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5화
고독한 기사 서 슈마허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다운 동작으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드디어 도착했어! 오오, 주여, 감사하나이다! 음 ! 음음음!”
잠시 후 슈마허는 열렬히 땅에 입맞추고 있었다.
소가 씹다 뱉은 여물 같은 머리 아래로 얼굴엔 비누 한두 장쯤은 너끈히 상대할 만한 웅장한 땟국물이 흐르고 먼지투성이가 된 어깨에 망토라고 주 장하다간 맞아 죽기 쉬울 걸레 쪼가리를 얹고서 땅바닥에 입을 맞추고 있는 기사의 모습도………… 때론 장엄해 보일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슈마허는 바로 그런 기적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물론 잠시 후 허리를 일으켜 퇘퇘 침을 뱉어댄 행위가 그의 기품을 약간이나마 손상시켰을 수는 있다.)
슈마허는 입을 쓱 닦은 다음 다시 눈물 어린 눈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먼저 냄새를 확인했다. 눈앞에 펼쳐진 포도원으로부터 맹렬 한 향취가 풍겨왔다. 슈마허는 눈을 꼭 감은 채 코를 위로 쳐들어 그 향기로운 냄새를 가슴 깊이까지 빨아들였다.
“라아아 트라인이다!”
슈마허는 다시 날랜 동작으로 말 위에 뛰어올랐다. 그러곤 라트라인 시내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멈춰 서서 누군가에 길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3년 전에 이루미나 공주의 수행원으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호위대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라트라인 시내 는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해질 무렵, 라트라인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한 섬뜩한 모습의 기사를 보 며 공포에 빠져들었다.
“이라 하!”
잠시 후 서 슈마허는 카밀궁 앞에 도달했다. 카밀궁의 경비병들 중엔 다행히도 3년 전 그들의 나라에 들렀던 카밀카르의 기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이 있었다. 그들은 서 슈마허의 초라한 행색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카밀궁 안쪽 정원으로 들어가자마자 서 슈 마허는 정원 가운데 서 있는 하얀 옷차림의 귀부인을 보게 되었다. 슈마허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거지 꼴을 한 기사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는 상대가 3년 만에 처음 듣는 호칭으로 그녀를 부르자 더욱 놀랐다.
“이루미나 공주님!”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카밀카르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루미나는 상대방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슈마허?”
“그렇습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공주……… 아, 아니. 라트랑 후작 부인이시군요.”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그리고 그런 모습은? 아니, 일단은 일어나봐요. 서 슈마허. 맙소사.”
이루미나는 당황하면서도 슈마허를 일으켰다. 슈마허는 깊이 목례하며 말했다.
“사정을 설명하자면 너무 깁니다. 그러니 설명 대신 질문을 먼저 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워낙 급한 질문이라서 그렇습니다. 율리아나 공주님 께서 혹 이곳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예? 아, 그래요. 그 애, 공주는 이곳에 있어요.”
“주여, 감사하나이다!”
슈마허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너무 오랫동안 누적되었던 피로를 한꺼번에 느꼈다. 슈마허는 잠깐 비틀거렸고 그를 안내했던 경비병들이 놀라서 슈마허를 부축했다. 그러나 슈마허는 그들의 부축을 살짝 물리치며 다시 질문했다.
“물론 안전하시겠죠?”
“공주가 안전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예.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공주님께선 여기 계시겠지요?”
“지금은 없어요. 잠시 밖으로 나갔는데…..”
별 생각 없이 말하던 후작 부인은 슈마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슈마허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추궁하듯 질문했다.
“공주님께선 호위와 함께 나가셨겠지요? 예?”
“호위? 아, 아뇨. 레빌 경과 함께 나갔어요. 레빌 경이 공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거든요. 그런 초대에 호위를 데려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공주는 자기 노예와 함께 갔어요.”
“레빌 경?”
“후작가의 비서지요.”
“그럼 다행이군요. 음, 죄송합니다만 제게 병사 몇 명을 좀 붙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레빌 경의 저택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그곳으로 가겠다는 건가요?”
“예. 그리고 이곳으로 모셔와야겠습니다.”
후작 부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서 슈마허를 바라보았다.
“서 슈마허. 진지하게 물어보겠는데, 좀 설명해 줄 순 없는 건가요?”
“공주님을 다시 이곳으로 모셔온 다음에 모든 것을 설명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공주님을 모셔와야 합니다.”
