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4화
세실은 돛대에 기대어 서서 레갈로빈졸 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로 갈라지는 안개의 장막 너머 아름다운 항구가 나타나자 세실은 짧게 탄성을 올 렸다. 키를 잡고 있던 에름 후작은 짐짓 점잖은 체하며 말했다.
“뭐 라트라인보다 아름답지야 않지만…………”
세실은 키득 웃었다.
“멋진 항구죠?”
세실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이 며칠 사이에 바뀐 후작의 모습에서 다시 즐거움을 느꼈다.
올이 굵은 머릿수건으로 훌륭한 머릿결을 감추고 선원 셔츠 한 장을 걸친 채 한손만으로 능수능란하게 키를 다루는 후작의 모습은 일국의 군주라기 보다는 해묵은 보트 조종사였다. 아직까지도 애인 같은 아내와 살고 있어서 그럴까, 후작의 모습은 한 척의 보트를 몰고 사랑을 찾아 항구를 헤매는 청년처럼 보였다. 아마도 3년 전, 홀로 자신의 보트를 몰고 카밀카르의 엔보스 항 앞바다에 나타난 후작의 모습이 저러했을 것이다.
“흐음. 당신에겐 세상의 어떤 항구도 눈에 안 들어올 테니까. 그때 정말 그렇게 외쳤나요, 후작님?”
“예?”
“고독한 뱃사람, 이루미나 항에 이제 닻을 내리려 한다. 입항 허가를 원한다.”
에름 후작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정상의 그런 황당한 방문에 당황해서 급히 출동한 카밀카르 해군들은 아마 울지도 웃지도 못할 심 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유쾌한 선장은 있었다. 그리고 그 선장은 그 순간 일국의 군주에게보다는 젊은 후배 뱃사람에게 말하듯이 말했 다 한다. 세실은 그 선장의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율리아나 항이 아닌가?”
에름 후작은 빙긋 웃고는 3년 전에 외쳤던 말을 반복했다.
“선장님. 벼락이 컴퍼스를 고장 내고 파도가 육분의를 앗아간다 하더라도 뱃사람은 돌아가야 할 항구의 이름을 혼동하지는 않습니다.”
“이루미나 항이군.”
“그렇습니다. 항만세로 내 영혼을 지불할까 하는데, 이루미나 항은 입항을 허락할까요?”
세실은 깔깔거리며 소녀처럼 웃었다. 물론 이루미나 항이 그 항만세에 만족하고 입항을 허가했음은 기왕의 사실이다. 세실은 다시 레갈로빈졸 항을 돌아보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당신처럼 청혼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키는 왜 이곳에 온 거지?”
“청혼하러 왔을 수도 있잖습니까?”
세실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승강구 쪽이었고 그곳에는 어깨에 키의 코트를 걸친 채 파리한 얼굴로 웃고 있는 라이온과 무 표정한 얼굴로 그를 부축하고 있는 키 드레이번이 있었다.
세실은 한달음에 달려가 라이온을 부축하며 말했다.
“라이온! 살아났네?”
“내 방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어떤 국면에선 끝났다고도 볼 수 있지만.”
라이온의 이상한 대답은 세실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라이온은 세실과 에름 후작을 놀라게 만들었다. 라이온은 키와 세실의 부축을 조 용히 뿌리치고는 이물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힘없는 걸음걸이였지만 라이온은 이물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세실은 키 드레이번을 돌아보았지만 키는 아무 표정도 없이 라이온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물에 선 라이온은 뱃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눈앞으로 다가오는 레갈로빈졸 항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레갈로빈졸……….”
그리고 라이온은 고개를 돌려 키를 바라보았다.
“선장님?”
키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라이온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고 키는 키를 쥐고 있는 에름 후작을 향해 말했다.
“부두 오른편으로.”
“오른쪽? 군항으로 말이오?”
“그렇다.”
“당신은 제국의 공적 제1호인데. 아무리 이곳이 레갈루스라도 위험할 거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선 신호가 오면 배를 멈춰라.”
