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3화
하리야 선장은 가까스로 평상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그가 평상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 혼자뿐이 었다. 사실 하리야는 동정심이 물씬 배어나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보통의 장수라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바스톨 엔도 장군이다. 이 위대한 이의 이토록 초라 한 모습은 보는 이를 연민에 젖어들게 만들고 있었다. 장군의 남루한 옷차림 위로는 점점이 핏자국이 새겨져 있었고 망가진 갑옷은 적의 칼은커녕 사 람들의 무례한 시선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군이 타고 있는 것은 말인지 나귀인지 언뜻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루해 있었다.
그러나 그 엄격한 시선만은, 관까지 가지고 갈 것이 분명한 죽지 않는 눈빛만은 깨어진 투구 아래에 선연했다. 하리야 선장은 그 눈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동맹입니다.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생각하십시오.”
바스톨 엔도 장군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그는 가벼운 어조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동맹입니까?”
“물론입니다.”
“여기도 볼지악 전투의 이야기가 전해졌을 텐데요.”
하리야는 긴 설명으로 상대방의 휴식—지금은 그 무엇보다 필요한ㅡ 을 뺏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폴라리스는 신생국입니다. 사람으로 친다면 청년이겠지요. 그래서………… 아직 약속의 무거움을 알고 시류에 영합하는 재주는 없다고 생각해 두십시 오.”
바스톨 장군은 감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 서 있던 가일즈 부관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망토 아래에서 쥐고 있던 칼자루를 슬그머니 놓았다.
‘그 해적들의 소굴’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 오늘 아침까지의 가일즈 부관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리야 선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의혹을 더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의 의혹이 틀렸다고만 말할 수는 어렵다. 패배한 무사가 환영받지 못함은 당연하고 게다가 신생국 폴라리스는 필요에 의해, 혹은 바스톨 장군의 압력에 의해 사트로니아와 동맹을 맺었을 뿐이다. 따라서 다벨이 대승을 거둔 지금, 폴라리스로서는 동 맹이랍시고 찾아온 바스톨 장군과 사트로니아의 패잔병들의, 도대체 어깨 위에 달린 것이 머리 비슷하게 생긴 혹이 아닌가 의심되는(역시 가일즈 부관의 표현이다) 행동에 대해 푸짐한 몽둥이 찜질로 대답해 준 다음 그들을 잘 포장하여 다벨에 바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하리야 선장은 그를 따라온 사람들을 선도하게 한 다음 홀로 바스톨 장군의 옆에 섰다. 신뢰감을 표현하는 최상의 제스처라 할 것이다. 그래 서 가일즈 부관 이하 사트로니아군은 안도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하리야 선장은 바스톨 장군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볼지악 전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장군 역시 볼지악 전투라는 말은 한번 꺼내었을 뿐 다른 것만 이야기했다. 바스톨 장군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공사터를 보며 탄복하듯 말했다.
“근사한 성이 되겠군요.”
돌탄 선장의 감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다림 외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리야 선장은 빙긋 웃었다.
“장군님께서 축성술에도 조예가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만만찮은 공사가 되겠는데………… 좀 그런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서 자금을 대었습니까? 성을 짓는 것은 신생국에 매우 필요한 일임은 당연 합니다만 이렇게 빨리 건축을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놀랄 일이군요.”
하리야는 약간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군님에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해봐야 웃기는 일이겠죠. 예. 우리는 제국 최고의 해적이었습니다. 현금화하지도 못한 채 쌓아두었던 보화들 이 가득합니다. 그 중에는 펠라론이 되사들이려 결정했을 경우 퓨아리스 4세 성하를 빚더미 위에 앉혀드릴 수 있을 정도의 보물들도 있습니다.”
나는 악당입니다라는 말도 이토록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매력적이다. 그들의 뒤에서 듣고 있던 가일즈 부관마저도 성유물(relique)을 가 득 쌓아두었다는 말에 오히려 감탄해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조금 후에는 그런 자신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곤 황급히 성호를 그었다.)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좀 다른 종류의 감탄을 느꼈다. 장군은 조심스럽게 농담으로 위장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러고 보니 ‘신부님’이라는 별명이 붙은 당신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군요.”
