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7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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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7


7

“이런, 젠장! 너는 사망하고 나는 생존하는 방식으로 모색해 보잣!”

제레인트는 너 죽고 나 살자는 말을 이렇게 고차원적으로 말한 다음 말머리를 돌렸다. 아일페사스는 알고 있는 욕설을(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모조리 뒤섞어서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지만 제레인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을 돌린 제레인트는 그대로 마상에 앉은 채 디바인 마크를 꺼내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가 갑자기 앞을 막아서자 기겁하며 말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를 태운 세레니얼 이 제레인트의 말 후치를 지나치자 제레인트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의 옆을 지나치고도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을 세울 수 있었다. 다시 뒤로 돌아선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검은 안개는 이미 시야가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선 높이와 넓이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칼날 같은 바람은 허공에 휘파람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합창 소리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 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해골들이 대지에 발을 디딜 때마다 지독히 역겨운 마찰음이 울려퍼졌다. 도저히 말이라고는 생각되 지 않는, 그러나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될지 짐작도 되지 않는 괴기스러운 짐승들 위에 올라앉은 데스나이트들은 그레이트 액스며 투 핸드 소드 같은 중무장을 허공에 휘둘러대며 거친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 법법!” 아프나이델은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부끼는 로브 자락을 내버려둔 채 제레인트는 단신으로 산더미 같은 안개를 상대하며 외로이 서 있었다. 아프나이델의 시야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 까지를 모두 채워버린 데스나이트들과 아래에서 윗부분까지를 모두 채워버린 검은 안개 속에서 하얗게 도드라지는 제레인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작 은 점이었다.

“제, 제레인트!”

아프나이델의 비명 소리는 너무 가냘펐다. 데스나이트는 타오르는 눈으로 제레인트를 응시하며 외쳤다.

“쥐쥐새새끼끼 같같은은 놈놈이이! 네네 신신의의 품품으으로로 돌돌아아가가고고 싶싶은은게게냐냐?”

“나는 말이야.”

제레인트는 침착한 태도로 눈앞을 막아서는 수천 큐빗 높이의 안개 더미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기어 나와야 되는 것이 정말 싫어. 내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내 머리를 주먹 단련용 도구로 사용하시긴 했 지만, 그래도 난 그것을 좋아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기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잠자리에서 그렇게 부지런 떨어가며 기어 나오느 냔 말이다. 그것도 시답잖은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내가 부끄럽잖아? 컨트롤 웨더!”

기도문인지 헛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던(헛소리지만 꼭 기도문처럼 장엄하게 말했기 때문에 아프나이델은 헷갈렸다.) 제레인트는 디바인 마 크를 높이 들어올리며 고함을 꽥 질렀다.

신은 소망으로 역사한다.

욕망이나 의지로 신을 움직일 수는 없다. 인간은 소망으로 신께 날아들며,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것도 부모가 자식에게 허락한 그것과 같다. 한없이 원하고 또 원할 것. 언제든 소망을 잃지 말 것.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뿜어낸 순수한 소망은 테페리에게 곧장 전달되었으며 데이든 평원 위로 신의 역 사가 시작되었다.

쩡!

최초의 소리는 데이든 평원을 순식간에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었다. 데스나이트들의 합창도, 안개의 노호성도 지워버리는 맑고 투명한 소리 에 아프나이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오를 정도였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를 단숨에 꿰뚫는 저릿한 느낌에 울음이라도, 혹은 웃음이라도 터뜨려버리 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프나이델이 그것보다 더 절실히 원하는 것은…………….

‘바지춤을 풀어헤치고 시원하게 오줌을 누고 싶은데.’

풀들이 미세하게 떨린다. 풀들 사이로 작은 자갈들이 춤을 춘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땅이 흔들린다. 모래를 가득 깔아놓은 철판을 해머로 때려보 라, 지금 데이든 평원에 널려 있던 자갈들의 움직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쩡! 쩡! 쩡! 데스나이트들은 신의 역사에 발광하기 시작했다.

“크크아아아아악악! 저저주주를를 너너에에게게! 네네 신신의의 이이름름을을 저저주주한한다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이 극도로 혼란스럽게 뒤섞인 그들의 포효와 비명 소리에 엑셀핸드는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낭랑하게 외 쳤다.