에름 후작은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키의 명령대로 배를 움직였다.
라이트버드호는 매끄럽게 움직여 레갈로빈졸 항의 오른쪽 편, 즉 군함들과 레갈루스 해군사령부 건물이 보이는 라이온 만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에름 후작은 그 만의 이름과 라이트버드호의 이물에 서 있는 사내의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레갈로빈졸 항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 배에 제국의 공적 제1호가 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 했다. 라이트버드는 유명한 배이긴 하지만 그것은 배 자체가 유명한 것이지 고위 인사가 타고 다닐 큰 군함은 아니었다. 당연히 상항으로 들어서야 할 배가 군항 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은 라이온 만에서 네 척의 롱 갤리어스가 출동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네 척의 군함은 물살을 헤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이제 레갈로빈졸 항에서는 항구의 모든 시민들이 달려나와 앞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두려움 과 의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숨막힌 시야 가운데로 네 척의 레갈루스 군함들은 신경질적일 정도로 명확한 전투 대형을 유지하며 라이트버 드호에 접근했다. 한 척의 비무장 스쿠너에 대한 반응으로선 거의 코믹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네 척의 군함에 타고 있는 레갈루스 수 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엄격한 기율 때문에 불평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왜 한 척의 스쿠너에 대해 이렇게 삼엄한 경계 태세를 취해야 되는지 이 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갈루스의 함장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전 라트라인에서 일어난 에름 후작 납치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눈앞의 라이트버드호에 키 드레이번이 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른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군함 쪽에서 정선 신호가 올랐다. 에름 후작은 키의 도움을 받아 돛을 접었고 라이트버드는 네 척의 군함에 포위당한 채 조용히 멈춰 섰다. 에름 후 작은 키의 거동에서 불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키와 레갈루스의 관계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 수도 있 다. 한때는 레갈루스의 사략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던 키 드레이번이니까. 하지만 키는 레갈루스로부터 공여받은 터릿 갤리어스들을 돌려주지 않았고 레갈루스는 그에 대한 응징으로 키 드레이번에게 걸려 있는 현상금의 1/3인 2,000만 데리우스를 내놓았다. 어떻게 본다면 더 험악한 관계라고 할 수 도 있다…………. 그때 정면의 군함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본함은 메넨 산달 경의 지휘를 받는 레갈루스 해군 소속의 지크헤드다. 전방의 함선은 정체를 밝혀라.”
에름 후작과 세실은 키를 바라보았지만 말문을 연 것은 뜻밖에도 이물에 서 있던 라이온이었다.
“나는 라이온 화이어하트 딜레도. 왕국 레갈루스의 왕자, 새벽의 사수다.”
“뭐라고?”라고 외친 건 세실이었다. 에름 후작은 얼빠진 얼굴로 라이온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왕자? 그러면.. 그림자의 왕자?”
그러나 키 는 두 사람의 경악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군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방의 지크헤드호에서 다시 목소리가 돌아왔다.
“돌아오셨습니까?”
“오래간만이군. 메넨 선장.”
“들었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새벽의 사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천천히 흘러가던 라이트버드호는 전방의 지크헤드호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름 후작은 지크헤드호에 타고 있는 메넨 선장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메넨 선장은 약간 슬픈 듯한, 그리고 그리움 같기도 한 표정을 지은 채 라이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엄격한 군인의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예,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동승하신 분들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판에 있는 사람이 전부다. 키를 잡고 계시는 신사분은 라트랑 후작이신 에름 라트랑. 이 레이디는 테리얼레이드의 세실리아. 그리고 여기 이 자 는…………” 라이온은 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디 크레이번이라고 한다.”
세실은 이 두음전환에 살짝 실소했지만 에름 후작은 웃을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가명이라면 차라리 엉뚱한 이름이 나을 것이다. 하 지만 이런 두음전환은 분명히 상대를 윽박지르는 의미가 있다. 에름 후작은 강렬한 호기심으로 메넨 선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메넨 선장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말했다.
