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3
3
바이서스 임펠의 거리는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다. 단단한 포석 위로 울려퍼지는 자신의 구두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샌슨 퍼시발은 불편한 심정으로 거리를 걸었다. 이 화려한 거리는 마주할 때마다 그 자신이 시골뜨기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칼 헬턴트를 따라 수도에 거주하게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왕좌를 걷어차고 궁성을 나가버린 ‘폐태자’ 길시언이 최강의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쓰 러뜨렸을 때 칼과 샌슨은 그와 함께 있었다. 길시언은 루트에리노 대왕에 이어 바이서스 왕가의 두 번째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으며, 그 싸움의 끄 트머리에서 장렬하게 사망함으로써 300년 전 사망한 루트에리노 대왕과 완벽한 공통점을 이루고 말았다. 죽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것이다.
비교적 짧지만 어떤 기나긴 모험보다도 더 강렬한 모험을 거친 두 사람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수도로 들어서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드래곤 슬레이어의 탄생에 환호했으며, 그와 함께 호흡했고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으며 그의 전설의 산 증인인 두 사람에게도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환호 를 등에 진 채 두 사람은 정치권의 핵심부를 향해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시언의 유언을 조용히 실천 하고 있었다.
지금 바이서스라는 한 나라의 구조를 재편하려는 야심가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입지도 세력도 배경도 갖추지 못한 칼에 비해 볼 때, 샌슨은 단 한 가 지 나은 점이 있었다. 그는 칼에게 기댈 수가 있다. 두 사람은 맨손으로 길시언의 유지를 잇고 있는 것이다.
샌슨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으며, 야심이라는 면에 대해서는 담백한 편이었다. 칼이 걷고 있는 길을 이해했지만 그것을 평 가해 본 적은 없다. 칼과 함께 바이서스를 개조하는 일에 매달려 있지만 그것을 일생의 목표라든가 숭고한 가치로 여겨본 적도 없다. 샌슨은 오로지 친구인 길시언의 뜻을 존중하고 동향인 칼을 돕고 있을 뿐이었다. 비교적 단순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사내인 샌슨은, 그러나 오늘 바이서스 임펠의 번화가에서 괴로웠다. 바이서스의 수도이자 마법사 길드가 있는 명실상부한 대륙 최대 번화가를 걷고 있는 시골 출신 청년이 당연히 느낄 만한 불편 함에 덧붙여 또 다른 괴로움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어! 퍼시발 씨. 좋은 날이군요. 그런데 왜 가짜 수염을 붙이셨습니까?”
“예. 아, 뭐……”
“어머, 샌슨 씨! 까르르! 왜 안대를 하셨어요? 눈에 뭐가 나셨나요?”
“아아, 그냥……”
“어라, 샌슨 아닌가? 그런데 왜 그렇게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건가? 다리가 아픈 건가? 괜찮다면 내 마차에 타게나.”
“신경통이 조금…………”
잠시 후 샌슨은 넌덜머리를 내며 지나가는 거지에게 자신의 변장 도구 일체를 줘버린 다음 허리를 펴고 걷기 시작했다. 그토록이나 완벽한 변장이었 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지에 대해 퍽이나 신기해하며 잠시 후, 샌슨은 대로에서 조금 들어선 위치에 있는 가게의 입구에 당도했다.
가게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행인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물건들을 늘어놓고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게 앞의 판매대와 상자들에는 각양각색의 과일들이 즐비했다. 이 계절 이 지방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굉장한 과일들의 모습은 바라보는 사람들을 얼빠지게 만들 만 했다. 그리고 가게 뒤로는 상당히 거대한 창고가 붙어 있었으며, 샌슨이 바라보는 중에도 수많은 수레들이 창고로 들락거렸다. 샌슨은 수레마다 실려 있는 각종 과일들에 순박하게 감탄하며 가게로 들어섰다.
작은 가게 안은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를 놓을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일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다. 의자에는 의외로 젊은 주인이 방만한 자세 로 앉아 있었다. 샌슨은 파인애플과 사과 사이를 지나치며 바나나 상자 뒤의 책상에 앉아 있는 가게 주인에게 인사했다.
“여어, 나 왔다.”
“아아.”
주인은 간단하게 아는 척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샌슨은 아직도 자신의 신비한 경험 때문에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샌슨은 주인의 책 상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오면서 있었던 일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과일 가게 주인 자크는 샌슨에게 사과 하나를 던져주며 말했다.
“오거가 변장한다고 엘프가 될 리 있소?”
“내가 엘프로 변장한 거냐? 사람으로 변장했지.”
“……관둡시다. 다음부터는 변장하지 말고 그냥 찾아와요. 샌슨이 나 만나는 거 모르는 녀석이 어디 있다고.”
“다 안다고?”
샌슨은 경악한 표정으로 자크를 마주보았고 자크는 이제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의자를 비스듬하게 뒤로 기울인 자크는 복숭아 상자 위에 두 다리를 얹어놓고는 옆의 책상에서 장부를 집어들며 말했다.
“댁이 과일 사러 여기까지 온다고 믿을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소?”
“큰일이군. 빨리 칼에게 말해야겠어.”
“쳇. 칼은 이미 알 거요.”
자크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펜을 들어 장부에 뭔가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자크가 글을 쓰기 시작하자 샌슨은 즉시 입을 다물고는 자두가 가득 쌓 여 있는 판매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가게의 입구로 젊은이 한 명이 들어섰다.
“자크 사장님, 저 왔습니다.”
자크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젊은이를 흘긋 쳐다보았다.
“아아, 됐어, 클라크. 오늘은 부탁할 것 없네.”