“그런 거라면 사람을 보내어 공주를 불러와도 될 텐데요. 당신은 휴식을 좀 취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레빌 경의 저택을 방문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난 후작님께 당신을 자랑스러운 카밀카르의 기사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지금으로선 후작님을 당황하게 할까 두렵군요.” 슈마허는 그제서야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모습이 이 아름다운 카밀궁에서 꽤나 파격적인 일탈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궁전이 아니라 뒷골목이나 다리 아래에 서 있는 편이 훨씬 나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 슈마허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험로를 달려와서. 품위 없는 모습 정말 죄송합니다. 크나큰 실례를 끼쳤군요.”
상기된 슈마허의 얼굴을 보며 후작 부인은 미소 지었다.
“일단 안으로 좀 들어가지요. 서 레빌의 집에 있는 것은 카밀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녁이니까 곧 돌아올 거예요. 그래도 경이 안 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공주를 돌아오게 하겠어요.”
슈마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제가 좀 지나치게 흥분했나 봅니다. 공주님께선 안전하시겠지요. 위험한 것은 서 레빌 쪽이겠지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이루미나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지요. 그러고 보니 공주의 화술에 곤욕을 치를 서 레빌이 불쌍하군요.”
율리아나 공주는 무서운 속도로 말했다.
“작렬탄? 놀라워요! 그러니까 포환 내에 폭약을 충전시켜 일체화시킨 거예요. 포환이 목표 지점에 명중하면 그 충격에 의해 내부의 신관이 작동하며 폭약이 폭발을 일으키지요. 신관은 격발식인가요? 아니면 관성식? 아하! 보면 알게 되겠지요. 어쨌든 신관 작동에 의해 충전 폭약이 폭발하면 그 폭 압에 의해 외부를 둘러싸고 있던 외피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가며 주위를 초토화시키는 거예요. 이론상 간단하지만 포환이 포신 내에서 폭발 하지 않고 목표 지점에서 폭발하게 하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지요. 그게 바로 격발신관의 마법이죠. 그런데 레모인들이 그걸 해냈다고요? 정말 놀라워요!”
서 레빌은 어이없는 얼굴로 율리아나 공주를 쳐다보았고 오스발은 한숨 쉬듯 말했다.
“……당황하셨습니까?”
“아뇨. 겁먹은 거예요.”
“그러시군요.”
밧줄에 묶인 채 공주와 등을 맞대고 있던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 레빌은 이 이상한 포로들에 대해 뭔가 정의를 내려보려다가 포기하곤 다시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은 나타나지 않았다. 율리아나 공주가 다시 말했다.
“나와 발이 사라지면 날 초대했던 당신에게 모든 의심이 돌아갈 텐데, 도대체 무슨 작정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죠, 서 레빌? 키 드레이번에게 협박받 았다고 말하기라도 할 건가요?”
“공주님. 난 그럴 생각 없소.”
“계획이 다 서 있다고 주장하는 얼굴이군요. 도대체 무슨 계획이죠?”
“당신은 알 거 없………… 마차 소리인가?”
서 레빌의 말에 오스발과 율리아나는 언덕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저 아래쪽으로부터 덜커덕거리는 수레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파랗게 질린 율리아나 공주는 밧줄을 풀어보겠다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요.”
“가만히 계시면 아프지 않으실 겁니다.”
“난 이 독특한 장신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나 역시 고문 도구나 다름없는 속옷들로 단련되어 온 여자이긴 하지만 이렇게 꽉 죄는 건 처 음이군요. 게다가 색깔이 진짜 마음에 안 드네요. 이 밧줄 색깔은 너무 촌스러워요. 엑!”
오스발은 낄낄거렸다. 허영심 덩어리의 연기로써 자신의 노예를 즐겁게 해준 율리아나 공주는, 하지만 자신의 기분을 추스르지는 못했다.
“어쩌죠, 발?”
“예?”
“드디어 왔어요. 그리고 난 저 자의 눈빛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스발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짧게 신음을 흘렸다.
수레에는 라이온과 세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키 드레이번은 수레에서 내리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가 황혼을 등지고 서자 밤의 정수 같은 모 습이 되었다. 오스발은 공주가 말한 ‘눈빛’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 검은 모습 속에서 눈빛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공주가 말한 눈빛은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었을 뿐이다.
서 레빌은 대포가 실린 마차를 훔쳐보다가 말했다.
