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1화
세실리아는 밀짚모자를 약간 추어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영 못한다는 게 진짜예요?”
“그렇습니다. 세실리아 양.”
“그럼 후작님은 아내랑 물 속에서 같이 놀지도 못하겠군. 좀 배워보지 그랬어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에름 후작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참 어렵더군요. 몇 번 시도는 해봤는데, 물만 실컷 먹었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수영치인가 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름 후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피식 웃던 세실은 갑자기 후작의 등을 미는 시늉을 했다. 물론 후작은 자지러지는 모습으로 난간에 매 달렸고 그래서 하마터면 낚싯대를 놓칠 뻔했다.
에름 후작을 생사의 기로에 몰아넣고 즐거워하던 세실은 다시 자신의 낚싯대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찌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낚시는 전반적 으로 따분했다. 세실은 크게 하품한 다음 자신의 낚싯대를 거둬올렸다.
“나 아무래도 낚시와는 소질이 안 맞네요. 그러니 저녁 거리는 일류 낚시꾼인 후작님에게 일임하죠.”
“예? 일류 낚시꾼이라니오?”
“낚시꾼들 허풍대로 ‘사람 키만한’ 것을 낚아올렸잖아요. 머메이드.”
에름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실은 몸을 돌려 선창의 물탱크 해치를 연 다음 물 한 바가지를 퍼 마시다가 후작을 흘끔 돌아보았다.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또? 당신은 물을 무척 많이 마시는군요.”
“날씨가 이렇게 덥잖아요.”
물론 후작은 세실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물탱크를 채울 비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고참 선원이 신참에게 하는 식의 조언ㅡ물을 아낄 줄 모르는 놈은 뱃사람 자격이 없다는 등의ᅳ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수영은 못하지만 훌륭한 보트 조종사인 후작으로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겠지만.
세실은 해치를 닫고는 선창을 가로질러 고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돛 하나짜리 스쿠너였기 때문에 어디로 가든 그렇게 많이 움 직일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세실은 곧 키의 옆에 섰다. 키는 키에 기대어 앉은 채 배 뒤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실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흠. 후작은 확실히 수영 못해. 그러니까 도망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세실은 승강구 쪽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라이온은 좀 어때?”
“잠들었다.”
세실은 고개를 조금 끄덕이다가 고물의 뱃전에 걸터앉았다.
여름의 태양은 수면 위에 무수히 되튀겨 건현에 복잡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키가 배를 정지시키고 세실과 에름 후작에게 낚시를 하도록 명령 할 만큼 바람 한 점 없는 조용한 오후였다. 돛은 축 늘어진 채 갑판 위에 고정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사방은 뜨겁고 고요하고 멀어지고 있었다. 세실은 키를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물어야겠군. 그때 왜 그랬지?”
“뭐.”
“라이온을 구하러 도로 나온 거 말이야. 감동이라면 감동이지만 네가 그러니 좀 이상하다.”
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키가 그럴 것이라 짐작했던 세실은 계속 말했다.
“그때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돼서 넘어갔던 거지만, 항해하다 보니 잡생각할 때가 많고, 그래서 그때 일 생각해 보게 되었어. 이상하단 말이야. 너도 이웃사람의 선과 자기 선을 사이좋게 나눠쓰는 사람이니? 아니라고 봤는데. 더군다나 후작에게 들었는데…………”
세실은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오스발도 내버려두고 나왔다며?”
키는 여전히 키에 상체를 얹은 모습으로 노곤한 듯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는 이 배에서 가장 먼저 말라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바로 자신 일 테고 틀림없이 대답에 목말라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툴툴거렸다.
“게다가 우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난 태양이나 별을 보는 재주는 없다고. 에름 후작은 북동쪽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관측기기를 못 쓰니 자세 히는 모르겠다고 하더군.”
키는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법으로 대답했고 세실은 또다시 대답을 받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왜 라이온이 다쳤는데 우린 배를 타야 하는 거지?”
