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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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3화


퓨아리스 4세는 으르릉거리며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열병식 중인 병사라 하더라도 지금의 퓨아리스 4세만큼 씩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황제는 날 약올리기 위해서 그런 거야. 망할! 황제는 내가 엄포를 놓는 것이 보기 싫었던 거야. 이해는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속이 좁단 말인가! 내 가 서 브라도의 전공이나 황제의 명예를 빼앗을 정도의 인격밖에 못 가진 자로 보였단 말인가!”

그레이엄은 우필을 멈춘 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대로 쓸까요?”

“미쳤나! 후우, 후우. 좋아. 계속 받아써. 야만의 들판으로부터 달려와 우리 선량한 신도들을 엄습하는 잔인한 이교도와 추악한 야만인들에 대하여 성채가 되고 감시탑이 되어 제국을 지켜온 제국 기사단의 위용과 업적에 대하여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의 친애의 정을 가져온 법황 퓨아리 스 4세는 기사 중의 기사이자 제국 기사단의 정화라 할 만한 브라도 잇사 크레이탄 켄드리드 공이 최근 알레미지우스 평원과 그외 여러 장소에서 보 여준………… 어디까지 썼나?”

“다 썼습니다. 속기술을 배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 나이에도 배움의 길에의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네의 열성에 감탄하는 바이네. 그레이엄. 우라질! 누가 공을 빼앗자고 바이올 기사단을 만든 줄 아나! 계속하겠네. …………여러 장소에서 보여준 놀랄 만한 전과에 대하여 한량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으니 이는 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는 기쁨이오 악마의 역사함에 대한 신앙의 통렬한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는바, 법황 퓨아리스 4세는 페인 제국과 그 식민지의 지배자이며 아흔아 홉 눈의 섬의 백작이며 사무이다크의 공작이며 신앙의 수호자인 페인 제국 황제 나르실 로이 아달탄 아크레아 리 온 놀가드 아자르 나이제스와 더불 어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자 하니……… 생각할수록 화를 참을 수가 없군!”

퓨아리스 4세는 분통을 터뜨리는 일과 아자르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을 구술하는 일을 동시 진행했고 그레이엄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법황의 말에 서 그 양자를 구분해 내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결국 그레이엄은 ‘나는 황제에게서 브라도를 그대로 록소나에 두라고 권고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완료해 내고야 말았고 그래서 뿌듯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분노를 거의 다 표출한 법황 역시 의자에 주저앉아 약간 상쾌해진 기 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의 대화는 꽤 부드럽게 시작되었다.

“결국 바이올 기사단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성하.”

“알아. 그게 황제를 언짢게 만들었겠지. 자신이 서 브라도를 보내어 어지러운 남부를 평정한 건데 엉뚱한 자가 나타나서 으스대는 꼴은 못 본다 이거겠지. 쳇, 웃기지 말라고 그래. 서 브라도가 알레미지우스에서 록소나군을 구해 내었다는 데는 동의해 주겠지만, 그가 다벨을 물리친 건 아니야. 그 건 사트로니아의 공이야.”

그레이엄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하, 바이올 기사단의 서품식을 좀 연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연기?”

“예. 결국 황제는 펠라론이 왕자의 땅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펠라론에게 그런 의도가 없음을 보 여주기 위해선 바이올 기사단의 서품식을 늦추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칼을 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란 건가?”

“말하자면 그렇겠지요.”

퓨아리스 4세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창문에는 검푸른 어둠이 물들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조심스럽게 일어난 다음 손수 집무실의 촛불을 밝혔다. 창가 쪽으로 걸어갔을 때 그는 플로라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플로라는 약간 힘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레이엄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플로라의 미소에 미소로써 대답했다. 플로라는 깜 짝 놀라서 그레이엄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꼿꼿한 몸은 이미 방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레이엄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법황이 입을 열었다.

“안 돼. 바이올 기사단은 그대로 서품한다.”

“그대로… 말씀입니까?”

“그래. 그 대신 다른 채널 모두 가동시켜. 왕자의 땅이 아무리 피폐해졌다 한들 법황은 그걸 탐내고 있지는 않음을 알리란 말이다. 알겠나? 펠라론에 있는 모든 대사와 영사와 공사와 상회의 사장과 그 말단 점원까지도 그렇게 믿게 만들라고. 실제로 내겐 그런 의도는 전혀 없어.”

