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달려들던 록소나 중장기 병들 역시 말을 멈추거나 되돌릴 겨를도 없이 폭발의 벽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 폭발 앞에서는 철갑으로 보호되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끔 찍한 화기는 철갑을 달아오르게 했고 그래서 그 안의 기사는 화덕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사람과 말의 비명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록소나군의 본영에서 서 브라도는 이를 악문 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옆에서 총사령관인 서 하빈저는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흙무더기가 아니라… 화약 상자였군요. 아무리 그래도 포병대의 발 아래에 화약 상자를 묻어두다니.”
“저 자식은 대포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록소나군의 참모 한 명이 분노하여 외쳤다. 서 브라도는 그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휘리 노이에스는 지금껏 대포를 쏘는 것보다는 주로 박살 내는 식으로 사용해 오고 있었다. 그가 대포를 제대로 사용했던 유일한 예는 판도 전투였지만 그때도 팔라레온의 대포를 사용했을 뿐………… 서 브라도 는 순간 경악하여 외쳤다.
“저건 팔라레온의 대포요!”
다벨 총사령관 휘리 노이에스는 자신의 본대 앞에서 산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록소나 중장기병대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100문이나 배 치했던 대포는 사실 다케온에서 무시무시한 제압사격을 벌인 결과 모두 고철이 되었던 팔라레온 대포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묻어놓은 화약 상자는 피린데 성공성전에서 네그리파 백작으로부터 입수한 것이었다. 화약의 무시무시한 폭발이 땅을 뒤엎고 청동제 대포가 사방을 나뒹굴게 되자 록소나 의 중장기병들은 더 이상 돌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돌격하던 관성은 여전했고, 그래서 중장기병 내에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 혼란의 수위를 면밀히 관찰하던 휘리 노이에스가 마침내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신호에 따라 다벨군의 좌측에서는 서 켈커의 지휘를 받는 중장기병이, 그리고 우측에서는 서 기리우의 지휘하에 경장기병이 돌격을 시작했다. 좌측에서 뛰쳐나간 1,000기의 다벨 중장기병은 앞쪽에 있는 700기의 록소나 경장기병에게 돌격했다. 그리고 우측의 800기의 다벨 경장기병은 500기의 록소나 경장기병과 격돌했다. 놀랍게도 양쪽 모두 다벨군 측의 숫자가 더 많았다. 중앙의 중장기병들이 상대방의 본대를 밀어붙일 때까지만 버티게 하기 위해 좌우익에 그런 적은 숫자를 배치했던 록소나 수뇌진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결과였다. 기병의 숫자가 더 적음에도 불구하고 실 제 격돌할 때는 더 많은 숫자로서 격돌하게 한 휘리의 재주는 상대방의 주병력을 봉쇄시켰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그것은 베테랑 병사들에게도 잘 이해되는 전술이었다. 자신들의 봉쇄가 풀리지 않는 이상 전역 전체에서 록소나군의 기세가 약화된다는 것을 깨달 은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노성을 지르며 사그라드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약의 폭발은 강렬했으나 연료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에 폭염은 어느새 줄어들고 있었다. 맹렬한 타격을 입었으나,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폭파 지점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다벨의 정예 중장보병들이 방패를 세워든 채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록소나 중장기병들에게는 돌격 거리가 없었다. 다벨 중장보병들은 멈춰 서다시피 한 중장기병들을 향해 밀집 대형을 짜고 전진했다. 그리하여 그들 로 하여금 계속해서 소폭발이 일어나곤 하는 폭파 지점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창을 팽개치고는 검을 뽑아 휘두르고 메 이스를 후려쳤으나 밀집 대형을 짠 중장보병은 그런 중장보병만이 가능한 굉장한 기밀성으로 중장기병들의 공격을 버텨내었다. 그리고 그들이 버텨 내는 사이 좌우의 다벨 기병들은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록소나 경장기병들을 손쉽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특히 서 켈커의 중장기병대는 록소나 경 장기병들을 상대로 맹렬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고 전장의 그 지점에서 들려오는 건 록소나인의 비명뿐인 것 같았다. 록소나 본영에 있던 서 브라도로 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중앙의 중장기병대는 적의 중장보병대와 맞대결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본대를 우회 기동시켜 전역에 새로운 힘을 투입시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문제는 좌익과 우익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였다. 판단을 내린 전 제국 기사단장 브라도 켄드리드는 거대한 함성을 질렀고, 그의 명령은 중계될 필요도 없이 본대에 곧장 전달되었다.