“약속은 지켰소. 자, 그럼 이만 레모인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겠소, 키 선장?”
마차에 앉아 있던 라이온과 세실은 그 말에 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키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오스발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키가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나온 순간 율리아나는 정신이 다 나가버릴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큰 걸음걸이로 다가온 키는 오스발의 앞에 섰다. 물론 율리아나는 무시당했다는 기분을 느끼기는커녕 죽다 살아난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녀와 등을 맞댄 채 땅바닥에 앉아 있던 오스발은 고개 를 약간 꺾어 키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오스발은 밤을 향해 말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이군요, 선장님.”
어둠 속에서 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렇군. 오스발.”
“먼곳까지 오셨군요.”
“이곳에도 파도 소리는 있다.”
“길들여진 바다입니다.”
“혼은 죽지 않아.”
“저도 그러할까요?”
키의 검은 얼굴이 좌우로 움직였다.
“아니. 네가 유령이 된다면, 난 그 유령까지도 죽이겠다.”
“……신이 허락할까요?”
“내 행동에 신의 승낙은 필요없다.”
오스발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본 순간 어두운 키의 얼굴로부터 불꽃이 튕겼다.
키 드레이번은 오스발의 멱살을 움켜쥐어 끌어올렸다. 오스발과 함께 묶여 있던 율리아나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덩달아 끌어올려졌다. 두 사람을 한 꺼번에 끌어올리는 놀라운 괴력을 발휘했지만 키의 숨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키는 오스발의 얼굴을 코앞까지 끌어당기며 말했다.
“빌어라.”
“뭐라고 빌어야 합니까?”
“살려달라고 빌어라. 오스발.”
몸이 들어 있지 않은 옷가지처럼 가볍게 휘둘려지고 있었지만, 오스발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글쎄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살고 싶지 않다는 거냐?”
“아니오.”
“그럼?”
“선장님. 제가 빈다 해도 살려주실 것 아니잖습니까?”
“물론이지.”
세실은 당연하다는 투로 ‘물론이지’라고 말하는 키에게 질렸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오스발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무반응을 보임으로써 세실을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키는 턱을 앞으로 내밀며 사납게 말했다.
“그래서 자존심이나마 지키겠다는 거냐?”
“아, 아니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뭐, 불필요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불필요하다?”
“예. 말해 봐야 쓸모없는 말이니까요.”
“의사 표시는 될 텐데?”
“예?”
“그렇게 빌면 살고 싶다는 네 의사는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어, 선장님께서 제 의사를 존중하시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물론.”
“그럼, 제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키 선장님.”
“중요하지 않다고? 네 목숨인데?”
“제 목숨은 제게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말해 봤자 무슨 상관입니까. 인정하실 것도 아닌데……”
키는 여전히 교리문답이라도 하듯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방금 전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나?”
“모르겠습니다만.”
“넌 어떤 늙은 여자의 하나뿐인 소망을 진흙탕에 차넣고 발로 뭉개었다. 그녀가 죽음마저도 보류하며 기다려왔던 것이 쓸모없는 것임을 선언했지.” 여자라곤 두 명뿐이었기에 오스발은 세실을 쳐다보았다. 세실은 석양 속에서도 두드러질 만큼 하얀 얼굴로 두 남자의 혼란스러운 대화를 듣고 있었 다. 그러나 오스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외쳤다.
“알겠나!”
세실리아는 흠칫하며 키를 쳐다보았다. 키는 여전히 오스발을 쳐다본 채 외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답이다. 세실리아! 오스발이 말하길 세상엔 진리라는 것이 없다시는군. 자신에게 자기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만큼 뚜렷한 진실이 어디 있 겠나? 하지만 오스발은 그 진리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침을 뱉는군. 그러곤 거만하게 말씀하시는군.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가 있을 뿐이라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긍정하면 그게 아무리 개소리라도 진리가 되는 거야. 부정하면 성전의 말이라도 개소리가 되는 것이고!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가 있을 뿐, 그것 자체로 진리인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는군. 그러니까 넌 아무거나 하나 찾은 다음 그걸 긍정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게 바로 네가 지금껏 기다려왔던 것이 될 거야!”
세실은 입술을 몇 번이나 핥은 다음에야 힘들게 말했다.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야.”
“부정하는군. 봤나, 오스발? 세실은 네 말을 부정했어. 그러니 네 말은 이제 무의미해지는 거야. 알았나?”
“………관둬. 키 드레이번.”