“믿기 어려워할 겁니다. 실상 열국들은 왕자의 땅의 전후 처리를 놓고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최고 공로자인 사트로니아가 가장 큰 배당을 받을 거라는 것이 지배적인 추측이고, 이에 대해 황제는 호의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황제는 사트로니아를 좋아하니까요. 그렇다 면, 바이올 기사단은 사트로니아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보여질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황제는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사트로니아에 모든 방법으로 추파를 보내! 사트로니아가 왕자의 땅에서의 교통 정리를 하고 싶어한다면 법황은 몸소 줄자를 들고 하드루스 대통령을 위해 측량을 해줄 작정인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알겠나, 그레이엄? 나는 절대로 사트로니아의 공로를 부정하지 않고 그런 공로를 통해 얻 을 것이 확실한 이득에 침을 흘리지도 않는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레이엄은 법황에게 목례했다. 그때 법황이 약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자네 왜 들어온 건가?”

그레이엄은 당황하여 법황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그제서야 자신이 뭔가를 전하기 위해 법황의 집무실에 들어왔다가 미친 듯이 노한 법황의 명령에 의해 서신을 받아쓰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레이엄은 헛기침을 한 다음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은쟁반을 들어올렸다.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상한 서신이 왔습니다.”

“휘리 노이에스인가!”

법황은 당장 잡아먹을 듯한 눈길이 되어 그레이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예. 발신인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검사는 해봤는데 이상한 것은 없더군요.”

그레이엄이 말하는 검사라는 건 편지를 이용한 암살에 대비한 검사를 말한다. 양피지 가장자리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독바늘을 꽂아둔다 거나 서신 자체를 악성 전염병 환자의 침대 속에 넣어두었다가 보내는 등의 수법이 그것이다. 심지어 변론의 황제 린타는 단지 문맥만으로 상대방에 게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약간 믿기 어렵다. 물론 우수한 창의력을 엉뚱한 곳에 이용하는 사람은 많 기 때문에 검사가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레이엄은 법황이 손을 내밀자 약간 당황했다.

“성하. 제가 읽겠습니다.”

“이상한 건 없다고 했잖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관둬. 날 죽이고 싶다면 내가 솔깃해할 만한 이름으로 발신했을 거야. 이리 줘.”

그레이엄은 난처해하는 얼굴로 은쟁반을 내밀었다. 퓨아리스 4세는 두루마리의 봉인을 보았지만 거기엔 아무런 문장이 있지 않았다. 법황은 고개를 갸웃한 다음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러곤 당장 그레이엄을 쳐다보았다.

“설마 자네가 날 놀리려고 이걸 쓴 건 아니지?”

“예?”

“그건 아닐 테고. 그런데 이게 뭐야. 내가 휘리 노이에스에게 쓰고 싶었던 스타일의 서신이군.”

그레이엄은 자신의 상상을 입밖으로 내는 데 약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죽어!”라고 씌어 있습니까?”

“그건 아냐. 읽어주지. ‘조만간 찾아가겠소. L.’ 이걸로 끝인데?”

그레이엄은 의아해했고 법황은 그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레이엄은 서신에서 법황이 읽어준 대로의 짤막한 문장을 볼 수 있었다. 그레이엄은 눈 살을 찌푸렸다.

“L이라니, 이게 누구일까요?”

“글쎄? 필체가 상당히 좋군. L이라는 이니셜이면 누가 있지?”

“데샨카라돔의 로스왈로일까요?”

“설마. 로스왈로의 필체야 알아주는 악필인 데다 그 자라면 이니셜로 쓸 까닭이 없지. 그러고 보니 이니셜로 썼다는 것이 퍽 이상하군. 게다가 찾아 오겠다………… 찾아오겠다니, 이게 무슨 뜻이지?”

그레이엄과 법황은 잠시 제국의 유력 인사들 중 L이라는 이니셜을 사용할 수 있는 이름들을 죽 열거해 보았다. (그 이름 중에는 심지어 카밀카르의 법무대 신이었던 라스 카밀카르까지 있었다.) 하지만 법황과 그의 비서관은 그들 중 이런 엉뚱한 서신을 보낼 만한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법황은 찝찔한 표정 으로 서신을 보다가 간단히 말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서신을 보낸 자가 누군지 아는 것은 간단해. 오겠다고 했으니, 그때 누군지 보도록 하지. 그 자도 이런 식의 서신에 답장을 기대하진 않을 테니 내버려둬.”

