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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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5화


파도가 스스로에 복상하는 해협, 페리나스.

페리나스 해협의 바닷물은 검푸르다. 대륙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이 해협에는 갈매기도 없기 때문에 해협의 양안에 늘어선 검은 바 위들에 파도가 부딪힐 때만 가끔 이 쓸쓸한 해원에서도 흰빛을 찾아볼 수 있다.

페리나스 해협의 검은 해안에 흰빛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은, 먹구름 사이로 마치 잘못 찾아든 것 같은 햇살이 내리떨어졌을 때였다.

흰 머릿결의 남자가 해안가 바위 위로 오르고 있었다. 셔츠와 바지의 단순한 차림새고 신발은 신지 않았다. 사내는 맨발로도 익숙하게 바위들 위를 건너뛰고 있었다.

높은 바위 위에 선 사내는 열린 바다를 노려보았다. 사내의 발 아래에서 거대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쏴…………루루루룽.

별 특색 없는 사내에게서 특색을 찾을 수 있다면 왼쪽 귀 아래에서 입술 근처까지 달리고 있는 흉터가 그것이다. 그 외에는 벗은 맨발이나 드러난 팔 다리 모두 보통 선원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흰 머리카락은 노쇠의 증거라기보다는 원래 그런 색깔인 듯했다. 사내는 꿈틀거리는 수평선 을 노려보았다.

쏴…………루루루룽.

파도가 다시 솟구쳤다. 그리고 그 파도 소리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왔는가.”

목소리는 명확했지만 해안가에는 사내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대신 사내는 파도를 향해 말하듯이 입을 열 었다.

“이리 나와라.”

바닷물이 거세게 물러났다.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파도가 벽을 형성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다 밑바닥이 드러났다. 흰 머리의 사내는 드러난 수십 피트 아래의 해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그것’이 누워 있었다.

죽음을 죽이는 죽음, 그림자를 감추는 그림자. 하지만 지금은 끔찍한 열기로 이루어진 암흑이었다. 그의 주위의 땅은 이미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고 바다 동물들의 시체와 뼛조각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멋모르고 다가왔던 물고기들은 채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타죽었을 것이다. 바닷속에서

그것은 바닷속에서도 끊임없이 해저를 불태우고 있었고 이곳을 항상 뒤덮고 있는 거친 파도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끓여올리고 있는 물거품이 이 해 원을 요란하게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열기에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일 것이다. 형체에서 일탈하고 모습을 드러낼 빛조차 가지지 못한 그것은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열기에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구울의 왕자는 해저에 누워 있었다.

파도가 모두 물러나자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수증기가 왈칵 피어올랐다. 4, 50피트 높이에 있는 백발 사내에게까지 열기가 치솟아올랐기에 사 내는 눈살을 찡그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아직모습을드러내고싶지않음을분명히했다따라서너의용건이중요한것이아니라면너는죽으리라발도로네스.”

발도 로네스는 시체처럼 누워 있는 구울의 왕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내 용건의 경중은 내가 판단한다. 너에게 도움을 부탁한 적은 없는 것 같군.”

“발칙한놈.”

구울의 왕자가 노성을 지른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어둠이 해안을 내리덮었다. 그것을 밤처럼 어둡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눈 밝은 밤새라 하더라도 이런 어둠 속을 비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 어둠 그 자체인 어둠이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를 습격하여 그것을 옭아매는 암흑, 판데모니엄의 암흑이다.

하지만 발도 로네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언짢은 듯이 말했다.

“어둡군.”

다시, 쓸쓸한 해변.

구울의 왕자는 여전히 시체처럼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다시금 파도는 해협을 가로지르며 으르릉거렸고 바람은 그 위를 질주하며 포효했다. 발도 로네스는 문득 조금 전엔 그런 소리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울의 왕자가 일으킨 암흑은 소리마저도 덮고 있었다.

벽을 이룬 채 구울의 왕자를 둘러싸고 있던 파도 속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내가정확히 찾았다는사실이저주스럽군공포를모르는자여.”

필마온 기사단장은 무심한 태도로 흐트러진 머릿결을 쓸어올렸다.

“글쎄.”

“네놈이나의선택이아니었던들너에게우주그자체를얼어붙게할공포를가르쳐주었을것이다.”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너를 찾아온 것은 아니다, 직스라드.”

