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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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5화


바탈리언 남작은 보고를 하기에 앞서 한참 동안 얼굴을 굳힌 채 손에 들린 계획서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그것을 읽으려 들던 남작은, 그러나 결국 계획서를 테이블 위에 팽개치고는 휘리 노이에스의 얼굴을 향해 말했다.

“이 나라들은, 원하시는 대로 거대한 군인 농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휘리는 빙긋 웃었다. 남작은 집어던진 계획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인구수 2만에 따라 설정된 관구에서 각 5,000명씩 충원되는 군인. 결국 남자들의 반이 군사화. 그리고 저는 40개 관구를 설정했습니다. 20만 대군 이 만들어졌습니다. 일할 수 있는 남자들 전부가 병사화된 거죠. 그리고 급료 대신 무상분배된 전답들. 먹고 사는 것은 가족끼리 스스로 해결하고, 그 외의 모든 능력은 군사력에 쏟을 것. 경제도, 문화도, 술 한 잔도 필요없다.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니까. 빌어먹을 둔전병! 완성했습니다.”

“경의를 표하네, 남작.”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지?”

“저는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계획뿐입니다. 저건 쓰레기입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테이블에 던져둔 계획서를 손가락질하며 험악하게 말했다.

“저게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왜 불가능하지?”

“저는 40개 관구라고 했습니다. 2만 명씩이니, 결국 80만 명의 패전국 국민이죠. 그들이 저런 헛소리를 가만히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저 제도의 비 인간적이고 반도덕적인 면은 잠시 접어두지요. 저건 반란과 폭동을 억제하기 위한 더 많은 군사력이 있지 않고선 실행 불가능한 제도입니다.”

“그렇겠지?”

휘리는 여전히 웃으며 바탈리언 남작이 팽개친 계획서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휘리는 계획서를 들어 읽는 대신 그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바탈리언 남작은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

“8군단이 끔찍하게 무서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쨌든 바스톨 장군을 도망치게 만들고 서 브라도를 전사하게 만든 병력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 도 일개 군단일 뿐입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일개 군단을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진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그들도 귀가 있으니 8군단이 폴라리스에서……”

휘리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만, 남작.”

바탈리언 남작은 자신이 약간 흥분했음을 깨닫고는 사과했다. 하지만 휘리는 바탈리언 남작의 사과를 들은 체만 체하며 계속 침묵을 지켰다. 한참 동안 지루한 고요가 흐른 다음에야, 휘리는 한숨처럼 말했다.

“이상한 놈들이 이상한 곳에서 튀어나오는군.”

“그러나 강력한 자들입니다. 어쨌든 바다에선 당할 자가 없었지요.”

휘리는 다시 남작을 불편하게 만드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말을 꺼냈다.

“그래. 진지하게 대해야겠군. 그들과 이야기 좀 해봐야겠어.”

바탈리언 남작은 짧은 순간 휘리의 말을 폴라리스와의 화친을 추진한다는 말로 오인했다. 그러나 조금 후 남작은 휘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 다. 그러고는 폴라리스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의 주된 재료들은 아마도 동정심과 호기심인 것 같았다.

폴라리스는 휘리의 서신을 받게 된 것이다. 분명히 불쌍한 노릇이지만, 한번 8군단을 뜨끔하게 만들었던 그들이 휘리의 서신에 어떻게 대응할지 관 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도 될 것이다.

계획서를 내려다보던 휘리는 다시 남작을 향해 말했다.

“자네의 계획서는 내가 보관하겠네.”

“그건 불가능합니다, 자작님. 말도 안 되는…………”

휘리는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만하게, 남작. 1년 전 누군가가 자네에게 가수 휘리 노이에스가 왕자의 땅을 통일할 거라고 말했다면 자넨 뭐라고 대답했겠나?”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휘리는 턱으로 남작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래서 남작은 인사말 비슷한 것을 중얼거린 다음 방을 나섰다. 남작이 나 가고 나서 휘리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휘리는 천장을 향해 말했다.

“아버지, 혼 족을 다루는 너는 차라리 편하겠군요.”

경어법이 엉망이 된 말을 중얼거리며 휘리는 피식 웃었다.

“그렇잖은가, 아버지? 나가서 죽으라고 말하면 감사하다고 말할 놈들을 다루는 건 얼마나 쉽겠나. 하지만 그건 재미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쉬우면 재미가 없는 법. 나는 더 어려운 것을 한다고………… 힘없는 여자나 찍어누르는 우라질 자식아.”