“무슨 말씀을. 어떤 신부가 그런 해적질을 하겠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의 옆얼굴을 훔쳐보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죄의식 비슷한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자의 신앙은 참 신비한 데가 있군.’ 바스 톨 장군의 감상이었다. 그가 보기에 하리야 선장은 신앙인인 척하는 군주들이나 귀족과는 달리 진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하는 행동은 그런 군주들과 유사해 보였다. 성유물도 그저 현금화될 수 있는 보물 정도로 판단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그것에 대한 존경이나 숭배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의 신앙과 그의 행동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그때 하리야 선장이 지나가듯 말했다.
“참. 저희들이 페인 제국을 수렁으로 몰고 갈 추문을 일으킬 수 있는 보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모르시죠? 저희들은 칼소 황태자의 비망록도 가지 고 있습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분은 자신이 관계했던 여인을 모두 기록해 두었죠. 참 이해 안 가는 열정으로 말입니다……”
바스톨 장군과 가일즈 부관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칼소 황태자는 200년 전의 바람둥이였으니 추문 어쩌고 하는 건 완전 농담이다. 그 원본이 공개되어 봤자 귀족가들이 타격을 입기보다는 정사보다 야사를 더 좋아하는 일부 역사가들을 미치게 만들 뿐일 것이다. 하리야 선장은 그렇듯 시종 일관 밝은 태도를 유지하여 사트로니아군으로 하여금 패잔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선군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끔 도와주었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은 아무런 착각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이 긴장을 풀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확인한 장군은 하리야에게 살짝 다가서며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그 청년이 청년다운 심장은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그 목 위로는 노회한 노인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좀 성급하시지 않습니까?”
“나도 이런 이야기는 좀더 그럴 듯한 곳에서 서로의 지적 수준을 경쟁하는 식의 단어들 써가며 나누고 싶소. 하지만 저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직설적으로 말해 주시오. 바라는 게 뭡니까?”
“저 사람들에게 해될 일은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저들이 평안히 사트로니아에 있는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스톨 장군은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말했다.
“나는?”
하리야 선장은 빙긋 웃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 선장이 꺼낸 서신의 봉인에 찍혀 있는 문장을 보고 약간 움찔했다. 흑 사자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하리야는 서신을 건네는 대신 그것을 손에 든 채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
하리야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는 그가 지금 꺼내려는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하리야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 고 그를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다른 선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사의 이 시점에서 하리야는 그것을 선택했다. 미망일지 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하리야는 행동에 수반될 괴로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 말을 꺼내기 전에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하리야는 그 역사적인 발언을, 세계사의 분수령이 될 말을 지나가는 농담처럼 말하고 말았다.
“우리와 함께 싸웁시다.”
바스톨 장군이 받아든 것은 하드루스 대통령의 명령서였다. 절묘한 서신이었다. 그것은 ‘나 사트로니아 대통령 길버트 하드루스는 사트로니아 의회 전원의 만장일치에 의해 귀하의 연임이 결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따라서 귀하는 의회의 요구를 성실히 받아들여 신성한 책무에 매진해 주시기 바 랍니다’는 내용의, 발신 날짜가 없는 서신이었다.
연임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말에 따른다면 바스톨 장군은 계속해서 ‘팔라레온 해방군의 사령관이다. 하지만 팔라레온 해방군의 사령관은 두 가지 점에서 성립 불가능한 자리다. 첫째, 팔라레온은 이미 해방되었다. 따라서 팔라레온 해방군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하지만 볼지악 전 투에서 사트로니아군과 록소나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이상 팔라레온은 조만간 다시 다벨의 수중에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바스톨 장군은 대통령의 서신에 날짜를 적어넣은 다음 다시 ‘팔라온 해방군 사령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바스 톨 장군은 그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두 번째 난점은 정말 해결하기 어려웠다. 장군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팔라레온 해방군을 만들어내라는 걸까요.”
“폴라리스죠.”
하리야는 간단히 대답했다.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서신의 본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1인 군대가 되는 것이다. 그는 팔라레온 해방군의 지휘자이자 유일한 구성원이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동맹국 폴라리스와 더불어 휘리 노이에스 와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한다면
“대통령께서는 나를 폴라리스에 팔았군요.”
바스톨 장군은 록소나에 대출되었던 서 브라도처럼 폴라리스에 대출되는 것이다. 하리야는 빙긋 웃으며 또다른 서신을 꺼내었다.
