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6
6
제레인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눈앞을 가로막은 계곡을 바라보았다.
“멋집니다!”
그 옆에는 아프나이델이 제레인트와 완전히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힘없는 목소리 로 말했다.
“정말 무시무시해 보이는 장소로군요.”
“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저 계곡 바닥에 솔로처가 잠재운 100명의 데스나이트들이 있겠지요? 굉장하겠습니다.”
아프나이델은 질린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의 콜로넬 계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세레니얼의 안장을 움 켜쥐었다. 분명 절벽 끄트머리와는 20큐빗 이상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 현실적인 거리는 아프나이델에게 안정감을 주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 다.
평평히 이어지던 데이든 평원 가운데로 거대한 칼날이 지나친 것 같은 모습의 콜로넬 계곡은, 언뜻 바라보아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형이 생겨났 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형태였다. 먼 옛날 이 데이든 평원에는 아름다운 콜로넬 수원(水原)이 있었다. 호수나 연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대신 수원이라 는 좀 이상한 이름으로 불린 까닭은 그것이 그야말로 수원이기 때문이다.
이슬의 여왕, 혹은 밤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산과 은닉의 일세인은 지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신이었고 그녀가 바로 콜로넬 수원의 주 인이었다. 콜로넬 수원에 밤이 찾아올 때마다 일세인은 이슬의 전달자들을 대륙 전역으로 파견했다. 그랬기에 콜로넬 수원은 호수나 연못이라는 이 름 대신 대륙의 모든 이슬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수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랬기에, 콜로넬 수원에서 흘러나온 콜로넬 강물은 높은 산에서 낮은 바다로 흐르는 보통의 강물과는 달리 평탄한 땅 위를 흘러야 했다. 콜로넬 수 원의 물은 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나왔기에 콜로넬 강은 데이든 평원을 깊숙이 침식하며 바다로 흘러갔다. 그래서 눈앞에 보는 것과 같은 깊이 천 큐 빗, 길이 20펜큐빗에 달하는 협곡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데스나이트가 이 땅을 찾아들었다.
아무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도래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세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신이 계신 장소는 늦든 이르든 간 에 어둠의 세력의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를 밝히곤 했다. 그 견해가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데스나이트의 준동에 일세인은 결국 이 땅을 떠나야 했다. 그 이후로 데스나이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콜로넬 협곡을 장악하고는 핸드레이크의 마지막 전인 무지개의 솔로처가 그들을 잠 재울 때까지 사우스그레이드 전역을 공포로 몰아갔다.
마지막 신은 이 땅을 떠나고, 마지막 대마법사의 전설은 바람에 흩어지고, 남은 것은 황야와 이 깊은 협곡뿐. 스산한 바람은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망 자의 애가와 같은 휘파람을 불어젖혔다.
아일페사스는 생긋 웃으며 상당히 독창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을 놀래게 만들었다.
“마치 땅이 찢어진 것 같네요. 그렇잖니, 엑스 오빠?”
“이놈아, 제발 말 좀 똑바로 하거라!”
“제 말은 제 개성이야.”
아일페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 동작의 정확함은 아프나이델에게 감명을 주었다. 거의 인간과 똑같은 동작인걸. 엑셀핸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안장에 매달아 둔 배틀 액스를 향해 뻗치는 것을 무시하면서, 아일페사스는 다시 콜로넬 협곡을 바라보았다.
“저희 집에도 이런 게 많이 있어.”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희 집? 아일페사스의 집이라면 카르 엔 드래고니안, 대미궁이다.
“이런 거라니? 협곡 말이야?”
협곡을 많이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것 말고요. 있잖아, 그거! 음, 뭐라고 하지요?”
“바람? 돌? 흙? 잡초? 지평선? 구름? 세상에 넘치는 테페리의 사랑?”
제레인트는 주위를 주욱 둘러보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일페사스는 그런 제레인트를 바라보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이 곳에는 네 가지 종족이 있어. 드래곤, 드워프, 인간, 그리고 하나가 더 있네요.”
“그게 뭔데? 펫시.”
“바보.”
“그럼 못써, 펫시. 어서 아프나이델에게 사과해.”
“네가 바보예요, 제리.”
아일페사스와 제레인트가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아프나이델은 어깨를 움츠린 채 협곡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뭐가 많다는 말을 하고 싶었 던 것일까. 아프나이델은 그녀에게 질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 주제에 대해 관심을 잃은 아일페사스는 협곡 건너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건너? 날아가요?”
