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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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1화


“말 그대로요. 하리야 선장. 진짜 뭐든 안다는 겁니다.”

“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하리야 선장. 이걸 단순히 이해하는 건 정말 간단한 일입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건 상상이 잘 안 된다는 의미겠 “지요?”

“아, 그래. 맞아, 킬리 선장. 난 상상이 잘 안 되고 납득이 잘 안 돼.”

“나도 그랬습니다. 그냥 이해만 해버렸지요. 하지만 그걸 납득하는 순간 깨달아버렸습니다. 다른 말 할 것 없고 그냥 시험해 보시죠. 그럼 내가 깨달 은 것을 당신도 깨닫게 될 겁니다.”

킬리 선장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홱 돌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창문이 있었고 그 창문과 더불어 아침을 맞 이하고 있는 벨로린이 있었다.

벨로린은 창턱에 걸터앉아 다림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거의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상황이 연속되는 바람에 하리야 선장은 약간 몽 롱한 시선으로 벨로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든 안다라.’ 킬리 선장은 하리야 선장의 그런 미적거리는 태도에 대해 사나운 시선으로 행동 을 촉구했고 그래서 하리야는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들 뒤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넌더리난다는 표정으로 그 서류 뭉치들을 바라보며 하리 야가 떠올린 생각은 매우 검소했다. 저 아이가 진짜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이 따위 서류들을 보지 않아도 되겠군. 주님의 은총이야.

“벨로린.”

벨로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킬리 선장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그의 말에 의하면 넌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고, 게다가 매순간 갱신되는 백과사전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 게 정말인가?”

벨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벨로린이야.”

하리야는 킬리를 돌아보았고, 그의 동료의 얼굴에서 당황을 발견하지는 못했기에 다시 포기하는 심정으로 벨로린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하지. 괜찮다면 지금 우리들을 향해 오고 있을 사트로니아군의 숫자를 좀 말해 주겠니? 그들을 숙박시킬 계획을 짜느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바스톨 엔도 장군을 포함해서 422명. 그 중 64명은 중상을 입고 있어. 그러니 숙박 시설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의사들을 준비시켜 두는 데 신경 쓰는 편이 낫겠군.”

하리야는 잠시 멈칫했고,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조금 후 그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조바심을 참지 못한 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여들었다.

“물론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리야는 다시 미심쩍은 어투로 질문했다.

“그들이 어디까지 오고 있지?”

“10마일 정도. 조금 전 출발했어. 그러니 오전 내에 도착할 것 같군.”

벨로린은 다림 외곽 10마일 밖에서 일어난 일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태평하게 말했다. 그리고 킬리는 하리야의 당황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즐거워했다. 더군다나 하리야는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이 이미 시도해 봤던 일들을 시작함으로써 그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페가서스호의 화약 잔유량은?”

“327자루. 많이도 실어놨군. 다림 시내에 대한 엄포용인가?”

“페가서스호의 항해일지 첫페이지에 적혀 있는 글은?”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내가 처음으로 성전을 가지게 된 건 몇 살 때지?”

“태어나자마자.” 

하리야 선장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너무 빨랐다. 

“아니, 고개 젓지 마. 기억 못하겠지만 너를 처음 본 네 어머니가 네 가슴 위에 자신의 성전을 놓아주며 그것은 네것이라고 말했지. 물론 널 맡아 기른 이모가 그걸 팔아치우곤 말을 안해 줘서 모 르겠지만. 네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애타게 성전을 가지고 싶어한 것은 신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기억하지도 못하는 트라우마 때문이지.”

하리야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건, 그건 잘 만들어진 거짓말일 수도………… 그런데 이모라고?”

“이모야. 어머니라고 주장할 건가? 마음속으론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고모일 거라 생각했어. 마치 아버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줬거든. 이모였었나.”

하리야는 서 있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벨로린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킬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놀라는 희귀한 체험을 하고 있었다. 벨로린의 능력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경악 하게 만드는 것.

“정말 ‘무엇이든 아는 것이군?”

“글쎄. 그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정의될 수 없는 말들의 챔피언급 아닐까.”

“그런데. 넌 킬리의 편을 들겠다고 했다고? 그럼 넌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준다는 말인가?”