“디 크레이번………입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왕국 레갈루스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라이온은 메넨 선장에게 인사한 다음 키를 향해 몸을 돌렸다. 키는 길게 흩어진 머릿결 사이로 라이온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이제, 꺼져라.”
세실과 에름 후작은 다시 당황했지만 라이온은 벌쭉 웃었을 뿐이다. 키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에름 후작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겠지.”
에름 후작은 자신이 무슨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 상심해야 했다. 하지만 라이온은 에름 후작의 자격을 설명하는 대신 팔을 약간 들어보였다. 그 의 셔츠 자락이 벌어지며 붕대에 감긴 상체가 드러났다.
“이 상태로 말입니까?”
키는 험상궂은 얼굴을 한 채 라이온을 노려보았지만 라이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평을 계속했다.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순전히 선장님 때문입니다. 절더러 이 상태로 새벽의 눈동자를 쏘라는 겁니까? 말이 안 되잖습니까.”
“쏘긴 하겠다는 말이군.”
“해고당했으니 저도 밥벌이할 궁리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아, 그러고 보니 묻지 않았는데, 전 이제 해고당한 것 맞지요?”
“멍청한 놈. 다림에서 난 이미 자유호를 버렸다. 네 녀석이 멋대로 자유호를 떠나 나를 따라온 거니 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유호의 갑판장이 아니 다.”
“으윽, 그럼 그 동안 저는 뭐였지요?”
“귀찮은 짐. 몰랐나?”
라이온은 좌절하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다. 키는 부두 쪽에서 다가오는 예인선을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세실과 에름 후 작이 처신의 곤란함을 느끼며 안절부절 못하던 사이, 키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놈이 쏘고 나서 가겠다.”
라이온의 얼굴이 환해졌고, 그래서 영문도 모르는 세실과 에름 후작 역시 세상이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보장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 들이 되었다.
폴라리스 정부 청사에서 개최된 초청 설명회는 총체적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란의 한가운데서 하리야 선장은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다림 시내에 있는 각국 대표부들을 초청하여 다림 외성에서 벌어진 다벨 8군단과의 전투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지금 돌이켜봐도 좋 은 생각이었다. 그 설명회를 통해 폴라리스의 높아진 위상 그들은 무패의 다벨 8군단을 처음으로 혼쭐내 준 세력이었다 -을 확립하고 지금껏 ‘수동적 상호 무시’ 정도로 남아 있던 각국과 폴라리스의 관계를 정식 수교 관계로 발전시킨다는 것이 하리야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가장 열렬한 찬동을 보내는 것은 이제는 피난민 대피소 비슷하게 바뀐 팔라레온과 다케온의 대사관이었다. 팔라레온과 다케온의 구세력들은 종전에 흔히 사용되던 피난처인 테리얼레이드 대신 이제 폴라리스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벨의 승승장구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하던 다른 나라의 대표부들 또한 충분히 유쾌한 기분으로 하리야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사트로니아와의 동맹에 이어 신생국 폴라리스의 두 번째 외교적 쾌거가 될 수도 있었던 이 설명회는, 그러나 하리야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난 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하리야는 그 설명회를 박살내 버릴 결심을 하고 참석한 인물이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 나빴던 것은 그 인물이 다름아닌 ‘다림의 큰누님’이었다는 사실이다.
폴라 대사는 턱을 높이 치켜든 채 날카롭게 말했다.
“하아! 마치 길 가던 처녀를 덮쳐놓고서 그 죄는 바지 속의 그 놈에게 물으라고 말하는 투로군?”
또다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제 각국 대표부원들이 전 노스윈드 함대의 선장들, 즉 뱃사람이 꿈꿀 수 있는 최악의 악몽들을 혼자서 요리하고 있는 폴라 대사의 모습에서 짓궂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또한 폴라 대사가 이 설명회를 박살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설명회장을 웃음판 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임도 분명해졌다.
킬리 선장은 엄격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며 폴라 대사를 향해 준엄하게 말했다.
