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1화
여름의 손자국들이 가득 찍힌 나뭇잎들이 오솔길에 복잡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가끔 화살처럼 내리떨어지는 햇살이 오솔길을 달리는 마차 지붕과 말 위에 떨어져, 그 전체를 빛의 얼룩을 가진 묘한 생명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길을 땅땅 두드리는 말발굽은 경쾌했고 마차바퀴는 이제 여행이 끝나가기는커녕 방금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신나게 구르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던 파킨슨 신부는 행복한 시선을 돌려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 이제 곧 펠라론이다.”
“마치 신부님 당신이 펠라론을 건설해 놓은 것처럼 말씀하시지 마쇼.”
퉁명스럽게 대꾸한 데스필드는 곧 날아올 주먹에 대비했다. 하지만 신성 펠라론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파킨슨 신부를 놀랍도록 변화시켰다. “내 말투가 그랬냐? 허허. 너무 즐거워서 그런다. 용서해라.”
멍한 시선으로 신부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던 데스필드는 이 가공할 위화감을 참고 견딜 것인지, 아니면 신부를 길길이 날뛰게 만들 말을 구상해 볼 것인지를 놓고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 앞쪽에 앉아 있던 핸솔 추기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 온 것 같군요. 그럼 우리 내려서 걸어볼까요, 신부님?”
“걸어간다고요?”
“마차 여행의 사소한 안락 대신 순례자의 기쁨을 누려보지 않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눈앞으로 기적의 도시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기념할 만한 일일 겁니다. 사실 이 도시를 찾는 순례자들에겐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지요. 마차 안에서야 그걸 볼 순 없잖습니까.”
“오오, 예하! 맞습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요. 감사합니다!”
파킨슨 신부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지만 데스필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차 안에 앉아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에 의 해 마차 밖으로 끌려나와야 했다. 데스필드는 투덜거리고 불평하고 화를 내었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 거룩한 광경은 일광욕이 절실한 네놈의 영혼에 한 줄기 빛이 되리라’고 주장하여 핸솔 추기경을 웃기고 데스필드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일광욕이 절실한 영혼? 웃겨주는군. 어쨌든 말이오, 저긴 당신들에겐 영광의 성도이자 기적의 도시일지 몰라도 본인에겐 다른 곳과 다름없이 시시 한 ‘목적지’일 뿐이란 말씀이야. 패스가 아니오.”
“이 자식아, 펠라론은 패스다! 우리 주님에게로의 패스란 말이다. 알겠냐?”
“헤? 그거야 모든 당신의 삶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언사잖아?”
“……………너무 예리하게 말하지 마! 짜식이 가끔 섬뜩하게 예리하단 말이야. 그리고 나 이 복된 순간을 망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으니 더 이상 구시렁 거리지 마라. 알겠냐?”
“알겠냐로 충분하니 홀스터에서 손 치우시지요.”
데스필드는 입을 다물었다. 마차를 먼저 달려가게 한 다음 세 사람은 순례자처럼 단단하고 느린 걸음걸이로 펠라론까지의 남은 오솔길을 걷기 시작 했다.
여름은 초록빛 물감이 되어 잎사귀와 나뭇가지에서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펠라론으로 들어가는 카티막 언덕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킨슨 신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연 신부는 추기경과 패스파인더를 훨씬 앞 질러 걸어갔고 핸솔 추기경과 데스필드는 그 미워할 수 없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 그들은 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필드가 신부의 등을 향해 외쳤다.
“펠라론입니까?”
신부는 한참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기적의 도시다.”
데스필드는 신부의 옆에 섰다.
도시 중의 도시가 그들의 발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펠라론 강의 수면에서는 태양의 박편들이 군무를 춤추며 강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늘빛 해오라기들이 수면 위로 조용히 날개치고 있었 다. 강가에 자리잡고서 펠라론 강에 제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 웅장한 건물들은 여름 한가운데서도 서늘한 설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열주와 하얀 발코 니들. 광장을 수놓은 페퍼민트 블루의 포석들은 그 자체로 성화(聖畵)라 할 만하다. 멀리, 구름보다 더 먼 곳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멀리 북쪽의 자케 산 기슭으로는 은빛 펠라론 파인들의 군림이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너울처럼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신심 깊은 신도들 중에서도 꽤 많은 수의 신도 가 오펠 2세가 은혈을 흘린 자리에서 저 펠라론 파인이 자라났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오펠 2세 자신도 법황으로 즉위하기 전 저 펠 라론 파인에 대한 시를 몇 수 남겼고 그 이전의 법황들도 펠라론 파인의 은빛을 신심 깊은 신도에 비견하는 칙령들을 남겼으니까. 하지만 누가 뭐래 도 은혈의 법황과 은빛 펠라론 파인은 잘 어울리는 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저명한 예는 아니다.