호칭도 엉망이 되고 있었다.

“모든 바보들이 나를 비난해도 상관하지 않아요.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없을걸. 나의 위대한 아버지여.”

이윽고 휘리는 스스로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아래쪽을 본 휘리는 바탈리언 남작의 계획서 위에 올려진 자신의 오른발을 발견했다. 휘리는 빙긋 웃으며 오른발을 치우고 그것을 들어올렸다.

계획서는 훌륭했다. 여기에 ‘전후 정복지 재편 작업에 대한 견해서’라는 단순한 제목을 붙인 것은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남작은 단 순히 인구에 따라 선을 그은 것만이 아니었다. 군사 자신이 먹을 군량만을 생산하는 최악의 경제 파탄책임에도 불구하고 남작은 필요한 것과 필요해 질 수 있는 것 전부에 대한 계획서를 만들어두었다. 거기에는 치안이 있었고 교통이 있었고 의료가 있었고 건설이 있었으며 추천될 수 있는 관구장들 의 인명 목록까지도 있었다. 휘리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만들 수 있다…..”

20만의 군사는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당장은 폴라리스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휘리는 폴 라리스가 있는 남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 하리야 선장이 들었더라면 환호를 올릴 말을 중얼거렸다.

“한동안 격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친구들.”


큼직한 돌로 이루어진 통로엔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키 드레이번은 횃불을 든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따라 걷고 있는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며 통로의 상태가 이런 것이 마치 자신 의 책임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했다. 손수건을 결사적으로 입에 비벼대던 노인은 다시 크게 기침하며 말했다.

“에, 에취! 워낙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보니………… 콜, 콜록! 이, 이 모양입니다. 선장.”

노인은 키를 쳐다보았지만 키의 무표정한 얼굴은 노인의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노인은 다시 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조심스럽게 말 을 꺼내었다.

“사람들을 좀 데리고 올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노출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멉니까.”

“예? 아,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이제 곧이군요.”

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뭐라고 입 속으로 중얼거린 다음 다시 손수건을 발작적으로 움켜쥐었다.

통로는 수레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큼직했고, 그래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그 적막한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큼직하게 울렸다. 결국, 노 인은 고요를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키 선장. 나에게야 이미 말했던 이유가 있지만, 당신의 이유는 뭡니까?”

“이유?”

“라이온 님을 돕는 이유 말입니다.”

“알거 없소.”

“저, 혹시 옛날처럼 레갈루스의 사략선을 몰고 싶은 거라면….”

“이건 라이온과 나의 일일 뿐이고, 레갈루스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소.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내 손으로 움켜쥘 거 요. 그러니 내게 다른 욕망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만일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탐색해 보는 짓은 필요없소.”

・죄송합니다. 선장.”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돌벽에 그림자를 던지며 걸어가던 두 사람 앞쪽에 벽이 나타났다. 벽 가운데는 커다란 나무문이 있었고 그것을 본 키는 다시 노인 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잠겨 있지 않을 겁니다.”

키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횃불을 왼손에 바꿔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허리에 차고 있던 복수에 얹은 채 발로 문을 밀어보았다. 문은 뻑뻑했고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지만 어쨌든 열렸다. 노인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고 잠겨 있지도 않고, 레갈루스 국왕의 보물창고라기엔 너무 허술하죠?”

하지만 키는 아무런 대꾸 없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노인은 미간을 약간 찡그린 다음 키를 따라 안쪽에 들어섰다.

문 안으로 들어온 키는 문 좌우에 붙어 있는 횃불걸이를 발견했다. 키는 그 안쪽에 들어 있는 홰에 불을 옮겨 붙였고 그러자 어둡던 공간이 갑자기 밝아졌다. 불빛이 늘어나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저 멀리 쌓여 있는 보물들 때문이었다.

노인은 탄성을 지르고는 지치지도 않은 것처럼 키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하지요?”

키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그래도 벙실벙실 웃었다.

방 저편에는 무수한 금괴와 금화, 금붙이와 보석, 보물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레갈루스인들이 대해를 누비며 긁어모은 보물들인 것이다. 물 론 칸셀보우궁에 있는 유명한 ‘아달탄의 보물’, 즉 페인 제국 황제의 보물은 여덟 개의 방을 가득 메울 정도다. 하지만 이곳의 보물들은 그 예술적 가 치, 혹은 희귀성 때문에 부피는 적더라도 그 값어치는 충분히 아달탄의 보물에 육박할 거라는 추측이 떠돈다. 그런 보물들이 어둠 속에서 떠올라 거 대한 빛덩어리로 되태어나고 있는 광경은, 비록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노인이라도 그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방 안은 전체적으로 연못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문쪽의 벽에는 3피트 폭의 바닥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모두 깊은 웅덩이였 고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보물이 쌓여 있는 곳은 물 저편의 일종의 섬 지대였다. 좌우를 둘러본 키는 횃불 걸이가 좌우로 하나 씩 더 있는 것을 보고는 거기에도 마저 불을 붙였다.

