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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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은 시각. 하루 종일 후작의 자취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기에, 그란과 운차이는 조금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홀 로 들어선 두 남자는 폭음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모자란 듯한 모습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네리아의 모습에 아연하고 말았다. 네리아는 홀 구석의 벤치 에 몸을 기댄 채 오로지 술을 마시기 위해서 아직 쓰러지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그란과 운차이를 맞이했다.
“야아! 어서 와, 휘꾹!”
오후 느지막하게 목이나 좀 축이러 찾아든 시민들은 그런 네리아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란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지만 운차이는 사 나운 표정으로 네리아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제정신이 있는 거냐. 환자를 내버려두고 술을 퍼마셔?”
네리아는 머리를 휘젓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란은 눈을 질끈 감았고 운차이는 반대로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네리아는 힘겹게 일어나 며 말했다.
“환자? 헤엥! 환자는 무슨. 안 죽어, 안 죽어. 휘꾹! 미는 저어어얼대로 안 죽어.”
운차이는 욱하며 네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그때 그란의 손이 운차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운차이는 잇소리를 내며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 때 들려온 네리아의 목소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미이이이는, 안 죽어. 앞으로 4년 뒤까지는 말이야. 깔깔깔! 죽어버릴 남편과 결혼하고, 죽어버릴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그 기분 찢어지게 좋을 그 날까지는 미는 불사신이라고. 으킬킬킬킬! 휘꾹!”
“……그게 무슨 말이야?”
“제기랄, 안 죽는다고! 미는 안 죽는단 말이야! 사람 말이, 휘꾹! 말 같지 않아? 엉? 너 말야, 너! 운차이. 너 정말 나 너무 무시해. 인간적으로, 휘꾹! 너무 무시한단 말이야. 그으으러지 마! 그럼 안 되는 거야, 너…………, 음냐, 휘꾹!”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곧장 네리아에게 다가서서는 그 손에 들린 술병을 뺏어들었다.
“어? 어? 이게 뭐야, 내놔!”
네리아는 힘없이 손을 휘저었지만 운차이는 그 항변을 무시하고 곧장 네리아를 안아올렸다. 버둥거리는 네리아를 안아든 채, 운차이는 그란을 돌아 보며 낮게 말했다.
“이 집 주인장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난 올라가야겠으니 네가 대신 좀 해주겠어?”
“그러지. 사과하라는 말이지?”
“아니. 여자가 이렇게 취하도록 내버려두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들면 조만간 조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 전해 줘.”
“넌 양식이 없는 놈이야. 어서 데리고 올라가.”
그란은 운차이를 밀어붙이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모자란 자신의 헤게모니아 어 실력으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원활하게 사과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운차이는 발버둥을 치는 네리아를 데리고 간신히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상태에 빠져 있는 네리아를 환자 옆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 래서 운차이는 그란과 자신이 쓰고 있는 방으로 들어선 다음 네리아를 침대 위에 던졌다. 네리아는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아악! 야, 인마! 헥, 휘꾹! 내가 짐 보따리야?”
“짐 보따리는 주정은 안 부리지.”
운차이는 그렇게 말한 다음 왼손으로 일어나려는 네리아의 팔을 걸어 다시 넘어뜨리는 동작과 오른손으로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무는 동작을 동시 에 취했다. 몇 번 더 일어나려다가 운차이의 방해에 의해 계속 침대에 쓰러지게 된 네리아는 마침내 포기하고서는 두 팔을 펼치고 천장을 바라보며 거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 후……”
운차이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네리아의 옆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창문을 통해 미끄러져내린 오후의 햇살은 침대 위의 네리아를 붉게 물들였다. 시트 위로 흐트러진 네리아의 붉은 머리카락 속으로 발갛게 상기된 네 리아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대로 여자가 누워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저 햇빛 때문이야. 운차이는 그렇게 되뇌며 어 둑어둑한 방 안으로 흰 담배 연기를 흩날렸다.
네리아는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운차이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돌아누운 네리아는 그대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그녀의 등을 내려다 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취했지?”
네리아는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며 울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 서쪽 창문을 통해 기울어가는 태양을 곁눈질했다. 운차이는 실눈을 뜬 채 해를 보며 말했다.
“네가 술이 얼마나 센지는 잘 알아. 그란은 안 올라올 테니 말해 봐. 아까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야.”
“……미가 그랬나? 4년 뒤에 그녀의 남편이 죽고, 그리고 그녀 자신도 죽을 거라고?”
네리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운차이의 시야를 붉은 파도로 가득 채우며 그녀는 그대로 운차이의 목을 휘감았다. 운차이는 조금 당황하다가 곧 파이프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네리아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운차이는 네리아의 붉은 머릿결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 건가?”