“그래요? 그럼…………”
“오늘은 노는 날이라는 말이지. 속으로는 박수를 치면서 그런 칙칙한 표정 짓지 마라. 어서 가봐. 대신 내일은 좀 많을 것 같으니 일찌감치 와.”
“예, 사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클라크라는 젊은이는 얌전히 몸을 돌렸지만 자크의 말마따나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모양이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클 라크가 사라지고 나자 샌슨은 다시 자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저건 누구야?”
“빛의 탑에서 파견 나온 견습생이지요.”
“견습생? 소방서에서 화재 점검이라도 나온 거야? 하지만 과일 가게에 무슨 불날 일이 있다고……”
바이서스 임펠에 소재한 마법사들의 길드 ‘빛의 탑’은, 마법사를 목표로 하는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교육 기관이기도 하다. 이 길드의 교육 과정에는 수련생들의 소방서 파견 근무가 있는데, 수련생들은 실제로 마법을 응용해 볼 수 있고 소방서로서는 상당한 도움을 얻는 셈이다.
자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쓰는 애지요.”
“응? 네가 마법사는 뭐하러?”
“차게 보관해야 되는 과일들 때문에 저 녀석이 와서 과일 창고의 온도를 떨어뜨려 놓는 대신 나는 빛의 탑에 과일 몇 상자씩 납품하고.”
“히야, 그래? 너 장사 잘하는데?”
‘댁보다야 낫겠지, 오거 선생’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자크는 피식 웃었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나이트호크였잖아. 장사는 언제부터 배운 거냐? 원래부터 소질이 있었어?”
자크는 장부를 덮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잡소리 그만하고 일어섭시다. 조금 있으면 귀족가에서 저녁 디저트거리 사려고 우 몰려들 시간이란 말입니다. 요즘은 우리 가게 때문에 귀족가에 딸기 케이크 열풍이 불고 있지요.”
“으윽. 어쩐지 요즘은 들르는 곳마다 지겹도록 딸기 케이크를 내놓더라. 이유가 그거였군.”
샌슨의 웅얼거림을 뒤로 한 채 자크는 가게 한구석의 문을 열었다. 문을 나서자 작은 마당이었고 저편으로는 창고의 정문이 보였다. 샌슨은 뒤를 돌 아보며 말했다.
“어, 가게 비워둬도 돼?”
“뭐, 먹고 싶어서 가져가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어요. 가져가 봐야 얼마나 가져가겠어. 기껏해야 주머니에 몇 개 채워가겠지. 과일은 부피가 큰 물건 “이거든.”
아무 흥미가 없다는 듯한 자크의 태도에 샌슨은 매우 감동을 받았다. 샌슨의 감동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크는 줄지어 서 있는 수레들 사이로 휘적 휘적 걸어갔다. 샌슨이 얼핏 세기에 뒷마당에는 열한 대의 수레가 입고를 기다리며 늘어서 있었고, 열한 명의 수레꾼들이 각자의 수레 위에 앉아 지 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레 사이로 걸어가던 자크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한 대의 수레 옆에 멈춰 섰다. 수레꾼은 뭐라고 인사를 하려 했지만 자크는 아무 말 없이 수레의 포장을 들췄다. 강렬한 오렌지 향이 훅 풍겨나왔다. 샌슨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과일을 바라보았다.
자크는 오렌지들을 하나씩 집어보며 상자의 아랫부분까지 검사했다. 자크가 검사하는 동안 수레꾼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자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포장을 내렸다.
“많이 썩히지는 않았군.”
수레꾼은 기세 좋게 말했다.
“예, 자크 사장님! 눈썹이 빠져라고 달려온 겁니다요. 한번 다 꺼내보세요! 썩은 놈은 열 개도 안 될 겁니다.”
“그래? 제법이군. 수고했네. 다음에도 이렇게 해주게나.”
자크는 마주 웃어준 다음 창고로 걸어갔다. 샌슨은 잠시 애타는 눈으로 수레 위에 실린 오렌지 상자를 바라봄으로써 수레꾼에게 경계의 태도를 취하 게 만든 다음 허탈한 표정으로 자크의 뒤를 따랐다. 창고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자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돌아갈 때 좀 싸줄 테니 가져가요.”
“정말?”
“아아, 인심 쓰지 뭐. 보통은 반 정도는 썩어서 버려야 되는데 요즘은 희한하게 썩어서 버리는 것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이런, 녀석, 말하는 것 봐라. 버릴 것이어서 준다는 뜻이잖아.”
“말이 어쨌든 안 가져갈 것은 아니잖아요.”
“쳇.”
자크는 빙긋 웃으며 창고의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창고의 안쪽은 상당히 넓었다. 거의 반대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깊이인 데다가 3층 높이는 될 만한 곳에 천장이 있었다. 창고 안은 곳 곳에 늘어선 계단과 선반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꾼들은 수레에서 과일 상자를 내려서는 계단 위로 가지고 올라가거나 선반 위로 쌓아올리거나 하 고 있었다. 자크는 아무 어려움 없이 그 사이로 걸어갔지만 샌슨의 경우에는 고문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샌슨의 후각은 예민해졌 고, 그래서 사방에서 풍겨나오는 과일 향기에 생침을 삼켜야 했던 것이다. 꼴깍.
잠시 후, 자크는 창고의 거의 끝까지 걸어가서 멈춰 섰다. 거기에 있는 것은 거의 견과류의 과일들이었다. 자크는 그중 한 상자에 다가서더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야자열매가 들어 있었다. 자크는 야자 몇 개를 들어 올리더니 그중 하나를 고르며 말했다.
“나도 아직 보진 않았어요. 당신이 오면 같이 보려고……………. 이거 봐요! 사람이 말할 때는 좀 쳐다보라고, 콧구멍 좀 그만 벌름거리고.”