그날밤, 카밀궁을 빠져나온 키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라트라인 상항(港)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세실과 에름 후작, 그리고 라이온과 그 를 부축해야 했던 두 명의 경비병들도 그대로 그를 따라가야 했다. 부두에 도착한 키는 어둠 속을 매섭게 둘러보다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 배에 탄다.”
세실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네 거야?”
“조금 후엔.”
세실은 할말이 없어졌다. 키는 해적인 것이다. 그래서 세실은 곧 벌어질 참극에 대해 두려워해야 했다. 그러나 갑판을 적시는 뜨거운 피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로 떨어지는 시체· 등의 활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갑판 위로 뛰어오른 키 드레이번은 멀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당직 선원들을 향 해조용히 말했다.
“나는 키 드레이번이다.”
“노스윈드다!”
그리고 당직 선원들은 죽을 힘을 다해 뱃전 밖으로 몸을 날렸다. 풍더덩! 말 한마디로 배를 점거한 키는 곧 경비병들로 하여금 라이온을 선실에 눕히 도록 했다. 그 시점에서 세실은 약간 이해되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포로로 끌려온 에름 후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대해적답군요. 이렇게 어두운 밤인데도 라트라인 최고의 스쿠너를 한번에 알아보는군요.”
“후작님. 왠지 이 상황을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물론 그렇지야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배의 이름은 라이트버드. 서 레빌의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배가 탐났죠.”
에름 후작은 어쨌든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도망치려는 시도를 아끼지는 않았지만 키 드레이번의 빈틈없는 감시나 정체 모를 신비한 마법 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라이트버드호가 부두를 떠나자마자 키는 두 경비병들을 뱃전에 서게 한 다음 앞으 로 일보’를 명령했다.
그리고 라이트버드는 쾌속 항해 끝에 그날 자정 무렵에 이미 라트라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닷새 동안의 항해에서 세실이 알아낸 것은 하나뿐이었다. 라이트버드호를 고른 키의 안목은 정말 정확했다. 라이트버드호의 쾌속에 감탄하는 세실에게 에름 후작은 선박명 바로 아래에 있는 3L의 서명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후작은 곧 한숨을 쉬어야 했다. 세실은 이게 뭐냐는 투로 그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로드니 라일름 리드클리프, 고명한 선박 설계자입니다. 카밀카르의 스톰라이더호, 필마온 기사단의 지브라호, 그리고 노스윈드 함대의 질풍호도 그 분의 작품이죠.”
“아하?”
그리고 그것이 세실이 알아낸 유일한 사실이었다. 키는 배에 오르고부터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세실이 설마하는 심정으로 관찰해 본 어느 날엔 가 키는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기도 했다. 그는 돛을 조절하고 키에 매달려 배를 움직이는 일엔 열심이었고, 그리고 그런 필요에 의해서는 가끔 입을 열었지만, 동료 선원들에게 왜 다친 라이온을 곧장 배에 태웠는지, 그리고 이 배는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여나 폴라리스로 돌아가는 것인가 했던 세실의 추측은 에름 후작의 설명 때문에 포기되어져야 했다. 라이트버드호는 폴라리스의 정반대인 북동쪽을 향하 고 있었다.
“지금까지 닷새 동안이나 아무 말 못하고 있었던 건 네가 화가 잔뜩 나 있을 것 같아서였어. 라이온 때문에 오스발을 잡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생각 해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이야. 오스발을 처리하는 대신 라이온을 구출하기로 결정한 건 네 판단이었어. 그거 지이이인짜 이상하더라? 그러니까 다시 이런 게 떠올랐어.”
세실은 젊은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고 어떤 고상한 사람들이 곤혹스럽게 고개를 가로젓든 말든 형태는 어느 정도 그 성격을 규정하는 법이다. 그 래서 세실은 자신이 젊은이의 성격도 유지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키와 나누고 있는 것은 청력까지 시원찮아진 노인들이 나누는 ‘대화’와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대답하든 대답하지 않든 자기 말만 계속하는 것. 그런 처지에 대해 한숨을 내쉬며, 세실은 계속 말했다.