이제는 하리야도 킬리가 느꼈던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남부의 이 작은 신생국은 가치의 분배에 투쟁이 개입된 이래로 대륙이 한번도 가져보 지 못한 무기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신무기라는 것이 그저 약간 더 개선된 구식 무기에 지나지 않는 것에 비해 볼 때 그들 이 쥐게 된 것은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불가능한, 말 그대로의 신무기였다. 물론 예전에도 그런 신무기는 있었다. 등자가 그랬고 대포가 그랬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를 바꿔놓은 종류의 신무기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곧 적들도 소유하게 되므로 제한된 시간밖에는 그 우수성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무기는 특별한 보안 수단 없이도 밀정들이 설계도를 훔쳐낼 염려는 없는 무기인 것이다……………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은 들어줄 거야.”

“맙소사, 킬리 선장. 자네 저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하리야는 거의 혼수 상태에 빠져 외쳤다. 그리고 킬리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대답했다.

“물론 알지요. 너무 심심해서 죽을 것 같은 오후, 우리들이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통일 제국이나 만들어보자고 나서게 될 경우 우리를 가리켜 미쳤 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요!”


율리아나 공주는 약간 멍한 얼굴을 한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빗방울은 가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먹구름과 수평선 쪽의 물빛을 본 율리아나 공주는 며칠째 라트라인을 괴롭히고 있던 태풍이 지나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노잡이였던 오스발이나 머메이드인 이루미나, 그리고 서 슈마허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율 리아나는 서글픈 듯한 얼굴로 창을 바라보며 혼자말 하듯이 말했다.

“태풍아, 제발 사라져줘.”

똑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오스발은 그 말에 고개를 약간 돌렸다. 공주가 불러서 온 것이지만, 율리아나 공주는 그저 그를 앉혀둔 채 그녀 자 신은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발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명하실 것이…………”

“앉아요, 발.”

오스발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율리아나는 몸을 돌려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추운 것처럼 두 팔을 감싸쥔 채 오스발을 보던 율리 아나는 약간 멍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태풍 좀 치워주겠어요?”

“명령이십니까?”

율리아나 공주는 가볍게 웃었다.

“하아. 똑똑하네요. 그런 불가능한 명령이나 내리는 멍청한 주인으로 만드는군요. 멍청한 데다가 심술만 많아서 말도 안 되는 명령이나 내리는 주인 과 착하고 똑똑한 노예 이야기는 나도 많이 읽었어요.”

“아니,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공주님.”

“됐어요. 발. ………… 나 어쩌면 좋을까요.”

율리아나 공주는 갑자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오스발은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공주가 말하던 이야기와는 달리 착하고 똑똑한 노예를 돕기 위한 두꺼비나 요정, 개똥지빠귀 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율리아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

“고백하자면 나 지금 무서워요.”

“공주님.”

“빨리 떠나고 싶어요. 간사하지요? 언니를 만났다고 좋아하던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데 저 밖에 키 드레이번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곳이 끔찍하 게만 보여요. 저 태풍은 혹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세실리아가 불러낸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왜 세실리아는 키 드레이번과 함께 있는 거 죠? 키 드레이번은 왜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는 거죠?”

“전부 모르겠습니다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군요.”

“묻는 게 아니에요. 난…… 정말 무서워서………………”

“그러신가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손가락을 쫙 펼쳤다. 그리고 오스발은 그 펼쳐진 손가락들 사이에서 공주의 웃는 얼굴을 발견했다. 

“좀 잘난 척해 봐요.”

오스발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두 손을 내려 엉덩이 뒤로 보내곤 입술을 살짝 내밀어보였다.

“눈치 챘더라도 좀 속아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이만큼 유도했으면 그 정성이 갸륵하잖아요.”

“죄송합니다.”

“기회를 줘도 영웅이 못 되는 바보군요. 나 삐질래요.”

“어떻게 사과드리면 될까요.”

“필요없어요. 그런 차분하고 순진하고 무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말이야, 걸핏하면 사람을 구해 주고. 미노 만에서도 그랬고 다림에서도 그랬 고 여기서도. 흐응.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고마운 마음에 좀 우쭐해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해도 눈치 다 채니 맥빠지잖아요. 제발 좀 그 만둬줬으면 싶을 때까지 목숨까지 걸어가며 패트런 흉내를 내는 남자들 사이에서… 흐음. 당신을 우월하다고 불러야 될까요, 모자라다고 불러야 될까요?”