“응? 아아. 어, 그거야?”
자크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들더니 세심하게 야자를 살폈다. 잠시 후 자크는 나이프를 거꾸로 쥐고서는 야자에 꽂아 넣었다. 이 남부의 신비한 과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샌슨이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실제로 야자는 나이프에 베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자크는 간단하게 나이프를 꽂아 넣고는 힘을 주었으며, 그러자 야자는 양쪽으로 쩌억 벌어지며 텅 비어 있는 내부를 공개했다.
속이 빈 야자 안에는 여러 번 접혀서 우겨넣어진 서류 뭉치가 나왔다. 자크는 그것을 꺼내 샌슨에게 건넸다. 샌슨은 종이의 주름을 펴기는 했지만 그 것을 살펴보지는 않은 채 그대로 품안에 쑤셔넣었다.
“아, 됐어. 칼에게 가져다주지.”
샌슨은 다시 속을 쩍 벌린 야자를 기특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하하, 그거 신기하군. 요런 식으로 서류가 오가다니 말이야.”
“별게 다 신기하군요.”
자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샌슨은 미심쩍은 듯 자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뭐야? 왜 그래?”
“예?”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거야? 꼭 오리 알을 낳은 닭 같은 표정을 하고 있군. 서류 한번 보자는 말도 안 하네.”
“흐음……”
자크는 턱을 긁적이더니 나이프를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오렌지.”
“뭐?”
“아까 그 오렌지 말이오. 나는 오렌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수. 솔직히 그 생각 때문에 그 서류엔 관심이 잘 안 가는데.”
“장사꾼 다 되었군 그래, 나이트호크가 정보에 관심이 없다니 말이야. 왜? 그 오렌지가 어때서?”
자크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창고의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썩은 것이 별로 없어.”
샌슨은 하마터면 ‘큰일이군’이라고 맞장구칠 뻔했다. 간신히 자크의 말을 이해한 샌슨은 이번에는 자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샌슨은 떨떠름하 게 말했다.
“그 수레꾼이 자기 말대로 열심히 달려왔나 보지.”
자크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수레꾼이? 웃기지 마쇼. 저 치들은 말 풀 먹일 시간은 없어도 주점에서 술 마실 시간은 비워두는 녀석들이야. 물론 그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몬스터 와 강도가 우글거리는 이 땅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레꾼 노릇 해먹지는 못하지.”
“그래? 그럼 뭐 그 오렌지가 워낙 품종이 좋다거나…………, 아냐, 잠깐. 썩은 것이 별로 없으면 좋아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뭐야, 장사가 너무 잘되어서 불만이냐?”
자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장사꾼이라면 이런 행운에 대해 즐거워해야겠지. 하지만 자크에게 있어 과일 장사는 눈가림일 뿐이다. 그래서 자크는 근래 들어 계속되는 행운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래. 이상하단 말이야. 요즘 날씨가 특별히 이상한 것도 아닌데 과일들이 도통 썩지를 않아.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는 바이서스 임 펠에서 과일장사로 성공한 첫 번째 장사꾼이 될지도 모른단 말이오.”
“무슨 말이야. 과일 장사가 그렇게 어려운 거냐?”
“수레꾼들 다루는 거나 과일 보관하는 것은 어려워. 나만큼 대규모로 이 짓하는 사람은 처음일걸. 하필이면 그 전무후무한 장사꾼이 과일 파는 일에 는 아무 관심도 없는 나이트호크라는 것이 아이로니컬하지만.”
“왜? 도둑 길드보다는 과일 장사 쪽이 건전하잖아. 그냥 도둑 길드 쪽을 부업으로 바꾸면 안 되냐?”
바이서스 임펠의 도둑 길드 마스터 자크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이 조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그래볼까 봐. 계속 이렇게 과일이 썩지도 않는다면.”
샌슨은 바구니를 꼭 끌어안은 채 싱글벙글하면서 대로를 걸어갔다. 바이서스 임펠의 아름다운 대로에 넘쳐나는 격조와 품위가 비명을 질러대며 동 반 자살해 버리는 순간이었다.
(해설: 신장 4큐빗에 웬만한 문에서는 비좁음을 느낄 만한 어깨를 소지한 사나이가 바구니를 꼭 끌어안고 가끔 거기에 코를 들이박으며 헤벌레 웃음을 짓다가, 마치 세상은 살 아볼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인 미소를 보내고 있다.)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걸어가며 샌슨은 생각했다.
‘이 오렌지를 다 먹고 나서 씨는 데미 공주에게 선물해야지.’ 보통 사람에게라면 자기 먹을 것 다 먹고 못 먹는 부위를 선물한다면 상당히 불쾌스러 운 선물 방식이 되겠지만, 데미 공주에게라면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것이다. 국왕의 여동생이자 구출해 줄 만한 왕자가 없어서 아직껏 드래곤에게 잡혀가지 않았다는 농담을 하곤 하는 데미 공주는 왕자보다는 원예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왕자에게는 물을 줄 수 없잖아요.’ 그리고 데미 공주 라면 이 땅에 오렌지를 자라나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충분히 성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임펠리아에 오렌지 향이 번지게 되면 그곳에서 낮잠을 자야지.’
샌슨은 이런 공상을 하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하늘은 맑고, 세상은 평화롭고, 샌슨은 행복했다. 그래서 샌슨은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이가 환한 표정 을 지으며 손을 들어올렸을 때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손을 흔들어줄 뻔했다.
