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6화
“날더러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에름 후작은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 나온 세실 역시 정확하게는 그녀 자신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서 그냥 어정어 정 따라나온 것이지만 잔뜩 화난 기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 으스름이 깊게 드리워진 낭떠러지는 고요했다. 한밤중에 그와 그녀를 깨워 이곳까지 끌고 온 레갈루스인은 그들을 이곳에 세워둔 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두 사람은 마치 막 부대 배치를 받은 신병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잔뜩 주눅이 든 채 주위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그들 주위에 있던 레갈루스인들은 황급히 이리저리 오가며 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준비에 열심이었고 그래서 에름 후작과 세실리아는 그들을 붙잡고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냐고 물어볼 만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에름 후작은 납치당한 이후 처음으로 차라리 키 드레이번을 그리워하게 되었 지만 키의 모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었지만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해안 절벽 위는 싸늘했다. 두 손을 신경질적으로 비비던 세실은 끝내 불평을 터뜨렸다.
“제기라알! 사람을 잠자리에서 끌어내려면 준비나 다 끝내고 불러낼 것이지, 이게 도대체 무슨 처사람. 우리 그냥 돌아가 버릴까요, 후작님?”
“돌아가도 되는 것인지조차 모르잖습니까. 아무래도 누구든 붙잡고 물어봐야겠습니다.”
에름 후작은 그렇게 말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방을 오가는 레갈루스인들 중 그래도 한가해 보이는 사람, 그러니까 바닷바람을 피해 화톳불을 피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내 하나를 발견하고는 세실에게 손짓했다.
“세실리아 양, 마법사니까 저 친구를 도와줄 수 있죠?”
세실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못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사내에게 다가섰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절망적일 정도의 시도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불을 피우기는커녕 그 자신을 질식시킬 듯한 기세였다. 콜록거리던 사내는 두 사람을 발견했고 에름 후작은 그제 서야 사내를 보게 되었다는 듯이 개탄스럽게 말했다.
“이런, 고생이 많으시군요. 좀 도와드릴까요?”
“예?”
사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에름 후작은 싹싹하게 웃었다.
“예. 잠시 옆으로 비켜서시겠습니까? 세실리아 양, 부탁합니다.”
세실 역시 특별히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당황한 사내가 옆으로 비켜나자 세실은 대천사, 혹은 악마라 도 소환하는 듯한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파괴 속에 구현된 생성의 모순, 다시 파괴로 돌린다. 화염!”
세실이 팔을 휘두른 순간 화로에서 수 피트나 되는 불기둥이 치솟았다. 미리 알고 있었던 에름 후작도 당황하여 뒷걸음칠 정도였으니 사내의 경악이 야 말할 필요도 없다. 사내는 아예 엉덩방아를 찧었고 세실은 속으로 뜨끔했다. ‘이런. 너무 멋을 부렸나? 도망가버리면 어쩌지?’ 그러나 다행히도 사 내는 의외로 대가 센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는 ‘그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고 내가 넘어진 건 저기 보이는 돌멩이 때문이라고 말하 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고맙습니다. 마법사님.”
세실은 속으로 실소하면서도 점잖게 말했다.
“대수롭잖은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세실은 에름 후작을 흘끔 바라보았고, 에름 후작은 재 빨리 말했다.
“여러분들이 꽤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일에 비해 사람은 얼마 오지 않은 것 같군요?”
“아, 아니요. 사실 일이랄 것이 별로 있습니까. 이 정도면 많이 온 거지요.”
“일이 얼마 없다고요?”
사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예. 뭐 아무도 없어도 상관없잖습니까? 결국은 그 분 혼자서 하실 일이니까요. 저나 다른 사람들 모두 괜히 흥분해서 이렇게 설치는 거지요.”
“라이온 혼자서 하다니… 그가 무슨 일을 하는데요?”
사내는 그제서야 에름 후작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모르십니까?”