그리고 키는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물을 향해 던졌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 안 됩니다. 선장!”

횃불이 수면 바로 위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솨아 아아.”

물이 갑자기 솟구쳤다. 오징어나 문어의 다리처럼 솟아오른 작은 물기둥은 키가 던진 횃불을 공중에서 잡아챘다. 물기둥은 정확하게 손잡이 부분을 휘어감았고, 그래서 불은 꺼지지 않았다.

키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극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물기둥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유리 공예의 달인이 만들어낸 걸작품처럼 보였다. 아니, 유리 공예에는 비 교할 수 없다. 딱딱한 유리와는 달리 물기둥은 끝없이 흐르고 있었고, 그래서 그 표면 위에서 뿜어져나오는 횃불의 반사광은 어떤 다이아몬드보다도 복잡한 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때 물기둥이 뒤로 슬쩍 움직였다.

뒤로 물러나던 물기둥은 갑자기 튕겨지듯 앞으로 거세게 휘어졌다. 즉 횃불을 던졌다. 불티를 뿌리며 날아든 횃불은 정확히 키의 얼굴을 향하고 있 었고 노인은 엉겁결에 눈을 감아버렸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노인은 한 손으로 횃불을 받아쥐어 들고 있는 키의 모습을 보았다. 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키는 얼굴 앞에서 잡아든 횃불 을 옆으로 옮기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진짜 스팻이군.”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오래간만인데.”

스팻은 수괴(water mass)의 일종이다. 수괴는 균일한 특징(염분, 온도, 밀도 등)을 가진 거대한 해수 덩어리를 의미하며, 바닷속을 이리저리 이동하며 해수의 움직임을 만들고 기상을 변화시키며 해양생물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일례로 저염 수괴(염분이 극히 낮은 민물 수괴)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는 어폐류가 집단 폐사하는 경우도 있다.

스팻 또한 균일한 특성으로서 주위의 다른 물들과 구별된다는 점에서는 일반 수괴와 같다. 그러나 스팻의 특성은 그것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즉 스 팻은 바닷속을 이리저리 이동하는 살아 있는 물 덩어리인 것이며,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곤혹스러운 방법으로 도전해 오는 존재다. 드 래곤을 동물계에 넣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던 박물학자들은 스팻을 발견한 다음 새로운 계(kingdom)를 하나 만들어내어야 하는가 하는 갈등 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동물계나 식물계와 달리 구성원이 하나인 왕국을 왕국이라 부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해의 기기묘묘한 생물들, 아니 온 세상의 기기묘묘한 생물들 중에서도 가장 희한한 생명체를 바라보며 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해양학 입문을 저술 하기도 했던 키 드레이번은 스팻에 대해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이마를 닦으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저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는 못합니다. 아마 마법으로 잡아둔 것일 겁니다. 조금 전에도 보셨지요?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이 위로 스르륵 올라 오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겁니다. 그런데 못 나오고 있어요. 그것은……”

“물론 마법이오. 그렇잖으면 어떻게 물 속에서 물을 잡아내었겠소. 그물? 그물눈 사이로 다 새어나갈 거요. 아주 큰 바가지로? 물고기도 바가지로는 잡지 못하는데 ‘물’을 어떻게 잡겠소. 당연히 마법으로 잡아서 마법으로 묶어둔 걸 겁니다.”

“예, 예. 물론 그렇겠지요? 어쨌든 저 녀석이 저 안에서 침입자를 죽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어쨌든 들어가기만 하면 시체 가 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별로 어렵진 않겠지. 그냥 물 아래로 끌어내린 다음 침입자의 허파를 잠깐 구경하고 나오면 될 테니까. 힘도 별로 들지 않는 방법일 거요.”

“아! 맞습니다. 말씀하신 것 같은 방법이면 침입자는 선 채로 익사하겠군요. 예.”

“그러면 왕은 어떻게 들락거립니까?”

대답한 것은 노인이 아니라 연못 속의 스팻이었다.

