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2화
“펠라론 게이트에 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라오코네스가 나타났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신부님께서는 왜 펠라론 게이트에 “정말 라오코네스였습니까? 그러니까, 드래곤 라오코네스?”
“……예. 그는 자신이 라오코네스라고 주장했고 저나 다른 목격자들은 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웠습니다. 아무튼 종탑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미노 만의 그 라오코네스 말씀이죠? 800년 전의?”
플로라는 질문을 중단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름다운 피조물의 허탈해하는 모습은 상대방이 꼭 열정적인 기사가 아니더라도 많은 동정심 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지만, 아쉽게도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그런 감정을 느끼기엔 너무 혼란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종의 취조실로 사용되고 있는 듯했지만 어쨌든 법황청의 훌륭한 방 안에서, 일종의 취조관으로 나선 듯하지만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신비로운 피 조물의 말을 들으며 파킨슨 신부는 격심한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파킨슨 신부는 대드래곤이 한 일을 이웃집의 주책바가지 노인이 한 일 처럼 표현하고 말았다.
“라오코네스가 왜 그랬을까.”
그리고 데스필드는 그만 신부의 화법에 휘말려버렸다.
“뭐 돈 떼먹은 거라도 있으쇼?”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평소에 좀 화목하게 지내지 그러셨수.”
“……우리 그만하는 게 좋겠지? 이 분이 우릴 미치광이 쳐다보듯 하시니. 죄송합니다. 어, 레이디 플로라.”
플로라는 살폿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건 여느 때의 아침과 점심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점심과 저녁 사이에 일어나곤 하는 일도 아니니까요.”
“일상적인 일은 아니죠. 예, 흐음. 라오코네스가 생존해 있었군요. 그런데, 왜 라오코네스는 누가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거 지? 아니, 잠깐. 그에겐 그럴 권한이 없어. 이유가 어쨌건 그 드래곤에게는 교회나 그 신도의 일에 간섭할 권한이 없단 말이야!”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던 파킨슨 신부는 결국 노기 어린 외침을 토하며 동쪽을 쏘아보았다. 데스필드는 그에게 ‘미노 만을 노려보고 싶은 거라면 남서 쪽은 저쪽이오’라고 가르쳐주고는 플로라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려 한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소?”
플로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들어가다니오?”
“아니, 파킨슨 신부님 당신 말이오.”
플로라는 눈앞에 앉아 있는 패스파인더의 이상한 어법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핸솔 추기경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성하께 보고드리던 도중 신부님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이 언급되었고, 그래서 성하께선 신부님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아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럼, 아무래도 라오코네스 당신의 말은 당신을 겨냥한 말이겠군.”
플로라는 다시 혼란을 일으켰지만 가까스로 데스필드의 말을 이해했다.
“예. 신부님을 지적한 말일 가능성이 높지요. 솔직히 법황 성하께서는 추기경 각하의 보고를 듣고 매우 놀라셨습니다. 라오코네스가 그런 말을 하자 마자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겠다는 분이 나타났으니.”
데스필드는 그 말에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가 가르쳐준 방향, 즉 북쪽을 노려보며 으르릉거리고 있을 뿐 플로라의 말 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백하지만 당신이 노려보고 있는 건 북쪽이오. 그만 씩씩거리고 대화에 참여하쇼.”
“……이 악마의 결과물 같은 놈. 재미있냐? 잠깐! 재미있다고 말할 거지? 알았으니 관둬. 뭐라고 하셨습니까, 플로라 양?”
플로라는 약간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순순히 다섯 번째로 질문했다.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분명 신부님을 지적한 것이 분명한 라오코네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말 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질문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놈이 나를 지적한 것일까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라오코네스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신부님을 겨냥한 말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파킨슨 신부는 이번에는 정확히 남서쪽을 노려보며 짧게 으르릉거렸다. 퍽이나 흉측한 언사가 동원되었지만 모두 테리얼레이드 속어인지라 다행히 플로라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싱긋 웃었다. 잠시 후 조금 진정하게 된 신부는 무례를 사과하며 말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요. 나를 이끄는 것이 나인지 주님인지 알기 위해서요.”
“물론 세례를 받은 적도 없는 저 같은 존재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엄청난 실례가 될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만, 신부님을 이끄는 것은 당연히 신부님 자신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강제로 이끌지 않고 스스로 오길 한없이 기다리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플로라의 나직한 대답에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내 표현이 좀 이상했나 보군. 이렇게 말하겠소. 내가 자기 기만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진리의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요.”
“펠라론 게이트가 답을 주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아니라는 말도 없잖소?”