파킨슨 신부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펠라론의 1700년 역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저기 펠라론 강에서 자케산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통해 역류의 법황 로키는 강물을 거꾸로 끌어올렸다. 대로 중턱에 비껴서 있는 아름다운 교회는 세 개의 종탑을 가진 것으로 보아 마누비스 3세가 건설한 삼종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언덕은 혼족에 의해 살해된 성 페이루스의 유해가 스스로 나타난 페이루스 언덕일 것이다. 페이루스 언덕 아래 잔디밭에는 초승달 모양의 연못이 하늘을 담고 있었고 그 주위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푸른 꽃은 절대 제비꽃 같은 것이 아니다. 저것은 펠라론 파인과 더불어 전 대륙에서 오로지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식물의 하나인 라우스 3세의 푸른 장미다……. 문득 파키슨 신부는 자신이 펠라 론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그 작은 부분에 오밀조밀 담겨 있는 전설들과 기적의 숫자에 전율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늙은 나무 한 그루조차 기적이다, 17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당신들이 오는군요.”
데스필드의 말은 1700년의 역사 속에 머리끝까지 빠져 있던 파킨슨 신부를 가까스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역사 속의 표류자였던 파킨슨 신부는 현재의 공기를 찾아 코를 벌름거린 다음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어떤 당신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파킨슨 신부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저 앞쪽에는 그들이 먼저 보낸 마차가 굴러가고 있었고 데스필드가 말하던 ‘당신들’은 그때 마차와 헤어져 그 들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부에게 탑승자들의 소재를 묻고 나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약간 늦게 언덕 정상에 올라선 핸솔 추기경이 데스필드의 말을 받았다.
“아, 자몬 경이군. 법황청의 의전관이자 또다른 기적의 역사의 증인이지. 약간 뭣한 기적이지만.”
추기경의 말 끝에는 재미있어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핸솔 추기경을 돌아보았고 추기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몬 경은 좋은 교양과 탁월한 승마술의 소유자이지만, 그보다는 펠라론 최강의 카드꾼이라는 사실로 더 유명하지요. 벨타온 자작이거든.”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벨타온 자작이라는 이름에서 자기 저택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카드꾼 가문의 전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신부 는 탄식처럼 말했다.
“아아. 로헤이든 성하께서…..”
“그렇소. 법황 로헤이든의 유령이 벨타온 가의 가장들에게 훈수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벨타온 가에서만 유용한 일종의 블러 핑인 것 같소. 상대의 블러핑을 견제하고 싶을 때 어떤 도박사는 피식 웃고 어떤 도박사는 무표정을 유지하지요. 하지만 자몬 경은 허공을 흘끔 쳐다 보곤, 뭔가를 듣는 시늉을 하고 나서, 상대를 향해 꺼림칙한 웃음을 띄워보내지요.”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효과가 있습니까?”
“그의 말을 보면 알 거요. 저 윈디어는 백만 데리우스에도 팔지 않는다는 전설이 따라다녔지만 자몬 경은 카드 두 장으로 저 명마를 차지했지.”
그들이 기적의 도시 펠라론의 약간은 덜 성스러운 기적에 대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동안 법황청 의전관과 그의 부하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파킨슨 신부는 그러려니 했지만 데스필드는 자몬 경의 말을 보고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전관은 말에서 뛰어내린 다음 핸솔 추기경을 향해 목례했다. “주님을 찬양할진저.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예하.”
“주님을 찬양할진저. 반갑구려, 자몬 경. 이곳까지 나와서 반겨주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하께선 예하가 겪어야 했던 고초들에 대해 진심으로 우려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파덴트로 모시러 가지 못한 점을 사 과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트로니아인은 예하께서 이미 파덴트 시를 떠났다는 전갈을 보내어와서 저희들을 꽤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데스필드는 이 대화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핸솔 추기경이 ‘작은 법황’이라는 소문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진 소문이었던 모양이 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그들의 동행의 높은 신분에 대해 익숙해질 즈음 자몬 경이 그 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례하겠습니다. 테리얼레이드의 파킨슨 신부님이십니까?”
