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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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3화


이루미나는 고함을 지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노력은 성공했고, 그래서 후작 부인은 불 같은 노성 대신 차가운 경멸을 말할 수 있었 다.

“당신에겐 우리나라의 최신예 군함과 300여 명의 정예 라트랑 해군이 있었어요. 스리우드 선장. 그런 당신이 고작 4명이 탄 스쿠너 한 대를 추적하 지 못했다는 말을 내가 납득해야 하나요?”

스리우드 선장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 뱃일을 모르는 보통 여자들에게 듣는 핀잔이 아니다. 바다의 공주, 해양대국 카밀카르의 둘째 공주였던 이루미나에게 듣는 추상 같은 질책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스리우드 선장은 약간의 억울함도 느꼈다. 바다의 공주라면 거대한 롱 갤 리어스를 움직이는 것이 날렵한 스쿠너를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며, 더군다나 그 날렵한 스쿠너에 비바람을 내키는 대로 불러대는 마법 사가 타고 있다면 추적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적은커녕 제대로 접근도 못해 본 채 귀항을 결정해야 했 던 스리우드 선장은 변명을 말할 염치가 없었다. 그리고 이루미나 역시 더 이상 그를 나무라진 않았다.

이루미나는 피로한 얼굴로 손을 내젓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후작 부인은 가신들과 관리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덕분에 회의실 안에는 누가 더 불쌍해 보일 수 있는지 경쟁하는 듯한 모습의 라트랑 각료들만이 남게 되었다.

밖으로 나온 후작 부인을 본 시녀들이 재빨리 다가섰다. 복도에 선 채 잠시 호흡을 고르던 이루미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율리아나는?”

“산책로에 계실 겁니다.”

“오스발과 함께 나갔나?”

“아니오. 홀로 나가신 듯합니다.”

“거기로 가자. 그런데 그러면 오스발은 어디 있는 거지?”

시녀들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이루미나는 산책로 중간쯤에서 오스발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다.

“오스발?”

산책로를 걸어가던 오스발은 고개를 돌렸고 등뒤에서 다가오는 후작 부인과 시녀들을 보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후작 부인은 인사를 받은 다 음 질문했다.

“유리에게 가는 건가?”

“예, 마님.”

“그 애가 불렀니?”

“아니오. 그냥……”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오스발은 다시 고개를 숙여보인 다음 이루미나의 시녀들 조금 뒤에서 걸었다. 후작 부인의 시녀들은 모두 예법을 익히기 위해(혹은 후작가를 드나드는 청년들 중에서 신랑감을 낚아올리기 위해) 후작가에 봉사하고 있는 양가의 규수들이거나 봉급을 받는 평민들이었으므로 노예인 자신은 그 뒤를 따라야 한 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라트랑의 귀빈인 율리아나 공주의 노예인 그는 후작 부인의 사용인들보다 결코 낮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이루미나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을 뿐 다시 발걸음을 뗐다.

해송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걷자 곧 퍼걸러가 나타났다. 그리고 퍼걸러의 돌의자에는 멍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미 녀가 있었다. 철없는 어린 시녀 한 둘이 그 모습에 작게 탄성을 질렀지만 곧 나이 많은 축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율리아나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룸 언니?”

이루미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퍼걸러에 들어섰다. 그때 시녀들 뒤에 서 있던 오스발을 발견한 율리아나가 낮게 말했다.

“오스발? 어머, 잘됐네요.”

이루미나와 시녀들의 시선이 전부 오스발을 향했다. 오스발은 공주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고 율리아나는 느릿하게 말했다.

“내 방 책상 위에 서신들이 있어요. 서 슈마허에게 좀 갖다주겠어요? 서명해 달라고 가져온 건데 서명 끝내고 깜빡 잊었어요. 책상 위에 있는 편지 전부 가져다주면 돼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돌아와서 보고할 필요는 없어요. 사이드 테이블에 디캔터 있으니까 그거나 마시면서 쉬고 있어요. 서 슈마허가 사온 것에서 내가 살짝 빼돌린 거 죠. 나 마실 건 남겨둬야 해요?”

오스발은 소리 없이 웃은 다음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이 다시 산책로 저편으로 사라지자 이루미나는 돌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녀들은 방 해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섰다.

이루미나는 동생의 얼굴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예야, 애인이야?”

“비슷한 거 아냐? 사랑하는 사람은 노예로 만들거나 노예가 되어줘야 된다던데.”

“설마, 좋아하니?”

“왜 찾아왔어?”