“가라! 저 친구들, 안색이 너무 나쁘다. 햇빛 좀 쐬게 해줘!”

휘우우우웅! 아일페사스는 갑자기 일어난 바람에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데이든 평원의 동에서, 서에서, 남에서, 북에서 질풍이 일기 시작했다. 제레인트의 소망이 불러일으킨 바람은 곧장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창끝을 디밀었다. 아프나이델은 희열에 들떠 외쳤다.

“그래! 저 안개, 저 검은 안개!”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가 바람을 불러일으킨 까닭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즉시 두 손을 들어올려 화려한 동작으로 휘둘렀다. 정신없이 나 부끼는 머리카락을 누르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며 아프나이델의 손동작을 응시했다.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아프나이델의 화려한 손동작과 캐스트에 대응하여 데이든 평원 가득히 편재되어 있 던 마나가 미미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일페사스의 입술이 조금 힘없이 벌어지는 순간, 아프나이델은 고함질렀다.

“윈드 월!”

마나는 의지로 재편된다.

세계에 안겨 있으며 세계에 순응하는 마나는 그 자체로 세계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마법사의 의지는 전체 마나의 배열에 일탈을 야기한다. 잘못 맞춰진 톱니바퀴처럼 어긋나버린 마나의 배치는 대자연과 끔찍한 마찰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마찰은 바람의 형태가 되어 데이든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일으킨 바람은 장벽이 되어 데스나이트의 앞을 막아섰다. 선두에 선 데스나이트들의 눈이 이글거렸다.

“바바람람으으로로 검검을을 막막는는가가!”

선두에 섰던 데스나이트들은 고함을 지르며 바람의 장벽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검은 안개는 바람의 장벽에 부딪히며 갈가리 찢기어 뒤로 흩날렸다. 결과적으로 데스나이트들은 검은 안개의 보호 없이 무자비한 햇빛 아래 노출되었다.

“크크아아아아악악!”

폭발적으로 검은 화염이 솟구치며 데스나이트들은 불타올랐다. 데스나이트들의 몸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화염은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제 레인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가 콜록거리며 힘없이 물러나는 동안 데스나이트들은 검은 불꽃으로 타오르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제레인 트를 향해 돌진했다. 선두의 데스나이트는 허공에 검은 불꽃의 반원을 그리며 핼버드를 어깨 너머로 힘껏 젖혔다. 퓨르르르!

“파이어볼!”

마법사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며 화염의 공이 날아들었다. 데스나이트의 어깨가 끔찍스럽게 부풀어 올랐고, 내리쳐진 핼버드는 날아드는 파이어볼에 명중했다. 콰앙! 붉은 불꽃과 검은 불꽃이 뒤섞여 불의 폭풍을 이루었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잠시 주춤했을 뿐 곧 아무렇지도 않은 모 습으로 달려들었다. 아일페사스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리이! 이 멍청이, 달아나요!”

“아, 콜록! 멍청이 씨. 당신과 나는 달아나야 한다는군. 그런데, 콜록! 펫시. 멍청이라는 그분 어디 있는데?”

콜록거리면서도 기어코 농담 한 마디를 완성한 제레인트는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바람에 의해 검은 안개가 벗겨졌건만 데스나이트들은 온몸을 불 태우면서 달려들고 있었다. 다행히도 회오리를 뚫고서 달려 나온 데스나이트들은 몇 안 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라도 검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하 게 했을 경우 제레인트는 테페리를 친견하는 영예를 누리게 될 것이었다.

“달려라! 후치!”

“달리세요, 센추리온! 이 바보야, 달려! 왜 제가 이런 미련한 생물에게 몸을 맡겨야 되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이미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고 제레인트와 아일페사스는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데스나이트들은 그들을 추적 하려 했지만 아프나이델이 불러일으킨 바람의 장벽은 검은 안개를 모조리 흩어버렸다. 그리고 제레인트의 소망으로 일어난 바람은 오히려 그들을 절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들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영영원원히히 저저주받받으으라라! 지지옥옥의의 회회랑랑에에서서 다다시시 만만날날 그그날날까까지지”

더 이상 제레인트의 일행을 뒤쫓지 못하게 된 검은 안개는 바람의 장벽 뒤에서 맹포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데스나이트들의 저주 섞 인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케 하고 있었다. 두번 다시 뒤돌아 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제레인트와 아일페사스, 아프나이델, 엑셀핸드는 죽을힘을 다 해 말을 독려했다.