키는 오스발의 멱살을 놓았다. 율리아나 공주와 묶여 있었던 탓에 오스발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물론 율리아나 역시 낮은 비명을 지르며 함께 쓰러졌다. 키는 복수를 뽑아들었다.
“넌 언젠가 살인이 죄라고 그랬지. 그렇잖나?”
그것은 세실에게 하는 말이었다. 세실은 괴로운 표정으로 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진리인가? ‘살인은 죄’라는 것이? 만일 그렇다면,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 진리에는 아무 힘도 없어. 그것이 갑자기 나타나 내 팔을 잡지는 못 해. 새장은 차라리 만질 수 있고 거기에 부딪힐 수도 있어. 부딪힐 수 있고 내 행동을 구속해. 그런 것이 괜찮은 진리 아닌가. 도대체 왜 그걸로 만족 할 수가 없나. 하지만…………… 하지만?”
어느새 키의 말은 그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세실과 라이온은 당혹하여 서로를 쳐다보았고 율리아나와 오스발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 았다. 선홍빛 석양 속에 키는 구부정하게 서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은 퍽이나 낯선 것이었다.
키는 갑자기 세실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그를 비추고 있는 햇살은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세실은 그 얼굴을 보며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여름날 아침, 더운 밤을 보내고 땀에 젖어 일어날 때, 시트는 구겨지고 말려 두 다리 사이에 끼워져 있고 팔다리는 방금 몸에서 돋아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끈적거리는 아침, 멍한 머 릿속으로 잘 떠오르지 않는 지난밤의 꿈을 생각할 때의 기분. 삶이 황당할 정도로 가까이 부딪혀 올 때, 서럽기까지 한, 그런, 그런.
“왜 넌 암탉이 달걀을 낳는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키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키의 말에서 ‘넌’이라는 대명사는 일반적인 용법과 다르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하며 세실은 하이낙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다림의 외곽 절벽 위에서 세상을 향해 으르릉거리고 있던 키를 생각했다.
쥬르노 산은 하이낙스에 의해 쥬르노 평원이 되었다. 하이낙스라면 수탉으로 하여금 오리알을 낳게 할 것이다. 새장의 문을 열 것이다. ‘세상의 모습 또한 그와 그에겐 진리가 아니었다.’ 세실은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그 둘이 제국의 공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얼마나 어울리는 일인가. 제국의 적. 세계의 적. 모든 새장의 적.
“새장의 창살 사이로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니까.”
“열면 다시 닫을 수 없는데. 다시는 널 행복하게 구속하지 않는데.”
“나를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보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키와 세실을 번갈아 바라보던 서 레빌은 자신이 아주 고약한 종류의 속임수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품어보았다. 저것이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드레이번인가? 믿을 수가 없군. 서 레빌은 불안스러운 눈빛으로 언덕 아래를 훔쳐보았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던 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서 레빌은 얼간이는 아니었고, 그래서 율리아나 공주가 살해될 경우 카밀궁에서 공주를 불러낸 자신에게 모든 의심이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나 공주의 암살건에 휘말린다는 것은 라트랑 후작 부인 이루미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임과 동시에 강국 카밀카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며 심지어 공주의 약혼자인 필마온 기사단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는 오늘밤 안에, 늦어도 내일 저녁까진 라트랑의 주인이 되어 있어야 했다. 에름 후작을 죽이고, 그리고 미망인이 된 라트랑 후작 부인 이루미나와 결혼해야 했다. 그럼으로써 라트랑과 카밀카르 양쪽을 한 꺼번에 정리하는 것. 거기까지가 서 레빌의 고려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에름 후작 살해 혐의를 덮어쓸 자로서 키 드레이번 자신이 필요했던 것 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언덕 아래에 매복시켜 둔 심복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키 드레이번이 나타나자마자 올라오라고 했더니,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때 키 드레이번이 말했다.
“레빌. 그들은 오지 않는다. 그들을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던 것이거든.”
레빌은 기겁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다………… 처리했다고?”
“그래.”
“도대체 어떻게?”
“지옥에 가서 물어봐.”
서 레빌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은 절벽이었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키 드레이번에 의해 막혀 있었다. 키는 서 레빌 쪽에는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 절벽 있으니 자살해.”
서 레빌은 그 태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실제로 키의 관심은 전부 오스발과 세실에게 돌려져 있었고 서 레빌에게 그것은 형언 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관심 가는 대상이 아니니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죽어라, 라고 말하는 키를 향해서 레빌은 이를 드러내며 검을 치켜들 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나를 뭘로 보는 거냐!”