“아니, 아일페사스. 저쪽으로 한 1펜큐빗 정도 가면 내려가는 길이 있어.”
“내려가서는?”
“건너편에는 올라가는 길이 있지.”
“아아, 귀찮아요. 날아 건너는 것이 낫겠어. 제리. 저 날아보면 안 돼? 저는 날개가 있는 종족이라고. 드래곤이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해야 된다는 거 우습잖아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락사하는 드래곤은 더 우스워. 그런 걸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거야?”
“에에에엑!”
아일페사스는 제레인트를 향해 혀를 낼름거려 보이고는 재빨리 일행의 앞쪽으로 자신의 말 센추리온을 몰아갔다. 센추리온의 항의를 코끝으로도 듣 지 않고 그녀는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낭떠러지에 바싹 다가갔다. 제레인트는 유쾌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아프나이델의 경우에는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가벼운 몸을 휘감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몇 번이나 절벽에서 멀어지라고 재촉했다. 그때마다 아 일페사스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절벽 가장자리로 센추리온을 몰아가, 결국 아프나이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한 태도로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앉아 있었지만 아프나이델은 그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드래곤 로드를 뵐 면목이 없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콜로넬 협곡을 제외하면 주위로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평야였다. 가장 가까운 산이 지평선에 그 허리 아래를 감추고 있을 만큼 광막한 대지 데이 든 평원. 따라서 바람은 거칠 것 없이 불어대었다. 때로는 말의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자란 잡초들이 마치 파도치듯 흩날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땅 은 노출된 흙이나 바위였다.
우울한 표정으로 그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기분 전환 삼아 제레인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프리스티스 에델린은 왜 이루릴 양을 납치한 걸까요?”
역시 기분 전환 삼아 로드를 뻗어 잡초의 머리를 툭툭 치고 있던 제레인트는 반갑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작하기가 어려워요. 그녀가 단독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처럼 신실하며 명망 높은 프리스티스가 한 행동이라면, 역시 그랜드스톰의 의지라고 보고 싶군요. 그런데,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나는 이루릴 양이 에델린 양에게 거칠게 반항하거나 하 는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조용히 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말씀하신 그 두 가지 상황은 서로를 배신하고 있습니다.”
“예?”
“만일 이 이상한 사건이 그랜드스톰의 의지라면, 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그랜드스톰에 인물이 없어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 랜드스톰이 원한다면 엘프 한 명을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에델린 양의 단독 행동 아닐까요?”
“아아, 그렇군요. 마법사답네요. 하하.”
제레인트는 그냥 웃어버렸고 아프나이델은 힘없이 웃었다. 역시 프리스트와 뭔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어려워, 특히 테페리의 프리스트와는. 그들 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토론은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인간다울 수 있는 것 아닐까. 미 래를 모르고, 의미를 모르고, 이유를 모르고.
인간에 대해 생각하던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들어올려 멀리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아일페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거리가 꽤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드래곤의 어린 레이디는 어떻게 저리도 빨리 말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일페사스는 경쾌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히죽 웃었다. 아일페사스는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저거야?”
아일페사스에게 다가간 일행들은 절벽 가장자리에 세워진 두 개의 바위를 발견했다. 바위는 둘 다 길이가 40큐빗은 될 것 같은 거대하고 길쭉한 형 태였으며 서로를 의지하며 V자를 뒤집은 것처럼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입구처럼 보이는 그 바위들 뒤로는 과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건너편 절벽을 바라보았다. 과연 아스라이 보이는 건너편 절벽에도 이쪽과 유사한 구조물이 보였다. 그리고 절벽의 거대한 위용 때문에 거의 실처럼 보이는 작은 길이 협곡 아래쪽에서부터 절벽을 타고 올라 그 바위들에 연결되어 있는 것도 보였다. 길은 좌우로 여러 번 꺾이며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져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불평했다.
“너무 내려가고, 너무 올라가야 되잖아! 저걸 좀 봐요. 내려가는 것은 괜찮다고 하더라도 저 길을 어떻게 올라간단 말이에요? 그렇잖아? 저 날아갈거야. 응!”
