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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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2화


내리떨어지는 여름의 햇살 속에 테라스는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자신의 발 아래에 만들어지는 그림자의 예리함에 잠시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 뒤에 서 있던 오스발은 나직이 말했다.

“공주님.”

공주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일체의 침입도 있을 수 없는 벽이 그녀 주위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오스발은 왠지 자신의 말 이 그 벽에 부딪혀 튕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후 율리아나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룸 언니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전 후작 부인의 명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마님께서는 제게 공주님이 배에 타도록 설득하라고 하시더군요.”

“안됐네요, 오스발. 어차피 설득은 못하겠지만 준비해 온 말이 있으면 해보겠어요?”

“아니오. 관두겠습니다.”

오스발이 대답한 순간 율리아나는 몸을 휙 돌렸다. 그녀는 커다란 두 눈동자 가득 오스발을 담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역시 말해 봐야 통하지도 않을 말은 무의미하니까 하지 않으시겠다?”

“……”

“살고 싶어 해봐야 고귀한 라트랑 후작 대신 천한 노예 한 명이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구태여 살아나려 애쓰지 않으시겠다? 살려달라고 말해 봐야 미친 대해적이 살려줄 리 만무하니 말하지 않겠다?”

“예.”

율리아나는 고개를 떨구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비록 얼굴을 많이 붉히긴 했지만 어쨌든 오스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 며 말할 수 있었다.

“이런 건 어때요?”

“무엇 말씀이십니까?”

“면천시켜 주고 나와 결혼해 달라고 요구하면 어쩌겠어요?”

오스발은 숨막히는 소리로 대답했다.

“예?”

“반복하긴 싫어요. 부끄러우니까.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니잖아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기다리지요. 근사한 대답이 하고 싶은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율리아나는 두 손을 입술 앞에서 깍지낀 다음 몸을 돌렸다. 그러곤 살짝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등이 오스발의 가슴에 닿았고 그녀는 오스발에게 기 댄 채 깍지낀 손 안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처럼 낮게 속삭였다.

“생각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기다리겠어요. 좋다면, 그냥 나를 안아요.”

그리고 율리아나는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았다.

오스발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공주가 입고 있는 얇은 블라우스와 바지는 그녀의 떨림을 숨김없이 그의 가슴에 전달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과 배, 그리고 허벅지에 닿아 있는 공주의 뒷모습은 작고, 가냘프고, 부드러웠다.

오스발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머리카락을 묶어올리고 있었던 공주는 목 뒤에 닿는 그의 입김에 목을 떨었다. 그때 오스발의 두 손 이 올라왔다. 그 손은 공주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오스발은 공주를 살짝 밀어내듯이 하며 뒷걸음질쳤다.

율리아나는 등으로 닿아오던 오스발의 느낌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녀는 두 손을 천천히 내렸고, 그리고 눈을 떴다. 여름의 햇살은 수면 위에서 빛 의 그물이 되어 파도치고 있었고, 테라스는 여전히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얗다. 그리고 그 테라스 위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스발의 그림자와 겹 쳐져 있던 그녀의 그림자는 이제 고독하게 홀로 서 있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약간 비틀어 오스발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 머리 부분은 그녀의 발뒤 꿈치 조금 뒤쪽에 너무 선명해서 잘못 떨어진 얼룩처럼 고요히 누워 있었다.

율리아나는 그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거절인가요?”

그림자가 대답했다.

“예.”

율리아나의 목이 더 돌아갔고 그 목을 따라 움직이듯 몸도 뒤로 돌았다. 그림자를 따라가던 율리아나의 시선은 곧 오스발의 발끝에 도달했고 율리아 나는 그 위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세기의 신부로도 안 되는군요.”

“배에 타시죠, 공주님.”

“언젠가 말했죠. 레보스호는 키 드레이번에게 공격당했고 다림 역시 노스윈드 해적에게 공격당했고 팔라레온과 록소나, 다케온은 휘리 노이에스에 게 공격당했어요. 휘리 노이에스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였죠.”

율리아나는 자신이 휘리를 언제 그렇게 만들었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오스발 역시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언니로 하여금 그 남편을 잃게 했어요. 그건 다른 여자들이 잃어버린 남편과는 달라요. 그녀들의 불행도 불 행이겠지만, 우리 언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언니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 준 남자를 잃은 거지요.”

“우연의 일치들입니다. 죄의식을 느끼실 필요가…..”