키는 천천히 서 레빌을 돌아보았다. 서 레빌은 롱 소드를 들고 있었고 그것은 석양 속에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서 레빌은 그 롱 소드를 땅에 내리꽂고는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세실은 멍한 얼굴로 상념에 잠겨 있었지만 라이온은 흠칫하며 검을 뽑았다. 서 레빌이 품속에서 꺼낸 것을 보며 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뭐지?”
레빌은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며 사납게 웃었다.
“데샨 카라돔의 장난감이지.”
서 레빌이 들고 있는 것은 막대기같이 생긴 것이었고 그 아래쪽엔 끈이 달려 있었다. 서 레빌은 왼손으로 그 끈을 움켜쥐고는 키나 라이온이 어떤 행 동을 하기도 전에 그것을 확 잡아당겼다.
순간 그 막대기 끝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강력한 불꽃은 2, 3피트는 되는 듯한 길이로 솟아올랐다. 서 레빌은 그것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절벽 저편의 허공을 향해 집어던졌고 키는 눈살을 찌 푸렸다.
“그건 신호인가?”
“그래. 자, 선택해!”
“선택?”
“조금 있으면 내 사람들이 카밀궁을 점거할 것이다. 좀 거친 수법이지만 도리가 없지. 에름 후작은 죽고 난 그의 나라와 그의 아내를 승계할 거야. 날 죽인다고? 허튼소리. 나에게 협력해! 아니, 나를 이용해! 라트랑의 새 지배자인 나와 손을 잡는 거야. 내가 이루미나를 얻으면 카밀카르까지도 내 것이 되는 거야. 그러면……………
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앙칼진 고함이 터져나왔다.
“이 나쁜 놈, 헛소리 하지 마!”
레빌과 라이온, 세실, 그리고 키까지도 약간 당황한 눈초리로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오스발은 사정상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등을 통해 율리아나 공주가 거칠게 씩씩거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우리 언니를 어쩌겠다고? 키 드레이번! 저 사람 죽여버려요! 당신 미쳤으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오스발은 나오는 대로 말하는 주인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의 비탄을 느꼈다. 그러나 율리아나 공주는 왜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겁을 줄 수가 없냐는 것에 대해 비탄을 느껴야 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세실은 물론 서 레빌까지도 웃음을 띄웠다. 서 레빌은 공주를 무시한 채 말했다.
“자, 키 드레이번. 당신은 바보가 아닐 거야. 난 라트랑의 지배자가 됨과 동시에 레모, 카밀카르와도 연결되는 고리가 되는 거야. 당신에게 폴라리스 가 있지? 그럼 나와 손을 잡으면 네 개의 나라가 서로 연결되는 거라고. 난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야. 당신은 이런 기회를 놓칠 정도의 얼간이는 아니 겠지?”
키는 라트라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라트라인 시내에서 움직이는 불빛들이 보였다. 꽤 많은 숫자의 횃불이 여러 방면으로부터 카밀궁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34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서 레빌은, 확실히 준비를 단단히 해두는 타입이었다.
서 레빌은 마차에 실려 있는 작렬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그 대포를 이용해야 돼! 알겠나, 키 드레이번? 그걸로 카밀궁을 포격해야 돼! 이것이 바로 기회란 말이야!”
“안 돼! 키 드레이번, 부탁이에요. 언니를 괴롭히지 말아요!”
키는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율리아나는 상기된 얼굴로 외치고 있었다.
“제발. 당신의 목적은 언니가 아니잖아요? 라트랑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에요. 로드 에름 때문이에요. 우리 언니에게 로드 에름은 무엇보다 소중 한 선물이에요. 제발, 제발 룸 언니의 작은 행복을 깨뜨리지 말아주세요. 키 드레이번. 제발 동정심을 가져줘요!”
서 레빌 또한 지지 않고 외쳤다.
“동정심이라고? 키 드레이번. 설마 저런 이야기에 신경 쓰진 않겠지? 당신은 동정심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가 된 것은 아니잖아. 합리적으로 생각 해! 손에 다 들어온 것을 놓치진 않겠지. 대포? 안 쏴도 상관없어. 카밀궁은 조금만 있으면 무너져! 당신이 할 일은 그저 나와 함께 저곳으로 내려가는 일뿐이야. 단지 그것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