“이제 이해하셨을 테니 이것을 보시죠.”
그것은 아무런 문장이 없는 편지였다. 바스톨 장군은 서신을 펼치자마자 그것이 앞의 편지와 같은 필체로 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드루스 대통 령이 보낸 밀서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장은 더 이상의 군대를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라트랑과 레모가 이상한 긴장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하리야 선장에게 물어보십시오. 하지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레모는 록소나가 호되게 당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라트랑을 잡아먹을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좀 졸렬한 방법인데, 그들은 라트랑 내부에 쿠데타를 일으켜볼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 우직한 대포공들 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대해 나는 약간의 놀라움마저 느낍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정말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가 라트랑의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라오코네스?”
바스톨 장군은 숨막히는 투로 하리야 선장을 쳐다보았고 하리야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서신을 읽어내렸 다.
‘라오코네스의 출현은 라트랑의 쿠데타 세력들을 겁에 질리게 했고, 그래서 그들은 자진해서 쿠데타를 포기했습니다. 에름 후작은 그들의 배후에 레 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고 그래서 현재 레모와 라트랑은 서로 국경에 병력을 집중시키며 긴장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남은 병력을 모두 서진시켜 놓고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장군께 보내드릴 병력이 없습니다.’
죄송하다고? 병력이 있다 해도 받기 민망하오, 대통령. 그 많은 장병을 장사 치른 패장의 죄를 물어주셔야죠. 바스톨 장군은 쓴 것을 삼키는 표정으 로 서신을 계속 읽었다.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팔라레온과 다케온, 록소나는 초토화되었고 전술했듯이 라트랑과 레모는 서로를 향해 으르릉거리느라 다벨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휘리 노이에스는 무주공산에 풀려난 맹수가 된 셈입니다. 이 상황에서 현재 휘리 노이에스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하다못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군사 집단은 하나뿐입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는 듯이 그런 놀라운 위치와 시간에 그들이 나라 를 세웠다는 사실에 대해 난 신의 섭리까지도 느낍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 대사의 선견지명일 수도 있겠군요.’
장군은 편지를 읽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페인 제국을 움직여보려 애쓰겠습니다. 황제께서 그 제후국을 제국의 공적으로 지적하는 드문 예를 만드는 한이 있어도. 황제 폐하께서도 서 브라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상태이니만큼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폴라리스는 그 점에서도 다릅니다. 폴라리스는 그들의 국경 바로 바깥에 초강대국이 생겨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장군은 하리야를 흘끔 돌아보며 서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하리야는 장군의 손가락이 머무는 부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자의 땅이 하나가 된다면 그건 크기만으로도 레우스를 능가하는 대국이 됩니다. 그러나 레우스가 황야와 고원 등으로 이루어진 불모지가 대 부분임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레우스보다 몇 배나 더 큰 초강대국입니다. 왕이 태어난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드루 스 대통령에게 우리들의 울타리 밖에 그런 것이 생겨나는 모습은 꿈에라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장군께 부탁드립니다. 그들에게 장군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내가 이곳의 상황을 정리하거나 제국을 움직일 수 있게 될 때까지만이라 도. 나는 아무래도 장군에게 죄를 너무 많이 짓는 것 같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어느새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죄를 말하는가. 패장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내용으로 이 서신은 예절의 극치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리야 선장은 그 서신의 다른 면에 감동한 듯했다.
“솔직히 그 서신에 놀랐습니다. 이런 전란의 시기에 장군님과 같은 인물을 놓치고 싶어하는, 하다못해 그런 위험이라도 있는 일을 저지르고 싶은 자 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사트로니아는 배포 좋게도 장군님을 우리에게 넘기는군요. 물론 장군께서 시시한 유혹에 빠질 인물은 아니지요. 나라 하나도 쾌척하신 분을 유혹할 방법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죠. 이것을 하드루스 대통령의 배짱으로 이해해야 할 까요, 아니면 두 분 사이의 신뢰라고 이해해야겠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빙긋 웃었다.
“공정함이라고 보아주시오.”
“공정함?”
“이 성실한 젊은이는, 내가 그들에게 보낸 엔도에 대한 보답으로 나에게 늘그막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요. 자유로운 상태에서 해보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는 거지요.”
하리야는 그 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하시고 싶은 일이 뭡니까?”