툭. 투두둑.

파는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상하게 을씨년스러운 저녁이었다. 대평원 전체에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석양빛이 가득했지만 그 황혼을 가 로질러 비가 오고 있는 것이었다. 봄비는 가늘고 따스했다. 내리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늘게 떨어지는 빗발 사이사이로 간혹 번득이며 석양빛을 반사하는 빗방울들이 있었다. 하지만 촉촉이 젖어든 어깨에 바람이 닿을 때마다 파는 한기를 느꼈다. 파는 기를 쓰며 망토 깃을 세우고는 망토 안으로 자신을 안아쥔 채 앞쪽을 향해 작게 외쳤다.

“쳉, 계속 갈 거야?”

쳉은 대답도 없이 부지런히 땅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빗살에 모든 것이 다 지워져버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취를 찾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미 흠 뻑 젖어 이마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코를 거의 땅에 붙이다시피 한 거북한 자세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쳉의 모습을 보며 파는 입술을 깨 물었다.

빗살마다 다른 색깔을 칠해 본다면, 지금 사이들랜드의 대평원의 상공은 미치광이가 고장난 베틀로 짜낸 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붉은색 과 검은색뿐이었다. 파는 젖어드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는 얼굴을 훔쳤다. 쳉은 여전히 붉은 대평원 위의 검은 그림자가 되어 여기저기로 돌 아다니고 있었다. 자취를 찾는 데 방해될까 봐 캐시헌터의 고삐까지 파에게 맡겨둔 상태였다. 파는 쳉에게 다가갔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자 쳉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자취가 지워질지도 몰라.”

파는 쳉의 말을 무시하며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건넸다.

“아직 아무것도 못 찾았어?”

쳉은 허리를 펴더니 손에 붙은 풀부스러기와 흙덩이를 털어내었다. 시선은 계속해서 땅을 향하고 있었기에 파는 한 번 더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건네 는 시늉을 해야 했다. 망토를 받아든 쳉은 그것을 대충 어깨 위로 두르고는 대답했다.

“몇 개 찾긴 했는데 확실치가 않아. 개 발자국이 있으면 확실할 텐데 아달탄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녀석이고. 하지만 눈에 익은 발자국이 보이는 데.”

“눈에 익은? 뭔데?”

“굉장히 큰 말의 발자국. 데브가 말하던 엄청난 말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럼 이 방향이 맞나 보네. 역시 쳉이야.”

쳉은 별 대답 없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방향으로 죽 나가면 턴빌이 나온다. 이상하군. 동쪽으로 향하던 자취가 왜 갑자기 남쪽인 턴빌로 바뀐 것일까. 단숨에 턴빌까지 가기가 힘들어서였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여유 있게 보급을 받아가며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미는 턴빌에 무슨 용무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정체불명의 동행자들은 왜 아직까지도 미와 함께 있는 것일까. 혹시 고스빌에서 미와 그 동행자들은 서로 헤어진 것이 아닐까? 이 자취로 보건대 그 이상한 일행은 분명히 턴빌로 향한 것 같다. 하지만 쳉은 미가 아직도 그 일행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쳉은 다시 한번 아달탄이 발자국을 잘 남기지 않는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파하스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지는군.”

“응?”

“자취를 잘 모르겠어.”

파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헬카네스를 찬양하는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 발자국이 있다면서? 그런데 왜 모르겠다는 거야?”

“그래. 그 발자국은 있어. 그런데 미가 아직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어. 미의 원래 목적지를 짐작할 수 없는 바에야 미가 어디까지 그들 과 함께 있을지 알 수가 없지. 어쩌면 미는 벌써 고스빌쯤에서 ‘안녕, 미는 그동안 즐거웠어요.’어쩌고 하면서 그들과 헤어져버렸을 수도 있단 말이 야.”

파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떻게 해?”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인상적인 자취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이 이상한 패거리를 하루빨리 따라잡는 도리밖에. 미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뭔가를 물어볼 수는 있겠지.”