“그날 아침, 그러니까 다림 떠나올 때 말이야. 라이온이 이상한 말을 했지. 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지? 너 라이온에게 뭐 빚진거 있어?”
“이 배는 레갈루스로 간다.”
세실은 흠칫하며 키를 쳐다보았다. 키는 키에 팔꿈치를 기대고 오른쪽 뺨을 받친 모습으로 세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갈루스?”
“응.”
“왜?”
“새벽의 눈을 찌르기 위해.”
“…..새벽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아, 그보다 먼저 그 새벽 양, 새벽 군? 그 친구의 눈동자 색깔이 뭔지부터 좀 말해 주겠어?”
농담하듯 말하던 세실은 당황해야 했다. 키는 별 표정의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심홍색.”
“응?”
“그 눈동자는 심홍색이다.”
세실은 키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키가 꼬박꼬박 대답하는 드문 기회에 항상 그러했듯이 장난기로 눈을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뭔가 황당한 질문을 꺼낼 틈은 없었다. 키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고물 뒤편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세실리아. 바람을 준비해라.”
“쳇. 마치 요리사에게 ‘건포도 케이크를 준비해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투군. 뭔데? 따라잡았어?”
질문을 던졌지만 세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키가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수평선을 뚫고 돛대들이 솟아올랐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기에 그 배가 노를 이용하여 움직이고 있음은 당연했다. 지난 닷새 동안 그들을 추적하 던 라트랑 해군의 롱갤리어스 이루미나호였다. 고개를 돌린 세실은 키가 어느새 돛대 쪽으로 움직였음을 발견했다. 키는 돛줄을 움켜잡으며 이물 쪽 에 앉아 있던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 키를 잡아라.”
에름 후작은 낚싯대를 챙겨들며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나에게 키를 맡기려는 거요? 지난 닷새 동안엔 한번도……”
“당신이 헤엄 못 친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까. 그렇다면 바다로 뛰어들 생각은 못하겠지.”
“그건 맞소.” 에름 후작은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키를 맡기는 건 위험할 텐데. 내가 암초로 배를 몰아가면 어쩔 거요?”
“당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를 바랄밖에.”
에름 후작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곤 그때까지 두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실에게 걸어와서는 정중하게 말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세실이 물러나자 에름 후작은 손가락을 몇 번 꺾은 다음 키에 연결되어 있던 조정 막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후작을 바라보던 세실을 향해 키가 약간 짜증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실, 바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건 요리사, 디저트! 라고 외치는 투야. 쳇. 마법사를 존경할 줄 모르고 마법을 경외스러워할 줄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세 실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뒷갑판 가운데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지난 닷새 동안 그들 뒤편으로 이루미나호가 나타났을 때마다 했던 일을 시작했다. 바다에서는 소리가 잘 퍼져나간다. 그리고 마법사들에게는 마법장이 쉽게 확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정신을 집중시킨 세실은 곧 1마일 반 저편 에 있는 이루미나호가 느껴질 정도로 마법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망망대해 위에 설정된 직경 3마일 가량의 거대한 마법장 속에서 세실은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홉 척의 중무장 전함에 30노트의 속도를 부여했 던 마법사는 세야의 아카나가 없어도 스쿠너 한 대쯤은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라이트버드호의 고물 쪽으로부터 강력한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제기랄, 또냐?”
라트랑 해군 소속 이루미나호의 선장 스리우드는 노여움을 참지 못해 선교 난간을 후려쳤다. 선장의 품격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심 정을 잘 이해하는 이루미나호의 고급 선원들은 그 선장의 품위 없음을 탓하지는 않았다.