젊은이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샌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억!” 불의의 일격을 받은 샌슨은 앞으로 휘청했고 젊은이는 재빨리 샌슨에게서 오렌지 바구니를 낚아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대신 들어주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줄행 랑을 쳤기 때문이다. 샌슨은 멍한 얼굴로 젊은이의 뒤를, 정확하게는 칼과 함께 먹을 오렌지와 데미 공주에게 선물할 오렌지 씨와 임펠리아를 짜릿한 향기로 물들일 오렌지 나무가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외쳤다.
“그거 내 거야!”
‘아,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제 것인 줄 알았어요. 샌슨도 사람인지라 이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젊은이 역시 사람이었는지 샌슨이 젊은 이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이해시키려는 안타까운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도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상황의 끄트머리에 서 샌슨은 바구니 도둑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서라!”
젊은이는 멈춰 섰다. 그래서 이 인간적인 상황에 슬슬 적응하고 있던 샌슨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서란다고 정말 서냐?”
“설리가 없다고 믿었다면 왜 서라고 외쳤는데?”
젊은이는 당당하게 되물어 왔고 샌슨은 말이 곤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질문에라면 칼도 대답하지 못했을걸. 샌슨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어느새 샌슨과 오렌지 바구니 강탈범은 대로에서 많이 들어선 골목길에 서 있었다. 주위로는 그 흔한 문이나 창문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벽뿐, 하 루 종일 기다려도 사람 하나 오갈 것 같지 않은 골목이었다. 샌슨은 곧 젊은이가 의도적으로 이 골목으로 도망쳤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샌 슨의 등 뒤에서 날아온 몽둥이에 의해 확인되었다. 퍽!
“왜 때려!”
이건 괴물이잖아. 몽둥이를 들고 있던 사내는 기막힌 표정으로 물러나며 생각했다. 샌슨은 재빨리 뒷걸음질 쳐서 등을 벽에 붙였다. 골목 어귀로부 터 세 명의 사내가 나타나서 바구니 도둑 및 샌슨을 때린 남자와 합류했을 때 샌슨은 행복함을 느껴야 했다. 우스꽝스럽고 이해 불가능하던 상황들이 아귀가 맞아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감은 씁쓸한 것이었다.
“쳐!”
곧장 한 개의 몽둥이와 두 개의 메이스, 그리고 두 개의 주먹이 동시에 샌슨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샌슨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외치며 가 장 가까이 있던 사내의 허리를 향해 돌진했다. 퍽, 퍼벅! 등이 부러지는 느낌이 왔지만 샌슨은 사내의 허리를 잡아 반대쪽 벽에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 다. 허리를 붙잡힌 사내는 반항을 시도하는 대신 들고 있던 메이스 자루로 샌슨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머릿속으로 불이 번쩍했지만, 샌슨은 간신히 까무러치지 않고 허리를 뒤틀며 정수리로 사내의 턱을 받아올렸다.
뻐직.
턱이 깨진 사내는 짙푸른 창공을 향해 하얀 이빨을 뿜어 올리며 혼절해 버렸다. 샌슨은 ‘정의로운 사내가 이 불공평한 상황에 분노를 느껴서 자신에 게 메이스를 건네주고 싶었지만 기절해 버리느라 그 말을 하지 못했다.’고 믿는 것처럼 잽싸게 메이스를 집어들고 기절한 사내의 몸 위를 굴렀다.
“고마워, 친구! 난 항상 네가 좋았어!”
다시 일어서는 샌슨을 향해 겁 없이 몽둥이를 휘두른 사내는 기막힌 꼴을 당했다. 샌슨은 오른손에 쥔 메이스를 내버려둔 채 왼쪽 팔뚝으로 몽둥이 를 막아내었다.
“그럼 메이스는 왜 들었는데?”
샌슨은 메이스를 올려쳐 사내의 낭심을 후려갈김으로써 대답을 갈음하며 외쳤다.
“일자무식이라는 거다, 인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자손들이여!
사내는 고환이 박살나는 충격 속에서 오열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내는 냉정했다. 그는 자손들의 억울한 죽음(?)에 비감해하는 남자를 그대로 앞으로 밀어버렸다. 샌슨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피하려 했지만 앞으로 쓰러져온 남자와 함께 나뒹굴고 말았다.
쓰러진 샌슨을 향해 발길질과 메이스가 흉포성을 아낌없이 과시하며 날아들었다. 잠시 후 샌슨은 잘 두드려 맞은 빨래 더미처럼 되어 골목 구석에 처박혔다. 그러나 샌슨의 입에서 흐르는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용감하게도 머리 쪽을 걷어차다가 발목을 물어뜯긴 사내는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대거를 뽑아들었다. 리더인 듯한 사내가 재빨리 대거를 쥔 팔을 낚아채지 않았다면 샌슨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해체 당했을 것이다.
“죽이면 안 돼.”
“제길, 저 미친개 같은 놈이 해놓은 꼴 좀 봐!”
리더는 주위를 돌아보며 사내의 말에 동감했다. 턱이 쪼개진 남자는 당장 프리스트에게 찾아가지 않으면 평생 동안 수프보다 단단한 것은 먹기 어려 울 듯했다. 낭심을 붙잡고 뒹구는 사내에 이르러서는 비장미도 퇴색해 버린다. 그리고 발목을 물어뜯긴 사내라니. 리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젠장, 죽이면 안 된다고 했단 말이야! 대거 집어넣어!”
사내는 대거를 집어넣는 대신 쓰러진 샌슨을 다시 한번 걷어찼다(물론 머리 쪽을 걷어차지는 않았다.). 사내를 말린 리더는 쓰러진 샌슨을 뒤집어 놓은 다 음 재빨리 그의 품을 뒤졌다.
조금 후, 리더는 서류 뭉치 같은 것을 꺼내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가자.”
