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4장 : 얼어붙은 검 – 3화
“배후를 내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군요.”
잔뜩 흥분한 가일즈 부관은 헐떡이듯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헐떡인다는 사실은 깨닫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바스톨 장군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 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경장기병과 노예병, 그리고 그 다음엔 경장보병이 번갈아 나서며 사트로니아 중장기병을 차단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중장기병의 발굽 아래 단숨에 뭉개질 것이 뻔한 — 그렇기에 바스톨 장군은 중장기병에 의한 배후 공격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병력이 이렇게까지 선전하는 이유를 찾아 노장군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아무래도 그 지휘관들이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별로 내리고 싶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군대라는 것은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다. 그래서 무사이자 군인인 바스톨 장군은, 그 자신이 이미 유명한 무사임에도 불구하고 돌출되는 개인이 라는 개념을 과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휘관의 직업병이기도 하다. 부하들 중 누가 죽든 똑같은 한 명의 손실로 생각하지 않으면 지휘관의 일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이유 외에 다른 이유는 댈 수 없었기에 바스톨 장군은 씁쓸한 심정으로 그 결론을 받아들였다.
그때 이상한 느낌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바스톨 장군은 그 느낌에 집중했다.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군은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내가 무엇을 놓쳤단 말인가?’
비록 중장기병에 의한 배후 제압은 저지되고 있지만 그래도 전선 전체에서 사트로니아군은 압도적인 위세로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묶여 있는 중장기병들도 앞서 그랬던 것처럼 곧 상대를 물리치고 장군의 뜻대로 포위진을 완성시킬 그런데 처음으로 그들을 막았던 부대는 어디 갔지?
바스톨 장군은 흠칫하여 전장의 남쪽을 살폈다. 처음으로 사트로니아 중장기병을 막았던 노예병과 경장기병들 중 노예병들은 어느새 중장기병들의 배후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경장기병들은…..
바스톨 장군은 전장의 남쪽을 크게 선회하여 달려오고 있는 일단의 경장기병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멀리서도 뚜렷이 확인되는 초록빛 갑옷이 보였다.
장군의 손이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휘리 노이에스는 어느새 서 기리우와 함께 경장기병들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상대편의 뒤쪽, 즉 사트로니아군 본 대의 배후였다. 350기 정도로 줄어든 경장기병들은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이 맹렬하게 달리고 있었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부대는 없었다. 바스톨 장군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배후 공격을 성공시킨 것은 오히려 휘리 노이에스 쪽이었던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숫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트로니 아의 본진을 혼란에 빠뜨리기엔 딱 적당한 숫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승패는 미묘해지게 될 것이며 볼지악 요새 내에 있는 7군단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사트로니아 쪽이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바스톨 장군은 휘리의 웃는 얼굴을,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내가 이겼다!’
바스톨 장군의 입가에 무의식중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될까?’
바스톨 장군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노장군은 검을 뽑아들어 한번 뿌린 다음 남쪽을 가리켰다. 노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간단했다. 남쪽을 본 기사들은 다가오고 있는 일단의 경장기병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때 장군의 외 침이 터져나왔다.
“용기 있는 자들은 따라오라!”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물론 가일즈 부관은 자신이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대신 급히 말의 배를 걷어찼 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 역시 맹렬한 기세로 사령관의 뒤를 따랐다.
바스톨 장군을 거의 따라잡은 가일즈 부관은 상관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곤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간신히 두발 동물이라 주 장할 수 있게 된 시절의 일인지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용병 바스톨 엔도의 얼굴임이 분명했다. 가일즈 부관은 그 순간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유혈로 몸을 씻던 시절의 바스톨 엔도를 보았다. 가일즈 부관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뿐임을 깨달았다.
가일즈 부관은 장군을 앞지르기 위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 하!”