“예. 저희들은 레갈루스인이 아니라서.”
“아, 그렇긴 하지만 라이온님의 신원을 보장하실 분이라 모두 다 알고 그 일을 승낙하신 줄………… 그게 아닙니까?”
사실은 대해적에게 끌려와서 영문도 모르는 채 맡게 된 겁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에름은 빙긋 웃었다.
“그 비슷한 말을 듣긴 했습니다만.”
“이런! 정말 모르시는군요.”
사내는 한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에름과 세실은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 그들이 고른 사내는 충분하다 할 정도로 수다스러웠던 것 이다.
“후작님께서는 이제 조금 후 레갈루스 선주연합의 대표단 앞에서 라이온 님의 신원을 보장해야 합니다. 그 일은 고명하고 신망 두터운 신사분이 해 야 하는 일이지만 라이온 님이 레갈루스 내에서 그런 분을 어디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어…………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전하의 노 여움을 살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예, 저희들은 그래서 후작님이 오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에름 후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전하의 노여움 어쩌고 했으니 라이온의 신원을 보장하는 것은 현재 레갈루스의 왕좌에 앉아 있는 아티모스 2세를 자극하는 일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현재 그의 지배 하에 있는 레갈루스의 신사(?)들은 감히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라이온을 도와줄 생각 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이자 일국의 영주인 자신은 아티모스 2세의 진노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든지 라이온의 신원을 보장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깐깐한 심사관이라도 에름 후작이 고명하고 신망 두터운 신사가 아니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후작은 그 제서야 키가 말한 ‘자격’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이온은 도대체 이 절벽 위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그것도 모르십니까? 하하, 이런 참 난감하군요. 그 분은 새벽의 눈을 찌르실 겁니다.”
얼마 전 키에게 이 말을 들었던 세실과 이 말을 처음 들은 에름 후작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에름 후작은 이런 걸 물어보는 게 바보짓은 아 닌가 하는 의심 속에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 새벽의 눈이라는 건 뭡니까?”
“첫 번째 일출이죠.”
이 황당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에름 후작이나 세실은 사내가 심술궂은 재담꾼이라는 판정은 내리지 못했다. 사내는 너무나도 진지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름 후작은 더욱 난처한 얼굴로 질문했다.
“저, 그럼 두 번째나 세 번째 일출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까?”
“예? 세 번째야 없지요. 두 번입니다. 그리고 라이온님은 첫 번째 일출을 쏘실 테고요.”
에름 후작은 멍한 얼굴로 레갈루스에서는 해가 두 번씩 뜨나 보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자신을 향해 참 엉뚱한 생각도 잘한다는 비난을 보내었다. 하 지만 세실은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해는 한 번씩 뜨는 거잖아?”
“물론입니다! 첫 번째 태양은 새벽의 사수가 떨어뜨리니까요.”
어쩐지 제국 천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신화 시대로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세실과 에름 후작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세실은 정리해 볼 요량 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해는 원래 두 개씩 뜨는 건데, 그 중 첫 번째는 레갈루스의 새벽의 사수가 떨어뜨리므로,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하나의 태양이 빛나는 세 상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요!”
“참 고마운 일이군……”
사내는 잘 이해하니 즐겁다는 듯이 희희낙락했고 후작과 마법사는 덩달아 웃으면서도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뭔가 다른 질문을 꺼내려고 할 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그제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두 사람에게 사과하며 총총히 떠나갔다.
사내가 사라지고 나서 에름 후작은 세실리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세실은 그 시선에 대해 싱긋 웃다가, 탐탁찮아 하다가, 결국 신경질을 부렸다.
“나도 몰라요! 마법사라고 뭐든 다 아나? 데샨 카라돔의 그 풋내기가 말하듯이 마법사는 스콜라가 아니라 아티스트라고.”
“그 풋내기? 로스왈로를 말씀하신 것 맞습니까?”