리더는 턱이 박살난 사내를 들쳐 업었다. 오렌지 바구니를 들고 있던 젊은 강도는 샌슨을 향해 바구니를 집어던지고는 자손을 잃은 사내를 부축했 다. 따라서 발목을 물어뜯긴 사내는 자기 힘으로 걸어야 했다. 사내는 험한 표정으로 샌슨을 쏘아보다가 몸을 돌려서는 쩔뚝거리며 걸어갔다. 사내는 분풀이 삼아 바구니에서 굴러 나온 오렌지를 짓밟으며 걸었다.
태양은 서쪽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째그르르.
샌슨은 참새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으으음.”
샌슨은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피와 오렌지 즙으로 얼룩진 골목에 널브러진 그의 모습은 비참하다는 말로도 표현을 다 못할 지경이었다. 몰 려 앉아서 오렌지 조각들을 쪼아 먹고 있던 참새들은 샌슨의 인기척에 질겁하며 날아올랐다. 포로롱, 참새들은 저무는 황혼을 향해 검은 점이 되어 날아갔다. 골목 안은 이미 붉은 석양빛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꽤 오랫동안 기절했나 보지.’
샌슨은 입가를 쓱 닦고는 몸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동안 샌슨은 얻어맞 은 자신보다는 짓밟힌 오렌지들을 더 애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신 차려야지.’
샌슨은 비참한 심정으로 몸을 굽혀 더럽혀진 오렌지들을 주워들었다. 그래도 개중 나은 것들을 골라 든 샌슨은 서글픈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걸 어떻게 들고 가지? 그러다가 샌슨은 석양의 그림자 속을 뒹굴고 있는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몸의 아픔도 잊은 채 환한 얼굴이 되었다.
샌슨은 힘들게 바구니를 주워들었다. 마치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서 이삭을 줍는 아낙네들처럼 샌슨은 꾸물거리며 놀빛에 붉게 타오르는 오렌지를 주워 담았다. 고요하고 쓸쓸한 오후였다. 샌슨은 이를 악문 채 생각했다.
‘빛의 탑일까, 귀족원일까.’
그 클라크라는 견습생 녀석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에 개입한 것이 마법사들인지 귀족들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칼에게 이 문제를 던져주자. 마음껏 고민해 보라지. 그리고 이런 개고생을 한 대가는 받아내야 돼. 샌슨은 휘청거리는 무릎을 다잡으며 단호하게 결심했다. 무조건적으 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이 오렌지는 전부 내 거야. 아무렴!
오렌지 바구니 밑바닥에 든 서류야 먹지도 못할 것, 칼이 가져가라지. 샌슨은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다가 입술이 갈라지는 아픔에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아이고!
이루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무에서 내려왔다. 나뭇가지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는 날렵한 동작이었다.
평지를 걷는 듯한 수월한 몸놀림으로 나무 아래 내려선 이루릴은 내려오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세를 되찾거나 중심을 잡거나 하는 일체의 동작 없이 그냥 걸어갔다. 만일 인간이 이 간단한 동작들을 흉내내 보려고 했다면 그 동작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목뼈가 부러지는 아픔도 느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루릴은 엘프였으며, 엘프에겐 단순한 일이었다. 이루릴이 걸어가 는 방향 앞에는 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개울 옆에서는 거대한 형체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동작은 어쩐지 보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 몸에서 당연히 느껴져야 할 중량감이 없었다. 정신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루릴은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손을 들어올렸다.
“여기예요, 에델린.”
좌우의 숲을 둘러보고 있던 에델린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에델린의 입에서는 무시무시한 이빨이 번득였다. 미 소를 지은 것이다.
“아아, 이루릴. 오래간만이에요. 많이 기다렸나요?”
“예.”
에델린은 잠시 당황했지만 상대가 엘프임을 깨닫고는 다시 으르렁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둘의 모습은 꽤나 언밸런스한 듯하면서도 동 시에 꽤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기막힌 용모의 엘프와, 역시 기막힌(?) 용모의 트롤 프리스티스가 인사를 나누는 광경에는 파하스가 되살아나도 어울 리는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에델린은 상대가 엘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많이 기다리셔서 화났나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에델린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째 인사말 하나도 의미가 전혀 다르게 사용되어야 할 것 같군.
“너무 늦어서 당신이 가버리지 않았는지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쓸모없는 걱정이었군요.”
“시간…………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제게는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조급하지는 않지요.”
에델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원히 조급해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에델린은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상대의 안색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만일 엘프가 거짓말을 해야 된다면 그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떠오를까. 그 러나 이루릴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전 에델린이 말한 뜬금없는 내용에 대한 의아함도 떠오르지 않았다.
에델린은 단어를 주의 깊게 선택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의논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기 남부에 계시는 제레인트 씨 일행에게도 연락을 드릴 작정이었습니다만 그 전에 당신을 먼저 만나 봐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루릴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한숨을 내쉬었을 테지만 그런 표정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은 에델린은 대신 우아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앉으시겠습니까?”
“아, 네.”
이루릴은 앉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앉기 전에 그러하듯이. 아무런 의심도 없는 동작이었고, 그런 모습은 에델린을 죄의식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피어나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대신 에델린은 곧장 앞으로 몸을 날렸다.
트롤의 무시무시한 주먹이 이루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이루릴의 입장에서라면 차라리 발리스타에 맞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짧고 잔인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이루릴은 그대로 에델린의 팔 안으로 쓰러졌다.
힘없이 무너지는 이루릴을 가볍게 받쳐든 에델린은 그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 가볍게 감긴 눈꺼풀. 그 어디에도 조금 전에 당한 불의의 습격에 대한 공포나 불신의 감정은 없었다. 마치 조용히 잠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왔습니다. 우핫하하! 엑셀핸드, 내가 이겼다고요!”
