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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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4화


율리아나 공주는 에름 후작이 예상했던 대답을 했다.

“거절이에요.”

오스발은 약간 난처해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에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작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 으려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공주님…………” 

그러나 곧 에름 후작은 자신의 표정을 바꿔야 했다.

“그런 자상한 얼굴, 룸 언니는 좋아할지 몰라도 저에겐 사용하지 마세요, 후작님. 유혹당할 것 같으니까. 제가 소녀다운 감수성으로 요런 반대를 하 는 거라고 생각하시나 보죠? 미안해요. 사실 이건 후작님을 위해서예요.”

“예?”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 자의 쥐 파먹은 치즈 같은 두뇌 구조를 증명하고 있잖아요, 후작님. 그 남자 돌았어요. 실력이 대단할 거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제국의 공적 제1호가 운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런 미친 자에게 라트랑의 군권을 맡기시겠다는 건가요? 말도 안 돼요.”

“….제안을 꺼낸 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끔 하는, 퍽 이해하기 어려운 제안이긴 합니다.”

“돌았다니까요.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일이지만 그게 미친 사자라면 사람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 웃어 버릴 거예요. 아, 미안해요. 후작님을 비웃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에름 후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비웃어도 할말이 없겠군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이해해요. 좋은 장수를 탐내는 군주의 마음. 게다가 근래에 험한 일을 당하셨으니 더욱 그러시겠지요.”

에름 후작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다리를 죽 뻗었다.

에름 후작이 그렇게 일부러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며 율리아나는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성실한 자는 고독한 법이며, 지배자 또한 그러하다. 따 라서 성실한 지배자가 얼마나 고독할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더군다나 그의 반려는 그의 고독을 덜어주기는커녕 안타까움을 더해 줄 뿐이며, 불꽃 이 되어 그의 차가운 노년에 온기를 뿌려줄 자녀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율리아나는 갑작스레 말했다.

“후작님은 강한 분이세요.”

“예? 무슨 말씀인지.”

“아 뭐, 별거 아니에요.” 

율리아나는 입이 찢어져도 우리 언니 때문에 힘드시죠? 라는 말을 또 꺼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노스윈드를 수하로 받아 들일 정도의 배짱이 있으시잖아요.”

“이런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던가요. 조금 전엔 그걸 멍청한 짓이라 질타하시더니 이젠 배짱 있는 일이라 하시는군요. 제가 너무 풀죽은 얼굴을 했던 가요?”

후작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고 율리아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후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마도 공주님께서는 저보다는 언니를 위해서 그런 조언을 주셨겠지요? 그 라이온은, 원칙적으로는 체포해야겠지만 그래도 사절이라면 사절이니 그냥 돌려보내겠습니다. 괜찮을까요?”

“물론 안 되죠.”

“예? 아, 저 사절은 보호되어야 하는 겁니다만.”

“그를 체포하라는 게 아니에요. 키의 제안을 승락한다고 말하세요.”

에름 후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후작은 공주의 말을 이해했다. 후작은 감탄했다는 듯이 웃었다.

“아아.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그리고 후작은 오스발을 향해 쾌활하게 말했다.

“잘됐군, 오스발. 그러니 그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 하고 있을 필요 없네. 영민하신 주인님을 모시고 있는 건 자네의 행운이군.”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름 후작은 공주에게 정중히 인사한 다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율리아나는 오스발을 돌아보았고 오스발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감사합니다.”

“뭐가? 주인이 노예를 보호하는 건 당연하지요. 당신은 내 것이라고요. 게다가 난 후작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 미친 작자가 우리 언 니 근처에라도 온다고 생각하면…….”

율리아나는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율리아나는 약간 꺼림칙해하는 눈으로 오스발을 보았고 오스발은 별 표정 없이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 만 율리아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오스발의 입술 끝이 약간 올라가 있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율리아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뭐예요, 그 웃음은?”

“예? 아, 별 의미는 없습니다.”

“응? 뭔가 야릇한 뉘앙스가 있는 대답이군요. 뭐지요?”