먼저 나서서 휘리 노이에스를 상대한다는 그의 부관다운 고결한 결심은, 그러나 무위로 돌아갔다. 가일즈 부관은 도무지 장군의 승마술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저 앞쪽을 바라보았고, 초록색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새 초록색 갑옷을 입은 휘리 노이에스로 바뀌 어 있음을 발견했다.
8군단 사령관 휘리 노이에스는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바스톨 장군을 발견하고는 싱긋 웃으며 말을 세웠다. 그와 함께 달리고 있던 경장기병들은 당 황하여 그들의 사령관을 따라 멈춰 섰지만 휘리는 아무 말 없이 안장 옆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휘리는 안장 옆에서 단궁을 뽑아들었다. 기사(騎射)에 상당한 소질이 있는 듯 휘리는 깨끗한 손놀림으로 활시위에 화살을 재어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계속 말을 달렸다. 심지어 장군은 방패를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휘리는 시위를 놓은 다음 기사의 정석대로 반탄력을 최대한 흩어놓았고 그래서 화살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매끄럽게 날아 든 그 화살은 꼿꼿이 앉아 있는 장군의 머리 옆을 지나갔다. 명중이나 다름없는 솜씨였지만, 어쨌든 맞은 것은 아니다. 서 기리우는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고 가일즈 부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은 당연하다는 태도였고 휘리 역시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 거리에서의 기사 란 어차피 도박이다. 휘리는 활을 옆으로 집어던지곤 칼을 뽑아들었다. 바스톨 장군은 비웃듯 외쳤다.
“초록빛을 몸에 두른 음유시인이 검을 드는가?”
“당신은 지금 나와 전투하려는 건가?”
휘리의 거침없는 응에 바스톨 장군은 껄껄 웃었다. 휘리의 말이 옳았다. 바스톨 장군은 휘리 노이에스가 돌출된 상황에서 그를 쓰러뜨림으로써, 자칫 미묘해질 수도 있는 전황을 다시 결정적인 것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따라서 비록 백주에 정면으로 덤비는 것이지만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암 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좋아. 네 피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피를 마셔왔던 검을 받아보라!”
그 순간 볼지악 전투는 한 점으로 압축되고 있었다.
“응?”
“…..너희틀 결혼했냐?”
돌탄 선장은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작업중인 측량원들을 구경하고 있는 벨로린이 서 있었다.
“선폭에 풀카사리 풀어타니틋이 풀어타니는쿤. 처 꼬마는 원래 물수리호에 있지 않았나? 왜 네케 풀어타니는 커지?”
“자기가 그러고 싶대.”
“왜?”
“날 선택했다나 봐.”
킬리는 탁자 위에 놓인 측량 자료와 지도들을 뒤적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돌탄 선장은 코를 실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유모로?”
“으윽. 아냐.”
“첫사랑으로?”
“제발, 돌탄.”
“남편으로?”
돌탄 선장이 그냥 넘어가줄 작정이 아니라고 판단한 킬리는 한숨을 쉬며 손에 쥐었던 두루마리와 삼각자 등을 내려놓았다.
“그것도 아냐. 더 묻지 마. 나도 내가 뭘로 선택됐는지 모르겠어. 혹시나 기사로 선택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내 보호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 꾸로 자기가 날 위해 뭐든 해주겠다더군.”
“으음? 왜?”
“저 애는 내게 미안해하고 있어. 나도 어른인데 어린애의 그런 감정을 이용해 먹을 생각은 없지만, 자기가 저러고 싶다는 데야 어쩔 수 있나. 그냥 맞춰줘야지.”
“미안해한타? 왜 미안해하는 컨테?”
“사실을 알려준 것에 대해.”
“사실?”
“아미가 죽었대.”
돌탄은 잠시 멈칫했다.
“레이티 아밀리아카?”
“응.”
킬리는 벨로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대충 간추려서 말해 주었다. 돌탄 선장은 오랜 친구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그렇게 퇸 커였나. 그런데 처 꼬마카 어떻케 크 사실을 안타는 커치? 묘한 일이쿤.”
