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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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6화



그러나 서 레빌의 예상과는 달리, 카밀궁을 공격하던 레빌의 수하들은 뜻밖의 곤경에 빠져 있었다.

카밀궁은 원래부터 전투용의 건물은 아니었다. 물론 지배자의 저택이므로 어느 정도의 수비 시설은 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카밀궁은 에름 후작 이 그 아내를 위해 만든 예술품이었다. 따라서 카밀궁의 점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레빌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카밀궁의 경비병 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카밀궁에 의외의 인물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 공주님을 두 번 위험하게 하진 않는다!”

참으로 기사도의 정화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 앞에서 피를 토하듯 외치는 슈마허의 모습을 보면서 카밀궁의 경비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서 슈마허의 헤진 옷자락이나 남루한 차림새 따위는 오히려 그를 역전의 용사로 보이게끔 했다. 슈마허는 종횡무진으로 말을 달리며 눈앞에 들어오는 모든 반역자를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라트랑의 형제들이여! 나는 카밀카르의 기사 서 슈마허요! 부탁이오! 내가 나의 왕에게 그 분의 따님과 그 분의 사위를 지켰다고 말하게 해주시오!” 

서 슈마허의 절절한 요청에 호응하여 카밀궁의 경비병들은 무서운 기세로 일어났다. 기습을 당했던 카밀궁은 서 슈마허의 귀신 같은 분전에 힘입어 간신히 숨돌릴 틈을 얻었고 카밀궁 경비대장은 그 시간을 잘 활용하여 조직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반역자와 경비병들 사이의 무서운 격투로 아름다 운 카밀궁은 순식간에 유혈의 장으로 바뀌었다. 반역자들은 미친 듯이 덤벼드는 경비병들을 보며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더 안 좋았던 것은 서 레빌의 부재였다. 조직적인 공격을 할 수 없었던 반역자들은 폭도처럼 그저 날뛰고만 있었고 카밀궁 경비병들은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 신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카밀궁의 지리를 잘 이용하며 반역자들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저 기사.”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루미나는 고개를 돌렸다. 몇 명의 기사들에 둘러싸인 에름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고 있 던 에름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서 슈마허라고 했던가요? 당신 고국의 기사들은 모두 저렇습니까?”

“잘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카밀카르인들은 좋은 기사보다는 좋은 뱃사람을 더 존경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거든요. 카밀카르는 록소나 처럼 기사들의 무용으로 유명한 나라는 아니잖아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군요. 이런 때 저 기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심됩니다. 하지만 이젠 주인이 나설 때가 되었 군요.”

팔을 움직이며 갑옷의 착용 상태를 검사하던 에름은 마지막으로 검집을 들어올렸다. 검대를 허리에 찬 에름은 이루미나에게 다가왔다. 에름은 이루 미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바닷속에 들어가 있어요. 이루미나.”

“바닷속이오?”

“예. 그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까. 당신이 머메이드라는 사실이 대단히 유용하군요.”

이루미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혼자 안전한 곳에 있고 싶지는 않아요. 비이성적이라는 건 알지만.”

“부탁이에요. 이루미나. 당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내가 안심하겠어요.”

“하지만……”

“그리고, 난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들 겁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겁이 많잖아요. 첫 번째 반역자를 보자마자 줄행랑을 칠지도 몰라요.”

“어머, 에름.”

“하하. 당신이 기다렸다가 날 받아주겠지요? 난 헤엄 못 칩니다. 갑옷까지 입은 상태에서 바닷속에서 살아나는 건 잊혀진 탑의 이름을 맞추는 것만 큼이나 불가능한 일이 될 겁니다.”

에름 후작의 짐짓 애원하는 얼굴을 보며 이루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지금?”

이루미나는 얼굴을 약간 붉힌 채 기사들을 가리켰다. 에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몸을 돌렸다. 기사들과 함께 문으로 걸어가던 에름은 문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들이 나가자마자 바닷속으로 들어가요. 알겠죠?”

“알았어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제발.”

에름은 웃으며 문을 나섰다. 그러나 복도로 나오자마자 에름 후작은 얼굴을 굳히며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서 레빌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율리아나 공주를 데려간 것은 인질이었군. 미련한 자. 좋아. 그대 둘은 당장 아리온 저택으로 가라. 율리아나 공주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고 상황 을 조사하라. 가는 길에 서 슈마허도 데리고 가도록. 공주를 모시던 기사니 도움이 될 거야.”