한참 후, 노장군은 힘없이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소.”
하리야는 그 대답에 약간 당혹했다. 그는 당연히 노장군이 휘리 노이에스에 대한 복수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은 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이다. 하리야는 장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의심을 느꼈다. 그 처참한 패배가 이 불굴의 노장군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 한번 시작된 의심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당연한 일 아닌가. 40년 동안의 라이벌을 절명시킨 상대에 대해 겁을 먹는 것은 용기 없음이 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어쨌든 바스톨 장군은 앞으로 가질 수 있는 명예보다 잃어버릴 과거의 명예가 더 많은 늙은 장수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피로하실 테니 대답은 천천히 듣겠습니다.”
뜨거운 미풍이 스며드는 포플러는 여름 매미들의 연주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쓰르르르………
같은 매미가 아니라면 사랑하기 힘든 소리지만, 어쨌든 충분한 박력은 있다. 이 무더운 여름의 오전을 가로지르는 소리로서는 충분히 시원하다. 휘리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소년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앞 돌계단 난간에 나란 히 걸터앉은 채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가롭고 여유 있는 모습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살벌한 눈을 한 소년의 호위병들이 표준보다 약간 큰 모기라도 나타나면 당 장 검을 뽑겠다는 기세로 서 있기는 했지만.
휘리는 눈을 뜨며 말했다.
“시원하군요. 공작님.”
“그렇소. 서 휘리.”
미사를 끝낸 두 사람은 교회 앞 포플러길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듣자마자 별 의견 교환도 없이 그대로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사실 그들 중 매미 소리에 취하며 망중한을 즐기고 싶어하는 쪽은 아무도 없었다. 휘리는 차분히 기다렸다. 소년에게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적 당한 때와 장소를 찾지 못해 당황해하는 소년을 위해 휘리는 일부러 이 장소에 멈춰 앉은 것이다.
과연 소년은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게 들리도록 무진 애를 썼고, 그리고 실패했다 더듬더듬 말들을 꺼내어놓았다. 휘리는 조용히 웃었다.
팔라레온과 다케온에서 이룩한 자신의 업적을 구출하는 일은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들에게 일임한 채, 휘리는 다벨의 수도 이레다벨에서 더 골 치 아픈 업적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는 공작 암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의혹’에 맞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노력이 필 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선 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휘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고, 휘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대단한 명예로군요, 로드.”
“명예라고 했소, 서 휘리?”
현재의 나이의 세 배는 더 먹어야 나이 대신 연륜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될 소년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발랑스 메르데린. 다벨 공국의 하나뿐인 지배자이며 휘리 노이에스의 주군이다. 휘리는 그의 주군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부친을 암살한 자들이 저를 위험 인물로 지적하고 있다는 의미잖습니까? 그들이 메르데린 가의 다른 명망 있는 가신들 대신 저를 지적해서 그들의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그 어처구니없음을 차치한다면 어쨌든 꽤나 명예로운 일이군요.”
발랑스는 자신도 이미 휘리의 농담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식의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웃었다.
“아, 그대는 다벨의 기사잖소. 그러니 저 배덕한 자들이 그대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게다가 그대는 아버님께서 살해당한 그 비탄스러운 밤, 나와 어머니를 보호함으로써 저들의 원한을 사지 않았소.”
“그들을 약올려 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하 된 자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겐 은혜 갚음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 다.”
“은혜 갚음?”
“선친이 아니었다면 저는 8군단장이나 ‘서’라는 호칭은커녕 아직도 푼돈에 허리를 굽신거리는 가수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전 그 분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 영영 그분의 은 혜를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욕된 목숨을 잇기로 했고, 이제 그 목숨을 그 분의 가족들에게 바쳐 그분께 갚지 못했던 은혜를 갚고자 합니 다.”
“서 휘리..”
발랑스 공작은 친밀감이 가득한 눈으로 휘리를 보았지만 휘리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저는 선친께 입은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저를 비방하는 자들은 그 단순한 이치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지요.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당연한 일이오. 아버님께서 경을 믿었듯이 나 역시 경을 믿겠소.”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하기조차 두렵습니다. 만일 저들의 허언이 공작님으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하였다면· 전 이제 영 영 갚을 길이 없었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었군요. 공작님께서 저를 믿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 또한 선친을 섬겼던 것처럼 공작님을 섬기겠 습니다.”