제레인트는 침대에 누운 채 웃기 시작했다.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 집어서 뭐라 단점을 잡기도 곤란한 여관 침대에 누운 채 낄낄거 리고 있는 프리스트의 모습에서도 신성함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 프리스트는 고요히 눈을 감은 채 먼 곳으로 그 정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아프나 이델은 이를 박박 갈아대고 있는 엑셀핸드를 다독거린 다음 말했다.
“에델린 님이십니까?”
“예. 내가 뭐랬어요, 엑셀핸드. 오늘 밤에는 연락이 올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요?”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고 있던 엑셀핸드는 빽 고함을 질렀다.
“시끄럽다! 너 혹시 테페리의 권능을 사용한 거 아냐?”
“천만에요. 아, 에델린, 미안합니다. 우리끼리 내기를 했거든요. 나는 오늘 밤에는 당신의 연락이 올 거라는 데 걸었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예? 아일페사스 말입니까? 잘 있습니다.”
대화의 한쪽밖에 들을 수 없는 엑셀핸드는 수염을 비비 꼬아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이 재미있는 대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신앙을 가진 자는 어느 장소에 있든지 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 골방에서 기도를 하더라도 신은 듣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신은 자 신의 의지를 전달함에 있어 그 신도의 위치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의 지팡이인 프리스트들은 신을 통해서 서로에게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
‘마치 우리 마법사처럼.’
아프나이델은 생각했다. 우리 마법사들은 마나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에 편재된 마나를 이용하여 또 다른 마나 디텍터인 마법사에 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 그리고 프리스트들은 신을 매개체로 서로의 의사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양자가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마나를 다루는 것이 잘 단련된 테크닉에 해당한다면, 프리스트의 이 대화는 올곧고 진실한 신앙의 문제니까. 곧 은 마음으로 신께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프리스트는 다른 프리스트에게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아프나이델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낄낄거리고 있는 제레인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이라. 일반인들이 당연하다고 믿는 상식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엉터리던가.
“무슨 헛소립니까!”
제레인트의 느닷없는 시비조의 말투는 아프나이델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프나이델은 드러누운 제레인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그 쾌 활한 프리스트가 관자놀이에 주름살이 생기도록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놀라버렸다.
“도대체 이게 트림이오, 딸꾹질이오? 아무래도 말은 아닌데. 이봐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거요?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를 한번 들려주시지. 아니, 당신이 가진 변명거리가 이사의 처녀들의 베틀에 걸린 날실만큼 많다고 해도 난 그 변명을 받 아들일 수 없을 것 같군 그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엑셀핸드는 그만 파이프를 발등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으앗, 뜨거!”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파이프를 집어주면서도 눈으로는 제레인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거지?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하마터면 파이프 부리를 엑셀핸드의 콧구멍에 꽂아줄 뻔했다.
제레인트는 거친 숨소리만 내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는 것은 당연하겠군요.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짓이니. 알았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어디라고? 아, 예. 알았소. 그랜드 스톰? 그럼 거기서. 늦어도 열흘 내에는 도착할 거요. 제기랄, 내가 왜 그것까지 걱정해야 된단 말이야!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열흘 뒤!”
제레인트는 넌덜머리를 내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에 앉은 제레인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조금 전의 충격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문 득 주위의 시선을 느낀 제레인트는 손을 치우고 고개를 돌렸으며, 거기서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와 마법사의 얼굴을 보게 되 었다.
의자에 주저앉은 채 짧은 다리를 힘겹게 끌어당겨 발등을 주무르고 있던 엑셀핸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와 결혼하자더냐?”
“그랬다고 해도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프나이델은 근심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왠지 듣기가 무서울 지경입니다만.”
“프리스티스 에델린이 우리를 좀 보잡니다. 원, 기가 막혀서!”
아프나이델은 이 두 개의 문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에델린 양이 기막힌 미모이긴 합니다만.”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제레인트는 씩씩거렸고 별로 어울리지도 않은 농담을 꺼냈던 아프나이델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레인트는 한참 후에야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서 말 했다.
“에델린 양은…….. 어떤 포로를 데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포로요?”
“죄수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그녀는 누군가를 억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포로라고 불러야 될지, 음. 적절한 단어가 안 떠오르는데요.”
제레인트는 매우 그답지 않은 방식으로 말했다. 즉 느릿느릿하면서도 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그 점에 주의했다. 제레인트는 콧등을 긁적거리면서 어눌하게 말했다.
“어쨌든…………, 그녀 혼자서는 그 죄수를 감당하기 어려울 듯해서 우리들과 합류하기를 원하는 모양입니다.”
“뭐야?”
엑셀핸드는 다시 한번 파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프나이델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그녀가 누군가를 억류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랜드스톰의 치료하는 손 에델린이 억제할 수 없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지도 짐작하기 어렵군요. 트롤의 완력과 덕망 높은 프리스티스의 디바인 파워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혹시 시오네입니까?”
제레인트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의 시간은 드워프와 마법사를 점점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제레인트가 씹어뱉듯이 말했을 때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의 경악은 더욱 컸다.
“아니오. 이루릴 세레니얼 양입니다.”
“예?”
옅은 붉은빛 하늘 아래 황갈색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의 낙타는 고요했다.
몰려든 군중들은 고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타까지 고요할 필요는 없다. 설사 옅은 붉은빛 하늘 아래 황갈색 바람이 아니라 무지개 색 바람이 불 지언정 낙타가 고요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낙타는 고요했다. 그래서 레드 서펀트 호의 일등 항해사 이시도 사이록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춘분제의 낙타가 이렇게 과묵한 것은 생전 처음 보겠군.”