“지금 나 손에 닿는 모든 고민거리를 수집한 다음 거기에 ‘내 탓’이라는 꼬리표 붙여가며 피학적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에요, 발.”

“예.”

“난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해왔다고요. 그런데…

율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한 채 오스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오스발의 얼굴은 이 뜨거운 한낮에도 서늘한 그림자 속에 고요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왜 당신만은……?”

오스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공주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몸을 돌렸다.

“돌아가서 전해요. 율리아나 카밀카르는 배에 타지 않고 라트랑에 남겠어요. 발도 로네스 경에겐 율리아나 공주가 기나긴 도피행에서 얻은 피로와 병 때문에 긴 항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는 답신을 보내도록. 물론 그녀는 육신의 고통에 더하여 그 지아비를 조속히 만나볼 수 없다는 슬픔 때문 에 더욱 괴로워한다는 말을 적어보내는 편이 좋겠죠. 그리고 서 슈마허에겐………… 포도주 한 상자 구입하라고 하세요. 발도 로네스 경에게 보내는 서신 편에 같이 보내도록. 아직 뵙지 못한 나의 주인께, 라고 적어서.”

그녀의 등뒤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주는 잠시 후 테라스에 홀로 남았음을 알게 되었다.

율리아나는 테라스 끝으로 걸어가 그 가장자리에 앉았다.

뜨겁게 달구어진 돌 위에 조심스럽게 앉은 공주는 발 아래에서 물결치는 바닷물을 내려다보았다. 테라스의 돌기둥들은 투명한 바닷물에 파르스름하 게 녹아 흔들리고 있었고 가끔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가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나는 오랜 시간 바닷물을 들여 다보았고, 마침내 수면 위에 어린 그녀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한껏 동정했다.


아침 새들의 비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밤의 냉기는 이슬 위에 보석으로 결빙되는 고요한 아침. 숲 사이를 휘감아도는 희뿌연 안개가 풀잎을 적 시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말발굽이 풀잎을 쳐 이슬을 떨어뜨렸다. 이슬은 반짝거렸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진다.

저벅저벅.

안개 사이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씩씩하면서도 아련하다. 우윳빛의 장막 속에서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되어 움직이던 군단은 이윽고 숲 가장자 리로 빠져나왔다. 안개는 아직도 그들의 발 근처를 휘감아 돌고 있었지만 움켜쥔 창과 방패는 이제 날카로운 빛을 뿜는다. 군단은 계속해서 안개를 헤치며 전진한다.

젖은 풀잎들이 어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비비적거리기를 한참, 안개 저편에서 웅장한 성벽이 떠올랐다.

짧고 빠른 신호가 오가고 나서 군단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포병들은 미리 약속된 위치로 대포를 이동시켰고 궁수들 역시 넓게 트인 자리에 서서 활 시위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말에 올라탄 기사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사들 중 한 명이 바이저를 들어올렸다.

기사는 성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벽은 충분히 웅장했지만 아직 건설중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반쯤 쌓인 흉벽이나 기중기 등의 모습이 보였 고 어떤 부분은 다른 곳의 절반도 되지 않을 높이였다. 그나마 완성된 곳은 성문이 있는 정면뿐이었고 그 위쪽으로는 펄럭이는 깃발들이 정연하게 꽂 혀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기사는 깃발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기사는 푸른 바탕에 포효하는 검은 사자의 모습이 새겨진 깃발을 발견했다. 기사, 서 소사라는 이맛살 을 찌푸리며 말했다.

“흑사자기를 걸어놓고 있군.”

서 소사라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와 말을 나란히 하고 서 있던 서 기리우 역시 성루 위에 게양된 흑사자기를 보고 있었다. 소사라 경의 시선을 느낀 서 기리우는 안장 옆에 매달아둔 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자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소.”

“기대하지. 하지만 먼저 말은 해봐야겠지.”

서 소사라는 다른 기사 한 명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기사는 들고 있던 창을 땅에 꽂고는 비어 있는 오른손을 위로 들어올린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초원을 가로질러 달린 기사가 성벽 아래에 도달하자 드디어 성루 위에도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명뿐이었고, 키 큰 사내였다. 기사는 비어 있는 오른손을 한번 더 치켜올린 다음 성벽 위쪽을 향해 외쳤다.

“나는 다벨 육군 제8군단 사령관 대행 소사라 림파이어의 사절 랜달 쥬마다! 그리고 내게 부여된 권한으로 회담을 요구한다!”