“패트런이라고요?”

“더 위대하고 더 강인하고 더 지혜로우면서도 워낙 잘 나셨기 때문에 더 모자라고 더 어리석고 더 미력한 여성을 멸시하지 않고 감히 자신의 허리를 굽히는 고귀한 남성, 여성의 올바른 보호자, 지도자, 주인, 하, 하, 하아!”

“아, 네.”

“흐음. 그래도 난 그게 귀엽다고 생각해요. 그렇잖으면 당신에게 그런 걸 시켜볼 리가 없죠. 그런데 내 주위에는 그런 귀여운 남자가 별로 없군요. 당신도 그렇고, 키 드레이번도 그렇고, 우리 에름 후작님도 그렇고. 우리 에름 후작님이 잘난 신사라서 불쌍한 우리 언니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는 건 당신이 설명해 줬죠? 온통 이상한 남자들뿐이야. 신사인 척하고 기사인 척하는, 좀 정상적인 남자가 보고 싶은데요.”

오스발은 웃음 띤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 슈마허처럼 말씀이십니까?”

“음. 한 명은 있군요. 다행이다. 난 괴물 남자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는 건 아니었어.”

율리아나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발. 뭐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에요. 정말 무서우니까.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건 맞아요. 만약 지금 내 앞에 근사한 악마 신사분이 나타 나서 태풍을 치워주는 대신 영혼을 내놓으라고 말하면 당신 영혼 내주고 그렇게 할지도 몰라요.”

오스발은 잠시 신음을 흘리고 나서 말했다.

“아, 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후작님께서도 태풍만 좀 잠잠해지면 당장 배를 출항시키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공주는 곧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진짜로………… 말해 봐요. 응? 솔직하게. 나, 정말 그렇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못하는 여자인가요?”

그러나 오스발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유도하시는 거죠?”

“에에에엑!”

공주의 해괴한 비명에 놀란 것은 오스발뿐만이 아니었다. 문밖에 와서 노크하려던 서 슈마허는 공주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온몸으로 문짝에 충돌 을 감행했다. 콰광! 문은 거의 박살날 듯 열렸고 슈마허는 방바닥을 한번 구른 다음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율리아나는 멍하니 슈마허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정상적인 남자는 저래서 위험하다니까.” 그리고 공주는 곧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서 슈마허의 볼에 키스했다.

“카밀카르의 공주를 위협하던 가증스러운 문짝을 토벌한 그대의 공로를 칭송하겠어요, 서 슈마허.”

“감사합니다! ……예?”

슈마허가 자신이 광대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며 일어난 서 슈마허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댔다. “이렇듯 무례하게 들어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에름 후작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키 드레이번을 체포했으니 와서 확인해 달라고 하시더군 요.”

오스발은 깜짝 놀랐고, 그리고 공주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더 놀랐다.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만 조금 갸웃하며 질문했다.

“누군데요?”

“예?”

“확인은 키 드레이번의 얼굴을 알고 있는 당신도 할 수 있는 문제고 우리 자상한 후작님은 그런 확인은 나보단 당신에게 부탁할 분이니 그 사람이 진짜 키 드레이번일 리는 없는 것이고 그러니까 나는 묻는 거예요, 누군데요?”

서 슈마허는 감탄했다.

“공주님의 영민하심은 저로 하여금 매일같이 공주님을 찬양하게끔 하시는군요.”

“별말씀을. 누군데요?”

슈마허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오스발과 율리아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서 슈마허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라이온입니다.”


라이온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길다란 롱 소드를 차고 팔짱을 단단히 끼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라트라인의 대로를 돌아다니다가, 치안헌병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도망갔으며, 그를 뒤따라오던 치안헌병이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지자 그 역시 덩달아 넘어졌다고 한다. 율리아나는 한숨을 쉬었 다.

“잡혀오겠다는 것이군요. 그냥 찾아오지 그랬어요?”

라이온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공주님. 제가 카밀궁의 정문에 서서 내 이름을 밝히고 들여보내 달라고 말했다면 경비병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런 미친놈, 저리 꺼져! 등으로 말했겠죠.”