플로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펠라론 게이트에 관련된 속된 농담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 농담은 펠라론 게이트에 대한 설명들 중 유일하게 반론을 당하지 않는 설명이지요. 사실이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그냥 저질스러운 농담이기 때문입니다. 펠라론 게이트에 대한 정설은 아무것도 없고 그 정의를 내려보려 는 시도는 항상 먼젓번의 시도보다 더 많은 반론을 이끌어내었을 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이미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 나자리의 이론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라면 천국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펠라론 게이트라는 이 름이 붙어 있다. 따라서 그 ‘문’은 펠라론으로 통한다.”
“신학을 공부하셨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놀란 눈으로 플로라를 바라보았지만 플로라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감고 돌을 던지면 열에 아홉 번은 신학자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와 거의 마찬가지로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건 그냥 주워들은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론이 근본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지탄 을 당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나는 성 나자리의 이론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주님이 천국으로의 문을 따로이 만들었다는 것은 이 세계 전체를 인간에게 창조하신 그 뜻과 상치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내가 묻고자 하는 것도 그것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잠깐 주저했지만 곧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나는 속에 성기 몇 구가 차려진 벽돌 건물이 사람을 구원하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속의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그 대답을 알게 된다면 나는 펠라론 게이트만이 천국으로 통하는 문인지 모든 사람들이 이미 천국으로 통하는 문인지 알 수 있겠지요.”
그녀 스스로 신앙인이 아님을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라는 이 대담한 신부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욱 대담한 말에 얼굴을 약간 굳혔 다.
플로라가 파킨슨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작, 법황청의 다른 장소에서는 부활의 법황이 오래간만에 만나는 추기경과 더불어 신부에 대한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수주의자군?”
“예. 그래서 그에게 핸드건을 주는 것에도 별 무리가 없었던 거지요. 그는 그것의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잘 쓰고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그냥 재미있는 장난감을 대하는 정도입니다. 그 강력한 무기를 무기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그는 율리아나 공주의 일을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기는 투쟁하는 자의 선택이고 투쟁하는 자의 9할은 겁쟁이지. 용감한 자로군, 그 신부.”
퓨아리스 4세는 이렇게 파킨슨 신부를 우대하고는 곧 그를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그리고 난 용감한 자들이 싫어. 다벨의 그 미친 녀석도 그렇고.”
“휘리 노이에스 말씀이십니까.”
“그 녀석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어떻던가, 핸솔 추기경? 다림에서부터 이곳까지라면 대륙을 거의 가로지른 정도의 여정이었잖아. 그 동안 많은 이야 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만 별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드리고 싶은 말은, 여행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드러나지 않은 것의 드러난 흔적도 찾고자 한다면 패스파인더를 고용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패스파인더는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데려다주지만, 그 때문에 패스 바깥에 있는 것과는 제대로 접촉도 할 수 없더군요. 어쨌든 유력자들과 만나볼 기회는 전혀 없었습니다.”
“흐음. 나도 장소가 아닌 패스 위에서만 사는 패스파인더에 대해서는 좀 들어봤네.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좋아. 피곤할 테니 가서 쉬게.”
“저, 그런데 파킨슨 신부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말씀드렸듯이 그는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만.”
“곤란한 질문이야. 사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대드래곤은 아무런 협박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 않으면’이 없다는 거지. 그리고 그것은, 내 판단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아예 처음부터 ‘그렇지 않으면’이 없다는 거지.”
“아예 없다고요?”
“그래. 나는 그가 사용한 권고라는 단어가 매우 마음에 걸려. 보통의 인간 외교관 나부랭이가 그런 말을 사용할 때면 어렵지 않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 하지만 라오코네스는,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구하고 있네. 참 어렵군.”
핸솔 추기경은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그는 파킨슨 신부를 그 안에 들어가게 해주고 싶었다. 그 자신이라면 그런 생각은 떠올릴 수도 없었을 테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추기경은 더욱 그의 의도를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부채감일 수도 있고 의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감정이었다. 10년 동안 오지에서 고생해 온 신부에 대해 고위성직자가 가지는 동정심이라면 가장 단순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은 학자였고, 그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삼는 일에도 익숙했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자신이 무엇 을 원하는지 짚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그다지 고상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진실인 소망이다. 주여. 저는 파킨슨 신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 다. 당신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추기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만, 성하께선 신도가 그곳으로 들어가길 원할 때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법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지들 중 누가 그러겠다면 당연히 말릴 테고. 이것은 대드래곤의 말이네. 이 말도 퍽 마음에 걸리는군………… 일단 플로라의 말을 듣고 나서 결정하겠네. 플로라가 그를 만나고 있지. 그리고 그래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그를 직접 상대해 봐야 할 테고. 젠장. 난 그런 작자들이 준비해 오게 마련인 선물들이 싫은데.”