키 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폴라리스 평의회 의장 하리야 헌처크다. 회담에 동의한다. 용건은?”

“귀국으로 도주한 사트로니아 패잔병의 인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사트로니아 패잔병의 신병 인도가 이행된 상황에서 평화회담을 요구한다. 불응할 시에는 귀국 역시 다벨의 적으로 간주될 것임을 경고한다.”

“그 요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 랜달. 대신 내 조건을 말하지. 다벨에 억류된 사트로니아 포로 전원을 석방하고 현재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다벨 외 땅에서 다벨군 전부를 철수시켜라. 그리고 사트로니아와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에 그들이 요구하는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라. 그리 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하리야를 올려다보고 있던 서 랜달은 버럭 화를 내었다.

“이 무엄한 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서 랜달. 사절의 의무를 망각하지 않도록.”

서 랜달은 격하게 씨근거렸지만 어쨌든 입을 다물었고 하리야는 옆을 흘끔 바라보았다. 흉벽 안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사내가 하리야에게 노스윈드 함대식(혹은 오닉스식) 손짓을 보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끄십시오.’

하리야는 속으로 한숨을 쉰 다음 생각나는 대로 요구 조건들을 주워댔다.

“볼지악 자작 휘리 노이에스의 작위와 권한을 모두 박탈한 다음 폴라리스로 압송하라. 그리고 다벨이 그 이웃국가들에 저지른 죄에 대해 참회하는 의미에서 발랑스 공작은 펠라론으로 가서 법황께 고해성사를 받고 죄사함을 받도록 하라. 우정으로써 팔라레온 해방군을 파견한 사트로니아의 높은 뜻을 기려 사트로니아에 전몰 위령비를 건설할 대금을 지불하라. 그리고 다벨 8군단이 팔라레온을 침입한 4월 37일을 공식 기념일로 제정하라. 매해 그 날이 오면 다벨 내 전 교회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의 장병들에게 바치는 미사를 봉행하라. 매해 6월 33일, 즉 폴라리스의 건국일에는 귀국의 교회와 수도원에서 빈자와 병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특별 미사와 봉사 활동을…………”

서 랜달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 하리야 헌처크! 지금 그 말들을 요구 조건이라고 내세우는 건가? 회담을 고의로 파탄내려는 거라면 짤막하게 말햇!”

하리야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은 적당히 끝내고 싶다네, 친구. 하리야는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그때 드디어 그 가 기다리던 손짓이 돌아왔다.

‘계산 끝냈습니다!’

하리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흉벽을 짚었다.

“알았다. 짧게 말하겠네, 서 랜달. 가서 이렇게 전하게.”

“무슨 말을!”

“자네들이 배치해 둔 대포 주위에서 병사들을 치워라. 환영사절단을 보낼 테니.”

서 랜달은 잠시 눈을 껌뻑이며 하리야를 올려다보았지만 하리야는 그저 웃기만 했다. 서 랜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다시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간 서 랜달은 서 소사라 앞에 멈춰 섰다. 소사라는 서 랜달의 표정을 보며 의아한 듯이 질문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어떻게 되었나?”

“글쎄요. 회담에 응한 것은 평의회 의장인 하리야 헌처크였습니다. 제가 말한 요구 조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참 주워섬기다가 이렇게 말 했습니다. 대포 주위에서 병사들을 치우라고…………”

서 소사라와서 기리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벽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들의 대포를 바라보았다. 배치를 끝낸 8군단의 대포들은 성문을 향해 포구를 고정시키고 있었고 그 모습에서 위험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원 너머 저 멀리 성벽 위에서 갑자기 대포들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 다. 서 기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 말하려 한 순간, 서 소사라는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모두 조용히 해봐!”

서 기리우와 서 랜달, 그리고 주위의 다른 기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낮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휘리리리 -.

순간 서 소사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목청껏 외쳤다.

“제기랄, 포병들! 모두 대포 주위에서…………!”

서 소사라의 말은 중간쯤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숲에서 날아오르는 까마귀떼처럼 갑자기 성벽 저편의 하늘로부터 80개의 검은 점이 솟구쳐올랐다. 그리고 수백 개의 벼락이 한꺼번에 내리꽂히는 듯한 광포한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쿠와앙쾅쾅!”