그리고 턴빌이라면, 모든 것이 잘 처리되었을 경우 다시 상단에 합류하기도 편해질 것이다. 이미 다시 만날 기일을 넘겼으니 그들이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다. 킬로이는 보스의 신경질을 받아주다 못해 마주 신경질을 내고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다면 상품 거래 같은 것 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 빨리 돌아가야 되겠군. 쳉은 휘적휘적 걸어와서는 다시 캐시헌터에 올라탔다.

“가자. 턴빌일 거야. 중간에 야영을 하거나 할 만한 장소는 없어, 그들이 엘프가 아니라면.”

“엘프? 재미있는 생각이네. 설마 엘프가 그런 자취들을 남겨놓고 다닐까.”

파는 좀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 마디는 했다. “이랴!” 캐시헌터는 곧장 달려나갔고 파는 어쩔 도리 없이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달리면서 파는 쳉의 등을 향해 외쳤다.

“그럼 곧장 턴빌까지 달릴 거야?”

“비가 오잖아. 저기 숲이 보이지?”

쳉은 손을 들어 진행 방향에서 조금 우측으로 치우친 위치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해 안에 간신히 도착하겠군. 저기서 비를 좀 피한 다음에.”

비를 피한 다음에 계속 달리겠다는 말인가 보구나. 내일 아침까지는 죽을 맛이겠군. 파는 속의 불평을 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안장 위로 몸을 조금 들어올리며 화이트풋을 재촉했다. 조금 후, 파는 쳉과 보조를 맞추어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지금, 나는 쳉과 함께 달리고 있어.’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이들랜드의 남쪽은 억새들의 군생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떨어지는 빗 발은 황혼에 물들어 사위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말을 달리고 있었기에 얼굴로는 빗방울들이 촉촉이 감겨들었고 말들이 뿜어내는 하얀 김은 빗줄 기 사이로 진한 음영을 만들어내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은 그들 주위로 희미한 물안개를 피워올렸다. 파는 스카프를 얼굴로 끌어올려 봤지만 물 에 젖은 스카프가 호흡을 방해하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빗방울에 얼굴을 맡겨버렸다.

‘영원히 이대로 달렸으면.’

하지만 황혼은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자 황야는 빠르게 어두워졌다. 쳉의 가늠은 정확해서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숲의 초 입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숲으로 뛰어들자마자 쳉은 재빨리 행동했다. 나이프와 밧줄, 모포를 꺼내든 쳉은 주위를 살피다가 적당한 위치의 나무 두 개를 찾아내었다. 모포의 두 귀퉁이에 밧줄을 묶은 쳉은 그 밧줄들을 나무에 연결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모포를 늘어지게 만든 뒤, 땅에 늘어진 부분을 바람 방향 반대로 당 겨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삽시간에 천막 비슷한 것을 만들어놓고서, 쳉은 파에게 턱으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

“응?”

“저 아래로 들어가. 비가 차다.”

파는 얼굴을 쓸어내려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쳉은 어쩔 건데?”

쳉은 대답 없이 캐시헌터와 화이트의 안장, 그리고 자신의 짐더미와 파의 짐더미를 천막 아래로 옮겼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깨달은 파가 도 움을 주려 할 때는 이미 쳉은 그 작업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쳉은 말 두 필의 고삐를 모아서는 천막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나무에 묶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파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나가는 비야. 곧 멋겠지.”

쳉은 그렇게 말하고는 캐시헌터의 안장을 뒤적거렸다. 술병을 찾아낸 쳉은 망토 자락을 넓게 펼치며 천막 앞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의 그 민첩하고 세심한 행동에 비해 볼 때 비에 젖은 풀밭에 아무렇게나 철퍼덕 앉아버리는 쳉의 모습은 파에게는 이율배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파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막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뒤로는 모포가 막고 있고 앞쪽은 두 마리의 말과 쳉에 의해 막혀 있어서 빗방울은 거의 들이치지 않았다. 파는 짐더미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턱을 얹은 채 천막 앞을 가로막고 앉은 쳉의 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후둑. 후두둑. 모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둔한 탄성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빗방울은 거세지 않았고 숲을 뚫고 들어오는 빗방울은 더욱 적었다. 비 오는 밤다운 안온함과 고요함 속에서 파는 숨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파는 말했다.

“이런 밤을 자주 겪나 보지? 무슨 천막을 이렇게 빨리 만들어.”

