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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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1화


어두운 밤, 성급한 성격이라면 새벽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창고 같은 어두운 방에서 몇 명의 사내들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랜턴 하나에 의지하여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깨어 있기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고 그래서 사내들은 상대방의 눈에 선 핏발을 보며 자기 눈도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풀이 죽어 있었다. 지리한 침묵의 시간 끝에 그들 중 한 사내가 테이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카드라도 할까?”

곧 나머지 사내들 전부가 그를 때려 죽일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을 꺼낸 사내는 흠칫하다가 곧 알아차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허. 카드가 없었나?”

“안 우스우니까 관둬,

제섭.”

“제기, 이렇게 기다리지 말고 그냥 찾아나서자고.”

“어허. 무슨 소릴 놈들이 돌아오지 않는 건 들켰다는 뜻일 수 있단 말이야.”

“들켰다면 벌써 우리들에게까지 들이닥쳤을 거다. 쳇.”

사내들은 제섭의 통찰력에 약간 감동했다. 그러나 불안감을 잊을 정도의 감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주 문 쪽을 쳐다보았지만 문은 열릴 생각도 하 지 않았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사내들은 기겁하며 일어났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와라락! 그리고 사내들은 각자 허리로 손을 가져갔고 그 중 어떤 이들은 검 을 뽑아들기까지 했다. 문은 잠겨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열렸다. 그리고 바깥의 어둠 속에는 가슴 앞에 뭔가를 든 채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사내들은 각자 얼굴 가득히 불신과 당황을 담은 채 불청객을 바라보았고 불청객은 건물 안의 험악한 광경을 주욱 둘러보더니 낭랑하게 말했다.

“배달 왔습니다!”

사내들은 불청객의 말에 총체적으로 당황해 버렸다. 첫째, 그 황당한 내용이 그들을 어이없게 만들었고 둘째, 그건 여자 목소리였다. 사내들은 어이 가 없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고 여자는 냉큼 한 발 들어왔다. 그러곤 가슴 앞쪽에 들고 있던 상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거워 죽겠는데 이거 좀 받아줄 신사분 없어요?”

사내들은 어찌해야 될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문 쪽에 가장 가까이 있던 제섭이 우물쭈물하며 팔을 내밀었다. 여자는 환하게 웃었고 그 미 소를 본 사내들은 제섭에게 기회를 뺏긴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제섭 역시 좀 밝아진 얼굴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어헛. 무겁군.”

“그렇죠? 화약 상자라서 그래요.”

제섭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사내들은 갑자기 서늘해진 기분을 느끼며 여자를 바라보았고 여자는 방긋 웃으며 두 손을 들어올려 가볍게 박수를 쳤 다. 짝짝.

“배달 왔습니다!”

문 쪽으로부터 이번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의 사내들이 얼빠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문 바깥의 골목에 커다란 짐마차가 짐칸 을 뒤로 한 채 와서 섰다. 먼저 들어왔던 여자는 웃으며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짐마차의 왼편에 선 여자는 짐칸을 덮고 있던 천을 확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제섭을 제외한 모든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덮개가 벗겨지며 나타난 것은 반짝이는 포신이었다. 시커먼 포구는 정확히 제섭을 겨냥하고 있었고 그 심지 부분에는 한 젊은 사내가 손에 랜턴을 든 채 앉아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사내들은 말문이 막힌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부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옆으로 내려섰다. 내려선 것은 검은 코트를 걸친 키큰 사내였다. 큰 걸음걸이로 걸어온 사내는 여자의 반대쪽, 즉 대포의 오른쪽에 서서는 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지휘자냐.”

방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그 중 한 명이 천천히 일어났다.

“나요.”

“이름은?”

“요링.”

“요링. 누가 배신자냐.”

“뭐야?”

“카밀궁의 배신자가 누구냐.”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넌 뭐야?”

“키 드레이번이다.”

“아, 그래? 드레이번 선생.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잠깐, 뭐라고?”

요링은 흠칫하며 장신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요링은 ‘제국의 공적 제1호와 같은 이름을 가지셨군’ 따위의 농담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 단했다.

“어허? 해적 키 드레이번 말인가?”

“그렇다.”

방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내들의 얼굴에도 놀라는 빛이 스쳤다. 요링은 키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진짜 그런 거 같군. 그런데 배신자니 뭐니 하는 건 무슨 소리지?”