“벨로린은 모르는 것이 없어. 나조차 믿지 않던 교육의 중요성을 그녀에게 역설하다가 된통 당하는 내 모습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모르는 컷이 없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그녀는 정말 모르는 것이 없어.”
돌탄 선장은 다시 코를 씰룩거리곤 의자에서 일어났다. 킬리는 멀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돌탄은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다음 벨로린 을 향해 걸어갔다. 벨로린은 언덕의 바위 위에 앉아 여전히 측량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폴라리스 평의회는 다림 시외에 성벽을 신축하기로 했다. 명색이 수도이므로 방어성은 필요하며 그것은 또한 신생국에 있어 상징적 건축물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는 합리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자유호의 식스 일항사는 다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며 그 예산을 맞춰내어야 했 다. 물론 식스는 훌륭한 예산서를 만들어냈고 하리야 선장은 그 예산서에 대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찬사를 내려 식스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돌탄 선장이 신축 성벽의 공사 책임을 맡게 되었다.
공사 책임자 돌탄은 벨로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어이, 컴은 꼬마.”
벨로린은 이 이상한 자마쉬 사투리가 자신을 가리킨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돌탄 선장을 올려다보았다.
“왜?”
“너 모르는 컷이 없다며?”
“아니.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는 몰라.”
이 대답은 돌탄 선장을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저편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킬리를 돌아보았지만 킬리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돌탄 선장 은 그 말에 대해 잠깐 생각한 다음 다시 벨로린에게 말했다.
“그래? 아. 크럼 내카 칠문하는 컷에 태탑해 퐈.”
“……해봐.”
“신생쿡 폴라리스는 망하나?”
벨로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킬리 선장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돌탄 선장을 향해 벨로린이 불쌍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물론. 언젠가는.”
“으윽. 그럼 언체 망하치?”
“그걸 누가 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아………… 예언은 안 된다는 컨카. 아. 크럼 어티 포자, 크래! 휘리 노이에스의 아퍼치는 누쿠치?”
벨로린은 다시 불쌍하다는 시선을, 이번엔 좀더 강도 짙게 지어보였다.
“그에게 물어봐. 예의를 안다면.”
이로써 돌탄 선장은 부주의한 성격임과 동시에 무례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킬리 선장은 배를 붙잡고 웃어대고 있었고 돌탄 선장은 붉으락푸르락거 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아, 총타코, 크럼 나와 관련된 컷이면 퇴켔쿤? 으흠. 크래, 이컨 어때. 내카 하고 있는 사업의 총콩사피는?”
“126,053,000 데리우스.”
“응? 무슨 소리야. 9,000만 테리우스 정토인테?”
“당신은 식스나 하리야를 몰라. 그들은 예비비를 만들어두는 성격이고, 그걸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 돈은 현금화되지 않은 채 장부 상으로 조성되어 있고 당장 건축 자금으로 묶여버릴 경우 다림 시내의 몇몇 유수한 상회에 약간의 부담을 줄 수 있으니까. 물론 그들이 그걸 착복할 생각은 아니니까 나도 말해 주는 거야. 예비비가 남으면 그들은 성벽에 배치할 대포를 사들일 생각이지.”
돌탄 선장은 입을 쩍 벌린 채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훔쳐듣고 있던 킬리는 그들이라면 정말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지만 그 정보는 잊는 편이 좋겠어, 돌탄. 예산서대로 집행해.”
“아, 나토 흥청망청 써퍼릴 위인은 아니야, 체킬. 치큼 톤이 얼마나 중요한치 청토는 나토 안타코. 크컨 크렇코 청말 놀라운테. 아, 아. 이커 하나 물 어포차.”
“뭐지?”