아일페사스는 아직 충분히 단단하지도 못한 그 날개로도 이 정도의 협곡은 넘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웃기만 했고 엑셀핸드 는 아프나이델에게 ‘저 녀석 묶을 정도의 밧줄은 있지?’ 어쩌고 하는 질문을 해왔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고민한 다음,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와인 한 잔. 다음 마을에서.”
“뮤러카인 사보네!”
“좋아.”
아일페사스는 곧장 바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프나이델은 히죽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엑셀핸드가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엑셀핸드는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저 애에게 술을 주겠다고?”
“예. 그렇게 원하는데 안 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잔인걸요.”
“맙소사, 드래곤 로드께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어쩌려고?”
아프나이델은 다시 벙긋 웃었다.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생긴 얼굴이었지만 미소 하나만큼은 그 스스로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 미소였다.
“드래곤 로드께서 그녀가 드래곤으로 자라기를 원했다면 우리에게 그녀를 맡길 까닭도 없겠지요.”
“뭐야?”
“그 의도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드래곤 로드께서는 그녀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능력을 갖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 쨌든 인간 사회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일 수도 있고요.”
“뭣 때문에!”
아프나이델은 묵묵히 엑셀핸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엑셀핸드, 위대한 노커여. 당신은 왜 우리들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뭐라고? 그야 제레인트 저놈이 아비스로 가겠다고 했기에 따라나선 것 아니냐. 지금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농담하지 마십시오, 엑셀핸드. 당신은 노커입니다. 드워프들이 안목이 없어서 당신을 노커로 선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엑셀핸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법이다. 드워프의 노커 엑셀핸드는 세상의 주도권은 이제 영구히 인 간의 손에 있음을, 그리고 이대로 있다가는 모든 드워프는 바위굴 속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임을, 그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보고자 드워프의 노 커인 자신이 인간 세계에 대한 관찰을 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도 마찬가지였을까?
아프나이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이미 아일페사스의 뒤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문득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여행 동료만큼은 기막힌 녀석들로 골랐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녀석들은 멍청하지만, 그래도 각자의 방식으로 친구의 자존심을 고 려해 줄 줄 안단 말이야.
일행은 바위 문을 통과했다.
내려가는 길은 예상과는 달리 추락을 염려할 정도로 좁지는 않았다. 워낙 깊은 절벽이라 상대적으로 좁아 보일 뿐 실제로는 그들 일행 전부가 나란 히 선 채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하지만 일행은 일렬로 늘어선 채 그 기나긴 길을 내려갔다. 그게 마음 편했으니까.
햇빛은 어느새 절벽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록 정오가 된다 하더라도 이 계곡의 바닥에 햇빛이 닿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행은 태곳적부터 한 번도 햇빛이 닿은 적이 없던 콜로넬 계곡의 그림 자 부분으로 들어섰다. 주위로 흩어지는 빛 때문에 걷기 곤란할 지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동안 주위로 점점 높아져가는 절벽은 폐소공포증을 야기할 듯했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주위의 공기가 습기를 띠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길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조금 추운 느낌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새 상당한 깊이까지 내려왔 음을 깨달았다. 이제 머리 위로 하늘의 모습은 가늘고 긴 리본처럼 보였다. 지평선에서 솟아올라 반대편 지평선으로 둥글게 이어져 있는 푸른 리본. 주위의 밝기는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일행은 바닥에 도착했다. 계곡의 바닥에는 콜로넬 수원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자갈을 튕겨 올릴 듯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걸어서라도 건널 수 있 는 얕은 강물이었지만 양옆으로 한없이 솟아오른 절벽 때문에 물소리가 몇 배나 증폭되어 바라보는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바람이 안 부는군.”
엑셀핸드가 갑자기 말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바위의 주민 드워프가 왜 바람에 신경 쓰는 걸까?
“여기에 솔로처가 호흡했던 공기가 남아 있다고 해도 나는 의심하지 않겠어. 강물이 낡아 보이는 것은 내 생전 처음이군. 여긴 모든 것이 낡고 오래 되었어.”
하긴 엄청나게 깊은 계곡이다. 노출된 바위들은 모조리 풍화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엑스 오빠, 솔로처를 보신 적이 있어?”
“있다.”
“무지개의 솔로처라고 하던데, 옷을 예쁘게 입고 다녔나 보죠?”
“응? 천만에. 그 친구는 사부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옷차림은 항상 엉망이었지.”
“무슨 말?”
엑셀핸드는 투구를 벗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프나이델, 설명해 줘.”