“주님을 찬양할진저 그렇습니다.”
“주님을 찬양할진저. 법황청의 의전 업무를 맡고 있는 자몬 벨타온이라고 합니다. 법황청을 대신하여 기적의 도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 다. 물론 공식적인 환영은 신부님께서 체재하실 법황청에서 있을 것입니다만.”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로서는 의외였지만 별로 감격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듯한 냉정함으로 대답했다.
“한낱 시골 신부를 이토록 환영해 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추기경 예하와 동행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저 기적의 성도를 찾아온 순례자 일 뿐입니다. 그러니 저나 여기 있는 이 자에게는 성려를 베풀어주시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저희들은 주제넘게 법황청에서 체재할 생각은 없으며 저 도시에서는 순례자로서 숙식을 해결할 것입니다.”
대답하는 신부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기적의 도시를 바라보았을 때의 희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자몬 경은 빈틈을 보이지 않는 얼굴 로 대답했다.
“펠라론을 찾는 모든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법황청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게다가 성하께선 적지 않은 기대감으로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곤란하게 하시지 마시고 법황청까지 두 분을 안내하는 영광을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면서, 데스필드는 이 대화의 내면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해 보았다. 법황이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신부를 기다린 것은 결국 율 리아나 공주 암살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점잖기 짝이 없는 자몬 경의 초청은 결국 구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파킨슨 신부가 엉뚱한 말을 흘리기 전에 법황청에서 단속하고 나서겠다는. 데스필드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스완 대거와 신부의 허리에 있는 핸드건을 번갈아 떠올렸지만
폭력의 증후를 느끼지는 못했다. 법황청이 어떤 우려를 하건 간에 파킨슨 신부는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목적을 가지고 펠라론을 찾은 것이므로. 데스필드의 예상대로 파킨슨 신부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군요.”
데스필드는 마음속으로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파킨슨 신부는 이런 경우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가 법황청의 암살 기도라는 특급 스캔들을 이용하여 법황이 신음을 흘릴 정도의 거금을 울궈낼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분명 존경 받을 만한 태도겠지만, 동시에 그를 단속하기 위해 허둥대는 이들의 면전을 가볍게 후려치는 태도이기도 했다.
킬리 선장은 말고삐를 내려놓고는 성을 돌아보았다.
“저 성은 점점 더 제방이 되어가는 것 같아, 벨로린.”
“피탄 각도 때문이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저렇게 비스듬하게 만들어놨다간 보병들이 뛰어오르겠는데.”
킬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돌탄 선장의 지휘하에 건설되고 있는 다림 외성은 포격에 대비하여 60도 정도의 각도를 이루며 제방처럼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벽 안쪽도 비슷한 각도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성벽의 두께는 가장 두꺼운 곳의 경우 5, 60피트나 된다. 강철의 레이디가 아니고서야 포 격으로 저 성을 파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만한 각도는 보병들로 하여금 그 위로 뛰어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벨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포격과 화살을 피해 저 넓은 초원을 죽 가로지른 다음 60도나 되는 성벽을 단숨에 뛰어올라가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 걸.”
“하긴 그렇겠지. 내가 투덜거리는 건 사실…………”
“성이 너무 못생겼다는 것 때문이지.”
“흐음. 내가 말할 걸 다 알겠지만, 일일이 말을 가로챌 필요는 없잖아?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들려줘야 하니까.”
킬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벨로린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훠이, 훠이.”
파리 쫓아버리는 손동작이었지만 벨로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원하다. 부채질 좀더 해봐.”
킬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탄 말은 다림 교외로 향하는 가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긴 여행에 대비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고 있는 어떤 사람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킬리가 세 마리의 기수 없는 말을 이끌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두 사람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킬리는 벨로린이 말을 탈 줄 안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 놀랐지만 벨로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망아지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뭐든 다 안다는 건 뭐든 할 줄 안다는 거야?”
“그렇진 않아. 예를 들어, 난 너를 유혹해서 네 아기를 가질 수는 없지.”
“그 이야기 좀 그만해. 요 꼬마야.”
“바보구나. 그렇게 당황해하면 계속하는 법이야. 재미있거든.”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너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다는 거 몰라?”