쳉은 술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런 밤이라. 이런 밤은 정말 드문 밤인데.”

“응?”

“이슬비 오는 숲 속에서 여자와 단둘이 맞이하는 밤이 자주 겪는 밤은 아니지.”

파는 가슴을 내리눌러야 했다. 갑자기 커지는 호흡 소리를 억누르려 애쓰며 파는 쳉의 말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빗소 리에 적당히 뒤섞여 들려온 쳉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출렁. 갑작스러운 소리에 파는 손가락을 깨물 뻔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멍청함을 소리없이 꾸짖어대었다. 술병째로 술을 마시던 쳉이 병을 내리자 맑은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쳉은 입가를 대충 훔치고는 술병을 망토 자락 안으로 감추며 다시 비 오는 숲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싸아아아……………

숲의 머리 부분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작은 소곤거림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쳉은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에 젖어 등에 달라붙은 쳉의 망토를 바라보며 파는 무의식중에 말했다.

“언니를 꼭 찾을 거지?”

쳉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응.”

“찾은 다음엔?”

“글쎄. 지금 생각으로는 너와 함께 사이들랜드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와 함께? 쳉은?”

“이대로 남쪽으로 달리면 다시 상단에 합류할 수 있겠지.”

“언제나 그렇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이야?”

쳉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하지만 어두운 천막 아래 가려 파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쳉의 뒤통수를 향해 억눌린 듯한 파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만일, 만일 언니가 남쪽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면? 그러면 어쩔 건데?”

“이번 여행의 배당금은 포기하는 거지.”

“언니가, 언니가 정말로 쳉이 찾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쩔 거야?”

쳉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술병을 들어올린 쳉은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뱃속이 조금 따스해지는 것을 느끼며 쳉은 다시 술병을 망토 안으로 갈무 리했다.

“어쩔 거냐고?”

“직접 듣겠어.”

“뭐?”

“미에게 직접 듣겠어.”

“언니가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상단에 합류해야겠지.”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스며드는 쳉의 목소리는 눅진거리는 습기에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도 아니고 습관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동화라고 할까. 쳉은 그저 비 내리는 봄 밤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언니를 찾는 거야?”

파의 목소리에는 이 밤을 떠도는 습기와는 다른 종류의 습기가 배어 있었다. 쳉은 대답할 말이 곤혹스럽다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대답할 수야 있다. 하지만 사람은 말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어조도 함께 전달받는다. 파의 질문은 마치 네가 대답할 말이 있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감정 결핍증 환 자가 어떤 대상이든 간에 집요함을 보여줄 수가 있느냐는 질문.

“하나뿐이니까.”

“뭐?”

“내게 미약한 감정의 조각이라도 돌려주는 것은 이 세상에 미 하나뿐이니까.”

파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 병신자식은 어떤 일에도 진심으로 즐거워할 줄 모르고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는 다. 파는 무수히 많은 질문이 있을 법한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거친 분노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데도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그날의 아침 을 떠올렸다. 그날, 고스빌의 숲에서.

파는 비명을 터뜨리고만 싶어졌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파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떨리는 경련을 억눌렀다. 저 괴물 녀석은, 그러나 딱 하나에 대해서만은 진지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하나는 그녀가 아닌 것이다.

아빠를 죽게 한 걸로도 충분하지 않은 거야!

‘미, 네가 아빠를 죽였어!’

‘그렇지 않아, 파.’

‘다 봤으면서, 다 봤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아빠가 타죽도록 내버려둔 거야! 살인자, 이 살인자! 네가 아빠를 죽인 거야!’

‘파, 파, 이러지 말아. 나는…………..?

무슨 변명이라도 해봐. 못 이기는 척하며 그 변명을 받아들일 거야. 나는 남겨진 단 하나의 가족을 미워하며 살 수는 없어. 하지만 미는 말하지 않았 다. 어떤 변명의 말도 하지 않고 파의 저주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것은 파에게는 더 잔인한 일이었다.

상처는 깊고, 오랫동안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파는 얼굴을 무릎에 대고 비볐다. 거의 얼굴을 뭉개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봄의 여린 풀잎을 토닥거리며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쳉은 한숨을 실어 보냈다.