“폴라 대사님. 부탁드립니다만 공식 석상에 어울리지 않는 어휘들은 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내 어휘가 어쨌다고요, 청년?”
각국 대사들은 다시 환호를 보내었고 킬리는 더욱 수심 깊은 얼굴이 되었다. 폴라 대사는 불과 몇 달 전이었더라면, 그러니까 킬리 스타드가 아직 노 스윈드 해적이었고 이곳이 그랜드머더호의 갑판이었더라면 그녀로선 죽었다 깨도 이렇게 대담하게 ‘청년’ 어쩌고 할 배짱은 없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폴라 대사는 킬리 선장에게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말들은 그런 속마음과는 정반대 로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키 드레이번이라는 이름은 들은 적도 없다는 듯한 태도는 집어치우지 않겠어요, 킬리 스타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도 정도가 지나치면 모욕 이 되니까. 당신네들의 키 드레이번이 라트랑에서 우리 국왕 전하의 사위이자 라트랑의 영주인 에름 라트랑 후작을 납치한 상황에서 당신들은 우리 에게 정식 수교 관계를 요청하는 건가요? 이런 지독한 헛소리는 죽은 내 바깥 양반의 청혼 이후로 처음 듣는구먼!”
근엄한 외교관들은 다시 악동들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더불어 같이 웃기는 했지만 설명회의 진행을 맡은 킬리 스타드로선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말 들이었다.
키 드레이번과 폴라리스와의 관계는 긍정하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키 드레이번과의 관계를 인정할 경우 폴라리스는 제국의 공적 제1호라는 무시무시한 이름도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 드레이번과의 관계를 부정해 버리는 것 또한 선택하기 어렵다. 아직도 그에 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내고 있는 노스윈드 해적들 자유호의 식스 일항사가 대표적이다 — 을 자극할 위험은 접어두더라도 너무 속보이는 거짓말 이라 오히려 역효과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폴라리스로서는 키 드레이번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을수 록 편리하다.
그리고 오늘의 설명회의 중점 내용은 폴라리스가 8군단으로부터 얻어낸 승리였으므로 키의 이름이 거론될 하등의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폴라 대사 는 느닷없이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라트랑에서 일어난 에름 후작 납치 사건을 들고 나와서 그들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끈질기게 키 드레이번의 이름을 거론하며 폴라리스가 내포하고 있는 약점을 계속 후벼대고 있었다.
킬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리야는 추리에 추리를 거듭해 보았지만 폴라 대사가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곤혹스럽기 그 지없는 자리에서 그나마 하리야를 흡족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킬리 스타드가 아직까지 차분한 얼굴을 유지함으로써 그를 내세우기로 했던 하리야의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폴라 대사님. 오늘의 이 자리는 다벨의 비이성적이고 몰염치한 일련의 침략 행위에 대해 폴라리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드리고자 마련 한 자리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사트로니아와의 동맹 관계 수립을 통해 이미 표현되었고, 게다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 던 전투 결과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각자 위대한 고국을 대표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폴라리스의 자세 를 평가하고 모국을 위해 가장 훌륭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와 그 결정을 도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대사님께서 말씀 하시는 사건들은, 물론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논제를 이탈하는 바가 매우 큰 것 같군요.”
폴라 대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젊은 남자는 때때로 젊은 여자보다 훨씬 더 매력적일 때가 있고, 킬리는 바로 그런 식의 부드러운 매력으로 청중을 다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폴라 대사는 그런 킬리를 상대하는 자신에게 불리한 점이 많음을 인정해야 했다. 자칫하면 심술 궂은 할망구로 확정될 위험한 순간임을 잘 파악한 폴라 대사는 주의 깊게, 하지만 겉으론 여전히 쾌활하게 말했다.