“그래요. 이제 후작님은 내가 꼬부랑 할머니로 보이겠지? 그거야 넘어가고, 어쨌든 내가 마법사라고 해서 모든 신비한 일과 기묘한 일들을 다 아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에름 후작은 잠시 세실의 나이를 추리해 보다가 추리의 근거가 될 것이 부족함을 인정하고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의식이나 제례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것 아닐까요? 여러 개의 태양 이야기는 꽤 유명한 전설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야기야 많지만 그런 의식 같은 것은 교회가 다 청소해서 야만인들 사이에나 남아 있는데?”
“그렇지요. 하지만 의외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곳도 있습니다. 성 바이올을 죽인 데샨 카라돔의 늙은이들 이야기도 그러하고…………… 그리고 교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로 지켜온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럴 듯한 추리군요. 흐음, 혼자 하는 의식이라는 건 좀 이상하지만. 아까 그 자는 라이온 혼자라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야만인들의 성인식 같은 것은 혼자서 치르기도 합니다. 아피르 족의 성인식이 그렇지요.”
“성인식? 아, 아. 그렇구나. 혼자서 칼 한 자루만 달랑 들고. 그렇네요. 그럼 그건 일종의 성인식일까요?”
“보면 알게 되겠지요. 저기 라이온이 옵니다.”
세실은 후작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횃불을 든 누군가의 인도를 받으며 절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세실은 키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보았고 잠시 후 라이온의 조금 뒤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키의 모습을 약간 어렵게 찾아내었다. 온통 검정색 일색이라 어둠 속의 키는 잘 보이지 않았다.
라이온은 단출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뭔가 으리으리한 복장을 기대하고 있던 세실과 에름 후작 모두 허무한 듯 서로를 쳐다볼 정도였다. 절벽 위 의 공터에 도달한 라이온은 두 사람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었다. 두 사람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라이온은 그대로 둘을 지나쳐 절벽 끝으로 걸어갔 다. 그러곤 낭떠러지 끝에 쭈그리고 앉아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이 절벽 위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처럼 소외되었다. 절벽 위를 오가는 사람들 역시 절벽 끄트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라이온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실과 에름 후작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키 드레이번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들 옆에 섰다. 세실은 발칵 화를 내 었다.
“뭔가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 비밀을 모든 이들과 공유해 볼 생각 없냐?”
“뭐가 듣고 싶나.”
기회다! 세실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키가 고분고분해지는 시간인 것이다.
“라이온은 저기서 뭘 하게 되는 거지?”
“말해 줬다. 새벽의 눈동자를 찌른다.”
“젠장, 새벽의 눈동자가 도대체 뭔데?”
“넌 뭔데?”
세실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나는 세실이라고 말한다면 키는 ‘그것은 새벽의 눈동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에름 후 작은 언젠가 라이온이 말했던 이 비슷한 재담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제 이름은 아실 테니 이름을 묻는 것은 아니군요. 그럼 후작님이 말하는 정체 란…………… 에름 후작은 살짝 손을 들어올려 키의 주의를 끌고서 말했다.
“위험은 없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소. 이런 걸 물어보고 싶은데, 만일 라이온이 이 일을 완수하고 나면 그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왕이 되겠지. 레갈루스의.”
세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을 뿐이다.
“대충 짐작했던 바와 비슷하군요. 나는 그림자의 왕자가 그저 자신이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공인받는 것 정도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만, 그 정도 라면 당신의 정체를 덮어주던 그 선장의 행동이나 기타 다른 것들이 설명되지 않았지요. 그것은 분명히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에 대한 예우들이 었습니다. 그런데도 위험하지 않다는 겁니까?”
“당신을 건드리진 않을 거다. 지금 라트랑에서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아티모스 2세는 얼간이가 아니므로.”
“난 내 이야기를 묻는 것이 아니오. 내 한 몸 빼낼 정도의 요량은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소. 아티모스 2세는 작렬포와 복수검을 휘둘러대지는 않으니 까.”