“그이름으로나를부르지마.”

구울의 왕자는 눈을 부릅떠 발도 로네스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벽을 이루고 있던 파도는 끓어오를 틈도 없이 수증기가 되어 솟구쳐올랐고 필마온 섬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르릉거렸다. 먹구름들이 갑자기 찢어질 듯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구름 속에서 뇌전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천둥이 울려퍼졌다.

꽈르르르 ・릉!

다시 뇌전의 번득임, 공기가 빠르게 움직였다가 강하게 죄어든다는 느낌, 이윽고 벼락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런 식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하늘과 바다가 흰 화염으로 이어졌다. 다시, 우레, 꽈광쾅쾅쾅! 수십 개나 되는 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자랐고 망막에 그 모습을 남 기자마자 시들어가는 가운데 먼바다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도 로네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면 너도 서 발도라고 불러라. 직스라드.”

해저에 드러누운 이제는 수증기가 수의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구울의 왕자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잠시 이어진 침묵은 마치 어이없어하는 구울의 왕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판데모니엄의하이마스터에게인간들에게만의미가있는존칭으로불려지길원한단말이냐그토록자존심을모르는멍청이였느냐.”

“나는 원한다.”

“좋아서발도.”

“알았어, 프린스.”

쏴아아-.

먼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시원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천둥과 번개는 사그라들었다. 필마온 섬 전체를 흔들었던 진동 때문에 바다가 사납게 으르 릉거리고 있었지만 이곳의 바다는 원래 사납기 때문에 그것조차 별로 눈길을 잡아둘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발도 로네스는 처음 바위 위에 올 라섰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구울의 왕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발도 로네스의 질문은 그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무관하다는 구울의 왕자의 증언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이름을 불리는 것을 왜 싫어하는가?”

“이름이파도소리나새지저귐과비슷한것이라고생각하는가이름은보통소리가아니다네가이름을부르는순간지옥의마귀들은그소리를듣는다그리고나의 위치를알아낼것이다.”

그리고 그 마귀들은 약화된 그들의 지배자를 습격할 것이다. 발도 로네스는 구울의 왕자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판데모니엄의 마귀들이 그 의 섬으로 찾아오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고 생각했다. 발도 로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이곳에서는 안전하니 숨겨달라고 한 것은 너였다.”

“안전하다그러나이름은안돼.”

“알았어. 그렇게 알아두지. 프린스.”

“찾아온용건을말하고빨리꺼져라나는더쉬어야한다.”

“휘리 노이에스의 정벌이 중단되고 있다. 최근 그는 폴라리스에서도 물러났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면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점령했던 그 휘리와 조그마한 폴라리스조차 어떻게 못하고 물러난 휘리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다. 이것이 네가 말하던 그 기회인가?”

“아니다.”

“설명해.”

“설명따위하지않는다아니다네기회는아직멀었다.”

“그럼 그 기회라는 건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거지?”

“내가회복했을때다얼간아.”

“회복했을 때?”

“그렇다그러니네놈이이렇게조바심부리며내회복을늦추면늦출수록너의기회또한멀어지는것이다알았으면당장꺼져라.”

“조바심 부린 적 없다. 나는 처음 찾아오는 거니까.”

발도 로네스는 비꼬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구울의 왕자는 다시 침묵한 다음 거친 방식으로 대화를 마무리지 었다. 무슨 신호도 없이, 물러났던 파도들이 다시 돌아와 구울의 왕자를 덮고 드러난 해저를 감추었다.

발도 로네스는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스리우드 선장은 망원경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초조해하는 얼굴로 스리우드 선장과 수평선을 번 갈아 바라보았지만 맨눈으로는 라트라인 항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스쿠너를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루미나는 입을 열었다.

“스리우드 선장님?”

“라이트버드호입니다. 마님.”

“그래요? 어디, 후작님도 보이나요? 예?”

“예. 보입니다.”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탄성을 질렀다.

“아아! 그럼 안전하신가요? 후작님은 아무 이상 없으세요?”

“아무 일 없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미간을 찡그리며 스리우드 선장을 바라보던 이루미나는 그제서야 선장이 매우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발견했다. 스리우드 선장은 마치 못 볼 것 을 본다는 듯한 얼굴로 망원경을 뗐다가 다시 눈에 붙였다. 그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원경을 눈에 붙인 채 그런 동작을 취하자 바라보고 있던 이 루미나는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그때 스리우드 선장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망원경을 내밀었다.