키 드레이번은 낮고 음조 없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빨리 말해. 레모놈들. 이 대포와 작렬탄이면 카밀궁의 테라스에 서 있는 후작은 암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작에겐 후사가 없다. 앞으로 생길 가능성도 없고. 암살 이후 누가 라트랑을 맡게 되는 거냐. 누가 젊은 후작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조바심을 부린 거냐, 지껄여!”

요링은 가까스로 신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는 쓰라린 기분으로 계획이 다 들통났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요링은 제국의 공적 제1호가 이 시점에서 이렇게 개입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키 드레이번이 여기에 왜 끼여드는 거지?’ 그때 키가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난 여러 번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 누가 배신자냐.”

요링은 배짱이 있는 사내였다. 

“말 못하겠다면 어쩔 건가?”

키는 배짱 있는 사내를 존중했다. 

“불 붙여.”

랜턴을 들고 있던 젊은 남자, 라이온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랜턴을 집어들었다. 건물 안쪽에 있던 사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이온은 심지에 불을 붙였다. 지지직! 불꽃이 튀는 심지를 보던 요링은 설마 하는 얼굴로 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다급하게 외쳤다.

“이, 이봐! 그만둬! 그만두라고!”

라이온은 나이프를 꺼내어 심지를 잘라내었다. 요링은 키를 향해 이를 갈며 말했다.

“진짜 쏠 생각이군.”

“그건 대답이 아니다.”

“제길, 좀 천천히 가자고. 무슨 성질머리가 그렇게.

“불 붙여.”

다시 심지에 불이 붙었다. 짧아진 심지 때문에 요링은 훨씬 다급하게 외쳐야 했다.

“말하겠어, 말하겠다고! 으아아아!”

라이온은 약간 아슬아슬하게 심지를 끊었다. 심지는 이제 손가락 한마디 정도만 남아 있었다. 요링은 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키는 짧아진 심 지를 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다음 번엔 끄기 어렵겠군.”

요링은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레모인들은 간절한 애원을 담은 눈길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말 조심하쇼, 제발!’ 

요링은 필 사적으로 해야 할 말의 순서와 조합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입을 열기 전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해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 을 것이다.

키의 눈치를 보며, 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그러니까, 배신자를 알고 싶다는 거지?”

틀린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불 붙………”

“서 레빌이야, 서 레빌이라고! 우라질!”

키는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서 레빌? 그건 누구냐.”

요링은 말을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키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어쨌든 상대는 걸핏하면 심지에 불을 붙여대는 사내였고 그래서 요링은 약 간의 은유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키는 에름 후작의 외삼촌이 되는 서 레빌이 후사를 기대할 수 없는 조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레모를 끌어들였다는 사실 등을 명료하게 알게 되었다.

지도에서 보면 레모의 위치는 누구의 눈에든 매우 불안해 보인다. 록소나, 바이스라, 사트로니아, 켄타로니아, 그리고 라트랑이라는 다섯 개나 되는 나라에 의해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는 레모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만일 레모가 그 중 하나인 라트랑과 연계하게 된다면 숨통이 트이는 효과 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라트랑은 가장 적합한 선택일 것이다. 소제국의 이름은 이미 잃었지만 그래도 강국인 사트로니아나 켄타로니아는 건드릴 수가 없다. 그리고 마왕이 버티고 있는 록소나 또한 버거운 상대이고, 북쪽의 바이스라는 차라리 페인 제국과의 완충 지대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은 나라 다. 만약 레모가 라트랑에 괴뢰 정부를 세울 수 있다면 그들은 사트로니아나 록소나에 버금가는 강자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레모는 대 포 하나로 라트랑을 낚아올리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관계는 서 레빌 쪽이 단순히 이용만 당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서 레빌이 대포 하나 ・물론 최신예 작렬포이긴 하지만 에 만족할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그로서는 그런 식으로 레모를 끌여들여 둔다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이용하여 저항 세력이 될 수 있는 라트랑의 유지들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키는 그 모든 사실에 별 관심이 없었다. 키는 발로 수레의 바퀴를 탁탁 걷어차서 요링의 말을 중단시켰다.

“좋아. 다른 건 더 필요없어. 그렇다면 그 서 레빌과는 어떻게 접촉하면 되지?”

“접촉? 왜…… 으아아! 불 붙이지 마!”

“그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거기 누가 그 친구 대신 상자 들어주는 게 좋겠군. 떨어뜨려서 폭발시키겠는걸.”

레모인들은 그제서야 제섭을 떠올리곤 그를 돌아보았다. 제섭은 밀랍 같은 얼굴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레모 인들은 제섭의 젖은 바지와 발 근처의 거무튀튀한 자국은 못 본 척해 주기로 했다.