그레이엄은 인사를 한 다음 집무실을 나갔다. 퓨아리스 4세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은 채 생각에 잠겨들었고,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플로라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법황이 갑자기 말했다.

“아,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 봐, 플로라, 해도 졌으니.”

“알겠습니다.”

플로라는 옆에 놓아두었던 가운을 들어올렸다. 가운끈을 묶던 플로라는 어두운 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녀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고 그 어깨 너머론 조그맣게 의자에 앉아 있는 법황의 모습이 보였다. 플로라는 어두운 창문에 비친 법황을 향해 말했다.

“성하.”

법황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응?”

“성하께서 그레이엄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무슨 말이지, 플로라?”

“그 분이 제게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네가 예뻐서 그랬겠지. 아름다운 꽃에 미소를 짓는 것이 뭐 이상한가?”

“성하.”

“아, 그래. 내가 한마디 했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꼬박꼬박 인사하는데 왜 무시하냐고, 자네에게 그러면 기분좋겠냐고 한마디 했어. 그리고 앞으로는 무시하지 말라고도 했던가.”

플로라는 유리 속의 법황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유리에 비친 그 모습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법황 자신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 으로 앉아 있었다. 플로라는 뭐라 말할 듯이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레이엄이 무시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법황 자신임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대신, 플로라는 몸을 돌려 법황의 등을 향해 목례하며 말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응.”


“우하하 ᅳ 함. 지루한 오전이군. 그렇잖수, 신부님 당신?”

데스필드는 주머니칼로 손톱을 다듬으며 말했다. 파킨슨 신부는 눈살을 약간 찡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텃밭에 서 노역하고 있었고 데스필드는 긴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감상하다가 너무 지루하다는 이유로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 운동 삼아 나처럼 김이라도 좀 매어보면 어떠냐?”

“안타깝게도 본인에겐 호미 두드러기가 있어서.”

“괭이는 어떠냐?”

“이제서만 밝히는 것이지만 본인은 사실 괭이 공포증을 가지고 있소.”

“삽은 괜찮겠냐?”

“삽엔 너무도 많은 애달픈 추억이 있는지라 본인은 슬픔을 느끼지 않고선 그것을 쥘 수 없군요. 다시 한 자루 삽을 비껴 차고 저 거친 밭을 호령할 날이 올지 심히 의심스럽소이다.”

“이건 어때?”

“아하, 하하, 하하하 !밭에 일하러 나왔으면서 그건 왜 차고 나온 겁니까?”

데스필드는 자신의 미간을 겨누고 있는 핸드건의 포구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파킨슨 신부는 그것을 몇 바퀴 돌린 다음 다시 허리춤의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수도사들이란 호기심의 늪 같은 작자들이니라. 이걸 내 손에서 떼어뒀다간 그 형제들은 고해와 참회 몇 번 할 각오하고 구경하려 들 것이다. 그리 고 난 이 수도원의 생기발랄한 수도사들이 자기 머리에다 주님이 만들어주신 구멍 이외에 다른 구멍을 뚫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참회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거였수?”

“무슨 말이냐?”

“김을 매는 것도 좋고 그런 노역을 하며 참회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런 식으로 땅을 다 뒤집어놨다간 불쌍한 상추 당신들을 다 살해하 고 말겠소.”

파킨슨 신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군단 병력이 세 번쯤 지나간 듯한 밭의 꼬락서니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랬을까.”

“본인의 권고는, 잠시 쉬면서 열 좀 식히라는 거요.”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권고를 받아들여 호미를 털고 일어났다.

오전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수아네자 수도원은 사하촌(村)에 떨어지는 햇살을 걸러내듯이 튀어나온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었 다. 그래서 수아네자 수도원에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데스필드가 앉아 있던 긴의자에 걸터앉은 파킨슨 신부는 호미를 연 장바구니에 집어던졌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댄 파킨슨 신부는 햇살 속에 두 다리를 죽 폈다.

데스필드는 주머니칼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놀려도 됩니까?”

“안 돼.”

“그럼 호기심으로 해두지요. 도대체 왜 노역을 하고 있는 거요? 추기경 당신이 언짢아하고 있다는 건 알지요?”

“안다.”