인간 심리에 대해 드워프가 설명해 준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지개의 솔로처의 사부 핸드레이크는 진짜 대마법사란다, 아일페사스. 아버님께서 이야기해 주셨지? 아아, 그래. 어쨌든 너무 유명한 사부의 제자 는, 너무 훌륭한 아버지를 둔 아들과 비슷한 지경에 빠지는 거지. 솔로처가 핸드레이크만큼 대단하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핸드레이크의 제자로 볼 뿐 솔로처로 보지는 않았다는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옷차림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 스스로를 광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솔 로처는 그런 것마저도 신경 써야 했어. 그는 더 겸손해야 되었고, 더 조용해야 되었지. 옷차림도 일부러 더 엉망으로 꾸미고 다녔고.”
“왜애애?”
“사부의 위명 때문에 헛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너도 잘 이해할 텐데, 아일페사스.’ 아프나이델은 이런 말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참았다. 아일페사스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제레인트를 향해 말했다.
“자, 어서 올라가지요. 이런 곳에 서 있으니 과거가 우리를 파묻어 버리는 기분만 듭니다.” 제레인트는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아프나이델을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예? 아아. 그렇지만 이곳은 아름답군요.”
“아름답다고요?”
“일세인이 왜 이곳에 계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아니, 전후가 바뀌었나? 한때 일세인께서 이곳에 계셨기에 이런 아름다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요.”
여기가 아름답다고? 아프나이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까마득한 절벽은 원근감을 왜곡시켜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무너져내릴 것처럼 보인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은 상류에서 퍼내려오는 흙 때문인지 흐린 빛깔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로는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이 온통 바위와 흙 뿐이었다. 혹시 저 프리스트는 과거 신께서 거주하셨던 이 공간에 남아 있는 신의 흔적을 느끼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프나이델로서는 절대로 제레인 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동경에 찬 눈으로 상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올라가면 상류, 콜로넬 수원이 있겠지요?”
“예, 그렇겠지요. 하지만 올라가 보자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하하. 보고 싶은데요. 호기심이 동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신이 거주하셨던 땅에 대한.”
“물론 호기심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류로 올라갔다가는 이곳에서 며칠은 보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저 길을 올라가야 해요. 보급이 안 돼요. 데스나이트들과 함께 콜로넬 계곡에 눕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레인트는 그답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다음에 와봅시다. 어서 올라가죠!”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강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강물에 먼저 뛰어든 것은 아일페사스였다. 센추리온의 발굽이 강물을 요란하게 튀겨 올렸다. 철벅!
“앗, 뜨거!”
강물이 튀자 아일페사스는 비명처럼 외쳤다. 뜨겁다고?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깊은 협곡을 흐르는 강물이 뜨거울 수가 있나. 아무래도 말이 익숙하지 않은 아일페사스가 단어를 잘못 선택한 모양이다. 아일페사스도 별 다른 말없이 강물 가운데를 향해 센추리온을 몰아갔다. 그때였다.
“테페리여! 조심해, 펫시이!”
이힝힝힝! 아프나이델은 하마터면 낙마할 뻔했다. 아프나이델의 말 세레니얼이 거칠게 발을 굴렀다. 아프나이델은 필사적으로 고삐에 매달렸고 엑 셀핸드는 필사적으로 아프나이델의 허리에 매달렸다. “이랴아! 달려, 후치!” 제레인트는 노성을 지르며 자신의 말 후치를 채근했다. 파바밧! 후치가 급작스럽게 출발하면서 발굽에 튄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날았다.
도대체 뭐야? 간신히 세레니얼을 진정시킨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제레인트는 저만큼 앞쪽에서 미친 듯이 강물을 튀기며 달려가고 있 었다. 아프나이델은 그의 진행 방향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일페사스가 우두커니 말을 세운 채 멍한 눈으로 상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프나이델은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프나이델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등 뒤에서 엑셀핸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스 누멘이여! 맙소사, 저게 뭐지?”
상류 저 먼 곳으로부터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연기? 아니다. 연기보다는 무거운 어떤 것이었다. 콸콸거리며 흐르는 강물 위로 천천히 깔리듯이 흘러내리고 있다. 저게 도대체 뭔가? 늪지에서 피 어오르는 수증기처럼 뭉클거리며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뻗어나오는 안개는 계곡을 가득 메우며 흐르는 급류처럼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갑작스럽 게 구토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저 안개가 특별히 역겨운 모습을 한 것은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눈앞의 세상이 휘청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프나이델! 이 멍청아, 따라가!”