“착한 청년이군요, 킬리 스타드.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정확하게 말해 주는군. 그래요, 난 바로 모국을 위한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싶어서 질문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내가 모국에 뭐라고 보고해야 할까요? 폴라리스는 매우 신뢰할 만 한 우방이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 국민들의 존경을 얻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납치해 주는 서비스도 제공해 줄 수 있을 듯합니다, 라고? 어쩌면 우리 국민들은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상관들은 그 말을 탐탁치 않아 할 것 같은데?”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킬리 선장으로서는 외교관이 본국에, 혹은 본국의 관리들에게 가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이런 식의 재담은 절대 구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킬리는 주도권이 다시 폴라 대사에게 넘어갔다는 것 정도는 잘 알 수 있었다.
결국 킬리는 더 이상 회담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원래 이 초청 설명회의 목적인 다벨군과의 전투에 대한 설명은 끝내었기 때문에 킬리는 서 둘러 폐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킬리 선장은 대사들과 대사관 직원들을 재빨리 만찬회가 준비된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원래 하리야의 계획대로라면 각국 대표부로부터 폴라리스의 승리를 축하받고 아울러 새로운 우정의 시작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었어야 할 만찬회는, 결국 실컷 웃고 나서 배가 고 파진 대표부원들이 배를 채우며 폴라 대사에게 쩔쩔매던 노스윈드 선장들을 조롱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폴라 대사는 만찬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각국 대표부원들이 폴라 대사의 흉내를 내거나 하며 웃음을 터뜨리 고 있던 시각, 폴라 대사는 그들 바로 머리 위의 2층에서 책상 너머의 하리야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웃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폴라 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리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하셨습니다, 폴라 대사.”
“너무했다고요?”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좀더 조용한 방법으로 처리하실 수도 있잖습니까. 꼭 우리의 자랑스러운 첫 번째 승리를 온 대륙에 자랑하는 자리를 그렇 게 망쳐놓아야 했습니까? 그것도 다름아닌 다벨 8군단에게 얻은 승리인 것을.”
“그렇게 말하니 미안하긴 하군요. 하지만 내가 좀 떠들었기로 이 아래의 능구렁이들이.”
의자에 앉아 있던 폴라 대사는 오른발 끝을 들어 바닥을 똑 똑 두드렸다.
“사실을 전달하는 소임을 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각국을 대표하는 자들이니까. 그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들의 승리를 정확하게 자기네 나라로 전달할 테지요.”
“그럴 테지요. 그렇지만 킬리 선장이 얼마나 당혹…………”
“킬리는 좀 당해도 싸다는 게 다림 시내의 여자들의 생각이지요. 난 그들을 대신해서 킬리를 응징했고.”
하리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폴라 대사를 쳐다보았다. 폴라 대사는 빙그레 웃었다.
“하긴, 아무리 똑똑한 척하고 잘난 척해도 당신네들이 그런 쪽으로 무딘 것은 당연하겠지. 이봐요, 지금 당신네 노스윈드 선장들이 다림 시내의 처 녀와 과부들의 겨냥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거 모르시지?”
하리야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예?”
“흔히들 하는 말이 있지요. 좀 괜찮다 싶으면 다 옆에 주인이 있다고. 능력 있는 남자들은 꼭 다른 여자들의 차지가 되어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여 기 다림에는 능력 확실한 독신남이 한꺼번에 다섯이나 나타났단 말이에요. 해적이었으니 독신남이 확실하고 건국 영웅인 데다가 바다 사나이라서 닳 아빠진 사교계 샌님들과는 비교도 안 되고. 그런 남자들이 한꺼번에 다섯이나 나타났으니 외로운 다림 여자들이 환호를 올리고 팔짝팔짝 뛰는 거야 당연하잖아요.”
“왜…… 다섯입니까?”
“키 선장과 알버트 선장, 그리고 미안하지만 두캉가 선장이 빠지거든. 아, 혹시 두캉가 선장을 맘에 들어하는 할머니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리야는 섬뜩한 상상을 떠올렸다.
“그럼 오닉스 선장도…..?”
“세상엔 남다른 취미를 가진 여자도 많고 약간 뻣뻣한 남자야 길들여서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많거든.”
“참으로 용감한 숙녀분들이군요.”