이루미나는 동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율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송림 사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후작 부인은 동생의 옆얼굴 을 향해 말해야 했다.

“이루미나호가 돌아왔어, 유리.”

율리아나는 다시 언니를 돌아보았다. 돌탁자 너머로 손을 뻗은 율리아나는 이루미나의 손을 꼭 쥐었다.

“못 잡았구나?”

“응. 그리고 내 가슴은 끔찍한 생각들로 넘치고 있어.”

“끔찍한…… 생각이라니?”

“그 스리우드 선장의 배후에 누가 있을지 모른다, 후작은 없어지고 석녀인 후작 부인만 남았으니 이 기회에 라트랑을 접수하고픈 누군가가. 그래서 그는 스리우드 선장으로 하여금 고의로 에름을 놓치게 했다……..”

언니의 처연한 얼굴을 보던 율리아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룸 언니는 석녀가 아냐. 아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더라도 후작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실 거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 끔찍한 생각 하지 마. 스리우드 선장? 그래.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키는 남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뱃사람이고 세실은 마법사란 말이야. 게다 가 그 배는 3L의 배라면서?”

“응.”

“그러니까 못 잡은 거야. 그러니까 그런 무서운 상상은 하지 마. 응?”

율리아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루미나의 옆에 앉은 공주는 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걱정하지 마. 키는 바보가 아니야. 그 자는 후작님의 가치를 무시해 버릴 사람이 아냐. 사람들을 인정해 줄 줄 아니까 친절하다고 해야 할까? 분명 히 몸값을 요구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비록 대드래곤에게 던져줄 재물로서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키에 의해 가치 평가를 당해 본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공주는 자신의 말에 강한 확신을 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이루미나에게까지 전달되지는 못하는 듯했다. 이루미나는 약간씩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유리. 난 말이야, 내 눈으로 후작님을 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더군다나 노스윈드를 믿으라니.. 그건 정말 어려운 말이야.”

“믿어도 돼.”

“응?”

“키 드레이번은 믿어도 돼.”

이루미나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동생의 소담스러운 머리카락뿐,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바다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를 믿으라고? 네 말마따나 침착하게 돌아버린 제국의 공적 제1호를?”

“오늘 진 태양이 내일 아침 다시 떠오를 것을 믿고, 삶의 끝에서 반드시 죽음이 찾아올 것을 믿고, 돌바닥에 달걀을 던지면 깨질 것을 믿어?” 

“뭐?”

“그걸 믿는다면, 키를 믿을 수 있을 거야.”


강물 위에 떨어진 이즈러진 달 위로 물결이 조용히 흐른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손은 강물을 조심스럽게 떠올렸다. 덕분에 강물 위에 떨어져 있던 달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강가에 엎드려 물을 떠마시던 파킨슨 신부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입가를 훔쳤다.

눈꺼풀을 두드리는 달빛을 느끼고 눈을 뜨는 것은 여행에 익숙해진 것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마차 때문에 여행이 더 쉬워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미리온 산맥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한밤중에 눈을 뜬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싱긋 웃으며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약간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신부님 당신. 그 강물 드셨소?”

“아, 데스필…………!”

고개를 돌리던 파킨슨 신부는 갑자기 얼어붙고 말았다. 휘영청한 달빛은 바지춤을 추스르고 있는 데스필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신부의 머 릿속에 꽤 끔찍한 상상 하나가 영글었다. 파킨슨 신부는 황급히 강물을 돌아보았다가 데스필드를 쳐다보았고 데스필드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웨에에엑!”

잠시 후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건 장난이었다고 고백했다. 본인이 왜 강물에 소변을 보겠느냐, 심심해서 해본 장난이다라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파킨슨 신부는 계속해서 침을 퇘퇘 뱉어서 데스필드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자식아, 이런 장난이 재미있냐? 재미있어?”

“아, 사실은 재미있수.”

“썩을 놈……!”

“그만 난리 피우고 똑바로 앉으쇼, 신부님 당신. 달빛이 그윽하지 않소? 창피한 줄을 아셔야지.”