병사들의 발길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투구와 갑옷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아래로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강이 생길 지경이다. 태양까지의 거리 는 평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것 같고 길가의 풀잎들마저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행군 속도가 늦은 것도 아니다. 사트로니아군의 행군 은 통상적인 행군 속도보다 약간 빠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사병 환자들이 속출하지 않는 것은 바스톨 장군의 배려 덕분이라 할 것이다. 장군이 새벽에 먼저 출발시킨 정찰기병들은 군대 의 행군로를 미리 답사하며 물을 구할 수 있는 곳과 쉴 만한 그늘마다 표식을 남겨두었다. 그들은 아마 지금쯤은 오늘밤의 야영지로 정한 곳에서 사 냥이나 정찰 등을 하며 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스톨 장군 역시 암염덩이를 입 안에 문 채 말을 몰고 있었다. 행군하는 대열의 가운데 서 있는 그의 꿋꿋한 모습은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의 준비 와 더불어 사트로니아군의 사기를 유지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사실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군은 뒤쪽을 흘끔 돌아보고는 부관에게 눈짓했다.

“포로들의 속도가 늦군. 가일즈.”

부관 가일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쪽에서는 족쇄로 수레에 연결된 포로들이 수레들을 밀고 끌고 있었고 그 좌우로는 칼을 뽑 아든 사트로니아 중장보병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의 말대로 그 수레들은 계속 뒤처지고 있었다. 가일즈는 이마의 땀을 훔친 다 음 말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들은 우리들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일부러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진짜 괴로워하는 녀석은 별로 없습니다. 좀 타이를까 요?”

가일즈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보였다. 바스톨 장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들 중엔 기사도 있어. 포로 대우는 해줘야지.”

“포로답게 행동하지 않잖습니까.”

“그래도 채찍은 안 돼. 자네 말대로 아직 기운이 있는 놈들이니 그건 난동을 부릴 빌미를 주는 거야. 가서 이렇게 전하게. 녀석들도 이젠 어디쯤에서 쉬게 되는지 눈치 챘을 테니까, 느리게 움직이면 다음 휴식지는 건너뛴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가일즈는 경례를 붙인 다음 말을 돌려 대열을 거꾸로 거슬러갔다. 잠시 후 뒤쪽으로부터 불평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포로들뿐만 아니라 사트로 니아군도 쉬지 않겠다는 것이므로 그들도 화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이레 전과 닷새 전에 사트로니아군에게 패했던 다벨 3군단과 4군단의 포로들이었다. 군단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꽤나 전통 있는 부대였 지만 바스톨 장군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신병 다루듯이 엄포를 놓거나 공포를 야기해 봐야 통하지도 않을 그들 베테랑들에겐 똑같이 베테랑 식으로 대접해 줄 작정이었다.

잠시 후 병참부대의 속도가 한결 높아진 것을 보며 노장은 빙긋 웃었다.

그때 저 앞쪽으로부터 몇 기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바스톨 장군은 그들이 새벽에 출발했던 정찰기병들임을 알아차리고는 약간 긴장했다. 별 일이 없 다면 그들은 야영지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정찰기병들은 길 옆을 통해 빠르게 본대에 있는 장군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이 보고하기 전부터 장군은 그들의 보고가 뭘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장군님. 전방 5마일 지점에서 다벨군 2개 군단을 발견했습니다. 5군단과 6군단의 군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병력은?”

“6,000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정찰기병은 지형과 적군의 편성, 진형 등에 대해 설명했다. 바스톨 장군은 정찰 기병을 돌려보낸 다음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부관 가일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역시 적은 숫자군요. 6,000이라면 사실 1개 군단 정도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포로들의 말이 맞는 모양이야.”

바스톨 장군은 부관의 말에 찬성하면서 휘리 노이에스의 8군단에 대해 생각했다. 

‘다벨의 각 군단 최고의 정예들만 모아서 만들어진 군단이라.’

덕분에 다벨군의 다른 군단들은 정족수를 채우지 못할 만큼 축소되어 있었다. 바스톨 장군이 다벨 제3군단과 제4군단을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에는 상 대방의 숫자가 적었던 탓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3군단과 제4군단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한 장군의 솜씨가 평가절하될 필요는 없겠지만.

“1, 2군단은 없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5, 6군단이고. 그럼 남은 건 7군단과 록소나에 있는 휘리의 8군단뿐인가. 메르데린 경께서는 날 꽤 나 미워하고 계시겠군.”