소리 죽여 울고 있지만 쳉은 파의 울음을 잘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솟아오르지 않는다. 스스로도 참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쳉이 느 끼는 가장 강렬한 감정은 미약한 동정심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쳉뿐이 아니었다.

“비 내리는 밤, 으슥한 숲속의 청춘 남녀. 애들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일어나야 되는데, 도대체 뜨거운 사랑은 어디로 여행갔지? 이건 관객 무시 라고.”

쳉은 벌떡 일어섰다.

방자한 목소리가 들려온 쪽에는 한 사내가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사내는 나무에 기대선 채 한 손으로 머리의 빗방울을 털면서 쳉에게 미소를 보내 오고 있었다.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미소였지만 약간의 장난기도 배어 있었다. 파와 비슷할 정도의 작은 키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긴 검을 찬 모 습이었다.

쳉은 망토 아래 비죽이 끄트머리를 드러낼 정도로 긴 검을 보며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저 키에 저렇게 긴 검을 쓰기는 어려울 텐데. 사내는 쳉의 눈 길을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해 내었네, 젊은이.”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지도 않은데. 쳉은 신경질을 낼 정도로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에 대신 의아해하며 사내를 마주보았다. 자세 히 보자 사내의 등이 마치 꼽추처럼 불쑥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등에 저게 뭘까? 사내는 손가락을 하나씩 세워보이며 낭랑하게 말했다.

“첫째, 세상에 사랑은 다 죽었어.”

“둘째는 뭡니까.”

“자넨 사내도 아냐.”

쳉은 빙긋 웃었다. 사내는 이제 어깨의 빗방울을 털어내는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망토의 끝자락을 잡아서는 멋들어진 동작으로 어깨 뒤로 넘겼다. 상당히 의도적인 동작. 그제서야 쳉은 사내의 등이 왜 저렇게 불룩하게 솟아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내는 등 뒤에 커다란 하프를 메고 있었다. 사내는 턱으로 쳉에게 옆으로 비키라는 시늉을 했다. 쳉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서자 사내는 화려한 동작으로 천막 안의 파에게 허리를 숙 여 보였다.

“이런 밤에만 뵈올 수 있다면 낮이 영원히 찾아오지 않아도 이 가련한 광대는 만족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이 겁 많은 광대에게 허락된 이상 의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는 저의 선량한 정의감이올시다. 레이디께 남자를 고르는 데 대한 조언 을 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파는 당황하며 벌떡 일어섰다. 너무 성급하게 일어서느라 자칫하면 모포에 휘감긴 채 나동그라질 뻔했지만, 파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얼굴이 빨갛 게 되어선 말했다.

“누구세요?”

사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파를 바라보았다.

“누구냐고 했소? 나를 모른단 말입니까?”

“예. 모르겠는데요? 아, 저는 파 L. 그라시엘이에요.”

사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파를 바라보더니 재빨리 표정을 바꿔 이번엔 적개심 넘치는 표정으로 쳉을 올려다보았다. 어리둥절해 있는 쳉을 향해 사 내는 점잖게 꾸짖기 시작했다.

“이 레이디께서는 문 밖의 세상이 죄악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요조숙녀인가 보군. 이 나쁜 놈아, 그래 이렇게 순진한 아가씨를 이 밤에 여기로 유 혹해 온단 말이더냐?”

“꼭 킬로이처럼 말하는군요. 음, 신기한데.”

“뭐야?”

“아니오. 나는 쳉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내는 이제 간질 환자 비슷한 얼굴로 바뀌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향해 쳉은 조용히 의문을 피력했다. 

“여러 가지 상황에 사용하기 위해 평소에 많은 표정을 연습하시는 편입니까?”

“너 정말 날 모르느냐?”

“언제 내 돈이라도 떼먹고 달아났습니까?”

“무슨 소리냐? 나는 널 오늘 처음 본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안단 말입니까?”

사내는 거대한 한숨을 내쉬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 왔기 때문에 황급하게 도로 고개를 숙 여야 했다. 쳉이 보기에 사내의 동작들에는 어쩐지 가식적인 면들이 꽤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라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든다기보다는 즐거운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눈을 거칠게 비빈 사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는 말했다.