율리아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오스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제 생각에…”

율리아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갔고 오스발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생각에, 뭐죠?”

“그, 그러니까 별로 대단찮은 것인데.

율리아나는 두 걸음을 빠르게 걸었고 그와 동시에 오스발 역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대단찮은데, 뭐죠?”

“아뇨. 이것은 단지…………어?”

오스발은 자신이 벽에 부딪혔음을 깨달았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옆으로 움직였지만 율리아나 역시 재빨리 그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오스발 은 곤혹스럽게 미소 지은 다음 반대쪽으로 움직였지만 공주 역시 빠른 동작으로 그렇게 했다. 제자리에 멈춰 선 오스발은 그만 울 것 같은 얼굴로 공 주를 내려다보았다. 공주는 씨익 웃었다.

“히이. 가뒀다. 자, 뭐죠?”

“…. 정말 에름 후작님을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요.”

공주는 간략하게 말한 다음 킥킥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나 참 못됐어요.”

오스발은 벽에 기댄 채 말했다.

“키 선장님은 말씀대로 하실 분이죠.”

“그래요. 미쳤으니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건 속임수이거나 계교겠지요. 하지만 그 미친 자는 정말 말 그대로 할 것 같아요. 난 이렇게 생각하 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에게도 그렇게 느껴지나 보군요. 발.”

“그렇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싫어요!”

공주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래서 풀어내렸던 머리가 크게 물결쳤다. 공주는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큰 눈을 빛내며 오스발을 노려보았지 만 오스발은 그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었다.

“저는 공주님의 노예입니다. 공주님께서 후작님께 바다가 만들어낸 최고의 장수를 선물하고 싶으시다면.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예?”

“그러고 싶어요? 당신을 키 드레이번에게 보내면 키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죽고 싶은 건가요?”

“아니오. 하지만 저는 노예입니다.”

공주는 다시 오스발의 가슴 앞으로 바짝 당겨섰다. 그러곤 자신의 노예를 올려다보며 간구하듯 질문했다.

“그 언덕 위에서 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나에게도 할 건가요? 죽이겠다면 막을 방법이 없으니 살고 싶다는 말 따위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안한 다?”

“예…………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당신이 영원한 피동태로 남기로 서원한 기사쯤 되나요? 왜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움직이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쳐부숴야 마땅할 존재라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거지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율리아나의 손이 올라왔다.

그녀의 손이 오스발의 셔츠 자락을 잡아챘다. 버티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만, 오스발은 공주에게 멱살이 잡힌 채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공주 는 자신의 얼굴 바로 앞쪽까지 끌고 온 오스발의 얼굴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자유로운 건가요?”

“네?”

“그래서 그렇게 자유로운 거냐고 물었어요.”

“공주님. 저는 노예입니다. 자유와는 가장 먼 거리에 있습니다.”

“거리는 창조지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 자유로운 것이군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악당이군요.”

오스발은 멋적게 웃었다. 율리아나는 그 미소의 구조를 모조리 분석해 내겠다는 듯이 오스발의 얼굴을 뜯어보며 말했다.

“몇 번씩이나 목숨을 구해 준 그 친절한 모습에 속을 뻔했어. 당신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 최악의 악당이군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오스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에게 멱살이 잡혀 있는지라 약간 어려운 동작이었다. “어쨌든, 제가 공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공주님께서는 저를 키 선장님에게 보내어 그분으로 하여금 저를 처벌토록 하실 수 있겠군요.”

“싫어요, 안할래요.”

“왜요?”

공주는 오스발의 옷을 놓아주며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린 채 말했다.

“난 악당을 좋아하거든요.”


법황청 비서관 그레이엄은 서신을 건네기 전부터 이미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퓨아리스 4세는 그레이엄이 서신을 이미 뜯어봤음을 알 아차렸다. 그레이엄은 공손한 태도로 서신을 내밀며 말했다.

“데샨카라돔의 로스왈로가 두 통의 서신을 보내어왔습니다. 성하.”

“그래서 뜯어본 것이군?”