파킨슨 신부는 으르렁거렸지만 그의 품성에서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남이 말하는 진실을 부정하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신부는 데스필드 의 말대로 향기로운 달빛임을 인정하며 편하게 앉았다. 데스필드는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쟀다.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나고 나서 데스필드는 푸르스름한 밤하늘로 담배 연기를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잠시 강물 위로 달빛 흐르는 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쓰다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안에는 정확히 뭐가 있소, 신부님 당신?”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데스필드는 파이프를 든 손을 무릎 위에 던져놓고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펠라론 게이트 안쪽 말이오.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긴 천당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라는 뜻이지?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그래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도 말하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 당신이면 이 끔찍한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어할 리가 없고, 그럴 자격이 없는 당신이라면 감히 천국에 발을 들여놓은 죄로 박살 이 날 테니까. 그야 믿거나 말거나지만 확실한 것은 보통 당신들은 앞쪽의 위험보다는 뒤쪽의 위험을 더 무서워하더라는 점이오.”

파킨슨 신부는 껄껄 웃었다.

“너도 그렇게 믿냐?”

“안 믿어. 당신들이 그렇게 말할 뿐이지 성직자 당신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거든.”

“세상의 풍문은 믿을 게 못 되지.”

“그래도 당신은 질문을 위해 그곳으로 가는 거 아니오. 그럼 역시 그곳은, 거기로?”

파킨슨 신부는 한쪽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팔을 올렸다. 그러곤 자신의 손등 너머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자세로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래. 어쩌면 너는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넌 장소보다는 여정에 더 관심이 많은 패스파인더고, 그러니 장소라는 것의 속임수에서 자유로울지도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이슈?”

“천국은 보통 하나의 장소로 생각된다. 그곳이 하늘 너머에 있든 어디에 있든,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기기묘묘한 곳에 있든지 간에 보통 사 람들은 그곳을 어떤 장소, 그러니까 우리 주님이 계시고 착한 천사들이 착한 이들과 함께 오손도손 사는 어떤 ‘곳’으로 생각하지.”

“흐음. ‘곳’이라.”

“하지만 그건 어떤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이라는 말도 부정확하긴 마찬가지다. 사람은 장소, 즉 존재의 기준점을 빼 놓고 생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이 사용하는 말에는 모두 ‘장소’의 뉘앙스가 강력하게 스며 있지. 참 어렵구나. 엘핀으로는 멋지게 표현된다고 들었다만 나는 엘핀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점을 생각해 보거라. 사람들은 왜 그런 장소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글쎄? 여기가 마음에 안 드니까 저기겠지.”

파킨슨 신부는 놀란 얼굴로 데스필드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정확하다! 놀랍구나. 패스파인더라서 그런 건가? 그래. 네 말대로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마음에 드는 세상, 즉 천국을 생각하는 거란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여기가 마음에 들면 저기로 가겠느냐?”

“아니겠지.”

“여기를 사랑하면 저기를 떠올리겠느냐?”

“아니. 음? 잠깐. 그 느끼한 눈빛은 당신 말 속에 든 무엇을 건져내보라는 강압인 거요? 본인은 그런 귀찮은 것 싫으니까 그냥 말하쇼.”

“……망할 놈. 좋다, 듣거라. 이곳을 사랑하면 다른 곳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그렇다면 이곳을 끝없이 사랑한다면 천국이 필요없 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니까.”

“어라?”

“그래. 너도 많이 들어본 것일 게다. 나의 원수 중의 원수이신 주여 나의 고난에 고난을 선사하시는 주여 들어봤지? 그게 이 세상이 주는 고통과 두 려움에 지친 인간의 주님에 대한 원망인 성싶으냐?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의 경건한 자기 고백이다.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하 고, 더 사랑해야 한다. 죄는 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은 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벌떡 일어났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데스필드는 뒤쪽을 흘끔 바라보았고 마차에서 나와 그들을 바라보고 있 는 핸솔 추기경의 모습을 발견했다. 데스필드를 본 핸솔 추기경은 손가락을 입 앞에 세워보였다. 데스필드는 입을 다문 채 다시 파킨슨 신부를 돌아 보았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파킨슨 신부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별을 향해 설교하듯 말하고 있었다.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그토록 많은 성인들이 순교는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자살은 하지 않은 이유가 뭐겠느냐? 왜 하루라도 빨리 천국으로 가 버리지 않은 것이겠느냐? 천국은 가 닿는 어떤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에 의해 분리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지어놓으신 이 많은 것들을 봐라! 그 분은 우리들이 사랑할 수 있는 이토록 많은 것을 주셨다. 비록 이것의 주인은 따로 있을지언정 이것을 최초로 만드신 이의 뜻은 변할 수 없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을 한없이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그럼 ・・・ 펠라론 게이트 너머엔 뭐가 있는 거요?”

“게이트의 너머는 바로 이곳일 것이다.”

“뭐요?”