“파스톨 엔토 창쿤 말이야. 타펠로 친쿤해서 휘리 노이에스와 풀었지? 크케 아직 청포카 틀어오지 않았는데, 누카 이켰지?”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듣고 있던 킬리는 곧 기겁할 듯이 놀랐다. 만일 벨로린이 그 질문에 대답한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고 절 대로 두 번째의 추격은 받지 않을 정보망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지만, 일어난 일이라면 그게 어디서 일어난 일이든 알 수 있는 것이므로. 킬리는 자신이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일종의 절망감까지 느끼며 (이렇게 아둔했다니!)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무도.”
“아무토? 크게 무슨 말이야?”
발코니와 창문마다 여인들의 상기된 얼굴이 반짝거리고 있다. 다락방의 창문으로 몸을 내미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지붕에 올라간 축들도 보인다. 그 중 침대 시트를 벗겨내어 거기에 거대하게 휘리 노이에스의 이름을 적어 휘두르는 사내가 특히 눈에 뜨인다. 그리고 대로 양편에는 사람들의 파도라 할 만한 것이 물결치고 있었다.
“휘리 노이에스 만세! 8군단 만세!”
볼지악 요새는 수도관문이라 상주하는 민간인들도 많았다. 요새 도시라고 부르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도시 내의 모든 사람들이 몰 려나온 것이다.
8군단은 씩씩하기 짝이 없는 걸음걸이로 진군하고 있었다. 가장 앞쪽에는 군단의 꽃, 중장보병이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비록 피와 땀에 절어 있는 모습이었고 그 동안의 많은 전투로 복장들 또한 통일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밝았고 내딛는 발걸음은 거의 찬란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노예병들의 모습은 볼지악 성내의 사람들에게 거의 놀라움에 가까운 위화감을 던져주었다. 그들 역시 많은 전투 를 겪은 후라 갑옷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기도 했고 턱없이 거대한 중병기를 들고 있기도 하여 애초의 농민군 비슷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어찌 보면 노련한 전사 같고 어찌 보면 야만인 같은, 한마디로 매우 데카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노예병들에게도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었고 난생 처음 그런 환호를 받는 노예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드디어 8군단 사령관 휘리 노이에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군중들 사이에서 포성에 가까운 환성이 터져나왔다.
“휘리 노이에스! 휘리 노이에스!”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목소리들에 휘리는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휘리의 손길은 무사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가수 의 우아한 손짓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혼절할 정도로 감격했다.
기병들과 포병들은 볼지악 요새 내의 좁은 대로를 걸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 약식 개선식에서 생략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포로들의 모습이었다. 포로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인파들을 즐겁게 하기엔 충분했다. 혹은 경멸감과 증오를 표시하기에 충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약식 개선식의 아이디어를 내었던 메르데린 공작은 본성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8군단의 모습을 보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를 나무랄 수도 없을 것이다. 눈앞의 부대는 단신으로 다벨을 떠나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정벌했고, 록소나를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였으며, 그리고 바람처럼 달려와 그들을 구원한 부대였다.
이윽고 분열 행진이 끝나고 중장보병과 노예병들이 대열을 짜고 멈춰 섰다. 베테랑들인 중장보병은 이렇게 급조된 개선식에서도 쉽게 분열 행진을 해내었고 한번 훈련받은 적도 없는 노예병들도 서 소팔라의 민첩한 지시에 따라 그럭저럭 대열을 짰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틈으로 휘리 노이에스가 걸어왔다.
메르데린 공작과 그의 가신들이 서 있던 계단 앞쪽에서 휘리는 말을 세웠다. 말에서 내린 휘리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본성 앞쪽까지 몰려왔던 인파들은 잠시 숨을 죽였고 그래서 계단을 밟는 휘리의 철화 소리가 잘 들릴 정도였다.
계단 끝까지 오른 휘리는 망토를 한번 훑어 뒤로 보낸 다음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름난 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벨 육군 제8군단장 휘리 노이에스, 로드 메르데린께 돌아왔음을 보고드립니다.”