하리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폴라 대사는 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킬리 선장은 조그맣고 새카만 여자아이에게 넘어감으로써 다림 여자들을 배신했단 말이야. 아, 그 여자들에겐 그렇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 러니 다림 여자들이 분개하는 건 당연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리야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폴라 대사는 큼직하게 웃었다. 하리야는 침착을 되찾아 말했다.
“반가운 소식(?) 감사합니다. 앞으로 몸가짐에 신경을 좀 써야겠군요.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킬리 선장의 눈을 쑤신 거야 그런 이유가 있 다 치고, 그렇다면 칼은 왜 뽑아든 겁니까? 아까 라트랑 대사의 얼굴 못 보셨지요? 어처구니없어하더군요. 실제로 일을 당한 건 자신인데 왜 당신이 나서냐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 표정을 놓고 보건대 폴라 대사께서는 라트랑과의 의견 교환도 없이 이 일을 감행하신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그래요. 이건 내 단독 범죄지요.”
하리야는 두 손 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임으로써 폴라 대사를 즐겁게 한 다음 말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카밀카르는 무엇을 원하는 거지요?”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시죠, 하리야 선장.”
하리야는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폴라 대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폴라 대사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하리야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그 미 소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미소였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기도 했다.
하리야는 짧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폴라 대사님.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만찬회장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이 건물은 다림 총독부였던 시절부터 익숙하니까.”
“알겠습니다.”
하리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무랄 데 없는 동작으로 폴라 대사를 문까지 배웅했다.
폴라 대사 역시 침착한 동작으로 문을 나섰다. 문을 나설 때까지 폴라 대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작별은 간단한 목례로 끝났다. 문을 닫고 나서 몸을 돌린 하리야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하얀 옷차림의 여인을 발견하고는 약간 당혹했다. 하지만 그녀가 라미라는 것을 알아 차린 하리야는 별말 없이 돌아와 조금 전 폴라 대사가 앉아 있던 의자에 몸을 앉혔다.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발코니에 있었다. 너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커튼 때문에 안 보였겠지.”
하리야는 발코니 쪽을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문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벨로린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휘리 노이에스에게 보내는 신호였겠지요.”
“흐음.”
“그녀의 말대로 이 아래의 능구렁이들은 본 것을 정확하게 전달할 겁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휘리 노이에스에게도 전달되겠지요. 카밀카르의 라 힘턴 3세는 휘리 노이에스에게 추파를, 아니 추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미소 정도는 보내두려고 결심한 겁니다. 당신네들의 골칫거리인 폴라리 스는 우리 또한 싫어한다는 의사 표시인데, 의도가 심히 수상합니다. 만약 카밀카르가 필마온 기사단 대신 휘리 노이에스를 파트너로 삼을 작정을 한 거라면, 그리고 휘리가 그런 카밀카르의 의도를 받아들인다면 우린 앞뒤로 포위당하게 됩니다.”
라미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까지 생각한 거라고 본다면 너무 소극적인 제스처인데.”
“그렇지요. 아직까지 결심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겁니다. 아마도 라힘턴 3세는 율리아나 공주의 라트랑 잔류 결정 때문에 이런 발상을 한 것 같습 니다.”
“당장은 필마온과의 연계가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휘리 노이에스를 떠올렸다 이 말인가?”
“예. 아마도 지금쯤 라힘턴 3세는 필마온과의 결합을 그대로 밀고 나가느냐, 아니면 신흥 세력이자 가시적 성과를 보이고 있는 휘리 노이에스를 선 택하느냐를 놓고 저울질중일 겁니다.”
“뒤쪽을 선택한다면?”
하리야는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율리아나 공주는 저 그린 나이트(green knight)의 신부가 될 테고 결혼식 피로연에서 돼지 대신 도살당하는 건 폴라리스가 되겠지요. 어쨌든 율리아 나 공주는 실로 세기의 신부입니다. 그녀 자신이야 아무 생각 없겠지만 그녀 때문에 골치 아파지는 곳이 한두 나라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