“저, 직접 보십시오. 도저히 말로는 뭐라 못하겠습니다.”

이루미나는 냉큼 망원경을 받아들고는 수평선에 있는 스쿠너를 향해 돌려대었다. 그러곤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이리저리 휘두르던 망원경에 에름 후작의 얼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에름!”

망원경 속에 떠오른 후작의 얼굴은 일단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기에 이루미나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이루미나는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후작은 아무래도 갑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어쩐지 맥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고,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은 뭔가에 대해 한심스러워하는 듯한 자세이기도 했다. 이루미나는 망원경을 조심스럽게 움직 였다.

렌즈를 아래로 내리자 이루미나는 후작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액체를 발견했다. 이루미나는 당혹한 얼굴로 망원경의 배율을 조정했고, 잠시 후 수면에서 솟아오른 물기둥이 후작의 몸을 휘어감고 있는 황당한 광경을 발견했다. 이루미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망원경을 눈앞에서 치웠다. 그리고 그때 라트라인의 앞바다에 떠 있던 라트랑 군함들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 크라켄? 아냐, 바닷물인데?”

“마법이다! 저 마녀가!”

“잠깐! 모두들 닥쳐, 저건, 스팻이다. 살아 있는 물이야!”

라트라인의 해안선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라트라인 시민들도 모두 비명과 감탄, 의문성 등 다채로운 소음을 뿜어올렸다. 라이트버드호는 항 구 앞쪽에 전열을 갖추고 있는 선단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고 에름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그 유명한 스쿠너에 타고 있 는 것은 아니었다. 에름 후작은 라이트버드호의 좌현 쪽 바다에서 솟아오른 스팻의 손(그렇지 않으면 발?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에 의해 사로잡힌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트버드호의 이물에는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선수에 발을 올린 채 선단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때 키 드레이번이 확성기를 들고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라이트버드호와 후작은 정지했다. 군함들에 타고 있던 수병들과 항구 쪽에서 바라보던 시민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속에서 키 드레이번은 확성기를 입 쪽으로 가져와서는 외쳤다.

“포환이나 화살이 날아오면 에름 후작은 익사한다. 스팻이 그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갈 테니까.”

스팻에게 붙잡혀 허공에 들려져 있던 후작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어쨌든 수영을 못해서 익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팻이 익사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 약점이 재확인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는 다시 선단을 향해 외쳤다.

“책임자 나와라.”

스리우드 선장은 후작 부인에게 짧게 목례한 다음 확성기를 들어올렸다.

“이루미나호의 선장 스리우드다.”

“꽁무니를 따라오던 그 친구군.”

·그렇다, 이 자식아! 그게 네 재주가 좋아서 그랬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마! 이런 전함이 아니었다면 네 녀석이 내게서 그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 었을 것 같으냐! 엉? 게다가 네놈이 타고 있는 배는 3L의 배였단 말이다! 결국 그 추적이 실패한 것은 네놈의 배와 내 배의 구조적 차이 때문이란 말 이다! 그러니까 잘난 체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갑작스럽게 토해진 불 같은 노성에 라트라인 앞바다가 고요해졌다.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황당한 얼굴로 스리우드 선장의 옆얼굴을 바라보았고 도 노반 일항사는 서글픈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는 자신의 선장을 좀 덜 약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약올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씩씩거리고 있는 스리우드 선장을 향해 키의 대답이 돌아온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잡담이 너무 길다. 스리우드 선장. 그 옆의 여자는 후작 부인인가?”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다시 고함을 내지르려는 스리우드 선장에게서 확성기를 나꿔챘다. 그러고는 이루미나호의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며 외쳤다. “그래요! 후작님은 안전한 거죠,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번은 그 질문에 왼쪽을 흘끔 쳐다보았고 스팻에 붙잡혀 있던 에름 후작은 손을 몇 번 흔들었다. 이루미나는 기쁜 마음에 열렬히 손을 마주 흔들었고, 그래서 하마터면 확성기를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그것을 다시 움켜쥔 이루미나는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말했다.

“요, 요구 조건이 뭐지요?”

“오스발과의 교환을 원한다.”