“정확히는 말할 수 없어. 하지만 게이트는 통과만 상징할 뿐이지 구분이 아닐 거야. 알겠느냐, 데스필드? 너에겐 목적지라든가 출발 장소 같은 것이 의미가 없지 않느냐.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길은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분하는 것이기도 하다. 길의 이쪽은 시작이고 저쪽 은 끝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너에겐 그런 구분이 없지? 마찬가지야. 펠라론 게이트 너머는 바로 이곳일 것이다.”

“그럼 왜 들어가려는 거요?”

“인마! 그러면 너는 왜 패스 위에서만 사냐. 껄껄껄!”

데스필드는 싱긋 웃었다. 파킨슨 신부는 호흡을 고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찾는 것 또한 이곳에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서 나는 펠라론 게이트를 통과할 필요가 있을 게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가는 거야.”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이프를 비웠다. 그리고 파이프를 앞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뒤쪽을 살짝 바라보았다. 핸솔 추기경의 모습은 다시 사라 지고 없었고 그가 본 것은 닫히기 직전의 마차문뿐이었다. 그때 신부가 말했다.

“그래서 질문인데, 이제 펠라론이 얼마나 남았지?”

“글쎄. 넉넉잡고 닷새 안에는 도착할 거요.”

“닷새? 그렇게 가깝나?”

“마차로 이동하니까 속도가 붙는 거잖수. 축하하오.”

파킨슨 신부는 크게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곤 그 감탄을 주님께 바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달빛 쏟아지는 가운데 경건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부의 모습은 참신앙의 정화 같은 모습이었지만 데스필드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부 옆에서 다리를 뻗고 맘 편 하게 앉아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 같은 것은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데스필드는 손을 당겨 허리춤에 매달아둔 칼집을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벌쳐에게 받은 스완 대거가 들어 있다. 칼날을 만져볼 수야 없기 때문에 데스필드는 칼집 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벌쳐는 왜 신부를 도우라고 말했던 것일까.

느릿하게, 그의 머릿속으로 이것은 그가 받아들인 패스파인딩 중 가장 기묘하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펠라론 게이트로의 패스파인딩이라.’

그러나 데스필드는 세상의 움직임, 혹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움직임들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분석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숨에 분석되는 일이 아닌 경우엔 기본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벌쳐가 왜 그런 의뢰를 한 건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분명히 단번에 분석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그만 집어치우 라는 기분이 되어 풀밭에 드러누웠다.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가 풀밭에 뒹굴든 어쨌든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로 계속 기도성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달빛 속에 듣는 그 나지막한 기도성 은 왠지 데스필드에게 낯익은 듯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도스 계곡, 싱잉 플로라.’

그리고 데스필드는 그 이름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름도 떠올렸다. 그는 약간씩 졸면서 계속 생각했다.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 노래의 불꽃 벨로린.’

다시 느릿하게, 데스필드는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부의 나직한 기도성 때문에 졸음은 끝없이 그를 유혹 하고 있었다. 졸음의 파도 속에서 들락날락하고 있던 데스필드는 갑자기 불쾌한 상상을 떠올렸다.

‘어떤 당신의 신에게로의 길을 방해하고 싶은 당신이 있다면?

유혹자, 오도자, 대적(敵)인 지옥의 지배자 당신들.

‘벌쳐 당신은 신부 당신을 도우라고 말하며 스완 대거를 주었다.

칼은 싸움이다. 싸움으로 신부를 도울 것.

‘그렇다면 본인은 이 알량한 스완 대거 하나를 가지고 당신들을 막아야 하나?’

잠시 후 데스필드는 자신이 너무 황당한 상상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건 다 졸음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것 다 지워버리 고 편하게 잠들었다. 어쨌든 악마에 맞서 구도자를 지키는 것은 천사나 성인들의 일이지 패스파인더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해면 위로 안개가 느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높은 파수대 위에서 해면을 내려다보던 레갈로빈졸 항의 파수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날씨는 입출항하는 배에게도 좋지 않겠지만 그의 구미에 도 맞지 않았다. 이런 날씨엔 그의 다리가 더욱 아파왔기 때문이다.