“어쨌든 난 뭐든 다 할 수야 없지.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시도할 때 퍽 유리한 건 사실이야. 왜 그런지는 알겠지?”
“음. 필요한 정보는 전부 다 아니까.”
“그러니, 최소한 말을 어떻게 멈춰 세우는가 정도는 알고 있는 거지.”
벨로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망아지를 멈춰 세웠다. 킬리는 역시 말을 정지시킨 다음 자신이 끌고 오던 말들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 본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가도와 그 주위를 둘러싼 숲뿐이었다.
“여기야?”
“응. 저기 있어. 이리 나오라고 해.”
벨로린은 눈으로 한쪽 숲을 가리켜보였다. 킬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다음 관목과 나무들을 향해 말했다.
“안심하시고 이리 나오십시오.”
벨로린의 모습은, 그녀의 공포를 모르는 사람에겐 어쨌든 분위기를 상당히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수풀 속에 숨어 있 던 사람들은 안심한 채 걸어나왔다. 그리고 이번엔 거꾸로 킬리가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장한 채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수풀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중 한 명이 킬리를 쳐다보았다. 오랜 여행, 그것도 몹시 괴로운 여행을 마친 자의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 있는 기사였 다. 몸 곳곳에 생긴 상처에는 망토를 찢어 만든 붕대가 감겨 있었고 다리는 약간 절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침착하고 빈틈없는 얼굴로 킬리를 올려 다보았다.
“숨어 있는다고 숨어 있었는데, 그래도 알아차린 모양이군. 게다가 그 태도를 보니 우리가 누군지도 아시는 모양이오?”
“예. 그래서 이렇게 마중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짐작하기로, 아마도 록소나의 자랑인 서 하빈저가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서 하빈저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록소나의 자랑이니 하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쨌든 나는 하빈저가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킬리 스타드입니다. 폴라리스를 대신하여 여러분들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원로에 정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킬리 스타드? 그랜드머더호의 킬리 선장이시오?”
“그렇습니다.”
킬리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하빈저는 엉겁결에 그 손을 받아쥐면서도 당황을 가누지 못했다. 킬리는 친밀감을 담아 하빈저의 손을 흔든 다음 말했다.
“정식 환영단을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긴장하고 계실 여러분들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두 사람만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니…… 그럼 당신네들은 비자 록소나의 낙성과 우리들의 도주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거요? 우리들은 전속력으로 도 망쳐 왔고 우리들보다 소식이 앞서기는 어려웠을 텐데.”
“수다스러운 바람은 다른 바람보다 더 빠르다던가요. 하하, 거기에 대해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을 겁니다. 빌레스 전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하빈저는 짧은 갈등을 느꼈다. 하지만 킬리의 말마따나 두 사람만이 찾아온 것은 굉장히 부드러운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서 하빈저는 몸을 돌려 한 노기사를 쳐다보았다.
마왕 빌레스는 도피행 중인지라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킬리는 벨로린을 흘끔 쳐다보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킬리 선장은 빌레스의 앞쪽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록소나 국왕 빌레스 커리돈 전하 만세. 저는 킬리 스타드라고 합니다. 폴라리스를 대신하여 전하를 영접하게 된 점,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근자에 당하신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마왕은 그만 감동해 버렸다. 그 스스로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면 말구유에 몸을 던지는 성격인 빌레스 국왕은 화려한 환영단보다 이런 진솔한 영 접에 더 감동했다. ・어차피 도망자 신세의 군주에게 많은 구경꾼은 그 숫자만큼의 수치이기도 했지만 마왕은 킬리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세운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럼 폴라리스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군?”
“물론입니다, 전하.”
“휘리 노이에스의 적이 될 텐데?”
“아직 모르시겠지만, 저희들은 이미 다벨군을 맞이했고 그들에게 남해의 기개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니, 나는 이미 들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
마왕 빌레스가 폴라리스를 찾은 것은, 폴라리스가 사트로니아의 동맹국이라는 점 이외에도 그 소문, 즉 신생국 폴라리스가 다벨 8군단을 맞이하여 2분 만에 그들을 패퇴시켰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왕은 이곳으로 도주할 것을 결심할 수 있었다. 킬리는 빙긋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 말에 오르시겠습니까?”
마왕은 폴라리스 영내로 들어오면서 점점 더 감동했다.