“전진! 우익의 경장기병대를 구출하라!”
서 브라도의 지시 하에 본대를 형성하고 있던 록소나 중장보병이 일제히 우측으로 움직였다. 서 브라도는 적군 좌익의 부대, 즉 서 켈커에게 두드려 맞고 있던 700기의 경장기병대를 구출하기 위해 본대를 전진시켰다.
높은 절벽에서 바라보고 있던 바탈리언 남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 브라도는 좌익의 500기보다는 우익의 700기와 연합하여 우회 기동하는 것 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우익의 경장기병대의 지휘관 역시 본대의 움직임을 보고는 부대를 더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중앙의 중장기병대 와 우익의 경장기병대 사이에 빈틈이 생기자 본대를 형성하고 있던 2,000명의 중장보병대와 1,000명의 경장보병이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서 켈커의 중장기병대로 향하는 록소나의 압박이 순식간에 3,700으로 늘어났다. 다벨 중장기병들의 기세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벨 역시 아직 투입되지 않았던 경장보병과 노예병이 남아 있었다. 경장보병대의 선두에서 서 소사라가 나타났다. 서 소사라는 휘하 부대를 향해 외쳤다.
“자, 계획대로다. 가자!”
경장보병대는 함성을 지르며 우측으로 뛰어나갔다. 다벨 중장보병들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자신의 좌측에서 갑자기 나타난 다벨 경장보병들의 모습에 곤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다벨 중장보병대는 뚫릴 생각도 하지 않는 데다가 좌측(보통, 무기가 없는 쪽)으로부터 경장 보병들이 나타나자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반포위되는 형국에까지 빠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노예병들의 선두에서는 서 소팔라가 나타났다. 소팔라는 방패를 요란하게 내팽개치고는 두 손으로 검을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피를! 내게 록소나의 피를 다오!”
“으아아아!”
노예병들은 사나운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그들은 놀라운 기동성으로 뛰쳐나갔다. 아군의 중장보병과 적군의 중장기병이 맞 서싸우고 있던 전역의 왼쪽으로 단숨에 돌아나간 노예병들은 서 켈커의 중장기병대와 연합하여 록소나의 중장보병에 맞서싸우기 시작했다. 그들 역 시 적군의 왼편에 나타난 형국이 되었고 그러자 록소나 중장보병들은 주춤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 그때까지 잘 버티던 서 켈커는 자신의 중장기병들 에게 강제 돌파를 명령했다. 록소나 중장보병들은 밀집 진형을 짜고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그러나 전장의 저 북쪽에서 500기의 록소나 경장기병대를 멀리 쫓아버린 서 기리우의 다벨 경장기병들이 달려오기 시작하자 그들의 얼굴에서도 핏 기가 가셨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 서 기리우는 록소나 중장보병들의 배후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서 켈커, 서 소팔라, 서 기리우의 세 부대에 포위된 록소나 중장보병과 경장보병들은 안쪽으로부터 터져나온 공포 속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서 소팔라 자신으로부터 초반의 폭발력만으론 제국 의 어떤 군사력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은 바 있는 노예부대는 록소나군의 공포를 냄새 맡자마자 야수로 돌변하여 록소나 중장보병대의 척추까 지 부러뜨릴 정도의 공격을 퍼부었다. 노예 부대에 의해 양단된 중장보병대는 좌우에서 쳐들어오는 서 켈커와 서 기리우의 기병 부대에 의해 참혹하 게 유린되었다.
배후의 본대가 그토록 유린되는 모습을 보자 록소나군의 중장기병들 역시 싸울 의욕을 잃고 말았다. 전방의 다벨 중장보병들은 끄떡도 하지 않은 채 록소나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배후에서 싸우고 있는 본대가 무너질 경우 자칫하면 완전 포위당할 지경이었다. 록소나군 중장기병대는 전장을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서 기리우가 비워준 전장의 북쪽을 이용하여 절도 있게 빠져나갔고 록소나군의 본영에서는 그들의 행동을 비겁 행위 로 간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침울하게 중장기병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3개 부대의 맹공을 받고 있던 록소나 보병들은 빠져나올 틈도 얻지 못했다. 본영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브라도 켄드리드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서 하빈저가 기성을 올렸다.