두 명의 기사가 경례를 붙인 다음 빠르게 걸어갔다. 에름 후작은 검을 뽑은 다음 나머지 기사들과 함께 정원을 향해 달려갔다.


저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하던 서 레빌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나에겐 이루미나에게 동정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율리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빌이 희열에 찬 얼굴로 뭐라 외치려 할 때 키의 말이 곧장 이어졌다.

“그러나 서 레빌을 죽여야 할 이유는 하나쯤 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서 레빌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천천히 서 레빌을 돌아보았다.

“자살하라고 했다.”

“뭐라고?”

“언덕길에 숨겨놨던 놈들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할 생각이었지?”

“뭐? 어, 하지만 그건 지난 일이잖아?”

“일어난 일이지.”

“아, 하하. 이봐, 키 선장, 거기에 대해선 사과하겠어. “설마 아니겠지?”

키는 서 레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 레빌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농담이겠지? 키 선장. 생각을 좀 해! 나를 살려주면 너의 폴라리스는 사트로니아뿐만 아니라 이 라트랑 또한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이야.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큰 것을 봐!”

키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의 폴라리스? 그런 것 가지고 있지 않아.”

“무슨 말이야?”

“말을 계속 늘이는군. 귀찮은 녀석.” 키는 서 레빌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서 레빌은 당황하여 검을 들어올렸지만 그가 채 검을 세워들기도 전에 키 가 파리라도 쫓듯이 복수를 휘둘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 레빌의 검은 옆으로 날아갔고 검을 놓친 서 레빌은 눈을 크게 뜬 채 키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얼굴을 향해 키는 복수를 차분히 내리꽂았다.

“꺄아아악!”

율리아나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숙였다.

강력한 일격에 서 레빌은 무릎을 꿇었다. 태양은 이미 서쪽 대지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눈이 아프도록 붉은 석양 속의 그 그림자들은 마치 서품식 중인 주군과 기사의 실루엣 같았다. 꼿꼿하게 서 있는 키 큰 남자,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 그리고 키 큰 남자의 손에서 나와 앞쪽의 남자의 머리에 멎어 있는 검.

그야말로 서품식중의 군주처럼 키는 복수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기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서 레빌의 그림자는 일어나 감사를 표시하는 대신 허물어 지듯 쓰러졌다. 자욱하게 번지고 있는 피비린내는 쓰러진 그림자를 한 명이라 부르는 대신 한 구라는 말로 불러야 함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옆으로 서 있던 키의 그림자가 빙글 돌았다. 오스발은 그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서서히 오스발을 향해 다가왔다.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스발은 문득 등을 통해 공주의 떨림을 느꼈다. 공주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오스발은 어느 밤을 떠올렸다.

키는 복수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하지만 오스발은 그 모습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진 않았다. 그는 차분히 자신 속으로 가라앉은 다음 어느 날 밤을 생각했다. 팔라레온의 새카만 밤 하늘. 어떤 알려지지 않은 고귀한 생물의 맥박처럼 느릿하게 물결치던 밀밭. 희게 돌고 있던 풍차, 시린 달빛이 꽃잎처럼 쏟아지던. 그리고 오스발은 그 속에서 하얗게 서 있던 공주의 모습을 생각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사고가 영글어지며, 오스발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셔야죠, 공주님.

집으로 갑시다.

복수가 거꾸로 떨어지는 벼락처럼 하늘을 찌른 순간, 오스발은 저쪽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들 모두의 머리 위로 거대한 암흑이 덮쳐 왔다.


“으, 으아악!”

에름 후작은 당혹한 눈으로 앞쪽의 적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에름 후작은 상대방이 반역자로서 죄의식을 느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로 치기도 전에 저렇게 쓰러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에름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땅에 주저앉은 상대는 그의 어깨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반역자의 얼굴은 격렬한 공포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에름 후작은 뒤로 조금 물러난 다음 재빨리 뒤쪽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에름 후작은 온몸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죽일 듯이 싸우던 상대방에 대해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희한한 망각은 넓은 카밀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서로 상대방의 목을 따내지 못해 안달 하듯 거칠게 싸우던 반역자와 경비병들은 모두들 넋을 잃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라트라인의 시민 전부가 하던 일 을 잊고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름 후작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라트랑의 하늘에 나타난 그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그것을 본 사 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천사나 진정한 사랑이 그렇듯 한번도 본 적이 없어도 보자마자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리고 역시 천사나 진정한 사랑처럼 진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라트랑의 노을 속을 날아가고 있는 것은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가장 큰 먹구름보다 크고 가장 강력한 폭풍보다 강력했다. 네 장의 날개는 하늘을 찢어내는 듯했고 곧게 뻗은 목은 명중이 약속된 화살촉 같았다. 에 름 후작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전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애썼지만 그것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는 도저히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카밀궁의 경비대장이 대단한 기지의 소유자임이 드러났다.