기사들과 다벨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충격음은 금속 투구 속에 있는 그들의 귀를 사정없이 유린했고 그들 중 일부는 투구를 벗 어 팽개치다가 말 위에서 떨어졌다. 말들 역시 기겁하여 발길질을 해대었기 때문이다. 고삐에 매달려 가까스로 낙마하지 않은 서 소사라는 재빨리 주 위를 둘러보았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던 대포들은 모두 폭풍이 지나간 뒤의 숲의 나무들처럼 사방팔방으로 구르고 있었고 정 통으로 명중당한 어떤 대포는 내부의 장약이 폭발하여 끔찍한 화염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피범벅이 된 포병들이 구겨진 쓰레기처럼 나뒹 굴고 있었다.

소사라는 헐떡거리며 비명처럼 외쳤다.

“강철의· 레이디!”


하리야는 숨막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여!” 

그러자 그의 옆에서 쾌활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하! 그렇게 착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전 주님이 아니라 그레고리올시다, 하리야 선장님!”

그랜드파더호의 포수장 그레고리는 이를 다 드러낸 큼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약간 불경스러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엄청난 관측을 해낸 그레고 리에겐 거만해질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을 것이다. 하리야는 더듬거리며 뭔가 치하의 말을 하려 했지만 그레고리는 어느새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초탄 명중! 그대로 쏴라!’에 해당하는 깃발 신호가 빠르게 허공을 갈랐고, 그러자 저 멀리 다림 만에 떠 있던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에서는 포수들의 환호가 울려퍼졌다. ‘네 단점은 너무 잘났다는 거야!’에 해당하는 환호들로 서로를 칭찬하며 포수들은 신속하게 재장전에 들어갔다. 그레고 리가 지정한 대로의 장약이 투입되고 그레고리가 지정한 대로 사격각이 설정된 다음 심지에 불이 붙었다. 다림 앞바다에서 다시 80개의 불기둥이 날 아올랐다.

성벽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다림 만을 바라보고 있던 두캉가 선장은 불기둥이 날아오른 순간부터 가슴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포환들은 다림 시가지 바로 위를 통과하고 있었고 그 중 어떤 것은 다림 교회의 높은 종탑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80발의 포환들은 모두 짧으며 격렬한 여정 을 무사히 마치고 성벽 위를 서둘러 지나갔다. 그러곤 초원 저편의 다벨군에 불벼락이 되어 떨어졌다.

“쾅쾅콰아앙!”

말들은 정신착란을 일으킬 듯 발광하고 있었고 병사들 역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사방으로 달렸다. 다케온 공격 당시 대포가 모조리 파괴될 정도 의 사격을 직접 펼쳐보였던 8군단도 이런 무지스러운 사격에는 얼이 빠졌다. 흙과 풀, 바위 등이 잿더미처럼 흩날렸고 그 틈틈이 사람과 말과 대포가 소용돌이쳤다.

두 번째 포격이 끝나자 정적이 찾아들었다. 서 소사라는 넋빠진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 2회, 총 160발의 포탄이 쓸고 지나가자 8군단의 대포 중 성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포들은 모조리 우그러지거나 두 동강나거나 깨져버렸 고 곳곳에서 폭발을 일으킨 장약들이 불쌍한 8군단병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소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화재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래서 사격이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다벨 진영은 전쟁터 같았다. 낙마한 서 기리우는 땅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뭐라 중얼거리 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강철의 레이디를 모든 땅과 바다’에서 사용 금지시키지 않은 퓨아리스 3세를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서 소사라는 일단 부상병들을 빨리 운반하도록 명령했다. 불 속에 있는 화약들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당장 화재를 진압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백부장들 역시 혼이 나가버린 상태인지라 서 소사라는 직접 말을 달리며 명령을 외쳤다.

“불 주위에서 비켜! 부상병들을 빨리 옮겨라! 백부장들, 백부장들! 제기랄, 악마를 불러내어 네놈들을 튀겨줄 테다. 너희들은 8군단의 백부장이다! 정신들 차리지 못하나!”

고함을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고 심지어 발길질까지 해대며 가까스로 지휘 체계를 복구한 서 소사라는 서 랜달을 찾았다. 서 랜달 역시 방금 귀신과 의 딥키스를 마친 듯한 얼굴로 흐느적거리고 있었기에 서 소사라는 그의 이름을 몇 번씩 불러야 했다.

“서 랜달!”

“예, 예? 예.”

“서 랜달! 가서 말해! 우리는 물러갈 테니 사격을 중지하라고. 빨리!”