록소나 대사관에는 폴라리스 평의회가 주관하는 환영 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폴라리스는 이런 경우 흔히 취하기 쉬운 애매모호한 태도를 전혀 취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다벨이 화를 내건 말건 우리는 록소나 국왕을 진심으로 환영함’을 매우 분명한 태도로 보여주었 다. 마치 다벨을 향해 볼 테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자신감 있는 태도는 휘리 노이에스에 대한 적의로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파티 손님들, 그러니까 록소나, 팔라레온, 다케온의 피난민들에게서 열렬한 호평을 받았다. 위험한 도피가 끝나서 긴장이 풀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만 나 서로 동정을 나누게 된 마왕은 결국 대취하게 되었다. 한때 전쟁을 치르기까지 했던 다케온의 피난민들조차 공동의 적인 휘리 노이에스 앞에서 마 왕과 악수할 정도였다. 결국 마왕과 피난민들은 서 브라도의 복수를 위해 제국이 움직일 거라는 둥, 그렇게 된다면 옛 다벨의 영토는 팔라레온과 록 소나, 그리고 다케온이 공동 분할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만취하여 잠들게 되었다.
하지만 서 하빈저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한밤중에 하리야 선장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이렇듯 환영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리야 의장님. 전하께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희들로서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밤중에서 하빈저의 방문을 받게 된 하리야는 책상 위의 램프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요.”
서 하빈저는 두 눈을 비비며 웃음지었다.
“사실 침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관이라도 그 속에 들어가 사흘쯤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비자 록소나의 낙성은 끔찍했습니 다. 저로서는 중과부적이었지요.”
서 하빈저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 중 그 동생이 폴라리스에서 벼락을 맞고 있을 때 그 형은 비자 록소나에 벼락 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서 소팔라와 서 켈커는 이미 몇 번이나 전투를 거듭한 덕분에 거의 이름밖에 남지 않은 록소나군을 풀잎 베듯 밀어버리고 비 자 록소나를 포격했다. 서 하빈저는 직접 검을 들어 포위망을 뚫고는 간신히 마왕을 빼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기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놀랍도록 중첩된 행운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건 경의 기량입니다. 이렇게 주군을 구출해 내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볼지악 요새전에서 경이 록소나 중장기병들을 구해 낸 이 야기는 바스톨 장군님께 잘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주군까지 구출해 내셨습니다. 빌레스 전하께선 경이 대단히 자랑스러울 듯합니다.”
“말씀하시는 것 들으니 더욱 서글퍼집니다. 어쩐지 저는 패전 처리 전문인 것 같군요. 다케온, 알레미지우스 회전, 볼지악 요새전, 그리고 비자 록소 나 낙성…………”
서 하빈저는 올 봄 이후로 자신이 참여했던 전쟁들을 죽 열거했다. 하리야는 이 젊은 기사가 이토록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 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다. 게다가 그 중엔 가벼운 전투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하리야는 그 많은 전쟁들에서 전부 도망치는 쪽에 있어야 했던 젊은 기사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하빈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이기는 편에 서고 싶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렇게 보이진 않겠지만 저도 록소나 기사입니다. 록소나 기사에 대한 험담을 많이 들으셨을 테지요? 오만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잔인한, 예, 제 속 에도 그가 있습니다. 저 역시 성 엑시아의 채찍 아래 온몸의 혈관이 터질 때까지 달리고 싶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욕설과 비웃음을 던져주고 싶습니다. 제 몸에 뿌려진 상대방의 피 냄새를 맡고 싶습니다.”
죽은 서 브라도나 바탈리언 남작, 혹은 록소나 대사관에서 만취하여 있는 빌레스 국왕이 지금의 서 하빈저를 보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아니, 서 브라 도라면 하늘에서 웃으며 박수를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침착함을 높이 사고 있던 바탈리언 남작과 빌레스 국왕은 당혹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하 리야 역시 이 온화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이가 조용히 꺼내놓은 속마음에 잠깐 동안은 당황했다.
하지만 서 하빈저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실례될지도 모릅니다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리야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록소나 기사답게, 오만하게 질문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저는 이기는 편에 선 것입니까? 당신들이 휘리 노이에스라는 저 불세출의 정복 기술자 앞에서 이렇듯 당당한 것은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서입니까, 당당한 표정을 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먼저 질문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만일 후자라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전하를 모시고 배를 탈 생각입니다. 현재로서는 사트로니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여의치 못할 경우 페리나스 해협 또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리야는 다시 당황했다.