“서 브라도! 왜 말에 오르십니까?”
“제게 중장기병을 주십시오, 사령관님. 저들을 구출해 오겠습니다!”
“안 됩니다, 서 브라도. 경은 제국의 보물입니다. 경께서 자칫 해라도 입으신다면 우리는 폐하께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브라도 경은 거칠게 날뛰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채고는 말했다.
“서 하빈저.” 브라도 켄드리드는 지금껏 계속 사용해 왔던 ‘사령관님’이라는 말 대신 그렇게 불렀다. 서 하빈저는 굳은 얼굴로 대선배 무인을 바라보 았다. “나는 이 이상 경과 록소나에 죄를 지을 순 없소. 당신들이 나를 믿고 맡겨준 젊은이들이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라 하더라도, 나는 그 들을 반드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어줘야겠소. 부탁이오.”
서 하빈저는 잠시 서 브라도의 늙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노장의 얼굴은 단호했고 서 하빈저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3중대 지휘관은?”
잠시 후 3중대, 즉 중장기병대의 백부장 하나가 달려왔다.
“전사하셨습니다. 제가 지휘를 맡고 있습니다.”
“알았다. 3중대는 지금부터 브라도 켄드리드 경의 지휘 하에 고립된 1중대와 2중대를 구출하라.”
백부장은 잠시 놀란 얼굴로 서 브라도를 바라보다가 곧 찬탄의 얼굴이 되었다. 국적이나 소속을 뛰어넘어, 안장에 올라 바람을 추적하는 무사들끼리 의 경외감이 그의 얼굴을 밝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벨군의 본영에서 전황을 바라보던 휘리 노이에스는 짧게 탄성을 질렀다.
본영으로 물러났던 록소나 중장기병대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멀리서도 뚜렷이 보이는 하얀 수염의 노기사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쭉쭉 내벋는 발굽이 땅을 스칠 때마다 흙덩이가 치솟아 파도를 이루었고 일렬로 뻗은 창들은 전체가 하나의 칼날 같았다. 두두두두 두! 땅의 울림 때문에 조약돌이 춤을 추고 풀잎이 세차게 경련했다. 그 굉장한 기세는 다가오기 전부터 전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맙소사! 우리 세기에 다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모습이군. 이 모습을 보는 가수가 나뿐이라는 것이 안타까운데!”
휘리의 말은 약간 틀렸다. 목소리 대신 글로써 노래하는 또 한 명의 가수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마 노장군이 돌 격대장 노릇을 하는 그런 지경이 되길 원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가장 보고 싶었던 모습을 보며 바탈리언 남작은 숨소리마저 아꼈다.
춤처럼 화려하고 신경병적일 만큼 정확하고 죽음처럼 무참하게, 록소나 중장기병대가 다벨 경장기병대에 맞부딪혔다.
다벨 기병대의 옆구리에 쳐들어온 것은 광포한 벼락이었다. 찢어지는 비명. 갑옷과 근육과 뼈가 뚫리는 형언할 수 없이 끔찍한 소리들 사이로 말들 이 네 다리를 하늘로 향한 채 날아오르는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전우의 말에 깔린 병사들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다벨군은 측면에서부 터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갔다. 다벨 경장기병대를 이끌고 있던 서 기리우는 어이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불구덩이 속에서 튀겨지고 아군의 중장 보병대에 쩔쩔매던 그 부대가 아니었다.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강철의 최종선고가 되어 다벨 기병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아니, 쓰러뜨린다기보다는 꿰뚫고 있었다. 서 기리우는 그 원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투구 아래로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강철 파도를 제련해내는 사나이가 그곳에 있었다.
“록소나, 록소나! 브라도 켄드리드가 왔다! 기운 내라!”
“서 브라도! 서 브라도!”
록소나 보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록소나의 백부장들이 눈빛을 몇 번 교환했을까, 그들은 곧 서 소팔라의 노예 부대를 향해 공세 방향을 일치시켰 다. 노예병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을 보자 서 소팔라는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주위를 향해 사납게 외쳤다.
“우리 부대 최고의 장기를 선보일 때로군. 튀자!”
“최고입니다, 대장!”
“음! 정확한 지적이다!”