“예? 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괜찮아. 나라도 마법사가 보낸 서신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열어봐 달라고 부탁했겠지. 자네가 살아 있는 것을 보니 그 서신은 사람을 잡아먹거 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군.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웃고 있나?”

그레이엄은 짐짓 점잖은 어투로 말했다.

“평소 그가 표시해 온 성하에 대한 존경과 우정의 이름으로 제발 부탁하니, 라오코네스와의 대화 내용을 좀 적어보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생김 새, 비행 방식, 속도, 목소리, 단어 선택 방식, 하다못해 발자국이 남아 있다면 그것의 석고 모형까지도 갖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성하께서 번거롭다 고 여기신다면 인터뷰와 조사를 위해 마법사 몇 명을 파견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황도를 그릴 화가도 파견하 겠답니다. 물론 데샨 카라돔에서 모든 체제비와 경비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그레이엄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퓨아리스 4세의 얼굴 위에도 떠올랐다. 그 강대한 마법의 수호자, 제일해석자가 ‘감히’ 법황에게 허리를 굽히며 부탁하는 것이다. 법황은 플로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그 늙고 거만한 고집쟁이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 이번으로 두 번째인가? 이번에도 내 힘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좋은 일인데.”

플로라는 살짝 웃었지만 그레이엄은 고개를 갸웃했다.

“두 번째라니오? 무슨 말씀입니까, 성하?”

“그 늙은 친구는 내가 리포밍된 싱잉 플로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비슷한 서신을 보냈지.”

“아하, 그렇습니까.”

“그래도 그땐 내가 로데인 백작이었던 시절이니까 좀 나았겠지. 하지만 법황에게 애걸하기는 정말 싫었을 텐데. 그 친구에 대한 내 평가를 약간 좋 은 방향으로 수정시켜도 될 것 같군. 그 자의 천칭에서 자존심은 언제나 지식욕보다 높이 올라가나 봐.”

“학자다운 태도입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지만.”

법황은 다시 웃었다. 마법의 수호자이자 제일해석자 로스왈로는 학자라고 불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마법 앞에서는 재고, 달고, 나누고, 붙인 다음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로스왈로의 평소 지론이며, 그래서 견실한 학자들로부터 엄청 난 비웃음을 사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저런 주장을 통해 로스왈로는 자신을 스콜라가 아닌 아티스트로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가 무어라고 떠 들든 보통 사람들은 마법의 작용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채.

“호의적인 답신을 보내주도록. 다만 추기경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마법사를 보내겠다는 것은 안 돼. 질문 사항을 정리해서 보내라고 하면………… 그 친구나 그 친구의 제자들을 충분히 미치게 만들 수 있겠지.”

그레이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면 우리들이 미칠 수도 있습니다. 수레에 실어 보낼 수도 있으니까요.”

법황은 껄껄 웃으며 다음 서신에 눈을 보냈다. 그레이엄은 그 서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두 번째 서신은 충분히 짧습니다. 직접 읽어보시죠.”

법황은 고개를 갸웃한 다음 로스왈로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신을 펼쳤다. 그가 익히 잘 아는 악필로 짤막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사말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서신이라기보다 무슨 쪽지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귀하의 까마귀들에 대해 오해한 점 사과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방패를 타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고 준비하는 대책만이 충분한 대책이니까요. 따라서 나는 귀하와 더불어 그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방패에 탄다니. 무슨 썰매 탄다는 이야기인가?”

법황 퓨아리스 4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비서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레이엄 비서관은 아버지의 방패를 몰래 꺼내어 눈밭에서 타고 놀았을 어린 법황을 생각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로데인 백작은 눈이 많이 내리는 그리치 출신이었다.

“그건 황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뭐?”