“명성의 부질없음이여! 한때 처녀를 공략하고픈 모든 청년들은 내 노래를 외워야 했던 시절도 있었지. 열다섯 명의 출판업자들이 방랑중인 나를 추 적하기 위해 한 달 동안이나 익숙지도 않은 모험에 시달려야 했던 적도 있었네. 내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래. 자랑하고 있네! 지금 까지 나를 못 알아보는 청춘 남녀를 만난 적이 없어서 그래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자랑을 해야 되는군. 쳉과 파, 거 이름 한번 걸작들이다! 어쨌든 세 상에서도 보기 드문 커플이 오늘 밤 나를 난처한 지경에 빠져들게 만드는군.”

“노래꾼입니까?”

“시인이야!”

“아, 시요. 어떤 노래를 만들었는데요?”

사내는 마침내 포기해 버린 표정을 지었다. 쳉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사내는 등에 메고 있던 하프를 뽑아들었다. 마치 검을 뽑는 듯한 동작이어서 쳉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프를 꺼내든 사내는 주위를 대충 둘러보더니 나무 등걸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위에 앉았다.

사내는 왼팔로 하프를 껴안고 오른손을 가볍게 현으로 가져갔다. 흩뿌리는 빗방울이 앞머리를 적시도록 내버려둔 채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 내의 손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현들이 아스라한 신음 같은 소리를 내자 쳉은 숙연한 기분을 느꼈고 파는 숨소리마저 낮추었다.

그리고 사내는 오크의 목을 따기 시작했다(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아이야 이켈리나, 미치광이의 마을에,

그래, 용감한 구두장이 믹 더 빅!

오른손에는 망치, 왼손엔 작은 못

용감하고 쾌활한 구두장이 믹 더 빅!

구두장이치고도 너무나 용감한 사내였지만,

창밖에 리틀 브리짓, 산책을 나서면

그날은 왼발만 두 개씩, 이야히호! 

창밖에 리틀 브리짓, 산책을 나서면 

그날은 오른발만 두 개씩, 이야히호! 

그래서 착한 리틀 브리짓, 

언제나 산책은 반드시 두 번씩 다녔지.

그래서 아이야 이켈리나, 미치광이의 마을엔

할아버지도, 꼬마도, 새침한 아가씨도

구두는 모두 두 벌씩 있었다지?

쳉은 이 노래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야 이켈리나의 구두장이 믹 더 빅.”을 이렇게 못 부르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았다. 보스는 좋겠군. 자기 보다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면 얼마나 행복해할까. 쳉은 손을 들어올려 사내의 신기, 즉 떨어지는 빗방울을 침방울로 맞춰 격 추시키는 신기를 중단시켰다.

“아, 예. 잘 알겠습니다. 노래꾼은 아니군요.”

그 실력에 노래꾼이라면 굶어죽기 십상이겠다는 의미였지만 사내는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이제 알았냐?”

“예. 시인이신가 보지요. 어떤 시를 지었는데요?”

“응? 방금 들려줬잖아?”

쳉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내를 마주보아야 했다. 잠깐. “아이야 이켈리나의 구두장이 믹 더 빅.”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노 래를 만든 사람은……………, 누구더라? 이름이 입에서 빙글빙글 도는데. 그 때 쳉은 상당히 젖은, 그러나 뜨거운 것이 어깨를 붙잡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린 쳉은 파가 자기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파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두 눈은 사내에게 고정시킨 채 쳉을 미친 듯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쳉은 아주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쳉이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나자 파는 재빨리 쳉의 앞을 가로막 으며 말했다.

“천천히, 천천히 물러나.”

잔뜩 쉰 목소리였다. 쳉은 다시 한번 말의 내용과 그 어조의 관계가 그다지 밀접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쳉의 귀에는 파의 말이 ‘물러나지 말고 나 좀 잡아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파의 어깨 너머로 사내를 바라본 쳉은 사내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 때 파가 말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내겐 무녀의 문신이 있어.”

사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신? 무녀의? 파 양의 부모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파 양을 극진히 보호하고 싶었나 보군. 하긴 나라도 파 양 같은 매력적인 딸이 있다면 근심 걱정 으로 위장에 구멍을 내고 말겠소.”

“내 언니가 무, 무녀야.”

“아아, 그러셨소?”

“너 따위 유령이 내, 내게 다가오진 못해. 물러나!”