엑셀핸드는 고함을 지르더니 곧장 드워프의 노커다운 노련미를 보여주었다. 그는 즉시 허리를 뒤틀어 세레니얼의 볼기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갈겼 다. 세레니얼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프나이델은 일단 고삐를 다잡으며 그 안개를 다시 뚫어지게 살폈다. 그러자 안 개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잘못 본 걸까?
그러나 다음 순간 아프나이델은 뱃속이 뜨끈해 오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불붙은 숯덩이가 뱃속을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
프리스트 제레인트가 왜 저리 비명을 지르는가? 그리고 이곳은 어디인가?
“세상에, 말도 안 돼!”
아프나이델은 기겁한 소리를 지르며 강물에 뛰어들었다. 강물이 튀어올라 다리를 적신 순간 아프나이델은 다시 한번 까무러치는 기분을 느꼈다. 강 물은 미지근했다. 처음에는 뜨겁다고 느낄 정도였던 것은 이 협곡의 차가운 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일페사스의 말이 맞았다.
제레인트는 이미 단호한 태도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한쪽 팔에 고삐를 단단히 감아쥔 제레인트는 다른 쪽 손으로 센추리온의 고삐를 낚아채었다. 그 동안에도 아일페사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상류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두말없이 센추리온을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꽉 잡아, 펫시!”
철벅철벅! 뜨거운 강물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아일페사스는 나동그라질 뻔했지만 간신히 안장을 움켜쥐곤 비명처럼 외쳤다.
“저게 뭐야, 제리! 못 오게 해요! 저거 싫어!”
아일페사스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외쳤고 제레인트 역시 대답 없이 단호한 태도로 강물을 건넜다. 이힝힝힝힝! 말들은 괴로운 비명 을 토하며 뜨거운 강물을 가로질렀다. 강물을 건넌 제레인트와 아일페사스는 그대로 반대쪽 경사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의 말은 두 명이 타고 있었기에 조금 느리게 그 뒤를 따랐다.
고오오오! 뒤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프나이델은 검은 안개가 이미 지척에 닿아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이미 천 큐빗 깊이의 협곡을 가득 메운 안개가 협곡 위까지 넘쳐흐르는 것이 보였다.
“이랴! 이랴!”
“하아아!”
검은 안개가 등 뒤를 덮치기 직전, 일행은 간신히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에 들어섰다. 일행은 잠시도 쉴 틈 없이 그대로 지상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두두두두두! 급한 경사인 데다 좌우로 정신없이 꺾어지는 길을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의 속도는 가히 경이로웠다. 그들의 발 밑을 지나친 검은 안개는 이제 하류 쪽을 향해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높은 위치를 달리며 주위를 조망하게 된 아프나이델은 이제 더욱 기막힌 광경을 보게 되었다. 상류 쪽의 협곡이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협곡의 상류 쪽은 이미 파도처럼 솟구쳐 오르는 검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하늘에서 본다면 광막한 데이든 평원 한가운데 갑자기 산이 솟아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울컥울컥 분출된 검은 안개는 이윽고 저편 하늘마저 가렸 다. 그러고도 안개의 분출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을 추격하는 검은 안개로 사방이 휩싸여 버렸다. 아프나이델은 시계가 극히 제한되자 황급히 말의 속도를 줄였다. 계곡으로 뛰어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계곡에서 솟아오르는 안개는 말 위의 아프나이델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거센 진동음을 내 고 있었다. 고오오오! 아프나이델은 죽어라 달려 올라가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제레인트! 아일페사스!” 그러나 안개는 빛뿐만이 아니라 소리까지도 삼켜버리는 듯했다. 아프나이델의 팔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마치 계절을 거슬러 겨울이 다시 돌아온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그리고 계속되는 폭음. 안개는 이제 화산 같은 기세로 쏟아져내려오고 있었다.
“제레인트! 아일페사스! 대답해요!”
“여기예요, 어서 달려요!”
저편에서 미약한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은 그들이 아직 무사히 달려 올라가고 있음을 알고는 계속해서 말을 재촉했다. 잠시 후 안개 저편에서 두 마리의 말이 모습을 보였다. 아일페사스는 넋이 나가버린 표정으로 센추리온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고 제레인트는 여전히 센추리온 의 고삐를 대신 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그 뒤를 쫓았다.