“고대 관습입니다. 아주 옛날, 전장에서 병사들이 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고 싶을 때 장군을 방패 위에 태운 다음 들어올렸지요. 거기서 유래 한 것으로 고대에는 황제 즉위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 변방의 장군들이나 대립 황제 등은 흔히 휘하의 병사들에 의해 방패에 태워 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1,000년 동안 안정된 황가가 계속되다 보니 이젠 그런 관습 같은 것은 까맣게 잊혀지고……………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옛 노래를 배우는 음유시인들에게나 이해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아, 물론 제국마저 위태롭게 만든 하이낙스가 있습니다만 그는 장군 같은 것은 아니므 로 그런 풍습을 이용하진 않았지요. 이용했다면 오히려 꼴불견이었을 겁니다.”

그레이엄의 설명을 들으며 법황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법황은 다시 서신을 내려다보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뭔가, 이 서신은 그가 황제가 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로스왈로가 말하는 그가 누구지? 흐음. 나는 이런 엉망 진창인 서신을 가리키는 신조어를 알고 있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레이엄?”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휘리의 서신 같다고들 하지요.”

“그럼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되나. 휘리는 황제가 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젠장! 이 자식, 왕자의 땅에 대해 알고 있나 보군. 마법사 주제에 그런 이야 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럼 까마귀라는 것은 바이올 기사단을 가리키는 것이겠군요. 성하께선 이런 사태를 예상하셨기에 바이올 기사단을 서품하길 고집하신 겁니까?” “이렇게 안 되길 바랐지. 서 브라도와 바스톨 장군이 한 전투에서 깨져나가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만약의 만약을 위한 일이었는데……… 젠 장.”

퓨아리스 4세는 다시 로스왈로의 편지를 노려보았다.

로스왈로는 바이올 기사단에 대해 처음부터 언짢은 반응을 보여왔었다. 그들로서는 펠라론이 자기 무장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휘리 노이에스가 서 브라도와 바스톨 장군을 물리쳐 당분간 그를 견제할 세력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금 ᅳ 물론 페인 제국은 언제나 제3자다. 객관 성은 제국에게 있어 통치 철학이라기보다 차라리 본능에 가깝다 로스왈로는 그제서야 법황이 고집스럽게 바이올 기사단을 발족시키려 드는 진의 를 깨달았을 것이다.

퓨아리스 4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 고집 세고 자존심 센 자는 귀하의 까마귀들에 대해 오해한 점 사과’어쩌고 하는 문구를 쓰며 손 을 덜덜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멍청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마법의 제일해석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여간 대 단한 일이 아니다.

“그럼 이 짤막한 쪽이 그의 본론이군. 공조 체계? 정말 휘리의 서신이군.”

“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놀라운 내용이 마치 휘리의 서신 같다고 말한 거야. 이 자는 지금 펠라론과 데샨 카라돔의 공조를 제안하고 있어. 진짜 지식인이든 지식인인 척하는 녀석이든 모두 놀랄 말이잖은가.”

“놀랄 일이긴 합니다. 교회와 마법계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렉시뇰 공의회 이후 처음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미리 서신을 읽었기에 그레이엄은 경악하지는 않았다. 대신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순간 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기겁할 이야기를 차분하게 나누고 있다는, 약간 덜 고상한 기쁨을 맛보며 즐거워했다.

마법사들은 교회로부터 인정받아야만 합법 마법사로서 활동을 할 수 있다. 교회로부터 허가받지 못한 마법사는 불법 마법사로 간주되며 이단과 마 찬가지로 처벌된다. 물론 원칙이 그렇다는 말이다. 마법사를 처벌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고 따라서 마법사들은 그런 원칙 을 탐탁찮게 생각한다. 마법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다시피 해야 얻을 수 있는 힘이며, 따라서 그런 힘을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 는 자에게 허락받아야만 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이런 분통 터지는 상황 속에 집어넣은 자가 바로 펠라론 1,700년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정치가인 ‘푸른 장미의 법황’ 라우스 3세다.