춘분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으며, 이후부터는 추분이 돌아올 때까지 헬카네스의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 잘 보여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이펀 인들 은 헬카네스에게 낙타를 바친다. 그런데 여기에는 서로 상반된 세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첫째, 자이펀 인들은 낙타를 좋아한다. 둘째, 헬카네스가 낙 타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그럴 것이라고 믿는 편이 낫다.). 셋째, 대개의 낙타들은 헬카네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을 뿐더러 자이펀 인 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따라서 낙타들은 이 순간에 거친 반항을 시도하게 된다. 저 엄청난 동물이 반항을 시도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실제로 낙타가 제단에서 뛰어내 려 고요한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제사장이 미숙할 경우의 일이며 자이펀의 춘분제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낙타가 마지막 발악을 시도할 때, 제사장의 날렵한 검은 그 어떤 바람에도 비교할 수 없는 날렵한 속도로써 낙타의 거센 반항의 한가운데를 민첩하 게 파고들어 짧고 가는 공격으로 그 목을 딴다. 나비가 꽃잎에 앉을 때보다 더 가벼운 손놀림, 태풍이 나무를 꺾을 때보다 강력한 일격. 이후에 낙타 가 목에서 피를 흘리며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어쨌든, 춘분제의 하이라이트는 주위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날뛰는 낙 타의 목을 순식간에 따버리는 제사장의 일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춘분제가 치르는 값어치인 것이며 신의 면전에서 떠는 재롱이다. 그런데 올해의 낙타는 너무 고요했다. 제사를 치르기도 전에 이미 죽어버린 듯한 모습인지라 산 제물을 바친다는 기분이 전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인지 제단 주위를 둘러싼 군중들 역시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유별나게 잔인한 것은 아니다. 이건 전통의 문제인 것이다.
선원들과 함께 군중들 틈에 섞여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시도는 무의식중에 혀를 찼다. 결과적으로 턱이 꽤 아팠다. 이시도는 아픈 턱을 움켜 쥐면서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을 너무 많이 썼어. 저게 무슨 몰골이람. 동맥을 따기도 전에 다 죽어버린 모습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시도의 곁에 있던 늙은 선원 하나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제사장이 자신이 없어서 약을 많이 쓰게 한 모양입니다, 이시도 씨.”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아마 품계가 높은 제사장들은 모두 바이서스 전선으로 나갔나 봅니다. 저 애송이 녀석 칼 잡은 손 좀 보십시오.”
늙은 선원은 턱을 들어 제단 위에 서 있는 제사장의 손을 가리켰고 주위의 선원들은 동시에 혀를 찼다. 제사장의 엄격한 얼굴에 비해 볼 때 그 손은 안타까울 만큼 떨리고 있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뭘 제대로 하는 친구들을 못 보겠군요.”
이시도는 턱의 아픔에 신경을 쓰고 있느라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건 어느 시대의 누구나 하는 말이잖나.”
“우리들에게는 보입니다.”
대답은 진지했고 그래서 이시도는 고개를 돌려 선원을 바라보았다. 거친 얼굴 깊숙한 곳에 위치한 눈을 반짝이며 선원은 말했다.
“우리는 땅에 자주 오르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확실히 다릅니다. 이시도 씨야말로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시도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턱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렸다. 어젯밤 졸란 항구의 단골 술집에 들렀던 이시도는 10년 동안 마셔오던 술맛이 바뀐 것을 깨닫고는 그만 난동을 부리고 말았다. 같이 있던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이 간신히 그를 구해 나왔을 때 이시도는 한 손에는 의자나 테이블의 다 리로 짐작되는 나무토막을 쥐고 다른 손에는 쿠션을 든 채 자신이 새로운 검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이의 수평선이라는 거창한 이 름을 붙이고야 말겠다는 이시도를 말리기 위해 늙은 선원은 정중하게 이시도의 턱을 깨버렸던 것이다.
늙은 선원은 측은한 눈으로 이시도의 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맛도 변했어요. 여자도 볼 것 없고. 제사도 정말 재미없군요. 이 빌어먹을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군요. 아들놈이 왜 춘분제를 안 보겠다고 말했는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만, 이젠 그 녀석의 말을 이해하겠습니다.”
“당신 아들은 이제 슬슬 이런 데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 나이 아닌가. 벌써 20세가 넘었지, 아마?”
“그렇긴 합니다만.”
“아,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의 얼굴을 안 잊어먹었나?”
이시도의 질문에 늙은 선원은 비죽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하셨다시피 20세가 넘지 않았습니까.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아들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일도 이젠 끝이지요. 녀석도 이젠 자신의 얼굴에 책임 을 져야 될 나이니까.”
“흐음, 그래.”
이시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제단 위를 바라보고 또 다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이제 『해가름의 서』3장의 봉독이 끝나고 제사장이 거침없이 낙타에게 다가가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제사장은 머뭇거리 고 있었다. 성질을 참지 못한 이시도는 고함을 지르려 했다.
‘야, 이 빌어먹을 녀석아. 그렇게 약을 먹여놓은 낙타가 일어나서 네 자지라도 걷어찰 거 같냐?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칼을 들어! 아니, 그 낙타보다 는 차라리 네 녀석을 묶어서 제단에 올리는 편이 더 낫겠다!’ 대충 이에 해당하는 말들이 이시도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늙은 선원이 이시도의 어 깨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뭘 보고 있는 거지요? 저는 눈이 어두워서.”
그제서야 제사장이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시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사장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광장을 가 득 메운 구경꾼들과 선원들도 당혹해하며 제사장의 시선을 따라갔다. 춘분제의 제사장이 제사를 잊고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살기다.