핸솔 추기경은 빙긋 웃었다. 그가 누구라도 신앙의 주인이자 신의 사도인 법황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신학적 수수께끼들을 한 보따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법황이 그것을 싫어하는 까닭은 그 질문들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눌러보겠다는 불손한 의도로 준비된 것일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기경이 알기로 파킨슨 신부에겐 그런 의도가 없다.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가 질문할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건 성하를 핏빛 토론장으로 끌어들여 난도질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진짜 궁금 해서 준비한 질문일 겁니다.”
퓨아리스 4세는 신음을 흘렸다.
“그건 더 무서운데.”
누워 있던 세실리아는 시트를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인데도 불구하고 단숨에 승강구 계단을 뛰어오른 세실은 입구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어둠이 가득 깔린 뒷갑판을 향해 상체를 내밀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잠이 안 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하라구. 도대체 어떻게 해가 두 번 뜨냐!?”
세실의 고함은 고요한 밤바다 위에서 꽤나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잠시 후 어둠 저편으로부터 한숨 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리아.”
“응? 왜, 말해 줄 거야? 응?”
“자.”
그냥 ‘자’뿐이었다면 세실은 코방귀를 뀌거나 더 큰 고함을 내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는 차가운 번득임이 동반된 것이었고 세실은 그것이 칼 집에서 뽑혀나온 복수의 칼날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목소리는 이물 쪽에서 들려오는 것이므로 세실은 복수의 칼날을 보지는 못했 다. 하지만 마법장이 극도로 억제되는 느낌은 정확히 그녀를 찾아들었고, 그래서 세실은 신음을 내며 문을 도로 닫아야 했다.
선수에 앉아 있던 키는 달빛에 복수를 비춰보고는 손수건으로 그것을 닦기 시작했다.
돛은 펼치지 않았지만 라이트버드호는 꾸준한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배 아래에서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살아 있는 물 스팻 때문이다. 하지만 키로서는 약간 기분 나쁜 항해였다. 분명 전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의 롤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경험에 위배되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뒷갑판에 앉아 있는 에름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작은 조정 막대에 손을 얹은 채 앉아 있었지만 사실 조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스팻이 알아서 배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작은 그저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일 뿐이었다.
에름 후작은 배 맞은편, 그러니까 선수에 앉아 있는 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좀 웃기는 말이지만, 키 선장. 나는 흔들리지 않아서 멀미가 날 지경이오.”
고요한 밤바다 위였기 때문에 말소리를 높일 필요는 별로 없었다. 키 역시 조용히 말했지만 그 대답은 배를 가로질러 후작에게 잘 들려왔다.
“불편하군.”
“어쩔 거요? 이 축축한 친구를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이오?”
출입문 뒤쪽에서 숨죽인 웃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고, 그래서 에름 후작은 세실이 문 뒤에서 엿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키는 별 웃음 기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다. 떠나지 않는군. 열린 바다로 나오면 도망칠 거라 생각했는데.”
“흐음. 야생동물이라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러지 않으니, 지성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러니 국왕과 국왕이 아닌 자를 구별하면서 보물의 파수꾼 노릇을 하는 거지.”
“제국은 당신 때문에 더 골치 아파지겠군요. 이제 당신은 바람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배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 스팻이 자유호를 움직이게 된다면 그거 정말 무시무시하겠는데.”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름 후작은 이대로 침묵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이왕 던져본 미끼를 이용해 볼 것인지를 놓고 잠깐 고민했다. 하지 만 결국 그가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비합리적인 이유에서였다. ‘뭐, 라이온의 말대로라면 마음에 안 드는 질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지야 않겠지.’ “이런 막강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어떻소. 키 드레이번. 다시 폴라리스로 돌아갈 거요?”
그의 예상대로 키는 복수를 휘두르며 ‘내일은 내가 결정한다!’ 등으로 외치지는 않았다. 다만 밤바람을 닮은 목소리로 나직이 대답했을 뿐이다. “오스발을 죽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에름 후작은 한숨을 쉬었고 승강구 쪽에서도 그 비슷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후작은 고개를 들어올리다가 아예 뱃전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곤 두 팔을 뱃전에 걸치고는 밤하늘을 향해 말하듯이 말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그 노예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율리아나 공주를 빼돌렸지.”