오스발이라는 이름은 이미 라트랑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키 드레이번의 카밀궁 습격 당시의 이야기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트라 인의 시민들과 선단의 수병들은 라트랑 후작과 노예 한 명을 교환하자는, 이 인질범의 요구 치고는 퍽이나 검소한(?) 요구에 상당한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루미나 후작 부인이 대답했을 때 그들은 아예 까무라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되나요?”

키 드레이번조차도 잠깐 동안 말을 잊은 채 이루미나호를 바라보았다. 고물 쪽의 뱃전에서 조종 막대를 쥐고 있던 세실은 딸꾹질 비슷한 소리를 내 었고 스팻에 의해 허공에 들려져 있던 에름 후작은 어이없는 얼굴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러니까, 이루미나, 예, 좋아요. 모름지기 생명이란 그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소중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거라면 난 찬성하겠어요. 그래도 나 역시 특별히 고상한 인간은 못 되는지라 좀 서운하기도 하다는 거 고백해야겠군요?”

“아니, 이런 그런 게 아니예요, 에름! 전 당신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는 거 모르나요?”

“사랑하는 이루미나, 미안해요. 그리고 그런 것을 받을 수는 없지요. 뭔가 불가능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없어요!”

키 드레이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다시 확성기를 들어올리며 빠르게 물었다.

“무슨 말인가?”

“당신이 레갈루스를 떠났다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유리는 곧장 떠났어요. 당신이 틀림없이 돌아올 거라고, 그래서 도망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스발은 유리를 따라갔고요.”

“어디로!”

“몰라요, 정말 모른다고요. 유리는 나에게 말하지도 않고 떠났어요. 목적지를 말하면 내가 갈등을 겪을까 봐,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내가 후작님과 그 애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까 봐 아예 말하지도 않고 떠났어요!”

“배냐, 육지냐?”

“배예요! 배를 타고 갔어요. 스쿠너죠. 서 슈마허와 오스발, 그리고 몇몇 선원들을 고용해서 떠났어요. 하지만 그 애가 카밀카르로 갔는지 페리나스 해협으로 갔는지, 아니면 다른 어디로 갔는지는 정말 모른다고요!”

“염병할……”

키 드레이번은 이를 잔뜩 드러낸 채 이루미나호를 노려보았다. 그는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에름 후작을 노려보았고 에름 후작은 그 희번득거리는 시 선에 질려서는 창백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스팻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에름 후작을 묶어두고 있었고 그 물기둥의 표면 위로 흐르는 물 은 마치 에름 후작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땀처럼 보였다. 키 드레이번은 이를 갈면서 다시 눈앞에 떠 있는 라트랑 선단을 노려보았다.

이루미나호에서는 후작 부인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건 뭐든지 드리겠어요. 무엇이든지!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번!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 키 드레이번?”

“닥쳐.”

“그건 에름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유리가 멋대로 떠난 거예요. 저도 그 애가 떠난 후에야 알게 된 거예요! 제발, 키 드레이번 동정심을, 제발!” 키는 이제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떨구어 수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키 드레이번?”

이루미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외쳤지만 키는 라이트버드호의 선수상이나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키 — 드레이버 언? 키…………… 드레이번…………?”

키는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키는 고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라이트버드호는 아무런 바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병들과 선장들, 그리 고 구경꾼들은 모두 당황한 모습으로 그 불가사의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라이트버드호는 돛대를 중심으로 천천히 반전했고 잠시 후 그 스쿠너는 이 물을 먼바다 쪽으로, 그리고 고물을 항구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물을 향해 걸어가던 키는 결국 다시 이루미나를 향해 돌아온 셈이었고 그 광경을 보던 이루미나는 최면에라도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흥분과 공포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물기둥은 제자리를 지켰기에 에름 후작은 이제 배의 우현 쪽에 있게 되었다. 바닷속의 스팻이 이런 마법 같은 일을 실현시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작은 그 신비한 광경에 짧게 매혹되었다. 키는 세실이 쥐고 있던 조종 막대를 받아쥐며 말했다.

“세실, 바람!”

세실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강력한 바람이 라트라인 시내 쪽에서 외항 쪽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구경꾼들은 비틀거렸고 부두에 정박해 있던 라트랑 군함들도 크게 흔들렸다. 이루미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뱃전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그리고 라 이트버드호는 바람을 받아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에름 후작은 제자리에 있었다.