난간에 기댄 채 해면을 바라보던 파수꾼은 무겁게 몸을 돌려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의자에 돌아갔다. 그의 앉는 동작은 1005년 이후로 한결같 이 불안하고 위태롭다. 오른쪽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단지 파수꾼이라고 불릴 뿐이며 그 이름 아닌 이름, 어떤 직업을 나타낼 뿐인 보통명사는 레갈로빈졸 항을 드나드는 뱃 사람에겐 레갈로빈졸 항이라는 고유명사보다 더 익숙하다. 그는 원래 과묵한 선원이었고 다리를 잃은 후엔 더욱 과묵해졌다. 하지만 레갈로빈졸 항 을 드나드는 고참 선원들은 항해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복잡한 해난사고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통일된 모습을 가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당사자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5년 이래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고, 거기엔 이레 밤낮의 폭풍우가 있었으며 갑판을 피로 물들인 반란이 있었고 통로를 가로막고 선 위대한 노예 칼잡이와 끊어진 닻줄과 고속 밀수선과 흑발 미녀 밀항자와 선장의 담배곽이 있 었고 때에 따라선 아흔아홉 눈의 섬과 머메이드와 바닷속의 활화산도 등장하곤 했다………… 그리고 모두들 그 이야기를 좋아했다. 외다리 선원이 높은 파수대 위에 그의 닻을 내린 1005년 이후, 그의 이야기 또한 레갈로빈졸 항에 영원히 닻을 내린 듯했다.

의자에 앉은 파수꾼은 무거운 시선으로 자신의 오른쪽 다리, 정확하게 말하면 잘린 그루터기 같은 오른쪽 허벅지의 일부를 내려다보았다. 1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런 축축한 안개가 끼는 날엔 오른쪽 무릎의 관절염이 도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그런 자신을 비웃던 파수꾼은 갑자기 졸음을 느꼈다.

파수꾼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항구의 동태를 정확하게 보고 있어야 할 파수꾼의 책무에 비춰본다면 이것은 용서받지 못할 근무 태만일 테지만 이런 험악한 날씨에 움직일 배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늙은 고래잡이가 고래의 이동 경로를 육감으로 알듯이 19년 동안 한 자리에서 레갈로빈졸 항을 내려다보고 있던 늙 은 파수꾼은 남해를 오가는 배들의 항로와 움직임 전부를 꿰뚫고 있다고도 말한다. 따라서 파수꾼은 눈을 감고 있어도 어떤 배가 들어오고 어떤 배가 나갈지를 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파수꾼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는 불편한 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빠른 동작으로 일어났다. 난간까지는 목발도 필요없는 거리다. 파수꾼의 왼발이 한번 펄쩍 움직이자 그는 이미 난간을 붙잡은 채 항구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파수꾼의 눈 주위에 가득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안개는 늙은이의 백내장처럼 레갈로빈졸 항을 뒤덮고 있었고 항구의 건물들의 청회색 윤곽 만이 고요히 서 있었다. 하지만 늙은 파수꾼의 귀에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손이 잡아 찢는 것처럼 외해 쪽에서부터 안개가 갈라졌다.

안개 저편으로 아침 햇빛을 받는 바다가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항구 안쪽의 어두운 바다와는 전혀 다른 바다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황금빛 바다의 첨병처럼 다가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배가 다가옴에 따라 안개는 좌우로 갈라지고 황금빛 바다도 점점 안쪽으로 확장되어 오고 있었다.

돛 하나짜리 스쿠너는 마치 대함대와도 같은 장중한 기세로 내항에 들어섰다.

그때쯤 항구 안쪽을 거닐고 있던 사람들이나 안개 때문에 대로 한가운데까지 호객을 나온 부두의 꽃들, 그리고 정박한 배 위에서 삭구를 손질하던 선원들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일손을 놓은 채 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황금바람을 받으며 들어서는 듯했고 전설의 항해자들이나 도피중인 영 웅들이 타고 다니던 배가 저러했던가 싶은 기상으로 당당하게 부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선원들 중 일부는 의아한 시선으로 파수탑을 바라보았 다. 그때 파수탑에서 굵직한 파수꾼의 고함이 들려왔다.

“라이트 – 버드호! 라이트- 버드호가 입항한다!”

대다수의 선원들이 그 함명에 당황했다. 스쿠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함들을 몰고 다니는 바다 사나이들도 로드니 라일름 리드클리프가 만든 이 유명한 스쿠너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멈춰 선 선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자신들이 들었던 함명을 확인했고 저 유명한 라트랑의 쾌속선이 왜 레 갈로빈졸 항에 들어서는지에 대해 짤막하게 토의했다.

그러나 파수꾼의 소임을 마친 파수꾼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감회를 느끼며 의자에 몸을 앉히고 있었다. 청회색 안개를 헤치며 나타난 황금배는 새 로움과 탄생과 변화를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파수꾼은 무거운 피로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개가 사라지며, 이제 19년 동안 계속되던 이야기도 끝나고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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