“글쎄. 내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대답에는 이런 비고가 붙어 있는 것 같군요. ‘이것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알아두라는 의미에서 하 는 대답임.’내 느낌이 맞습니까?”
키 드레이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술이 난 에름 후작은 갑자기 키를 확 꺾어 키를 바다에 빠뜨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시도할 용기는 별 로 나지 않았다. 키가 바다에 빠져 죽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만일 헤엄쳐 올라온 키가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한다면 그것은 그로서는 퍽 달갑잖은 상 황인 것이다. 라이온의 말대로라면 키는 똑같이 복수하는………… 싱거운 상상을 계속하던 에름 후작은 문득 어떤 생각 하나를 포착했다.
후작은 뱃전을 베고 있던 머리를 앞으로 들어 선수 쪽을 향해 말했다.
“그가 당신을 위협하는 거요?”
“뭐?”
“오스발이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를 죽이려드는 겁니까?”
“터무니없는 소릴 하는군.”
이번에도 후작은 키의 대답에서 조금 전과 같은 비고가 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후작은 자신의 생각을 그 스스로 지지하기 어려웠 다. 노잡이 노예였던 오스발이 어떻게, 왜 제국의 공적 제1호인 키 드레이번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게다가 후작은 짧은 기간이나마 오스발을 알고 있었고 그가 아는 오스발은 그런 추리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키 드레이번이 카밀궁을 급습한 밤, 오스발은 그 스스로 본관에서 걸어나 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라이온의 말에 의하면 키 드레이번은 똑같이 돌려주는, 말 그대로의 복수자다. 사랑에 사랑을 돌려주고 죽음에 죽음을 돌려주는. 왕위에 왕 위를 돌려주고 왕국에 왕국을 돌려주는………… 폴라리스? 그렇다면 그의 주위의 누군가가 새로운 나라를 원했던 것일까?’
마음속의 또다른 자신으로부터 ‘농담도 적당한 품격은 유지해야지, 그렇잖으면 광언이잖은가’ 어쩌고 하는 내용의 야유를 들으면서도 에름 후작은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라이트버드호를 조종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고요하고 무료한 밤바다 위인 것이다. 공상에 잠기기엔 딱 적합한 상황 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후작은 마음껏 공상했다.
파킨슨 신부는 방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침대에 몸을 누인 채 그 모습을 보던 데스필드는 결국 넌더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젠장, 가만 앉아서 생각 못하쇼? 보는 본인 정신 시끄럽잖아.”
“눈감아.”
“뭐요? 드디어 법황 성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요?”
파킨슨 신부는 두 손을 머리 옆까지 들어올려 강하게 두 번 휘저었다. 그러곤 의자 위에 몸을 던지듯이 주저앉았다. 다리를 꼬아올린 신부는 그 위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면서 말했다.
“라오코네스.”
“라오코네스?”
“그 대드래곤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왜 펠라론 게이트에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일까?”
“미노 만까지의 패스파인딩이면 돈 많이 들 거요.”
“가서 물어볼 생각은 없다. 어쨌든 당장은 말이야.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게 된 다음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추리를 할 때다. 대드래곤이 왜, 왜, 왜 그랬을까?”
“본인이라고 그 이유를 알 수, 수, 수 있겠소?”
“내 추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이놈아. 잠자코 네 방으로 가서 잠이나 자라!”
“아까도 나왔던 말이지만, 아무래도 당신을 겨냥한 말인 것 같지 않소?”
“뭐?”
데스필드는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사실 그 역시 라오코네스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의뢰주인 벌쳐는 파킨슨 신부가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도록 도우라고 했고, 라오코네스는 아무도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이런 기상 천외한 일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성 없는 사건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라오코네스 당신 말이오. 어떤 당신이 거기 들어가는 것을 라오코네스 당신이 싫어한다면,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그만이었을 거요. 거기 들 어가고 싶어하는 당신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일부러 이곳까지 날아와서는 법황 당신에게 말했소.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당신은 다른 당신이 아닌 바로 당신이 거기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어서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 것 아닐까요?”
데스필드가 말한 마지막 문장은 그의 괴상한 화법의 극치라 할 만한 것이었지만 오랜 단련을 거친 파킨슨 신부는 별 무리없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 다.
“합당한 추리야. 하지만 녀석이 왜 나를 저지하고 싶어하는 거지? 아니, 잠깐. 그럼 그냥 내 앞에 나타나서 말하면 되잖아?”
“응? 그야 간단히 설명될 수 있지. 당신이 말한 것에 따르면 당신은 800년 전의 약속 때문에 제국의 땅을 밟지 않으려 한 것이오.”