“아아, 놀라운 사랑의 힘. 공주님의 입으로 흘러나오니 그 폭언도 밀어처럼 들리는군요.”

라이온은 밧줄로 단단히 결박당한 채 취조실 바닥에 무릎 꿇려 있었지만 그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공주의 뒤편에 시립하고 있던 서 슈마허가 함대라도 능히 움직일 만한 콧바람을 뿜어대며 씩씩거리고 있는 것에도 크게 괘념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율리아나 공주 역시 마찬가지여서 공주는 ‘나 사랑해요? 훗. 가서 줄서요’ 등의 시시덕거림을 꺼내놓음으로써 서 슈마 허와 카밀궁 경비병들이 조성하려 애쓰던 엄숙 장엄 살벌한 분위기를 꽤나 혼탁하게 만들어놓았다. 결국 참지 못한 에름 후작이 조심스럽게 헛기침 을 했다.

“공주님의 말씀을 놓고 보건대, 그대는 키 드레이번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잡혀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후작님.”

“웃기는 작자로군. 살아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나?”

“죽음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찾아오는 불청객이지만, 기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 친구의 방문 예고를 받은 셈이죠.”

“금언 같은 말은 듣기에 좋을지 몰라도 사실을 전달하는 데는 크게 도움되지 않네, 라이온 군. 이렇듯 직접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이제 다른 사람들 을 밖으로 내보내라는 말이라도 할 건가?”

“예. 공주님과 저만 남겨주십시오. 돌아오시면 우리는 가시버시가 되어 있을 겁니다………… 아, 하하, 하하하. 슈마허. 그 칼 도로 집어넣지 않겠나?” 서 슈마허는 라이온의 생명 활동을 정지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상당한 폭언을 통해 표출해 대며 발광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조를 경비하고 있던 카밀궁 경비병들은 그의 팔다리를 붙잡은 채 밖으로 끌고 나가야 했다. 율리아나는 라이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한테 키 드레이번의 말을 가지고 온 건가요?”

라이온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참 가슴 아픕니다만 사실 저는 후작님에게 용무가 있습니다.”

“나에게?”

에름 후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공주를 바라보았고, 공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 에름 후작의 귓가로 입을 가져 가 속삭였다. “키 드레이번은 침착하게 돌아버린 작자예요. 후작님.” 말을 끝낸 율리아나는 취조실 바깥으로 나갔고 밖에서 씩씩거리며 벽을 두드리 고 있던 서 슈마허는 공주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가 밖으로 나가자 에름 후작은 다시 라이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동안은 라이온에게 의식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조금 전 그의 귓가로 그 입술을 가져왔던 여인은 세기의 신부였던 것이다. 에름 후 작은 아직까지도 코끝을 맴도는 공주의 향기에 매혹되었고, 그런 자신에게 씁쓸한 조소를 보내었다. 어쨌든 그와 성직자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짧은, 흔적조차 희미한 탈선은 끝났다. 에름 후작은 라이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한 둘만의 대화를 원하나?”

아직까지 취조실에 남아 있던 경비병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라이온은 잠시 후작의 성실해 뵈는 얼굴을 보곤 웃음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만, 왜 셋째가 아닌 둘째를 선택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진짜 바보짓 같은데요.”

에름 후작은 약간 당황했다. 설마 나의 설렘을 눈치 채기라도 한 건가?

“그건 그대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그게 키 드레이번의 전언인가?”

“아, 이건 또다른 제 동료가 물어보라고 하던 질문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랑하기에.”

“하하. 셋째 공주님에겐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었습니까?”

“놀라운 미모와 교양을 가지시고 총명하시기까지 하지만, 사랑은 느끼지 못했다.”

에름 후작의 조용한 대답을 들으며 라이온의 얼굴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솔직한 대답인 것 같군요. 전 후작님의 성실함을 들어왔습니다만, 키 드레이번의 질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해적에게 인품을 평가당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군. 그래, 이제 그의 전언을 전할 수 있겠나?”

“둘만의 대화를 원합니다. 하지만 절 믿기 어려우실 테니, 원하신다면 경비병을 둔 상태에서 필담을 나눠도 좋습니다. 제 팔 하나만 풀어주시면 되니까요.”