라우스 3세 주도하에 개최된 렉시놀 공의회의 포고문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법은 특별히 증명할 필요 없이 글을 잘 쓴다거나 검을 잘 쓴다 는 것 이상의 어떤 재능이며, 따라서 주님이 특별한 사람에게 마법이라는 이 희귀한 재능을 허락한 것은 주님의 적극적 의지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 다. 따라서 법황은 악마의 사역인 마법과 주님의 의지 표현인 마법을 구분할 무한하고 유일하고 모든 것에 우선하는 책임과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한마디로 마법은 주님의 특별 보너스이며 따라서 신의 대리인인 법황에게 허락받고 쓰라는 말이다. 마법사들은 으르렁거리고 가르랑거리고 꽥꽥거렸지만, 전부 속으로 내지른 비명일 뿐이었다.

게다가 노회한 정치가였던 라우스 3세는 마법사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직업인이 법황의 보증 아 래 일하겠는가.’ 참으로 멋진 한마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생이라는 시간을 어느 한 점에 집중시킨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마법사들은 어찌 보면 순박한 사람이다. ‘마법사는 세상의 모든 직업들 중 법황의 보증을 받는 유일한 직업’이라는 한마디에 감격한 마법사들은 스스로를 규제하기 시작했 다.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는 자신의 동료들을 자기 스스로 백안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 일한 사람들에게서 백안시당하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들 중에도 드물다. 그들은 헐레벌떡 교회로 달려가서는 마법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신 부에게서 ‘당신은 정당한 마법사임’이라는 인증서를 받아들고는 희희낙락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어 측은하기까지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이 노련한 법황에게 당했다는 것을 마법사들이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뿔두꺼비와 핑크빛 토끼와 다리 여덟 달린 길이가 모두 다른 테이블로 바꾸는 난동을 부렸지만 그것은 가십거리에 목마른 사람들을 열광시켰 을 뿐이다.

“마법사 골드버그가 윈필드 백작을 말로 바꿨다더군.”

“흐음. 늘상 그러고 싶어하더니, 백작 부인은 드디어 남편에게 고삐를 채울 수 있게 되었군. 말채찍이나 하나 선물할까.”(이 친구는 틀림없이 윈필드 백작 에게 아내를 뺏겼던 작자일 것이다.)

공의회의 결정은 공의회로만 뒤집을 수 있다. 그리고 마법사들에게는 공의회 개최권이 당연히 없다. 좌절은 과거의 결정에 대한 긍정이 되었고 그들 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마법사 인증권을 뺏거나 무효화시키는 대신 자신을 납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맘에 들진 않지만 그건 옳은 일이야.’ 물 론 마법사들이 아닌 사람에겐 그것은 진짜 옳은 일이다. 교회가 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힘에 대한 견제를 맡고 나서는 것이므로. 그 이후로 펠라론과 데샨카라돔은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상대방을 개탄스러워해야 했다.

그것이 펠라론과 데샨 카라돔의 관계였다. 어떻게 보면 불가해한 관계이기도 하다. 데샨 카라돔은 어쨌든 자신이 법황의 인정을 받는 마법사의 집단 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펠라론 또한 데샨 카라돔의 마법사들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서로 가 서로의 자부심의 원인이라는 것은 한 둥지 속의 새들처럼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근거다. 하지만 바꿔 말한다면 이들의 둥지는 철창이고 펠라론과 데샨카라돔은 각자 맹수 조련사와 맹수라 할 수 있다. 데샨 카라돔은 자신들에게 채찍을 휘둘러대는 펠라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펠라론 은 단단히 휘어잡지 않으면 자기 팔을 뜯어먹을 맹수로서 데샨 카라돔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로스왈로의 서신은 맹수가 맹수 조련사에게 점잖게 제안하는 것이다. ‘힘을 합쳐보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법황은 차분한 태도로 서신을 도로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은 다음 플로라를 돌아보았다.

플로라는 가운을 얌전히 여민 모습으로 앉아 햇살을 쬐고 있었다. 법황은 햇살을 머금어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그녀의 녹색 머릿결을 바라보며 지나 가는 말처럼 말했다.

“보상일까, 수호일까?”

그레이엄은 고개를 갸웃했다. 법황은 플로라를 보면서 그레이엄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들의 일원이 대륙에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성취한 업적에 한낱 무인 따위가 도전하게 내버려둘 수 는 없다는 심보인 것일까?”