“신부님 당신이 손님 대접받기 싫다 해도 추기경 당신을 위해서라도 좀 빈둥거려야 될 거 아니오. 그리고 이건 본인의 의문인데, 저 위쪽과 문제가 있다면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릴 것이지 웬 육체노동이오?”

“너 가끔 너무 날카롭다.”

“얼마나 날카롭소?”

“이쑤시개로 쓸 만하다.”

데스필드는 히죽 웃었다. 파킨슨 신부는 모자를 벗은 다음 이마의 땀을 훔쳤다.

“모르겠다. 네 말이 맞겠지.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신앙상의 문제가 있다면 신앙의 형제들이나 교회에 의논하고 도움을 받아 야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펠라론으로 가서 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펠라론에 갈 때까진 되도록 교회와 예배당엔 발을 들여놓 고 싶지 않다.”

“흐음. 제부르카스 당신의 입버릇은 ‘황제에게 물어봐’ 였다지요. 그런 거요?”

“어쩌면.” 

파킨슨 신부는 다시 밀짚모자를 눌러쓰곤 그 그늘 속에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난 단지 최고 권위에 기대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 펠라론에 가서는? 법황 당신과 일대일 독대라도 하실 거요?”

파킨슨 신부는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데스필드는 두 팔을 목 뒤에 괸 다음 역시 건물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나 잠시 후 데스필드는 팔을 내리며 신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마?”

“뭐가 ‘설마’냐?”

“관두쇼. 진짜 그럴 생각이라면.”

“뭐가 진짜 그럴 생각이라는 거냐?”

“젠장. 펠라론 게이트에 머리를 집어넣을 생각인 거 아닙니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천국의 방귀를 뀐다지. 하하.”

파킨슨 신부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데스필드는 그로선 드물게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은 신부님 당신이 겪는 신앙적인 문제인지 뭔지를 이해 못하겠수다. 당신 말마따나 악마의 사생아인가 보지, 뭐. 하지만 진짜 그러지 말라고 권하고 싶어요. 어차피 죽으면 가게 될 거 아니오? 왜 살아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까?”

파킨슨 신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기 기만으로 영위하는 삶은 그 길이만큼의 죄악이므로.”

“썅! 그렇다면 깨달음 다음에 영위하는 삶은 그 길이만큼의 허무 아니오?”

파킨슨 신부는 놀라워하는 눈빛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다시 벽에 등을 기댄 다음 셔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파이프와 담배 쌈지를 꺼낸 데스필드는 파이프를 몇 번 훅훅 분 다음 담뱃가루를 조심스럽게 채워넣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거요. 꼭 아셔야겠소?”

“알아야겠다.”

“답을 알고 치르는 시험은 의미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수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답을 알아야겠소?”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앞뒤 없는 걸로는 테리얼레이드 당신들도 도망칠 신부님 당신답소. 쳇.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요?”

“넌 어차피 패스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놈이잖느냐.”

이번엔 데스필드가 움찔했다. 파킨슨 신부는 싱긋 웃으며 데스필드를 돌아보았고 데스필드는 신부를 외면하며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것에만 신경 썼다. 불을 붙인 데스필드는 수도원의 낮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넓은 평원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날려보내었다. 채마밭과 과수원들로 누덕누덕 기운 것 같은 들판 위에 구름 그림자가 짙게 흐르고 있었다.

“제길, 그래요. 본인은 끝에 뭐가 있든 상관없지.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없지. 그러니 끝에 있는 뭔가에, 마지막 무엇에 매달리는 당신들을 이해하는 척하는 건 웃기겠지. 하지만 차분히 설명해 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해주겠습니까?”

“내겐 교회가 있다. 네놈 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패스의 종착점, 어떻게 걸어도 결국 거기로 돌아가야 되는 곳이 내게는 교회다. 어쩐지 좌우명이나 가치관 따위를 설명하는 말 같다만 넘어가자.”

“은근슬쩍, 얼렁뚱땅.”

“그런데 그게 분리가 되었다. 내 속에 교회가 있다는 말, 여러 번 했었지? 하지만 너도 짐작하다시피 그게 펠라론이라는 현실의 교회와 괴리를 일으 켰다.”

“덕분에 유리 당신을 살렸소. 그런데도 만족이 안 됩니까? 유리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들어서 그러신 거요?”

“흐음. 내가 특별히 고매하다고 주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웃길 수 있겠지. 그래. 고맙다는 말을 못 들어서 심술이 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 지금 약간 고상한 척하고 싶으니 야유는 좀 참아주겠느냐?”