“발도 로네스 경을 육지로 끌어들이신다고요?”
“제 결심은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알겠습니다. 예,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법황 성하께서도 그들이 육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벨 에 성무 금지 처분 이외에 다른 것은 내리지 않고 계심을 알고 있을 텐데요.”
서 하빈저는 투명한 표정으로 하리야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저는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악마라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저는 지금 어떤 요구 조건에도 납득해 줄 수 있는 기분입니 다.”
하리야는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주전자의 물이 끓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하리야는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한 기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자를 다루기는 쉽지만 침착하게 분노한 자를 다루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때 서 하빈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을 말씀하십시오.”
“예?”
“저를 어떻게 다룰지 생각하고 계실 테지요. 사실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하리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좋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지요. 우리에겐 당장은 다벨을 어떻게 할 힘이 없습니다.”
“저는 시간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 나이입니다. ‘당장’이라는 것은 필요없습니다. ‘확실히’가 필요합니다.”
젊은이는 침착하질 못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늙은이는 시간이 없어서 침착함을 잃는다. 그래서 젊은이가 침착함을 가졌을 경우 이토록 등골 서늘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리야는 찻잔에 차를 부으며 말했다.
“어떻게 미래의 일을 확실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카드점보다 나은 전망이면 제겐 충분히 확실한 겁니다.”
“그렇다면 확실합니다.”
“……먼저 제가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듣고 싶군요.”
“폴라리스는 신생국입니다. 자기 보전이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일 것이며 영토 확장 같은 것을 감행할 만한 내적 충실함을 쌓을 시간은 없었을 겁니 다. 반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이낙스 이후 제국이 처음 만나게 된 정복 기술자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최악의 상대라고 하겠습니다. 의장님께서는 이 상황의 어떤 국면에서 자신감을 느끼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가 진정한 정복 기술자라는 데서 자신감을 느낍니다.”
서 하빈저는 차분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하리야의 설명을 강요했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하리야는 손가락을 가볍게 꺾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폴라리스는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이런 폴라리스를 치는 것은 시간 낭비고 자원 낭비입니다. 당분간 그는 폴라리스 를 내버려둔 채 정복지 재편에 신경 쓸 것입니다.”
하리야는 이 전망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벨로린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적 충실함을 쌓을 시간을 가지게 될 겁니다.”
“말씀하신 것은 옳다고 여겨집니다만 그 시간은 휘리 노이에스에게도 똑같이 유리하게 작용할 텐데요. 폴라리스가 힘을 기르는 동안 다벨은 더 많 은 힘을 기를 겁니다. 더군다나 그가 재편하고 있는 그 땅은 아달탄 대왕께서도 지적하신 ‘왕자의 땅’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식량과 군마와 강철과 자 금을 거침없이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더 많은 적을 끌어들일 겁니다. 따라서 그는 더 많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그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휘리 노이에스는 그 힘을 페인 제국이나 사트로니아, 혹은 부활한 중부 동맹에 사용해야 할 테니까요.”
“중부 동맹?”
“비밀입니다만 이젠 말씀드려도 될 것 같군요. 바이스라, 레모, 라트랑의 3국은 비밀 협정을 맺었습니다. 록소나가 다케온을 침략했을 때 록소나의 배후에서 압력을 구사하기 위해서였지요.”
•서 하빈저는 놀란 눈으로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왕께서 회군을 결정하셨기에 그 협정은 제대로 가동되기도 전에 시들해져 버렸고 더구나 레모의・・・・・・ 그, 아십니까? 예. 라트랑 내 쿠데타 획책 때문에 현재는 완전히 파기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라트랑 후작 에름 라트랑이 라트랑으로 복귀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그 3국 동맹의 부 활을 부탁할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직접 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트로니아에 그 3국 동맹의 정보를 알려주고 요청해 볼 생각입니다. 그들의 협정 을 다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벨의 동쪽 저지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북쪽은 페인 제국에 맡기면 되겠지요. 우리들은 농담 삼아 이 것을 반…..”
반왕 사냥이라고 할 뻔했던 하리야는 가까스로 말을 바꿨다. “덫 사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놀랍군요. 하지만 그 3국이 충분한 힘을 낼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케온이나 팔라레온, 록소나는 각개격파당한 겁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국과 다케온은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이간질 당했기에 8군단 앞에 쓰러진 거지요. 특별히 빌레스 전하나 귀국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하지는 않을 테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바이스라, 레모, 라트랑의 3국은 상당한 저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입니 다.”