목이 메인 메르데린 공작은 그야말로 간신히 말했다.
“일어나라, 서 휘리.”
휘리는 잠시 주춤했다. 그는 ‘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휘리는 공작이 흥분한 나머지 실수하지 않았나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메 르데린 공작은 아직도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휘리는 약간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질문했다.
“로드? 전 작위가…………”
“당연히 서 휘리다! 경이야말로 다벨의 기사이니까!”
그리고 메르데린 공작은 휘리를 확 끌어안았다.
군중들과 병사들은 그 모습에 비명이라고 착각될 정도의 환호를 올렸다. (실제로 그 중 많은 수의 여인네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휘리는 피와 먼지로 엉망이 된 갑옷 때문에 그 포옹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로드. 정말 감사합니다만 전투 후라 지저분한 몸이옵니다.”
실제로 그 격한 포옹을 끝낸 메르데린 공작의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눈가를 닦기에 바빴다. 눈물을 대충 닦아낸 메르데린 공작은 옆에 서 있던 서 클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그리고 노이에스 장군은 무릎을 꿇으라.”
휘리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클루 경에게 검을 받아든 메르데린 공작은 검을 높이 들어올렸고 군중들은 가까스로 조용해질 수 있었다.
“나 다벨 공작 프란체스코 릴파인 엔 돌리안 메르데린은 거룩하신 주님의 광휘 아래 그대 휘리 노이에스를 다벨의 기사, 그리고 볼지악 자작으로 명 하노라.”
굉장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사의 고행도 거치지 않았고 충성 서약도 뛰어넘었으며 군주의 맹세와 기사의 맹세 모두 생략된 채 메르데린 공작은 단숨에 휘리 노이에스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메르데린 공작이 거룩하신 주님의 광휘 아래’ 작위를 내린 부분이다. 당연히 메르데린 공작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것은 법황과 그의 대리인, 그리고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메르데 린 공작은 휘리 노이에스에게 작위를 내림과 동시에 만방에 대고 제위에의 야욕을 분명히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휘리는 약간 당황했지만 정중하 게 고개를 숙였고 메르데린 공작은 검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마침내 휘리 노이에스가 볼지악 자작 휘리 경이 되어 일어났다. 병사들은 조금 전까지 적을 도륙하던 그 무기를 하늘로 높이 쳐들어 휘리 경의 탄생 을 축하했고 볼지악 요새 내의 모든 사람들 역시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내었다. 휘리는 쑥스럽다는 얼굴로 메르데린 공작을 바라보았고 공작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서 휘리! 저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도록. 자넨 그들의 영웅이야.”
휘리는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높아졌다. 그 환호 속에서 휘리는 메르데린 공 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로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전 작위보다 더 받고 싶은 것이 있군요.”
“응? 뭔가. 무엇이든 말해 보라.”
공작은 정말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휘리의 대답은 공작을 꽤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볼지악 요새 내의 모든 병에 대한 사용권입니다.”
바스톨 장군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사트로니아를 떠난 이후로 가장 큰 손실이군. 빌포 중대장의 후임을 맡은 백부장에게 부하들을 잘 위무하라고 전하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 고.”
“그렇게 했습니다. 솔티 백부장은 그저 서 소사라를 포로로 잡을 경우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하더군요. 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냐고 말해 줬습 니다만 쉽게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군요.”
“서 소사라…… 빌포를 쓰러뜨린 자의 이름인가?”
“예. 경장보병대의 중대장입니다.”
“아, 그 경장보병대. 잠깐. 뭐라고 했지? 서 소팔라? 그 노예 부대의 중대장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나?”
“형제입니다.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로 이것이 첫 복무인 모양입니다만,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 등지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전과를 세워 온 모양입니다. 서 소팔라는 원래 1중대, 즉 중장보병을 맡고 있던 중대장이었는데 그것을 더블원 센츄리온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노예병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긴, 그런 잡병들에겐…..”