“이웃에 그런 선물을 보냈던 자는 할말이 없을 겁니다.”

“옳은 말이야. 그럼 전투 준비를 해볼까.”

“예?”

“여기서 싸운다. 다벨 5, 6군단은 롱레인저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 녀석들이 원하는 지형으로 들어가줄 필요가 없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공작, 넓디넓은 제국에서도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고, 그걸 만들고 싶어하는 약사도 없는 희귀한 병 일명, 황제병 에 시달리던 사내는 깊은 시름에 잠긴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이블 둘레에 앉은 그의 가신들은 그 서신에 뭐라고 적혀 있 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조심성이 부족한 가신 하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노이에스 장군의 말이 옳았군요.”

순간 로드 메르데린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나갔다. 입을 잘못 열었던 가신은 목을 움츠리며 벼락에 대비했다. 하지만 주먹을 부르르 떨던 메르데린 공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인정하지. 내 잘못이다.”

“황공하옵니다.”

메르데린 공작은 다시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휘리의 서신 같다는 말이 유명해진 지금, 단촐한 그 서신은 오히려 놀랄 만했다.

‘충성과 헌신으로 휘리 노이에스가 고합니다. 바스톨 장군에게 싸움을 걸지 마십시오. 그는 절대 전격전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산처럼 움직이 는 자, 내버려둬도 천천히 갈 것입니다. 그에게 다벨의 모든 영토를 내줘도 상관없으니 제가 도착할 때까지만 기다리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자신의 영토를 밟았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 메르데린 공작은 3, 4, 5, 6군단을 출진시켰고, 그럼으로써 바스톨 장군의 승 전 기록을 갱신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고 말았다. 아무리 축소된 군단이라지만 4개 군단을 연파한 바스톨 장군의 위업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왕관을 던진 장군의 팔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느낀 메르데린 공작은 그제서야 수도 요새인 볼지악 요새로 옮긴 다음 7군단과 함께 농성을 준비 했다. 당장이라도 바스톨 장군이 쳐들어올 것만 같은 절박한 심정에 부랴부랴 결정한 농성이었지만, 바스톨 장군은 휘리의 예언대로 전혀 속력을 높 이지 않았다. 다벨의 군사력 태반을 고갈시켜 버렸다는 놀라운 전과도 노장에게서 침착함을 뺏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느리지만 꾸준한 진격 이 메르데린 공작과 그의 가신들을 더 두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메르데린 공작은 두 손을 깍지껴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만, 노이에스 장군 역시 등뒤에서 브라도를 둔 채로 움직이기는 힘들 것 아닌가.”

장수 하나가 공작의 지적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당연할 겁니다, 로드. 하지만 노이에스 장군은 원군을 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기다리라고만 했습니다. 그에겐 서 브라도의 추격을 뿌리치고 달려올 자신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솔직히 저로서는 록소나 기병을 거느린 서 브라도의 추격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지 짐작도 되 지 않습니다만, 그에겐 그만의 방법이 있는 모양입니다.”

“오로지 휘리만 믿어야 된다는 말이군. 하긴, 그를 믿지 않았다면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터.”

가신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데린 공작은 기운을 차리려는 듯 허리를 펴며 말했다.

“바스톨 엔도 장군이라 해도 귀신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정예 7군단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이 단단한 볼지악 요새까지 있고.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버티는 것뿐이다. 이 서신을 공표하라.”

“노이에스 장군의 서신을 말씀입니까?”

“그래. 앞부분은 제외하고, 그가 반드시 온다는 것만을 공표하면 돼. 다벨의 모든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노이에스 장군과 8군단이 반드시 구하러 올 것임을 선포하라. 알겠나? 팔라레온도, 다케온도, 심지어 제국 기사단장 서 브라도마저도 그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했던 다벨 8군단이 올 거라고 외치고 다니란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4개 군단의 연속적인 패전에 풀이 죽어 있었던, 그리고 바스톨 엔도라는 이름에 절망하고 있던 다벨인들은 그 서신에 안도하고 희망을 얻었다. ‘단지 버티기만 하면 될 뿐이다. 버티기만 하면 휘리 노이에스와 무적 8군단이 오는 것이다. 다벨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볼지악 요새로 몰려들었고 덕분에 볼지악 요새는 수용 인원의 한계를 넘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몰려든 다벨인들은 활기차게 농성을 도왔 다. 끝없이 몰려드는 지원병들과 수송마차의 행렬에 메르데린 공작은 크게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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