“아, 그렇군. 그때쯤이면 나는 페인 제국에 있었고 나에게 뭘 말하려면 라오코네스는 제국 땅을 밟아야 했단 말이지.”
“그렇소. 그리고 대드래곤 당신의 자존심도 있었을 테고, 당신 같은 일개 신부보다는 법황 당신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근사하잖소.”
“흐음. 이해되는군. 그것이 일몰의 제왕다운 처신이란 말이지? 제왕이니까 법황 성하를 상대로 말한다 이거로군. 하지만, 제길, 건방진 자식 같으니 라고. 자기가 뭐라고 교회나 신부의 일에 간섭한단 말이냐!”
파킨슨 신부는 이렇게 존대와 하대를 동시에 사용해 가며 듣고 있던 데스필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데스필드는 혀를 빼물어 보인 다음 말했다. “대드래곤 당신에겐 간섭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나 보지. 어쨌든 800년 만에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미노 만에서 나올 정도니까 꽤 중요한 이 유일 거요. 젠장,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당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도 몰랐겠지.”
“그렇지?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런데 그 이유가 뭘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800년의 시간과 이 넓은 대륙을 가로지르게 만들었을까?”
“이유야 알 수 없고, 상관없잖소?”
“상관없다니?”
“어쨌든 본인이 보기에 상관은 없는 것 같은데. 라오코네스 당신은 당신더러 답을 찾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어. 아무도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지 말 라고 했지. 그런데 당신이 원하는 건 답을 찾는 거지. 펠라론 게이트는 답을 찾을 수 있는 한 가능성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었어. 맞소?”
“그래. 그렇다.”
“그럼 당신은 적극적인 방해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러니 그만 끓이고 뚜껑 열고 김 빼쇼.”
“하지만 내가 거기에 들어가야 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만하고 주무쇼. 내일 성하 당신을 만나봐야 되잖아. 이런, 젠장. 본인이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만, 그래도 법 황 당신을 알현하게 된 신부가 도대체 뭐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요?”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 내일 성하를 알현하지? 네 말이 맞다. 이런 경우라면 알현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로 머리가 꽉차있어야 되지. 그런데 그 자식이 왜 그랬을까?”
“으윽. 신부님 당신!”
데스필드는 야유 삼아 베개를 집어던졌고 파킨슨 신부는 껄껄거리며 그것을 피하고는 말했다.
“주여, 나의 대적이 어찌 이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데스필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 위를 한 바퀴 굴러 방바닥에 섰다.
“기도하고 주무시오. 본인은 가보려오.”
“알았다. 잘 자라.”
데스필드는 신부에게 인사를 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닫고 나온 데스필드는, 그러나 어딘가로 걸어가는 대신 복도 옆의 창문을 향해 걸어갔 다.
그들이 유숙하고 있는 곳은 벨타온 저택이었다. 추기경의 저택이나 교회, 혹은 수도원이 아닌 법황청의전관의 저택에 그들을 묵게 한 것은 여러 가 지로 재미있는 의미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천장과 바닥만 있으면 만족이라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그 의미를 짚어낼 수 있었다. 법황청 의전관 자몬 벨타온은, 법황청의 일을 맡고 있지만 성직자는 아니며 따라서 완전한 교회 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는 파킨슨 신부를 억류할 생각이 없음’을 나타내는 예의바른 제스처일 것 이다. 혹은 그 반대로 ‘파킨슨 신부는 교회 내에 속하지 않음’이라는 좀더 강렬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데스필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 다. 이 경우엔 천장과 바닥이 있으면 만족이라는 파킨슨 신부의 태도가 차라리 속 편하다.
데스필드는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 배낭을 뒤진 다음 서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약속 시간이 가깝다.
서재에서는 자몬 경과 몇 명의 사람들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몬 경은 데스필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가볍게 웃었고 데스필드는 눈인사를 보낸 다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몬 경은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죽 소개했고 데스필드는 웃으며 그 이름들을 모두 잊어먹었다.
“피곤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소?”
하인이 다가와서 데스필드의 옆에 섰다. 데스필드는 술 이름을 하나 말한 다음 가볍게 손을 풀었다.
“거덜나는 흔적이 보이거든, 본인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알아서 쫓아보내 주시길 바라오.”
테이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가볍게 웃었다. 서 자몬은 게임의 이름을 말했고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자몬은 다시 한 번 웃은 다음 날렵한 솜씨로 셔플한 다음 카드를 돌렸다.
데스필드는 차분한 눈으로 카드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엉뚱한 것에 정신을 팔고 있는 파킨슨 신부와는 달리 내일 있을 법황과 신부의 회견을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