키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물이 좌우로 갈라지며 연못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고 키는 물 속에 있던 계단을 보았다. 그의 발 앞쪽에, 그리고 저편의 섬 지대에 하나씩이 있었다. 키는 피식 웃었다.

“그냥 걸어간다는 말이군.”

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우에 만들어졌던 물벽이 그 안쪽으로 거칠게 쏟아져내렸다. 하얀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잔물결이 거칠게 소용돌이치며 드러 났던 바닥은 다시 사라졌다. 출렁거리는 스팻을 보던 노인은 키를 돌아보았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방법이 있다고 하셨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저쪽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예 손을 들어 섬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보입니까? 바로 저겁니다.”

키는 노인이 가리켜보인 방향을 보고는 목표물을 확인했다. 그가 레갈루스 국왕의 보물창고에서 가지고 나가야 할 물건은 확실히 보물들 사이에 놓 여 있었다.

키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복수를 뽑아들었다.

보물들이 이토록이나 쌓여 있는 곳이었지만 복수의 아름다움은 전혀 퇴색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복수의 차가운 검광 아래 보물들의 반사광이 사 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키는 복수를 한번 옆으로 뿌린 다음 가볍게 돌려 잡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던 노인은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칼로 물을 베려는 겁니까?”

키는 노인의 말을 무시한 채 연못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스팻은 그야말로 고요한 물처럼 조용히 출렁거리고 있을 뿐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키 는 노인을 흘끔 바라보았다.

“뒤로 물러서시오. 아니, 문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저, 키 선장.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정말 물과 싸우려는 겁니까?”

“나가시오.”

노인은 다시 키의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건 별로 유익한 행동은 아니었다. 노인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뒤로 물러났다. 문을 열기 직 전, 노인의 등뒤에서 키 드레이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온은 새벽의 눈동자를 찌를 수 있을 거요. 내가 그렇게 할 테니.”

노인은 다시 키를 돌아보았지만 키는 이미 몸을 돌려 연못을 향해 서 있었다. 노인은 뭐라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이 닫혔다.


“유우우우우리! 유우우우리!”

율리아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감탄한 얼굴로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발? 밖에 저 소리 들려요? 꼭 내 이름 부르는 것 같네. 신기하죠? 깔깔깔!”

“………정말 부르고 계시는 겁니다. 공주님.”

율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 -기보다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쪽에는 황당한 얼굴로 쓰 러진 문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루미나가 있었다. 율리아나는 그 문짝을 박살낸 서 슈마허의 용맹분투에 대해 설명하려 했지만 이루미나는 그냥 자기 힘이 너무 센가 보다 생각하고는 그대로 문을 짓밟으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유우우우리!”

“신은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는 거야! 라고 말하려는 거지?”

“맞아!”

“고마워, 알려줘서. 발? 신이 우릴 보고 있대요. 기뻐요…………”

오스발은 그저 쓴웃음만 지어보였고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이루미나는 그제서야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떠올렸다. 이루미나는 율리아나 의 눈앞에서 그 서신을 흔들어대며 외쳤다.

“에름이 편지를 보냈어!”

율리아나는 펄쩍 뛰었다. 말 그대로 앉아 있던 소파에서 솟구치듯 몸을 일으킨 율리아나는 그제서야 진지한 얼굴로 언니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자매 사이에는 매우 유쾌한 싸움이 벌어졌다.

“보여줘! 보여달라고! 이리 줘!”

“기다려, 읽어줄게. 나 한번 더 읽고 싶어졌어. 아니, 수십 수백 번이라도 읽을 거야. 기다리라고!”

이루미나는 편지를 든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빙글빙글 돌았고 율리아나 역시 그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손을 내뻗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돌던 자 매는 결국 부둥켜안은 채 비명을 올리며 소파에 쓰러졌고 문제의 편지는 이루미나의 손을 벗어나 나부끼듯 날아올랐다. 오스발은 허공을 나는 그 편 지를 살짝 나꿔챘으나 곧 그런 행동을 후회했다. 두 자매는 여전히 소파에서 서로 부둥켜 안은 채 각자 한손을 내밀며 외쳤던 것이다.

“나 줘요!”

“이리 줘!”

“내가 주인이야!”

“내 남편 편지라고!”

오스발은 그만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겁한 것은 두 자매 쪽이었다.

“저, 이건 서신이니까 반으로 찢으면………… 아마 안 되겠죠?”

“으악! 안 돼요!”