“아, 아, 알겠습니다!”

서 랜달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성벽을 향해 내달렸다. 록소나 기사들도 감탄할 만한 속도로 내달린 서 랜달은 초원 중간쯤에서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

“멈추시오! 사격을 멈춰! 멈추라고!”

사격은 이미 중지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은 어떤 의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서 랜달과 8군단 전체의 공포심을 표현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공 포심을 아낌없이 표출한 서 랜달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성벽 아래에 멈춰 섰다. 하리야는 주의 깊게 느긋한 표정을 유지하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 았다.

“우리 환영사절단이 마음에 드셨는지, 서 랜달?”

등자에 발을 얹은 이래 최고 속도를 낸 데다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던 서 랜달은 숨이 가빠 곧장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씩 씩거리며 하리야를 올려다보았고 하리야는 빙긋 웃었다.

“부족하면 좀더 보내줄 수도…………”

“물러가겠소!”

“응? 뭐라고 했나?”

“물러가겠소! 그러니 쏘지 마시오! 이대로 물러가겠소!”

하리야는 그제야 웃음을 지운 다음 진지하게 말했다.

“잘 듣고 그대로 전해라, 서 랜달. 되도록 대포를 노려 쏘았지만 그래도 부상병들이 발생했고 그 점에 대해선 분명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부 상병들을 옮길 시간을 주겠다. 그리고 위급한 환자가 있다면 우리 쪽 의료 시설에 수용해 줄 수도 있다. 포로 대우로 말이야. 하지만 지금 있는 위치 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다가오면 이번엔 병사들을 노려 쏘겠다.”

서 랜달은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쳐지는 모양이었다. 하리야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유예 시간은 모레 아침까지로 한다. 모레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폴라리스 주위에서 완전히 사라져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폴라리스 대 다 벨의 회담이 필요없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일 그런 것을 하게 된다면 그 시간과 장소와 방식은 우리가 결정한다. 알겠나?”

서 랜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야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보도록. 쏘지 않을 테니 마음놓고 부상병들을 옮겨라.”

서 랜달은 황급히 돌아갔다. 그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하리야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두캉가 선장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놈들 중에 뱃놈이 없다는 건 참 다행이었어.”

하리야는 씩 웃었다. 아무리 그레고리의 관측이었다 하더라도 세 번째 사격은 위험했을 것이다. 터릿 갤리어스는 물 위에 떠 있는 배이며, 따라서 아 무리 닻으로 고정시켜 두었다 하더라도 배 자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캉가 선장은 코를 쓱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쩝. 아무래도 대포를 노린 건 도박 아닐까, 하리야?”

“예?”

“병사놈들을 쐈어야 했던 거 같은데.”

“그 말도 맞습니다만 병사들을 쐈으면 공포보다 분노가 더 커져서 달려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골치아팠겠습니까.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이 성에 대포를 쏘아대기라도 한다면……”

“하긴, 그렇군. 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더 못 쏜다는 거 알아채면 어쩌지?”

“괜찮을 겁니다. 아까 그 기사의 얼굴 못 보셨지요? 익사한 시체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겁을 줬으니 눈치 채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아, 참..”

“예?”

“축하하네!”

두캉가 선장은 큼직한 손을 위로 들어올렸고 하리야 선장은 공포어린 눈빛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두캉가 선장?” 

허공을 가르며 내려쳐진 그 커 다란 손바닥은 하리야의 어깨를 강타했다. 철썩! 속으로 비명을 삼키는 하리야를 향해 두캉가는 푸짐하게 웃어보였다.

“폴라리스 최초의 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뒀네! 축하받을 일이야. 잔치를 벌여야지? 무하하하!”

“전쟁… 이오? 하하, 뭐 최초 포격 후 2분 만에 항복을 받아낸 것이니, 엄청나게 짧은 전쟁이군요.”

그리고 하리야는 어깨를 쓸어만지며 성벽 위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길이 잘 든 갑옷을 입고 침착하게 서 있던 노장군은 저 멀리 다벨군의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야는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에 대해 궁금해하며, 동시에 그런 것을 궁금하게 여기는 자신을 창피스러워했다. 어쨌든 그들은 노장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던 8군단을 단 2 분 만에 격퇴했던 것이다. 그때 하리야의 시선을 느낀 노장군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 곁에 남은 장군, 바스톨 엔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음으로써 하리야를 더욱 창피하게 만들었다.

“축하합니다. 하리야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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