차분히 듣고 있던 서 하빈저는 그만 얼빠진 얼굴로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하리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우리들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아실 듯한데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번도 알려진 적이 없던, 게다가 실행되기도 전에 깨진 3국 협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놀 랍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오늘 오전 킬리 선장이 여러분들을 맞이하러 나갔던 일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서 하빈저는 그제서야 놀라움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비밀 협정이 얼마나 비밀스러운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하리야 의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 오전 킬 리 선장은 그들이 어디쯤 왔는지 뻔히 안다는 듯이 마중하러 나왔었다. 국왕의 도피행이었기에 서 하빈저가 비밀 유지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 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런데 폴라리스는 파티 준비까지 마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트로니아의 정보력입니까?”
“아니오. 우리들의 독자적인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필요한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알려드릴 수야 없지만 우리는 지금 휘리 노이에스가 어떤 형태의 재편 작업을 하고 있는지, 그 총책임자가 누구며 기한은 얼마로 잡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법 황성하께서 다벨에 대해 준비하고 계신 대응책이 뭔지도 알고 있습니다.”
“예? 법황 성하께서 무슨 대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카드점보다는 확실하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리야는 자신이 상대방의 오해를 일으켰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이니까. 물론 그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벨로 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서 하빈저는 폴라리스가 신성 펠라론과도 모종의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그래서 이 자는 필마 온 기사단을 끌어들이는 일에 그토록 난색을 표했던 것인가.’ 서 하빈저는 자신이 이끌어낸 결론에 감탄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결론 속에서 이 신생국은 소제국 사트로니아에 이어 신성 펠라론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 하빈저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여전히 투명했다.
“카드점보다는 확실하군요.”
“그럼 한번 더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궁금하신 것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궁금해졌습니다. 왜 폴라리스를 선택하셨습니까? 페인 제국이 더 확실한 선택이었을 텐데요. 그렇게 확신이 없으셨다면 왜 페인 제국이 아닌 폴라리스로의 도주를 선택하신 건지요?”
“제 질문이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페인 제국으로 전하를 도피시켰다면 확실히 안전했겠지요. 하지만 그랬다간 록소나를 되 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졌을 겁니다. 제국은 레프토리아 회전 이후 제후국들간의 분쟁에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아왔습니 다. 제국을 움직이게 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확실한 안전보다는 조금 위험하더라도 당장 그들과 적대하고 있는 나라를 선택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제가 조금 전 사트로니아나 필마온 기사단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이고, 게다가 마왕다우신 결정이군요.”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무슨 이유지요?”
“전하께서는 키 드레이번을 만나셨습니다.”
이번엔 하리야가 놀랄 차례였다. 그리고 서 하빈저와는 달리 하리야는 자신의 충격을 그대로 표현했다.
“어, 어디서 말입니까? 혹시 마왕께서 키 드레이번을 체포했다는 말입니까? 아니, 키 선장님은 분명히 에름 후작과 레갈루스에…………”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전하께서 키 드레이번에게 체포되셨었지요.”
“예?”
서 하빈저는 조용조용한 말투로 다케온 공격 당시 마왕과 키 드레이번의 조우에 대해 설명했다. 하리야는 대단한 집중력. 약간 도가 지나쳐서 말 하고 있는 서 하빈저를 거북하게 할 만큼의ᅳ을 보이며 하빈저의 말을 청취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하리야는 탄성을 질렀다.
“아아. 그리고 회군하신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만방의 찬사를 받았던 그 회군은 사실 키 드레이번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비자 록소나 탈출 이후 이렇게 말씀하셨습 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 남자의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 자는 내게서 다케온을 빼앗아갔으니, 그 부하들은 내게 록소나를 돌려줘야 할 것이다.”
말을 끝낸 하빈저는 하리야의 얼굴을 보며 약간 당혹했다. 하리야는 싱긋 웃으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웃음 속엔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하리야는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잘못 아신 겁니다.”
“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확신합니다. 키 선장님은 빌레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돌려줬을 겁니다. 아마도 빌레스 전하가 그때 가장 원하고 있었 던 것은 록소나로 회군할 수 있는 빌미였을 테지요. 나는 압니다.”
서 하빈저는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