결국 사태는 이루미나가 서신을 읽고 율리아나가 오스발을 고문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남편의 편지는 그 아내에게 소유권이 있을 것 같다는 오스발의 판단 때문이었다. 율리아나는 그 판단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오스발의 어깨를 심하게 꼬집어준 다음에야 이루미나의 낭독을 들었다.

이루미나는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으며 율리아나를 반쯤 미치게 만든 다음에야 첫머리를 읽었다.

“나의 발라드, 나의 장미, 나의 보물에게.”

“우에에에, 우에에에!”

“시끄러워, 유리. 부러우면 시집가라고.”

이루미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당당히 선포했고 율리아나는 왼팔을 눈앞에 들어올리곤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왼팔 위를 튕겨내는 시늉을 하며 외 쳤다.

“이야압! 닭살 받아랏! 투투투투투!”

그리고 오스발은 언제쯤이면 본론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잠겨들었다. 다행히도 역시 내용이 궁금했던 율리아나가 언니에게 빨리 다음을 읽 을 것을 종용했다.

“나 때문에 걱정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는 몸 성히 잘 있습니다. 당신이 걱정해 준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신에게 키스를 보냅 니다. 키 드레이번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을 보건대 나를 인질이나 포로가 아닌 라이트버드호의 선장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 다면 그 자신은 제독이 되겠지요. 그와 함께 항해한 것은, 순수하게 항해의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루미나호로부터 보 고를 받았을 테지만, 내 곁엔 바람을 자유로이 다루는 마법사가 있었고 노련한 뱃사람이 있었습니다. 걱정하고 있었을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래 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즐거운 항해였음을 고백해야 할 듯합니다. 당신이 기쁘셨다면 저도 기뻐요, 에름.”

“……그거 본문에 없는 내용이지?”

“당연하지.”

“닭살 받아랏! 투투투투투! 계속 읽어.”

“별 어려움 없는 항해를 계속한 끝에 우리는 레갈루스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내 처리에 대해 키 드레이번에게 물어보려 했습니다 만 그는 좋은 대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레갈루스를 향한다는 것도 가까스로 알아낸 일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암담한 전망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전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의 관심은 전부 라이온에게 쏠려 있었으니까요. 기 억하죠? 그때 다친 그의 갑판장 말입니다. 아마도 율리아나 공주님이나 슈마허 경, 혹은 오스발이 그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들도 내가 지금부터 적을 이야기, 이 기묘하고도 나를 몹시 놀라게 만든 이야기는 말해 주지 못했을 겁니다.”

“무슨 이야기?”

“들어봐, 유리, 라이온이라 알려졌던 그 사내는 실은 라이온 화이어하트 딜레도, 그러니까 그림자의 왕자였습니다.”

“그림자의 왕자! 라이온이?”

이루미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서신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후작님은 자세히 적지는 않았어. 그림자의 왕자라는 것이 뭔데?”

그러나 율리아나는 언니에게 대답하는 대신 놀란 얼굴을 오스발에게로 돌렸다.

“발?”

“예? 어, 저는 모릅니다. 저야 노만 저었을 뿐이니까요.”

“그랬군요. 그럼 두 사람 모두에게 설명해 줘야겠네. 음, 그러니까 그림자의 왕자라는 건 레갈루스의 세 번째 왕자를 가리키는 말이지.”

“응? 아티모스 2세에겐 왕자가 없는데?”

“아, 아냐. 그러니까 선왕인 휀켈 5세의 세 번째 아들. 아티모스 2세의 막내동생이지.”

“어, 휀켈 5세에겐 아들이 둘이었는데?”

“있어, 세 번째가 정실이 아닌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아아. 그런데 왜 그림자의 왕자라고?”

“어머니가 수녀원장이거든.”

이루미나와 오스발은 놀란 눈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설명을 계속했다.

“몹시 감추고 감춘 이야기라 아는 사람이 드물어. 어쨌든 레갈루스의 선왕이었던 휀켈 5세가………… 왕태자였던 시절 반란을 피해 도피하던 중 수녀와 관계해서 낳은 아이야. 휀켈 5세는 결국 왕위를 되찾았고 덕분에 그 수녀는 수녀원장까지 되었지. 그런데 이 여자가 또 대단해요. 신앙 고백서를 썼 는데 거기서 그 이야기를 다 고백했거든. 물론 상대방을 익명으로 표시했지만 추리력의 기본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제약은 항상 적은 법이지. 똑똑한 사람들은 대충 눈치를 잡아버린 거야.”

“아아,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누군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어. 그 자의 정체는 왕실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르거든. 그래서 외교계에서는 그림자의 왕자라는 이름으로만 불렸어.”