“합리적인 제안인 듯하군.”

종이와 우필, 잉크 등이 준비되었다. 라이온은 오른팔만 남겨둔 상태에서 의자에 단단히 묶였고 에름 후작은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 경비 병들은 모두 뒤로 돈 채 테이블 주위를 둘러쌌다. 라이온은 오른팔을 몇 번 움직여보곤 종이 위에 빠르게 글을 썼다. 그리고 에름 후작은 당황해 버렸 다. 라이온이 쓰고 있는 것은 페이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엘핀이었다.

에름 후작은 이제 해적에게 교양까지 평가당해야 하나 하는 심정이 되었다. ‘오, 주님. 가혹하시군요. 물론 그도 엘핀을 그럭저럭 독해할 수는 있었 다. 하지만 지금 라이온이 쓰는 것처럼 빠르게 써내려갈 정도의 자신은 없었다. 에름 후작은 의심스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도 대체 뭐하는 친구지?’ 그때 라이온이 필기를 마치고 종이를 앞쪽으로 밀어보냈다.

후작은 그것을 읽기에 앞서 라이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넨…… 자네 정체가 뭐지?”

“제 이름은 아실 테니 이름을 묻는 것은 아니군요. 그럼 후작님이 말하는 정체란 직업입니까, 인격입니까, 출생지입니까, 경험입니까, 부모의 이름 입니까, 꿈입니까, 아니면 그 꿈을 위해 걷고 있는 길입니까?”

라이온이 대답할 마음이 없다고 판단한 후작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경비병들을 뒤돌아서게 할 필요는 없었군. 에름 후작은 호흡을 가 다듬고 천천히 독해를 시작했다.

‘키 드레이번은 공주의 노예인 오스발을 원합니다. 후작님께서 오스발을 내어주신다면 키 드레이번은 후작님께 감사하며 후사할 것입니다.’

에름 후작은 이번엔 그 내용에 당황했다. 그는 라이온의 얼굴을 노려보았지만 라이온은 그저 싱글거리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에름 후작은 우필로 자신의 의문을 표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쓴다기보다 그린다에 가까운 자신의 필기에 한심해하며 라이온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았다.)

‘오스발을 원한다고? 이유가 뭐지?’

‘그건 후작님이 알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노예 한 명의 일이잖습니까.’

‘비록 노예라 하나 그것은 공주의 재산이다. 게다가 키 드레이번은 제국의 공적 1호. 난 제국의 무엇이든 그에게 내어줄 생각이 없다.’

‘후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솔직히 궁금했다. 그리고 에름은 성실한 인물이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키 드레이번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뭔가?’

‘그 자신.’

후작은 경악했지만 라이온은 계속 써내려갔다.

‘서 레빌의 일로 후작님은 레모와의 관계가 악화되겠지요. 그리고 굳이 그 일이 아니라도 후작님 정도라면 지금이 전란의 시기, 광풍의 시대임을 알 아볼 정도의 안목은 있을 겁니다. 저 강력한 사트로니아가 참으로 수치스럽게 패배했고 페인 제국은 한가로운 심정으로 빌려줬던 그렇게밖에 말 할 수 없겠지요 •제국 기사단장 브라도 경을 잃고 망연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벨은 그 위대한 승리들을 통해 과거의 사트로니아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진짜 소제국으로의 길을 착착 밟아가고 있습니다. 후작님이 야심가와 기회주의자들과 같은 열에 서고 싶지 않더라도,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 키기 위해 야심가와 기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죠. 이 상황에서……?

라이온은 잠시 우필을 멈추곤 싱긋 웃었다. 그러곤 남은 말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라트랑 해군사령관 키 드레이번은 어떻습니까.’

라이온은 다시 종이를 밀어보냈지만 에름 후작은 잠깐 동안 우필을 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라이온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라이온은 재촉하는 표정으 로 손가락을 테이블 표면에 딱딱 부딪혔고 그래서 에름 후작은 일단 처음 떠오른 질문을 적었다.

‘그렇다면, 키 드레이번은 나에게 자신을 팔겠다는 거냐?”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 한 명에?’

라이온의 고개가 또다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에름 후작은 우필을 내려놓은 채 이 전대미문의 상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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