강제로 이 정신 나간 질주를 즐기게 된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허리를 꽉 붙잡은 채 이 멍청이들이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안개 일 뿐이잖은가. 비록 인상적인 모습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지형에서 자주 일어나는 자연 현상일지도 모른다. 일행 중의 최고령자일 뿐만 아 니라 가장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인 엑셀핸드가 드워프이기에 승마술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일행에게는 불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엑셀핸드는 이 일행을 보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인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행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훌륭한 인솔자가 있었다.
제레인트 덕분에 간신히 아무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타고 있는 말의 귀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안개 속에서 일행 을 올바로 이끈 것은 갈림길을 잘못 접어들지 않는 테페리의 프리스트의 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아무런 주저도 보이지 않은 채 절벽을 타고 달렸다. 그리고 제레인트가 이끌고 있었기에 아프나이델 역시 주저 없이 달렸다.
“저기야! 다 왔어!”
숨 막히는 질주의 끄트머리에서 제레인트는 고함질렀다. 안개는 부피와 딱딱함을 가진 물질처럼 요란한 소리를 뿜어내고 있었으므로 제레인트의 목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일행은 튀어 오르듯이 협곡에서 평지로 올라섰다. 말들은 모두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고 기수들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협곡을 빠져나온 일행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이게 뭐야!”
엑셀핸드가 황급히 아프나이델의 팔을 잡아당겼다. 흥분해 버린 세레니얼을 제자리걸음시키며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얗게 질린 엑 셀핸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엑셀핸드의 풍성한 턱수염이 모조리 곤두서 있었다. 엑셀핸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협곡을 흘러넘치는 안개의 폭풍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프나이델의 질문이 있고서야 엑셀핸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도 겁을 집어먹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들리지 않냐, 아프나이델?”
“예? 뭐가요?”
같은 말 위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였지만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목청껏 고함질러야 했다. 땅이 울리는 진동음과 미친 듯한 안개의 회오리 소리 때문에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노래, 노래가 들리지 않냐고!”
노래? 아프나이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귀에도 폭풍 소리 가운데를 뚫고 날아온 미약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하게 강인한 박자의, 지독하게 거친 노랫소리가.
붙붙은은 마마………… 핏핏빛빛………… 이이트트의의 …………법법!”
아프나이델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말 위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야.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아프나이델은 협곡을 주시 했다. 옆에서는 제레인트가 뭐라고 고함지르고 있었으나 아프나이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음침한 노랫소리뿐이 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 핏핏빛빛………… 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개의 폭풍 때문에 다시 밤이 돌아온 것 같은 암흑 속에서 아프나이델은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자신의 추측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폭풍 소리 사이로 절그렁거리는 거친 쇠붙이 소리들도 들려왔다. 숨통을 조여 오는 듯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엑셀핸드는 부 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프나이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아일페사스가 발악하듯이 외쳤다.
“저거! 저거!”
저거라니?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휘두르며 아프나이델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저거라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 저 흔들리고 있는 하늘을 말하 는가? 허공에서 요괴스러운 빛으로 번득이는 검은 안개를 말하는가?
“내가 그랬잖아! 저거 많다고 했잖아요! 시체 말이야아!”
시체라고? 시체, 주검, 해골, 대미궁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과거의 유골, 망자, 죽음의 기사.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그리고 느닷없이 안개를 뚫고서 그것들이 나타났다.
파도의 끄트머리를 박차고 오르는 갈매기처럼, 그들은 검은 안개의 끝에 실려 지상으로 떠올랐다. 휘몰아치는 안개는 이미 사방을 향해 뻗어가며 하 늘을 가리기 시작했고 낮에 찾아든 밤의 결을 따라 그들은 짙은 공포를 호흡하며 번뜩이는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갈가리 찢어져 펄럭이는 붉은 깃발. 손에 손에 들고 있는 억센 무기들은 말라붙은 핏자국 투성이였다. 마귀의 모습을 본뜬 투구 아래 빛나는 눈빛은 타오르는 두 개의 불길이 었다. 마구잡이로 뒤엉킨 근육들에 올올이 새겨져 있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한없는 적의. 그들이 내딛는 발 아래 대지는 신음했고 독기를 품은 숨결에 풀들은 오그라들었다.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 300년의 세월을 거슬러 그들이 다시 대지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