이루미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서신에 이런 말이 있었구나.”

“이런 말? 어서 읽어봐!”

이루미나는 다시 서신을 들어올려 보다 진지해진 어투로 읽었다.

“그림자의 왕자가 왜 키 드레이번의 배를 타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키 드레이번도 라이온도 말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얻어들은 것을 종합해 보건대, 키 드레이번은 아무래도 라이온에게 어떤 빚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5년 전 키 드레이번이 레갈루스 의 사략선 지휘자로 활동하던 시절에 생긴 일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점에서 몇 가지를 추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년 전은 현 레갈루스 국 왕인 아티모스 2세가 휀켈 5세로부터 왕권을 이양받던 때와 일치합니다. 아마도 왕위 교체의 과정에서 흔히들 일어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피 청소?”

“그렇겠지 뭐. 계속 읽을게. 휀켈 5세가 형의 노여움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한 그림자의 왕자를 도피시킨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림자의 왕자가 자 신의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키 드레이번과 함께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계획의 입안자이든 간에 내용은 대충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림자의 왕자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게 될 것이 뻔한 아티모스 2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키 드레이번에게 어떤 은혜. 아마도 터릿 갤리어스를 준 것이 아닐 까 합니다 — 를 베풀어 함께 도망친 것일 겁니다. 어쩌면 이 점은 키 드레이번이 이후 터릿 갤리어스들을 돌려주지 않으면서까지 레갈루스와의 인연 을 끊어버린 일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리아나는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다.

“화ᅳ아! 그럴 듯해! 후작님 말씀이 옳아. 그 사람이 왕자였구나.”

율리아나는 그렇게 외친 다음 그가 기억하고 있는 라이온의 모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라이온의 왕자다운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의 말에 신 빙성을 부여해 보려던 공주의 노력은, 그러나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공주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체념하듯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안 믿어져. 당신은 믿을 수 있어요, 발?”

오스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님. 저는 공주님의 노예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전엔 노만 저었습니다. 제가 높으신 분들이 어떠한지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음음. 그렇구나. 계속 읽어봐, 룸 언니.”

“알았어. 그래서 나는 지금 라이온 화이어하트 딜레도의 손님 자격으로 레갈루스에 체류중입니다. 놀라지 마시길. 마법사 세실리아는 물론이거니와 키 드레이번 역시 손님의 자격입니다. 레갈루스인들이 한때 그들의 사략선을 몰기도 했던 키 드레이번을 몰라볼 리야 없지만 그들은 키 드레이번에 게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복형이 기다리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니 라이온 또한 위험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레갈 루스인들은 라이온 또한 정중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라이온이나 그의 동료들인 우리가 이렇듯 정중한 무관심으로 대해지는 것은 아마도 라이온이 어 떤 특권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특권은 그가 어떤 도전을 하기로 선포한 것 때문에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전?”

“그 도전이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하는 날 라이온이 자신을 ‘새벽의 사수’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들은 말 중에 ‘아티모스 2세는 새벽의 눈을 쏘지 못했다’는 말 또한 있었습니다. 아마도 고전적인 시험 같은 것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키 드레이번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물론 인질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라이온의 입회인, 혹은 후견인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그 비슷한 일을 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나는 키 드레이번에게 내가 맡아야 할 역할에 위험이 있 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런 것은 절대로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믿는 것이 바보짓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가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항해 도중에 나를 바다에 던지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군요. 그래서 나는 그를 믿고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레갈루스인들이 바 깥에 알리지 않은 비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지요. 아마도 율리아나 공주님도 ‘새벽의 사수’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실 겁니다………… 모르니?”

율리아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지식들 중에 그것을 가리키는 말은 찾아내지 못한 듯했다. 율리아나는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울먹거렸다.

“후작님이 부러워 죽겠어. 잉잉잉.”

“내일 그 시험인지 뭔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는 주의 같은 것은 받지 못했고, 그래서 약간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군요. 키 드레이번과 라이온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오늘 하루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낼 시간을 얻었습니다. 이 다음은 안 읽을래.”

“응? 왜?”

이루미나는 뭔가 대답을 하려다가 빙긋 웃고는 그 서신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서신에 입을 맞추었다. 멍한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보 던 율리아나는 그제서야 그 뒷부분의 내용들이 어떤 것들인지 짐작해 내었고, 곧 맹렬한 동작으로 팔을 휘둘렀다.

“이 소름 끼치는 잉꼬 부부들, 분노의 닭살을 받아라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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