에름 후작은 스스로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나 저기 라이온은 몹시 위험할 텐데.”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솔직히 말해 두겠소. 만약 내가 예상하고 있는 상황이 온다면, 난 당신들을 돕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필요한 경우 나 역시 당신에게 끌려온 포 로라고 외칠 용의도 있소.”
키는 싱긋 웃었다.
“도와달라고 요청한 적 없어. 그리고 나는 말했다. 바다의 공주에게 너를 돌려보내 주겠다고.”
키는 한 호흡쯤 쉰 다음 단정하듯이 말했다.
“그러니, 너는 라트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에름 후작은 조용히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고개를 돌려 라이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회청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밤새 날카 롭던 파도 소리는 조심스럽게 뭉개지고 있었다. 밤의 마지막 헐떡임 같은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새벽은 멜바골의 활에 그 너울을 던지고 있었 다.
차가운, 부드러운, 고요한.
내리막길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린 세실은 꽤 많은 수의 불빛이 올라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세실은 키를 흘끔 돌아보았지만 키는 여전히 라이온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실은 투덜거리며 에름 후작의 팔을 쳤고 고개를 돌린 후작은 세실이 본 것을 보게 되었다.
“누가 오는 걸까요, 후작님?”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중요한 사람인 것 같군요.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저기를 보고 있는데요.”
세실은 에름 후작의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낭떠러지 위의 공터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바쁘게 오가던 그 동작들을 멈춘 채 조심스러워하는 모 습으로 저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온은 여전히 어두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고 키 역시 그런 라이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세실과 에름 후작은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짧게 고민했다. 결국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똑같은 결정을 내렸고, 방관자 혹은 국외자의 역할을 연기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연기는 오래 갈 수 없었다. 불빛들이 다가옴에 따라 노성 또한 들려왔기 때문이다.
“준비중이군! 정말 하겠다는 건가!”
세실과 에름 후작은 결국 관심 어린 시선으로 고함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화려한 모피 코트를 걸친 사내가 씩씩거리며 걸어오고 있었 고 그 뒤로는 잘 무장한 병사들이 다급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얹힌 금고리를 본 세실은 그것이 약식 왕관일 거라 판단하고는 에름 후작 을 쳐다보았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티모스 2세입니다. 첨언하자면, 제가 여태까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군요.”
아티모스 2세는 공터 위에 도착하자마자 깃털을 곤두세운 수탉처럼 주위를 홱홱 둘러보았다. 그리고 에름 후작과 세실은 어느샌가 구색이 맞추어진 공터의 모습을 보고선 무엇을 준비중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잔치 준비였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마련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요리장이었고 그 주위엔 요리사로 보이는 사람도 몇몇 서 있었다. 상석으 로 보이는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넓고 평평한 돌들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상석에 앉을 처지가 못 되는 이들을 위한 자리인 듯했다.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나 절벽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통나무 구조물이 인상적이었다. 세실은 그 것이 연단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연단이라기엔 너무 컸거니와 우선 방향이 반대쪽이었다. 그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하 는 사람은 갈매기와 구름을 향해 연설해야 할 것이다.
그때 다시 아티모스 2세의 노성이 터졌다.
“내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군나르! 네가 왕을!”
아티모스 2세의 노성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볼품없이 생긴 노인이 서 있었다. 왜소한 체구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세월 때문에 오그라든 모습 이었고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한 것이 차라리 완전히 벗겨진 것만 못한 모습으로 나풀거리고 있었다. 배 앞에 모아쥔 두 손은 작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 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그럭저럭 강단은 남아 있는 듯했지만 불쌍하게도 숨소리를 심하게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그 이름에 눈을 빛냈 다. 그리고 키보다는 훨씬 친절한 그는 세실을 위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처음 봅니다만, 아마도 레갈루스 선주연합의 회장인 군나르 파헤드리스일 겁니다. 상당히 입지전적인 인물이지요. 재미있는 구경을 위해서라면 우 리는 국왕보다는 저 노인을 주목해야 할 겁니다.”