그레이엄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하이낙스의 일에 대해 고소하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데샨 카라돔뿐일 테니. 그리고 보상…. 어쩌면 둘 다일지 도 모르겠습니다.”

법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엄. 이유를 알아내야 돼. 나는 로스왈로가 왜 휘리 노이에스에 대해 걱정하는지 알고 싶다. 그 젊은 친구가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치고 있다 는 것만으로는 그 고상한 마법사들이 우려하는 이유로서는 약간 부족해. 그걸 알아내봐. 하지만 그들의 제안 자체는 일단 환영받는다고 느끼게 해줘. 실제로 환영하고 싶은 제안이니까. 그러니 법황은 입에서 군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 제안을 환영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줘.”

“알겠습니다, 성하.”

그레이엄은 정중히 인사한 다음 집무실을 나갔다.

법황은 플로라에게 다가갔다. 플로라는 아무 말 없이 창문에서 떨어지는 햇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라의 등뒤에 선 법황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치 옷을 받아주는 자세 같았다.

“가운 벗어도 돼, 플로라, 그레이엄은 나갔으니까.”

플로라는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가운을 벗는 대신 그 손을 더 높이 들어 어깨에 얹힌 법황의 손을 살짝 밀어내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성하.”

법황은 밀려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플로라의 머릿결을 바라보았다. 손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허둥거리던 법황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 법황은 그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집무실의 발코니를 통해 미풍이 불어왔다. 나부끼는 얇은 커튼 자락은 집무실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들로 물결쳤다. 커튼을 간지럽히던 미풍은 그대 로 대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둘에게로 다가섰다.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플로라의 머릿결이 살짝 떠올랐고 퓨아리스 4세는 배를 간지럽히는 그 머릿 결의 느낌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궁금해…”

플로라는 고개를 약간 돌려 어깨 너머로 법황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질문 하나 할까, 플로라.”

“예. 성하.”

“에름 후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트랑의 에름 후작 말씀입니까?”

“그래. 안을 수 없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 말이야. 아내를 ‘꽃처럼 바라보기만 하는 남자.”

·글쎄요. 성하.”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궁금해.”

플로라는 미세한 아픔 같은 것을 느끼며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플로라가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빌어먹을 퓨아리스 3세. 날 거세시키면서 그 영감쟁이는 쾌감을 느꼈을걸.”

“그렇지 않습니다, 성하. 그 분은 교회의 우두머리로 성하보다 더 나은 이가 없음을 알고……”

“내버려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법황으로 만들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거지. 죽음까지 뛰어넘어서 말이야. 만약 휘리 노이에스가 좀더 나 은 출생을 가졌더라면, 그래서 일찍부터 퓨아리스 3세의 눈에 들었다면 지금 펠라론과 모든 교회를 다스리는 자는 그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씀을……….”

“틀리나? 고소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플로라는 잠시 침묵한 다음, 고개를 뒤로 젖혔다.

등받이를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법황과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플로라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늘어진 머릿결 사이로 그늘진 법황의 얼굴은 어 두웠다. 반대로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플로라의 얼굴은 빛 속에 떠오르는 빛처럼 보였다. 법황은 훤히 드러난 그 이마와 콧날, 그리고 봉긋한 입 술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법황의 시선은 플로라의 눈에서 멈췄다.

그 초록빛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성하.”

법황은 대답 대신 그의 손등에 늘어진 플로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법황의 손가락들 사이로 녹색 머리카락들이 사락거리며 미끄러 졌다.

“제가 성하를 리포밍시킨 것 같군요.”

플로라의 머리카락 속을 헤엄치던 법황의 손가락이 멈췄다. “무슨 말이지?”

“성하는 좋은 분이세요.”

“보통 남자들이 여자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지, 그거.”

“그래도 좋은 분이신걸요. 성하. 그리고 그것이 제가 좋아하는 성하의 본래 모습이죠.”

“본래 모습? 내 본래 모습이 뭔데?”

“성하는 지키고, 보호하고, 이어가는 분입니다.”