“그, 그, 그렇게 부드럽게 말하면서 핸드건에 손 뻗지 말아요!”

“그러마. 어쨌든 내 속의 교회와 내 바깥의 교회가 하나였을 때 내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자랑 같지만 그럴 경우 나는 테리얼레이드에 교회를 세 우려는 시도까지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영웅적이지 않느냐?”

“교만의 대죄를 경계하쇼. 일단 찬성이오.”

“고맙다. 하지만 그게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자 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솔직히 숟가락 하나도 제대로 들 수 없게 된 기분을 느낀 단 말이다.”

“당신은 도스 계곡을 통과하고 미리온을 넘으셨어요.”

“너 덕택이지, 데스필드. 서부 최고의 패스파인더가 한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야. 응? 너 지금 ‘서부 최고가 아니라 세계 최고’ 등으로 말할 생각 이라면 조금 전 네가 했던 말을 돌려주마. 교만의 대죄를 경계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당신은 언제나 핍박받나니.”

“시끄럽다, 놈. 어쨌든 내게 있어서 교회는 분리되었고, 그 중 어느 것도 인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중 하나를 인정하면 다른 건 자연히 부정되어야 되는데 난 둘 중 어느 것도 부정할 수가 없거든. 이 상황에서 난 답을 모르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험을 치를 기력조차 없단 말이 다.”

“그래서?”

“분리된 교회를 다시 통합하거나, 내가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것인지 알기 위해 난 펠라론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법황청에서도 답 을 얻지 못한다면, 그래, 내 답을 얻을 장소 중에서 펠라론 게이트를 제외하지는 않을 결심이다.”

“마음대로 하쇼, 마음대로! 다만 본인은 그 안에서의 패스를 찾아달라는 의뢰는 받지 않을 거요. 아시겠소?”

파킨슨 신부는 빙긋 웃고 말았다. 그때 파킨슨 신부는 수도원의 산문을 들어서는 핸솔 추기경을 발견했다.

추기경은 나귀에 탄 채 수도사들 몇 명의 수행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채마밭 쪽을 바라본 추기경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나귀에서 내렸다. 핸솔 추기경은 나귀를 수도사에게 맡기곤 데스필드와 신부 쪽을 향해 걸어왔다.

“또 노역중이셨습니까, 신부님?”

“그렇습니다. 내려가신 일은?”

“잘 처리되었소. 사트로니아 상관으로 사람도 보내었고 마차도 한 대 구했소. 이곳 수도사들은 웬만한 거간꾼 못지않더군. 그 흥정하는 모습 봤더라 면 좋았을 거요. 어쨌든 내일 아침엔 마차가 이곳으로 올 겁니다. 그런데 데스필드 군. 당신은 언제 돌아온 거요?”

데스필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돌아오다니, 무슨 말씀이쇼?”

“응? 아까 저 아래 마을에 있지 않았소?”

“엥?”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고 파킨슨 신부 역시 의아쩍은 얼굴로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누굴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데스필드는 줄곧 저와 함께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추기경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날 놀리는 거요? 내가 부르니 웃으면서 손도 흔들었는데, 수도사들도 같이 봤소. 얼굴도 똑똑히 봤고…………. 어라? 그러고 보니 옷이 좀 틀리군. 하지 만 그렇게 똑같은 사람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이라면 손을 흔들 까닭이……

데스필드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다른 당신이오.”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소. 다른 당신이오.”

이번엔 파킨슨 신부와 추기경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녀석에게 형제라도 있다는 거냐?”

“아니, 형제라면 그건 쌍둥이일 거요. 그렇게 닮았을 수가 없단 말이오. 데스필드 군. 쌍둥이 형제가 있소?”

신부와 추기경이 번갈아 질문했지만 데스필드는 담배만 피우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가 조바심을 내며 다시 질문하려 할 때 데스 필드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당신은 벌쳐요.”

데스필드의 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던 추기경은 그 말이 ‘그는 벌쳐요’라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벌쳐가 뭔지는 알 수 없었 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그 이름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계속 혼자말처럼 말했다.

“패스파인더 벌쳐. 그런데 당신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파킨슨 신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형제 아니냐?”

“한번도 본 적 없소.”

그런 대답을 예상한 적이 없었던 신부와 추기경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담배 연기 속에 얼굴을 감춘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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