“실력자인가요? 참주?”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레갈루스는 뱃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국왕보다 선주연합 회장의 기침 소리가 더 높은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저 노인이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평민 출신이라는 점 외에도 그가 뱃사람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레갈루스 뱃사람.”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해역을 영토로 생각하는 사람은 육지의 땅에 대한 욕심이 없을 것이다. 그때 가까스로 숨을 고른 군나르 회장이 몇 번 급한 기침을 한 다음 국왕의 말에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저 늙은 뱃사람일 뿐이고 왕가의 일에 대해 주제넘게 나선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군나르의 목소리는 그럭저럭 카랑카랑해서 별 볼일 없는 외관에 실망하던 세실을 약간 만족시켰다. 하지만 아티모스 2세는 이 뻔뻔스러운 대답에 질려버렸다는 얼굴로 군나르를 쏘아보았다.
“그렇다면 이 자들과 이 준비들은 다 뭐란 말인가!”
“아, 물론 제 사람들이고 제가 명령한 일들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뵙지 못한 동생분을 만나게 되셨잖습니까. 전하의 경사를 축하드리고자 미 력하나마 약간의 금전을 풀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동생? 동생이라고!”
아티모스 2세는 그 말에 생각났다는 듯이 주위를 매섭게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잠시 에름에게 멈췄지만 그것은 어둠 때문이었고,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한 아티모스 2세의 눈은 낭떠러지 끝에 앉아 있는 라이온을 포착했다. 아티모스 2세의 입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저 수녀의 자식 말이냐?”
국왕의 목소리는 분명히 라이온에게 들렸을 것이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한 것이니까. 하지만 라이온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조금도 바꾸 지 않았다. 대신 군나르가 불편한 듯한 신음을 내었다.
“전하. 저 분은 선왕 휀켈 5세의 아드님이시며 전하의 아우님이십니다.”
“허튼소리 마라! 수녀의 아들 따위는 악마의 자식일 뿐이다. 감히 아버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다니, 군나르 네가 포환이 그리워져…”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 저를 욕하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휀켈 5세의 아드님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군나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준엄했다. 아티모스 2세는 악귀 같은 얼굴이 되어 검을 뽑을 듯이 손을 꿈틀거렸지만 군나 르는 태평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포환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 또한 발에 포환이 묶인 시체가 되어 바다에 던져질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를 겁줄 수 있었던 반 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실은 이 친구들이 증명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아티모스 2세는 그 말에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군나르의 뒤편에는 대여섯 정도의 중늙은이들이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뱃사람인 에름 후작이나 노스윈드 함대의 선장들을 보았던 세실 은 모두 그들이 노련한 선장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한때는 거함을 몰고 남해를 누볐을 레갈루스의 선주들, 즉 레갈루스 선주연 합의 회원들이었다. 아티모스 2세와 선주들은 잠깐 동안 시선으로 싸움을 벌였다.
국왕의 뒤편에는 수십여 명의 건장한 근위병들이 있었지만 에름 후작은 속으로 선주들의 우세라 판단했다. 그리고 아티모스 2세 역시 똑같은 판단 을 내렸다. 그는 손을 내렸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아티모스 2세의 말은 여전히 사납고 잔인했다.
“놈이 아버님의 과오의 결실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리고 난 그런 자를 왕가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 늙은 군나르여, 너는 헛수고를 한 것이 다.”
군나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것은 왕실 내부의 일이니 전하의 의향대로입니다. 저로서는 참견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당장 집어치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뭐라고?”
“음식은 많고, 술은 향기롭습니다. 아까운 음식들을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자리를 새벽의 사수를 환영하는 자리로 삼을까 합니다.”
격심한 분노로 아티모스 2세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그때 저편에서 라이온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