“너희들의 악업을 징벌하기 위해 나타난 제왕을 보라 ―!”

에름 후작은 기가 막힌 얼굴로 저 멀리 서 있는 경비대장을 보았다. 그는 정말 되묻고 싶었다. 자네 방금 뭐라고 그랬나? 하지만 경비대장은 씩씩하 게 외치고 있었다.

“너희들은 라트랑의 정당한 지배자에게 검을 겨냥했다! 그 천인공노할 죄악에 대하여 무엇이 나타났는지를 보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너희들의 심판 자를 보란 말이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반역자들은 뜨거운 것이나 되는 것처럼 각자의 무기를 팽개친 다음 자신들은 원래 지하생물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에름 후작의 상대 역시 땅에다 머리를 쑤셔넣으려 애쓰며 울부짖었다.

“오오, 후작님!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전,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전 버러지입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후작님!”

땅에다 머리를 쑤셔넣으려 애쓰던 그 반역자는 그것이 여의치 않았는지 곧 에름 후작의 다리에 매달렸다. 마치 에름 후작을 모든 죄악의 면죄부쯤으 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다른 반역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반역자들은 모두 에름 후작에게 달려왔고 그의 주위에 무릎을 꿇으며 그 발에 키스하려 했다. 그래서 카밀궁의 경비병들은 에름 후작이 압사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급하게 그를 보호해야 했다.


절벽 위에서 세실은 온몸을 떨며 그 모습을 보았다. 절벽 위의 사람들 중 가장 나이 많은 그녀였지만 그녀의 긴 생애에서도 그런 압도적인 힘의 화신 을 본 기억은 없었다. 물론 그녀의 눈앞에서 쥬르노 산이 쥬르노 평원으로 바뀐 적은 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느낀 것은 충격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 이었다. 이해할 수 없으면 충격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라트랑의 석양 속을 날고 있는 드래곤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때 키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라오코네스!”

라오코네스? 세실은 키의 말에 흠칫했다. 저것이 일몰의 왕 라오코네스라고?

일몰의 제왕은 순간을 지배하기에 영원을 지배한다. 누가 설명해 준 것은 아니지만, 세실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라오코네스는 일몰을 이용하여 단숨 에 대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라이온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뭐라고? 너 전에 저거 봤냐?”

라이온의 떨림이 약간 줄어들었다. ・세실. 당신이 덤벙거리는 성격이란 건 이젠 비밀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걸 잊습니까. 율리아나 공주 가 도망친 것이 미노 만이었다고 말했잖습니까.”

“아, 그랬지?”

세실은 넋 나간 듯이 벙긋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그녀의 눈은 다시 석양 속으로 고정되었고 그 끔찍한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세 실 덕분에 약간 침착을 되찾은 라이온은 라오코네스의 진행 방향을 관찰하는 여유까지 발휘했다. 라오코네스는 대단한 속력으로 날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어느샌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북서쪽이군요. 그쪽으론 나라가 너무 많아서 어느 불행한 나라가 라오코네스의 공격 대상이 된 건지 모르겠는데요.”

“고, 공격 대상?”

되묻는 세실의 말에 라이온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예? 아, 뭐 공격이 아닐지도 모르죠. 그냥 무섭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이해돼.”

세실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키에게 너도 이해되지? 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참혹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세실과 라이온은 잠시 라오코네스의 모습마저 잊어버릴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짧은 순간 그들은 라오코네스가 포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목소리의 방향은 분명 다른 쪽이었다. 세실과 라이온은 키를 바라보았고 무서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오싹해지는 전 율을 느꼈다. 세실은 키가 왜 비명을 지르는지 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라이온이 알아차렸다.

“달아났어!”

오스발과 율리아나 공주가 앉아 있던 곳엔 끊어진 밧줄들과 키가 튕겨내었던 서 레빌의 검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두 남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 이지 않았다. 라오코네스의 모습을 보다가 그들이 달아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키는 끔찍한 고함을 지르며 발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L은 라오코네스였군요.”

플로라는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황은 그것이 대단한 사실이나 되는 것처럼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얼빠진 얼굴로 하늘을 쳐다 보았다.