“내가? 그레이엄이 들으면 어처구니없어할 말이군. 그는 내 손에 의해 파괴되고, 부서지고, 결딴난 집무실 기물들에 대한 대하 서사시를 쓸 수 있을 걸.”

법황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플로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플로라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은 자신의 머리카락들 사이에 잠겨 있는 법황의 손을 찾아낸 다음 그것을 움켜쥐었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지요. 나는 비뚤어진 아이야, 라고 주장하는 소년처럼.”

“으윽.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내가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이군, 그래?”

플로라는 법황의 손을 자신의 볼로 가져갔다. 법황은 움찔했지만 플로라는 그 손을 꼭 쥔 채 그 손등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부드럽게 웃었다. “예.”

법황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뭔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릴 때 플로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때문이죠. 정말 미안해요, 네스탄.”

퓨아리스 4세, 속명 네스탄 로데인 백작은 아무 말 없이 플로라의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

“네스탄.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그러니 자신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말아요. 괜히 반항아인 척하지 마세요. 괜히 하이낙스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척하지 마세요. 당신은 보호하고 가꾸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나는 보호자 같은 것도 아니고 썩 선량하지도 않아.”

“그럼 왜 휘리 노이에스를 싫어하시지요?”

법황은 다시 말을 잃었다. 플로라는 법황의 손등에서 그의 맥박을 느끼며 말했다.

“네스탄. 당신이 저를 얻기 위해 일부러 반항아인 척, 규칙의 파괴자인 척, 대범한 척한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인간이 아닌 저, 통념이 용납하지 않는 저를 원하신다면 당신 스스로가 통념의 적이 되어야 했을 테니까요.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그건 제가 좋아하는 당신의 모습이 아니에요. 선대 법황께서 적절한 시간에 당신을 교회의 수호자로 만드신 거, 전 정말 감사하고 싶어요. 당신 말로는………… 거세당하셨다고요? 글쎄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내가?”

“제멋대로 부는 바람이 아닌 아름다운 나무가 될 수 있으셨으니까.”

“아름다운 나무라.”

“네스탄. 당신은 나무가 되어 대지에 그늘을 드리워야 하실 분이죠. 저 믿을 수 없는 바람의 꿈을 꾸지 마세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수고, 결딴내 는 휘리를 증오하시는 당신이 진짜 당신이에요. 그리고…………… 용서하세요. 바람에 의해 태어난 어떤 꽃에 소중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만히 보호하시는 당신이 진짜 당신다워요.”

법황은 가까스로 웃었다.

“그 꽃을 꺾어 가지는 대신?”

“예.”

“넌 그 바람을 잊을 수 없나, 플로라?”

“예. 용서하시길.”

법황은 길고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잊으라는 쪽이 잘못되었겠지. 너에게 모습을 준 사람을 어떻게 잊겠나.”

“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꽃이라서. 성하, 성하께서도 내버려두면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꽃을 위해 무엇이든 부수고 파괴해 버릴 바람이 될 당신을…… 법황으로 만드신 선대 법황의 뜻을 아시죠?”

“아는 것 같아. 그 교활한 노인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척한다는 점에서 너와 막상막하야.”

플로라는 방긋 웃었다. 

“용서하세요.”

“용서는 무슨.”

“아니, 앞뒤 안 맞는 말을 할 저를 용서해 달라고 미리 부탁드리는 거예요.”

“응?”

플로라의 왼손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도 법황의 손을 내버려둔 채 올라왔다. 그 손들은 법황의 목 뒤에서 서로 만나 얽혔다. 법황은 당혹 한 얼굴로 플로라를 내려다보았지만 플로라는 웃음띤 얼굴 그대로였다.

“성하께서는 부활의 법황 퓨아리스 4세가 되셔야 해요. 저도 그 모습을 더 좋아할 테고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하이낙스가 되어주시겠어 요?”

그리고 플로라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바람의 꿈을 꾸는 꽃을 위로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법황은 낭패한 기분과 당혹감을 느끼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른 채, 약간 절망적인 아찔함까지 느끼며, 고개를 차츰 숙였다.

각도가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키스는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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