“우수한 지휘관이라도 붙여줘야 힘을 쓸 수 있으니까. 그래서 1중대장이라는 명예를 버렸단 말인가?”
바스톨 장군은 갑자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가일즈 부관. 자네라면 그럴 수 있겠나?”
가일즈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군인입니다. 명령에 복종할 것입니다.”
“아, 미안. 그래. 자넨 공화국의 군인이지. 하지만 다벨은 아니야. 그 젊은이들은 귀한 가문의 자손들일 거라고. 그러니 그들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 니지. 내가 질문을 잘못 했군.”
가일즈는 잠깐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쓸모없는 명예나 자존심 때문에 실리를 벗어나가게끔 하는 체제라면, 그것은 이미 자신이 저급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계급 사회는 엉터리다 이 말이군. 하지만 그것에 목숨까지도 거는 사람들도 있지.”
“미련한 짓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꾸로 우리들을 비난할지도 모르네, 가일즈 부관.”
“예?”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지배욕 – 피지배욕도 포함시키세 ᅳ 을 가지지 않은 체, 속으론 전혀 그렇지도 않으면서 상대를 자신과 동격으로 대우하는 체하는 위선자라고. 말로는 모두가 평등한 공화국이라지만, 정말 주님께 맹세코 상대를 자신과 동격으로 대우한다고 말할 자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우리 공화국은 바로 그런 사실을 인정해 주는 체제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타인에겐 그 자신이 가장 중요할 거라 여겨주는 이타 정신의 시발점이 됩니 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공화국 정신의 정수 아닐까요.”
“그리고 위대한 거짓말의 정수지.”
“예?”
바스톨 장군은 희미하게 웃으며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러곤 나무 탁자 위에 두 개의 선을 나란히 그었다. 위의 것은 1인치 정도, 그리고 그 아래의 것은 2인치 정도의 길이였다. 바스톨 장군은 단검을 탁자 위에 탁 던진 다음 가일즈 부관을 올려다보았다.
“이 두 개의 선을 보게. 하나는 약간 짧고 하나는 약간 길지?”
“예? 그렇군요.”
“그 단검을 이용해서 이 두 개의 선을 똑같게 만들어보게. 단 내가 그은 선은 건드리지 말고.”
가일즈 부관은 이게 무슨 데샨 카라돔 농담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은 항변을 기다리기보다는 재치 있는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하고 있 었다. 그래서 가일즈 부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가일즈 부관은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다시 단검을 뽑아들었다. 장군은 두 개의 선 아래에 5인치 정도 되는 긴 선을 그었다. 손목을 꺾어 단검을 다시 테이블에 던져 꽂은 바스톨 장군은 그의 부관을 올려다보았다.
“알겠나?”
“죄송합니다만……”
“이제 먼저 그었던 두 개의 선은 이 마지막 선에 비하면 ‘똑같이 짧은’ 선이 되었네. 평등해진 거지.”
가일즈 부관은 자신도 뭔가를 깨달을 수 있고 언외언을 읽어낼 정도의 지성은 가지고 있다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부관의 얼굴을 보던 바스톨 장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바로 공화제일세. 선들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 자네가 말한 그 개인을 인정한다는 것이겠지. 개인들을 인정해 주면서도 그 들을 평등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그것보다 월등하게 긴 선, 그것에 비해 보면 작은 선들의 장단은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긴 선을 만드는 수밖에 없 지. 그 긴 선은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보통은 조국이라는 환상이 잘 이용되지.”
“조국이…… 환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건 환상이야. 물론 국가라는 것은 실재하지. 하지만 그건 검이나 마차나 배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야. 하지만 조국 이라는 것에는 도구의 개념 이상의 환상이 있지. 마차나 배를 위해 죽는 사람은 없어도 나라를 위해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지. 그렇듯 그 환상은 유용해………… 무엇보다도 조금 전 보여줬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똑같이 평등하다고 여기게 만들 때 특히 유용하지.”