후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이트버드호의 고물을 바라보았다. 키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뒤돌아보지 않았고 라이트버드호는 빠르게 멀어지고 있 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스팻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키가 다시 일어났다.

키는 세실을 불러 조정 막대를 건네주고는 몸을 돌렸다. 짧은 순간 에름 후작과 키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지만 키는 곧 시선을 내려 그를 붙잡아놓고 있는 물기둥을 향해 말했다.

“바다의 공주에게로, 가라.”

스팻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기둥은 에름 후작을 붙잡은 채 이루미나호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이루미나호에서는 그 모습을 보던 후작 부인이 기쁨의 비명을 올렸다. 

“에름!”

다음 순간 이루미나는 옷을 벗어던지며 뱃전에 뛰어올랐다.

스리우드 선장과 도노반 일항사, 그리고 이루미나호의 수병들 전부가 턱이 쑥 빠진 모습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이루미나는 뱃전을 차며 날아올랐다.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바다에 뛰어든 이루미나는 잠시 후 물 위로 떠올라서는 맹렬한 속도로 헤엄쳤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물보라와 함께 아름다운 은빛 꼬리가 번득였다. 이루미나는 눈깜짝할 사이에 에름 후작에게 도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루미나가 놀랄 차례였다.

“에름?”

에름 후작은 수면 위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작 자신도 스스로의 상태에 꽤나 놀랐는지 얼이 빠진 얼굴로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이루미나?”

“에름!”

이루미나가 먼저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에름 후작은 엉겁결에 마주 손을 내밀었다. 아내와 남편은 곧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그런 모습에 크게 놀랐다. 이루미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에름 후작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당신, 빠지지 않나요?”

에름 후작은 물 속에 ‘서’ 있었다. 모습은 그렇게 보였지만 분명히 ‘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름은 마치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꼿꼿이 서서는 물 속에 떠 있는 그의 아내를 껴안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아내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고 이루미나의 긴 꼬리는 그의 다리를 살짝 휘감고 있었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물 속에 서 있었고 한 머메이드는 물 속에 떠 있었다. 에름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예, 이루미나. 이 스팻이 나를 받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음?”

에름이 먼저 깨달았고, 곧이어 이루미나도 깨달았다. 이루미나는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지만 물 속에 꽂꽂이 서 있을 수 있었던 에름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이루미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 에, 에름. 저를?”

“안을 수 있어요……… 바닷속인데… 바닷속에서!”

에름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에름 후작은 이루미나를 확 끌어당겼다. 그러곤 아내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희열에 차서 외쳤다.

“이루미나! 오, 주여. 이루미나!”

“에름, 에름, 에름!”

이루미나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혼란 속에서 남편의 이름만 되풀이 부르며 그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에름 후작은 곧 고개를 돌려 라 이트버드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루미나도 그를 따라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라이트버드호의 모습은 이미 꽤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그 고물에 서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사내와 여마법사를 볼 수 있었 다. 항구 쪽에서는 멀어지는 제국의 공적을 추적하기 위해 군함들이 돛을 펼친다, 닻을 끌어올린다 하며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에름 후작의 귀에 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목소리만이 귀 안쪽에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공주에게 돌려주겠다.’

그때 키 드레이번이 다시 몸을 돌렸다.

키는 돛대를 향해 걸어갔고 그 자리엔 이제 세실만이 남게 되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세실은 부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세실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그것을 힘차게 흔들었다.

에름 후작은 오른팔로 그의 아내를 껴안은 채 왼팔을 들어올렸다. 물론 빠지지 않았고, 그런 자신에 다시 희열을 느끼며 에름 후작은 왼팔을 힘껏 흔 들었다. 그의 팔을 따라 물방울이 크게 비산했다. 세실의 웃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에름 후작과 이루미나는 그것이 바람 소리거나 갈매기 울 음 소리였는지 확신할 수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도 라이트버드호는 하늘과 바다의 틈 사이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3년간의 길고 긴 결혼식이 마침내 끝나고 에름과 이루미나는 부부가 되었다. 항구에 선 무수한 구경꾼들이 보내는 박수 소리와 환호, 그리 고 파도 소리가 그들의 결혼 행진곡이 되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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