서 소팔라와 그의 노예병들은 시시덕거리면서도 날쌔게 도망쳤다. 서 소팔라는 상대방이 혈로를 원할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림파이어 가문에 는 막대한 숫자의 부하를 죽여 얻은 승리는 개나 줘버리라는 매우 훌륭한 가훈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따라서 서 소팔라는 도망치길 원하는 적을 붙 잡고 소탕전을 벌여봐야 피곤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서 소사라 역시 형의 움직임을 보며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예 부대들이 민첩하게 빠져나오자 록소나 보병대들은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공세를 중단했다. 그들은 서 브라도의 중장기병대와 보조를 맞추 며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서 브라도는 다벨 보병대들의 퇴각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그의 기쁨은 길지 못했다. 첫째, 록소나 중장기병들이 너무 기세가 올라 발을 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둘째, 그의 상대인 서 기리우의 가문에는 림파이어 가문과 같은 훌륭한 가훈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 기리우 역시 다벨 보병대가 빠져나가는 것에는 별로 신 경 쓰지 않았지만 대신 그 관심을 모두 제국 기사단장에게로 돌려버렸다. 서 기리우는 투구까지 벗어 내팽개친 다음 검을 사납게 휘두르며 외쳤다.
“브라도 켄드리드! 남의 싸움에 끼여든 노망난 늙은이, 요절내 주겠다!”
그리고 서 기리우는 흉흉하기 짝이 없는 기세로 말을 몰아갔다. 그의 주위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검광이 불티처럼 희번득거렸다. 결코 한두 해 만에 이루어지는 솜씨가 아니었지만, 서 브라도는 혀를 찬 다음 안장 옆에 매달아둔 플레일을 뽑아들었다. 완력도 완력이지만 그보단 수십 년 동안 체득한 익숙함으로 플레일을 몇 바퀴 돌린 서 브라도는 다가오는 서 기리우의 허리를 향해 그 철구를 가볍게 날려보냈다. 차라락!
철구의 가시들은 그대로 서 기리우의 흉갑을 찢으며 그를 하늘로 튕겨올렸다. 안장에서 튕겨난 서 기리우는 몸을 몇 바퀴 뒤집은 다음 퍽이나 다이 내믹한 모습으로 나가떨어졌다. 서 브라도는 얼빠진 후배에게 몇 마디 던져주거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공치사를 중얼거리는 대신 그대로 플레일을 회 전시키며 다벨 경장기병들 사이에 격한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윙윙윙윙! 장관이었다. 서 브라도의 플레일이 톡톡 건드려주는 곳마다 다벨 경장기병들이 휙휙 날아다녔다. 서 소팔라는 아예 박수까지 치며 ‘비행 의 은사로다!’ 따위의 말을 외쳤고, 노예 병사들 역시 대장과 마찬가지로 그 모습에 순박하게 감탄했다. 저력을 다 폭발시켜 버린 노예병으로는 더 이 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에 구경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서 소팔라를 이해했지만, 그리고 이왕 구경하려면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자는 그 태 도도 납득했지만, 서 소사라는 형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줬으면 하는 희망을 잠시 품어보았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임을 잘 알기에 서 소 사라는 그 소망을 깨끗이 포기하고는 휘하의 경장보병대를 이끌고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대를 구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서 켈커 의 중장기병들도 반대쪽에서 록소나 기병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서 소사라의 깨끗한 압박이 들어오자 거칠게 날뛰던 록소나 중장기병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서 브라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후퇴를 명령했다. 서 소사라의 압박이 깨끗하다는 것은 충분히 압박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았기에 록소나 기병들로 하여금 물러날 여지를 남겨줬다는 말이다.
이윽고 마지막 록소나 병사까지 전장을 빠져나갔다. 휘리 노이에스는 소탕전이 필요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알레미지우스 평원에는 다벨군이 내지르 는 승리의 함성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는 너무 빨랐다.
알레미지우스 전투 이틀 뒤, 록소나의 왕궁 비자 록소나를 10마일 남겨둔 시점에서 다벨 8군단의 사령관 휘리 노이에스는 뜻밖의 첩보를 받게 되었 다. 첩보의 내용은 팔라레온에 주둔하고 있던 사트로니아군이 다벨 본토를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바스톨 엔도 장군은 휘리 노이에스의 8군단을 무시한 채 직접 적국인 다벨을 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모루를 아직 깨뜨리지 못한 상태에서 휘리 노 이에스로서는 급소에 망치를 맞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