그제서야 가일즈는 바스톨 장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공화국의 정수는 나와 네가 똑같이 중요하다 고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라, 너나 나나 저 조국에 비해 보면 똑같이 가소롭다고 생각하는 정신이다………… 가일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일찌기 우수한 개인들이 한 모든 일을 보게. 자넨 공화제가 개인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진정 개인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발휘한 자들 은 결국 나라를 뛰어넘고 체제를 뛰어넘었지. 그것이 어떤 체제이든, 모든 체제는 그들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기는커녕 억눌렀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 들은 그것을 뛰어넘거나 파괴해 버릴 수밖에 없었지. 아달탄 대왕, 록소드라, 가이너 카쉬냅, 손필 대공, 하이낙스, 그리고………… 키 드레이번.”
“예?”
바스톨 장군은 미소를 지을 뿐 마지막 이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결론을 내리는 태도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결국은 일자와 다수의 문제야. 그리고 똑같이 개인을 억누르는 다수라는 점에선 귀족제든 공화제든 거기서 거기일세.”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말 끝을 약간 이상하게 끝맺었다.
“이건 전장의 막사에 어울리는 주제가 아니군. 자넨 이 노마의 부관이지 말벗이 될 필요는 없네. 이만 물러가 쉬게.”
가일즈는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대충 인사 비슷한 것을 건네고 물러갔다.
바스톨 장군은 테이블의 촛불을 보다가, 다시 그 촛불 아래에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는 말이 많아서 큰일이군.’
아슬아슬했다. 그가 꺼내었던 이름들의 마지막은 사실 ‘키 드레이번’이 아니었다. 그는 ‘바스톨 엔도’라고 말하려 했다. 입밖으로 나오기 직전 가까 스로 키 드레이번의 이름을 대기는 했지만 만일 그게 좀 늦었다면 바스톨 엔도는 젊은 부관의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보게 되었을 것이다.
‘너는 이제 왕이 아니다. 바스톨 엔도. 짧은 선이 된 거지. 정신 좀 차려라. 그러니, 오늘 낮처럼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나 바스톨 엔도 장군은 자신이 테이블에 꽂혀 있던 단검을 손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봄부터 그의 정신 활동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휘리 노이에스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를, 한 개인으로서의 휘리 노이에스를 직접 만난 것은 오늘 낮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스톨 장군은 자신의 의식을 뚜렷이 한 점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고 개인인 그를 향해 개인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사트로니아나 다벨은 장군의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십 명의 여인에게 동시에 키스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점에선 검 또한 마찬가지다. 한 남자를 위해서만 뽑아들 수 있는 것이 검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사령관이 아닌 무인이 되어야 했을 때 바스톨 장군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검이 부딪혔을 때 장군은 거의 환성을 지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일격이 교환되고 나서 둘은 거의 동시에 자신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 다는 것을 깨달았다. 휘리는 팔에, 그리고 장군은 허리 쪽에 상처를 받았지만 둘은 모두 고삐를 놓치지도 않았고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장군 의 암살은 실패한 것이다.
뒤쳐졌던 바스톨 장군의 호위병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휘리는 곧 말머리를 돌렸다. 경장기병들 또한 다시 움직였다. 휘리는 달려가기 직전 바스톨 장군에게 말했다.
“충고하겠다. 후퇴 신호를 보낼 때가 되지 않았나?”
경장기병들에 의해 포위되면 사트로니아군은 후퇴할 수도 없을 것이다. 휘리는 말을 달려갔다. 허리의 상처를 잊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스톨 장군은 곧 체념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창백한 얼굴로 달려온 가일즈 부관에게 전군 후퇴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번엔 7군단과 8군단 모두 나올 것이다. 그들이 합류해 버린 이상 바스톨 장군의 실인형 재주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바스톨 장군 은 두 배로 늘어난 적을 상대할 전략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