“내 허언을 용서하시오. 서 휘리. 난 그들의 말을 진짜 믿었던 것은 아니오.”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겠습니까? 호위병들이 초조해하고 있군요.”
“경은?”
“전 일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근래에 공작님의 영토가 된 땅들에 대한 재편 작업이 있지요.”
발랑스는 다시 감동하고 자책했다.
‘내가 왜 그 황당한 말을 믿었던가! 휘리는 군단 하나만을 이끌고 떠나서 다벨의 영토를 확장시킨 영웅 아닌가.’
발랑스는 수고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곤 휘리에게 뭔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호위병들과 함께 궁전으로 떠났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휘리는 자신의 말을 묶어둔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 포플러 뒤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언젠가 그 아이도 죽일 겁니까?”
멈춰 선 휘리는 포플러 뒤에 기대어 서 있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 남작.”
“선친을 섬겼던 것처럼 그 아이를 섬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작님.”
“글쎄. 그 말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말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 어르기용이지, 바탈리언 남작. 하지만 자네처럼 학식 있는 자라면 어린 권력자는 때 론 성인 권력자보다 더 골치 아픈 존재라는 것쯤은 알겠지.”
바탈리언 남작은 포플러에 뒷머리를 기댄 채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휘리는 잠시 멈춰 서서 이 우필을 버린 연대 기 작가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쓰고 싶어져서입니다.’ 자신이 휘리를 찾아온 이유를 남작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휘리는 그가 무엇인가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글을 쓰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어쨌든 남작은 노이에스 가의 첫 번째 가신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정복지 재편 사업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 므로 다벨 정청에서 서류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휘리가 더 신뢰하고 자기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8군단의 장수들이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진 메르데린 가의 가신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어린 로 드 메르데린의 부하들인 것이다. 하지만 바탈리언 남작은 처음부터 노이에스 가의 가신이 될 것을 맹세하며 찾아왔다. 휘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 작은 문객 중의 문객이었다. 주로 수사학적인 용도로 많이 쓰이게 되었지만 어쨌든 객(客)이라는 말에는 원래 그가 언제나 손님이며 무엇의 편도 들지 않고 제3자의 위치를 지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게다가 그는 참여 없는 관찰을 말하곤 하던 연대기 작가였다. 그런 남작의 과거 행적에서 휘리 노 이에스의 가신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찾기 어려웠다. 물론 그 자신은 휘리를 쓰겠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자네는 나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위해 찾아온 건가?”
“말씀드렸듯이 저는 자작님께 봉사하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시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뭐지?”
“명령하셨던 점에서 의아한 것이 있어 찾아온 것입니다.”
“가면서 이야기하지. 자네 말도 거기 있겠지?”
휘리와 바탈리언 남작은 교회의 마구간을 향해 걸어갔다. 남작은 용건을 간략히 정리해서 말했다.
“말씀하신 새로운 토지법은 대충 정리되었습니다. 서 소팔라와서 소사라의 작업이 끝나는 대로 곧장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정말 빠르군!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 예상하고 그들이 싸움을 끝내기도 전에 착수시킨 것인데 벌써 끝났단 말인가?”
“빠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진의를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가 묻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뭔가, 남작?”
“말씀하신 것 중 가장 중요한 내용들은 세 가지더군요. 인구수 2만 명에 맞춰 관구를 설정한다. 이들에게 무상 몰수한 토지를 무상 분배한다. 그리 고 그들에게 토지대 대신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한다. 제가 이해하기로 나머지 것들은 이것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자작님께서 원하시는 것 은 둔전병입니까?”
휘리는 빙긋 웃었다.
“역시 날카롭군.”
“……시대 착오도 이 정도면 이만저만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자작님. 둔전병 제도라니오. 인간적으로도 너무 가혹할 뿐만 아니라 제국법에 정면 도 전하는 제도입니다. 게다가 경제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제도입니다.”
“전 국토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잖나.”
“물론 정복지에서 실시하겠다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지만 그 방법이 아니면 당장 20만 군사를 만들어낼 방법이 없어.”
바탈리언 남작은 잠시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휘리가 20만이라는 말을 꺼내자 아주 당연한 질문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아주 당연한 대답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질문: 그 엄청난 병력을 어디 쓰실 생각입니까?