이시도는 고개를 끝까지 돌리기도 전에 제사장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고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제사장이었기에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으리라. 이시도는 고개를 돌리는 동작과 동시에 허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한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 후, 이시도는 방어 태세를 갖춘 채 광장 한구석에서 살기를 퍼뜨리고 있는 작자를 찾아내었다.
“선장님?”
다음 순간 레드 서펀트 호 선원들의 움직임은 눈부실 정도였다. 이시도를 선두로 해서 선원들은 ‘어이쿠, 미안합니다.’, ‘이런 실례가’, ‘괜찮으신지’ 등등의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몰려든 인파를 밀어붙이며 자기들의 선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곧 광장에서는 욕설과 고함,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거 뭐야? 미쳤어! 으아!”
“선장님! 선장님! 제기랄, 이거 놔! 선장님!”
“맙소사, 지금 제사중이라는 거 모르냐, 이 막돼먹은 뱃놈들아!”
“말 다 했냐!”
“으악!”
이시도는 자신의 멱살을 잡아당긴 사나이의 얼굴을 들이받으며 춘분제의 낙타만큼이나 시끄럽게 꽥꽥거리고 있었다. 다른 선원들의 사정도 비슷비 슷했다. 그러나 춘분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그대로 벽이나 다름없었고, 바닷바람으로 단련된 사나운 선원들의 돌격에도 그들과 그들의 선장 사이 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신차이 선장은 잠시 고개를 돌려 우울한 눈으로 그의 선원들이 일으키고 있는 소란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서 있던 남자 역시 신차이를 따라 고개 를 돌리더니 가볍게 미소 지었다.
“좋은 선원들이오, 선장. 마치 아버지를 부르는 자식들의 모습이로군. 나도 한때는 저런 선원들을 데리고 대양을 누볐던 적이 있지. 즐거워해야 될 일이니 웃으시오.”
신차이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상대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장례일에 함부로 웃는 것이 당신에게 무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상대는 웃어버렸다.
“당신의 선원들이 지금 누구 걱정을 하고 있는 거요?”
신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선원들이 저렇게 달려오려 애쓰고 있는 이유는 선장이 결투를 하려 들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결투의 상대가 코다슈의 불의 계승자 베이론 코다슈인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코다슈의 불. 명가 중의 명가이며 수천 필의 낙타를 마음대로 다루는 거상일 뿐만 아니라 한 자루 팔치온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꽃잎을 희롱하는 바 람이나 미풍을 타고 넘는 갈매기보다 유려한 검법을 자랑한다. 게다가 어찌나 명가인지 얹혀사는 식객만 해도 기백 명, 졸란의 거지들을 다 먹여 살릴 지경이라고 한다.
신차이는 옷자락을 젖히고는 목검을 뽑아들었다. 베이론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으나 신차이는 그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했다.
“시작합시다, 베이론.”
“당신은 식솔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베이론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동안에도 선원들의 필사적인 질주와 그에서 파생되는 고함 소리로 광장의 상황은 극도의 혼란으로 치달아 갔지만, 명가의 수장 베이론은 담담한 표정으로 진홍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고개를 내린 베이론은 빠르게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내겐 복수의 책무를 이어받을 가권이 백 명도 넘소. 당신에겐 불리한 결투니만큼, 내 복수의 전승 권리는 모두 포기하겠소. 그 어 떤 자도 내 죽음에 대해 복수할 권리가 없음을 선언하오.”
이 세련된 기만은 신차이의 입가에 쓴 미소를 떠올렸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기만하는 베이론의 이 말을 저 바이서스나 헤게모 니아의 어투를 빌려 번역해 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죽는 것은 네 녀석이니 난 내 관 모양이 어떨 것인가, 또는 누구에게 내 복수를 맡길 것인가에 는 신경 쓰지 않는다.’
“공정한 제안입니다. 운차이 역시 그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복수해 줄 사람도 없이 사지로 떠났으니, 당신도 그러해야 마땅하겠지요.”
운차이의 이름이 거론되자 베이론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베이론은 가까스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말이오? 운차이 역시 자이펀 인이며, 명가의 후손으로서 하탄의 영광을 실천한 것이오. 그것이 불행이라는 말이오?”
“발탄 가문이 실천한 하탄의 영광을 말한다면, 코다슈의 불은 어떠하오?”
“우리 가문 역시 하탄께 자식을 바쳤소!”
“아아, 그 사생아 말이군. 설마 고귀하신 코다슈 가문에서 하녀를 건드리지는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그 자손이라는 것은 당신 가문에 넘쳐나는 낙 타와 관계해서 낳은 자손이오?”
야비한 것은 대개 조야한 법이다. 하지만 빠르다. 신차이의 경우에는 야비함을 통해 비로소 원하던 상황을 얻을 수 있었다. 코다슈의 불을 계승한 베 이론 코다슈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팔치온을 앞으로 뻗은 채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베이론은 자신이 다시는 춘분제를 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신차이가 내뻗은 목검은 베이론의 목을 꿰뚫어 둥글고 치명적인 구멍을 만들어놓았고 그 구멍에서는 코다슈의 불의 마지막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 다. 뎅그렁. 제사장은 기어코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지만 낙타 이외에는 아무도 거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이시도는 난동을 부리다가 찢어진 옷차림 으로 그 자리에 도달해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는 춘분제의 피를,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제물의 피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의 선장을 올려다보 았다. 그의 입이 힘없이 열리며 고요해진 군중들 덕분에 간신히 들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신차이는 이시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목검을 갈무리하고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검붉은 색으로 바 뀌어 신차이의 하늘에 핏빛의 석양을 던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