벌써 네 번째 일어난 일이었다. 바람 한 점 없던 해역, 혹은 심한 역풍이 불고 있던 해역에서 느닷없이 순풍이 분다. 처음 두 번까지는 우연으로 치부 했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수용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들이 추적하고 있는 배의 여마법사는 순풍이나 식수용 스 콜(그제 정오 무렵, 스콜이 내릴 턱이 없는 위도상에서 만난 비를, 스리우드 선장은 소나기라고 우겼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스콜이었다)을 제맘대로 불러낼 수 있었 다.
물론 라이트버드에 부는 순풍은 그 뒤를 따르는 이루미나호에도 똑같이 순풍으로 작용한다. 바람이 공기의 흐름인 이상 일정 지역의 공기가 앞쪽으 로 이동한다면 그 뒤쪽의 공기 또한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며, 그래서 세실이 만들어내는 바람은 이루미나호에도 똑같이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루미나호는 무거운 롱 갤리어스이며 이루미나호가 아니더라도 라트랑에서 가장 빠른 스쿠너를 따라잡을 배는 드물다. 스리우드 선장은 세 번째 순풍에서, 그러니까 바로 어제 오전 돛과 노를 병행하여 따라잡는다는 과감한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얻은 성과는 노잡이들 사이에서 폭동의 전 조를 이끌어낸 것뿐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았어. 3L의 서명이 있는 배가 있어야 해!”
스리우드 선장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일항사이며 그 회의주의로 라트랑 선단에서 드높은 명성을 얻고 있는 도노반 일항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배가 있다 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뭐라고? 왜!”
“저건 키 드레이번이 조종하고 있는 배입니다. 그를 비난할 말은 많겠지만 그의 뱃사람으로서의 자질이 고만고만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요.”
일항사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노려보던 스리우드 선장은 나직하게 말했다.
“도노반 일항사.”
“예, 선장님.”
“자네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그 외엔 퍼부어줄 말이 아주 많아. 자네가 욕설에 굶주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 니 부디 닥쳐주게.”
남부럽지 않은 분별력의 소유자 도노반 일항사는 입을 다물었다. 스리우드 선장은 갑판장을 향해 짧게 외쳤다.
“횡범 모두 펼쳐! 그리고 노잡이들은 좀 쉬라고 그래! 저 괘씸한 마법사의 소행을 반가워할 녀석들은 그놈들뿐일 것 같군.”
과연 무풍 때문에 오전 내내 노를 저어야 했던 노예들은 퍽이나 기뻐했다. 갑판 아래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숨죽인 웃음 소리와 낮은 환호를 들은 스 리우드 선장은 치통에 시달리는 것 같은 신음을 내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배가 그 이름을 딴 어떤 귀부인에 대해 마음속으로 거듭거 듭 사죄했다.
“저놈들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지? 저런 작은 배로 오랫동안은……..”
그때 회의주의와 분별력은 충분할지 몰라도 기억력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도노반 일항사가 선장의 경고를 잊은 채 태연히 대답하고 말았다.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도 저 얼빠진 마법사가 있는 한 상당히 장기간 동안 항해할 수 있을 겁니다. 식수는 하늘에서 마음대로 끌어내리고 스쿠너에 4명밖에 안 탔으니 식량도 남아돌 테지요. 물론 낚시로 보충할 수도 있을 테고. 그리고 키 드레이번은 태풍이나 암초에 배를 들이박지도 않을 테니,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을 겁니다. 위험한 것은 오히려 우리 쪽이 아닐까요?”
이루미나호는 급한 추적을 위해 항해 준비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로 출동해야 했다. 군함은 어차피 적하량이 적고 승선원은 너무 많다. 따라서 도노반 일항사의 우려는 절대로 피해망상이 아니다.
다만 이 경우 그는 약간의 피해망상을 가지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꼬박꼬박 그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항사에 대한 아니꼬움을 참지 못한 스리 우드 선장은 매우 야비한 복수를 결심했고, 그래서 도노반 일항사는 그날 오후 동안 그들의 남아 있는 보급품에 대한 ‘완벽한 목록’을 만들기 위해 못하나하나까지 세어가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