법황청의 테라스. 신앙심 깊은 순례자들이나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리거나 할 때 법황이 서곤 하는 그 장소에서, 법황은 거꾸로 자신이 무슨 축복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만인을 굽어보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에서 위를 쳐다볼 필요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기분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펠라론의 가장 높은 종루도 라오코네스의 가슴에도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라오코네스는 너무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고 법황은 그가 자신 을 인식할 수 있을지조차 미심쩍었다. ‘아마도 개미 비슷하게 보일 텐데.’ 법황은 잠시 테라스 아래쪽을 내려다보았고 노비서관 그레이엄이 어울리지 도 않는 중장갑을 걸친 채 라오코네스의 가운뎃발가락을 향해 검을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깊은 한숨을 쉬며, 퓨아리스 4세는 재미없는 사람으로 알려진 법황청 비서관이 혹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자신의 침대에 앉아 기사도 문학을 너무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잠시 의심해 보 았다.

까마득한 곳으로부터 목소리가 날아왔다. 

“법황이여, 이름은?”

퓨아리스 4세는 그것에 대답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천둥 소리 같은 것에 대답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리스 4세다. ・…들리는가?”

“잘 들리니 그렇게 목소리를 돋우어 말할 필요는 없다.”

저 아래에서 그레이엄은 무거운 검을 내려놓고는 힘들게 바이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창피스러운 광경이지만 법황청의 경비병들이 그 레이엄의 등뒤로 숨어 있는 모습도 잘 보였다. 법황은 약간 비꼬아서 말하여 긴장감을 조성한 다음 저 경비병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관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법황은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법황을 내버려둔 채 무기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달아난다 해서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라오코네스.” 

법황은 자기 목소리가 엄숙하게 들리길 간절히 원했다. 

“제국과 너와의 협약에 의하면 넌 미노 만을 벗어날 수 없을 텐데. 이것은 황 제에 대한 도전인가?”

“이곳이 황제의 땅인가?”

법황은 자신이 대드래곤에게 한방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곳은 신성 펠라론이다.

“그렇군. 대드래곤 라오코네스, 실언을 사과하겠다. 일단………… 나는 이렇게 성도의 하늘 아래에서 그대를 만나게 된 것이 매우 기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용건을 말하겠다.”

터프한 자식 같으니라고. 법황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 용건이라는 것을 기다렸다.

“나는 법황과 펠라론에게 권고한다. 펠라론 게이트에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

“펠라론 게이트에?”

퓨아리스 4세는 잠시 주춤하며 플로라를 돌아보았고 플로라 역시 당혹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라오코네스가 일부러 저렇게 나타나서 말하지 않 더라도 그곳에 들어가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법황은 라오코네스가 참견꾼의 성벽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법황은 라오코네스가 권고라는 신사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주목했다. 옳은 태도다. 원칙적으로 라오코네스는 펠라론 게이트에 대해 어 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세례를 받았을 리는 법황은 그 광경의 상상도조차 머릿속에 그릴 수 없었다 없으니까.

“그것은 친구의 권고인가? 아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세례를 받은 신도는 누구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네 친지 중 누군가가 그렇게 하겠다면 일단 말릴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퓨아리스 4세는 인정해야 했다. “아마도.” 그리고 법황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여. 권고란 대개 친절한 마음씨의 산물이고 난 권고를 말한 그대의 친절함에 의지하여 묻겠노니, 그 권고의 의미도 설명해 주 지 않겠나? 왜 그런 권고를 하는 것인가?”

“용건은 끝났다.”

법황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 개의 날개가 네 개의 그림자처럼 펼쳐지며 잠시 법황청에 암흑을 던졌다 싶을 때 라오코네스는 이미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바람이 일어났다.

저 아래에선 중장갑을 걸친 경비병들과 그레이엄이 그 갑옷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와 당탕거리며 쓰러졌다. 펠라론의 곳곳에서 터져나온 비명은 방불케 했다. 법황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재빨리 한쪽 손으론 테라스의 난간을 움켜쥔 다 음 다른 손으로 플로라를 끌어당겼다.

마치 폭풍 속의 배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바람에 비틀거리면서도 법황은 가슴에 안은 플로라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실눈을 뜬 채 하늘을 응시했다. 라오코네스는 땅으로부터 솟아나는 밤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은 네 장의 날개를 크게 펼친 다음 펠라론의 상공을 한 바퀴 돌았 다.

잠시 후 라오코네스는 일몰의 땅,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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