대답 :페인 제국과 싸운다.
물론 고대의 황제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거느리기도 했다. 아달탄 2세만 해도 70만의 제국군을 동원하여 펠라론을 포위하는 퍽이나 인상적인 시위 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그 시위를 통해 교회로 하여금 ‘속계의 제왕은 황제 일인’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병 력은 아달탄 대왕이 페인 제국을 건국하기 위해 만들어낸 병력이었고, 싸울 상대가 없는 상황에서 그토록 많은 병력은 국고에 천문학적인 부담을 주 는 낭비일 뿐이기 때문에 후대의 황제들은 그 병력을 착실히 줄여나갔다. 그리고 1,0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제국군의 전체 병력은 22만 정도에 불 과하며 그들은 모두 20년 동안 복무하는 직업병이었다. 현대에 들어 전쟁은 직업적인 병사들(직업병이나 용병)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페인 제국과 같은 거대한 제국도 그런 것이다. 하물며 다른 제후국들의 병력이란 고대의 황제들이 휘두르던 군사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다벨의 총 군사력만 하여도 엄청난 전쟁들을 치렀다곤 하지만 어쨌든 현재 3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사트로니아군에 억류되었던 포로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며 볼지악 전투 당시 다벨의 전체 병력은 고작 1만여 명뿐이었다.
따라서 페인 제국은 22만의 군사로도 제후국들로 하여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시킬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가진 셈이다. 제후국들로서는 의무병 제도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도 그런 대군은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거꾸로 의무병 제도를 이용하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대군을 조성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의무병 제도 중 가장 가혹한 것이라면 단연 둔전병 제도다.
그리고 휘리는 둔전병 제도를 이용하여 단숨에 현재의 다벨 병력의 7배에 달하는 엄청난 군사력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탈리언 남작은 입술을 적신 다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자작님께서는 방패를 타시려는 겁니까?”
질문을 꺼낸 다음에야 남작은 자신이 꺼낸 질문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똑똑히 이해했고, 그래서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휘리의 대 답은 의외였다. 휘리는 그 엄청난 질문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글쎄.”
“예?”
“그런 게 필요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면 자네가 말했던 그 아이가 방패를 타게 될 수도 있지. 아무려면 어떤가.”
바탈리언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휘리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일을 ‘아무려면 어때’라고 말할 수 있는 일과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일로 나눌 수 있다면 지금 그들이 나누고 있는 일은 절대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따라서 휘리는 저토록이나 무신경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바탈리언 남작은 거의 분노에 가까운 경악을 느꼈고 그래서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교회의 허드렛일꾼이 그들의 말을 가져오고 있었기 때문에 남작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휘리는 경쾌한 동작으로 말에 올랐고 남작은 답답한 심정을 삭히며 등자에 발을 얹었다. 말을 출발시키기 직전, 휘리는 갑자 기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재미있는 일 아닐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방패에 태우면 죽은 프란체스코도 날 용서해 줄지 모르잖아. 하하하.”
바탈리언 남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노이에스 자작!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그럼 공작은 왜 죽인 겁니까?”
“공작 말인가?”
“예!”
“당연히 서 브라도를 죽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지. 자네 바보인가?”
휘리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말을 출발시켰다. 하지만 바탈리언 남작은 말을 출발시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휘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서 브라도를 죽인 나를 보호한다………… 남작은 소스라치는 기분을 느꼈다. 휘리가 일개 장수로 있을 때라면 다벨은 서 브라도 살해의 죄를 묻는 페인 제국으로부터 휘리 노이에스를 보호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서 브라도는 전사한 것이지만 힘이 있는 자는 억지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개 장수인 휘리는 페인 제국의 외교적 공격 앞에 무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휘리가 다벨의 제일 권력자로 있다면 억지를 부리기 힘들다. 휘리 를 공격하는 것이 곧 다벨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휘리는 지금 다벨의 제일 권력자다. 바스톨 장군이 깨끗이 청소해 준 덕분에 휘리는 다벨 내의 유일한 군사력을 가진 자가 되어 있고, 게다가 그것은 최강의 군사력이자 가장 사랑받는 군사력(이 둘을 동시에 획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이다.
‘그럼 당신은’ 남작은 멀어져 가는 휘리의 등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다벨이 자신과 같은 우수한 장수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힌 것이 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