파의 말 마지막에서 빗소리는 다 지워져버렸다. 파의 노호성은 사내뿐만 아니라 쳉까지도 놀라게 만들었다. 유령이라니? 사내는 이 모욕에 크게 분 노를 느꼈다.

“말 조심하시오! 생사람을 잡고 늘어지는 것도 분수가 있지, 무슨 얼토당토않은 유령이라니?”

“그럼, 그럼 네가 누군지 말해 봐.”

“젠장, 파하스요! 아이야 이켈리나의 파하스, 음유시인 파하스가 황당한 레이디를 뵙소이다! 또 어떤 빌어먹을 출판업자가 내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만들어낸 모양이군.”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지만 상상이 현실로 증명되는 순간 파는 아련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쳉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거나 입술을 깨무는 대 신 조금 전 파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파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며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파는 거의 무의식중에 반항하려는 듯한 동작 을 취했지만 쳉은 이미 검집을 당겨잡으며 자칭 파하스라는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쳉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녀석이었군.”

파하스는 이제 눈에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쳉은 아주 파하스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놈! 말 다했냐? 애인 앞에서 죽어 넘어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 사과해!”

쳉은 빙긋 웃으며 응수했다.

“제법인데. 연구를 많이 했나 보군. 거의 파하스처럼 보일 지경이야. 자, 떠나.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겠다. 난 정신 나간 친구들에 게 관대해 본 적이 별로 없고, 무기를 든 미치광이는 더욱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그때였다. 아주 가냘픈 목소리가 쳉의 귀에 들어왔다.

“쳉……, 진짜 파하스야.”

쳉은 미치광이에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러고는 곧 호흡을 크게 들이켜야 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의 파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라고, 쳉………..

“파하스는 죽었어.”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저자는 파하스야.”

“파하스가 그렇게 노래를 못 부르겠냐.”

“으으응! 못 부르는 것이 아냐, 다르게 부르는 거지! 바, 바보야!”

“다르게 부르다니?”

“저, 저 사람이 파하스인 척하려면, 왜 그렇게 이상하게 부르, 부르겠어? 아냐. 저게 진짜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저게 진짜라고. 파 하스가 제일 처음 불렀을 때는 저런 음정이었어. 세월이 흐르면서, 그러면서 바뀐 거야. 그래.”

“뭐?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언니가 들려준 적이 있어. 알잖아. 언니는 보고 싶은 과거는 아무때라도 볼 수 있어. 언니가 언젠가 원래 저 노래가 어떤 건지 들려준다면서, 그러 면서 꼭 저렇게 불렀어. 똑같아! 원래는, 원래는 저렇게 유쾌하고 복잡한데,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게, 그렇게 통속적인 리듬으로……………”

쳉은 가만히 파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파하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연구를 잘했나 보군.”

하지만 파하스는 쳉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파하스는 쳉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파하스는 눈을 흡뜬 채 파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보시오, 레이디.”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파하스의 목소리는 미미한 떨림을 담고 있어 듣기가 퍽 불쾌했다. 파하스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아서는 거칠 게 물방울을 털어내며 말했다.

“세월이 흘러 내 노래가 변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세월이라니?”

파는 파하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녀의 언니가 아니다. 그래서 파는 땅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너, 넌 죽었어. 아마 모르고 있나 본데, 넌 죽은 지 100년도 넘게 지났어.”

“뭐요?”

“넌, 넌 유령이라고. 그래, 유령이야!”

“제길, 비둘기의 구구거림도 이것보단 심금을 울리겠군! 그게 도대체 말이오? 언어요?”

쳉은 점점 눈 앞의 사내를 파하스답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당황했다. 작고 정열적인 북부의 시인, 무수한 여인을 사랑했지만 한번도 그녀 들의 남편이나 애인과의 결투에서 지지 않았던 검객. 그리고 100년 동안 사이들랜드의 평원을 떠도는 유령.

파하스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레이디, 난 사랑스러운 여성들과 논쟁을 벌이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 그리고 내 면전에서 그렇게 하는 놈은 참아주지 않았지만, 등 뒤로부터 들려 오는 많은 조롱과 저주와 질시는 내게 익숙해.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웃기는군.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 취급하는 방식 치곤 개성적일 정도야. 뭐라 고? 100년?”

쳉은 그답게 불안이나 공포보다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100년 만에 펼쳐진 시인의 귀환을.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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