네리아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래. 윽, 으윽……. 그리고, 남편도 죽고 미도 죽고 나서, 10년 뒤에는 미의 아들도 죽고, 그 여동생은 자살할 거야. 그렇게 될 거래. 나, 난 너무 무 서웠고, 너무 슬펐어. 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 그, 흐윽! 그건 사실이야. 도저히,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었어. 너도, 너도 그 얼 굴을 봤어야 해. 그래. 운차이, 나, 난 너무 슬퍼. 무서워! 으흐흑!”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네리아의 어깨를 쓸어내렸고 네리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숨이 막히도록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공포는 아직 다 표현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흑! 그런데 미는 그것을 원해.”
“무슨 말이지?”
“미는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대. 그래, 더 이상 미래가 안 보인대. 으, 흐윽! 그 물그릇, 그 물그릇 속에서 더 이상 미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 대. 그날, 그날 기억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미는 아무 모습도 보여주지 않다가, 그러다가 그란의 모습을 보여줬어. 기억나지? 그건 말이야, 그건 과거라고. 미래가 아냐!”
네리아의 머릿결 속에서 운차이의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그날의 기억을 재빨리 떠올리는 것은 간단했다. 계속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 까.
미는 원하는 시간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미가 보여준 것은 과거의 모습뿐이었다. 미래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미는 과거의 모습만을 보여주었을까. 네리아는 요란하게 딸꾹질을 하고서는 울부짖었다.
“그래, 미가 왜 여행을 나왔는지 알아? 응? 미는 말이야, 미는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되고 있다고 했어. 그래서,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여행 나 온 거야. 알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미래가 안 보이게 되어서, 그래서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거야. 큭, 그, 그런데 그 원래가 뭐야? 응? 운차 이! 말해 봐. 그 원래라는 것이 도대체 뭐야?”
맙소사…………. 네리아의 등을 어루만지던 운차이의 손이 갑자기 멈췄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운차이는 까마득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운차이가 홀로 내려왔을 때 그란은 네리아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팔짱을 낀 채 술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홀 안의 손님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그란에게 다가가 앉았다. 그란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네리아는?”
“잠들었어.”
“수고했어. 들려줄 건가.”
“그래야 되겠어.”
운차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와 네리아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여기서 앉아 기다리고 있던 그란에게, 운차이는 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차분한 표정으로 듣기 시작하던 그란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창백한 얼굴로 운차이를 마주보고 있게 되었다. 그의 감정은 도저히 헤게모니아 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이서스 어로 나온 그란의 말도 그의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세상에..”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끔찍하더군.”
“그래. 나 같으면 자살해 버리겠어. 아냐, 잠깐. 자살할 수 없는 건가? 그럼 미래가 변화되는 거야? 이런, 제길!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그럼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 아는 상태에서 그대로 따라하는……………”
“연극이다.”
“응?”
“연극이야. 대본을 외워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 말이다. 미는 그렇게 산다는 말이지.”
“그래, 그렇군.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이지?”
운차이는 손을 들어올려 눈가를 문지르며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불가능할 것은 없지.”
“뭐?”
“불안하지는 않잖아? 좋은 점도 있지.”
그란은 고개를 짧고 강하게 흔들었다.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런 입장이라고 생각해 봐. 아니, 그런 입장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겠군.”
“될 수 없을까.”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말이냐?”
운차이는 윗주머니를 뒤져 파이프를 꺼내며 말했다.
“우리 속담에, 낙타의 눈꺼풀로 덮을 수 있는 것은 모래쥐의 눈꺼풀로도 덮을 수 있다고 하지.”
그란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술병을 기울였다. 따르르르. 청동 술잔에 술이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내던 것도 잠시, 곧 술은 술잔만 한 크기의 동심원 가 운데를 꿰뚫는 화살처럼 고정되었다. 그란은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라보는 세상은 하나라는 의미인가?”
“대충.”
“하지만 미가 보는 세상은 우리와 완전히 달라.”
“그렇긴 하지.”
“그녀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럴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운차이는 파이프를 입에서 떼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진하고 흰 연기가 피어올라 남부 전사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 홀의 불그스름한 공기 속으로 흩 어져가는 그 흰 안개를 향해 운차이는 말했다.
“우리가 그녀의 입장이 될 수 없다면, 그녀 역시 우리의 입장이 될 수 없겠지.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의 입장 말이야. 나는 이에 대해서 수만 명의 장님들 틈에 홀로 섞인 정상인의 예를 들어보고 싶은데.”
“그래…………?”
“그런 정상인은 어떤 기분일까.”
“뭐?”
“그런 정상인은 우선은 장님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겠지. 하지만 그 많은 장님들을 모조리 돕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결국 어떻게 될까. 그 정상인은 장님에 대한 모든 동정심을 포기해 버리겠지. 구렁텅이에 발을 들이밀든, 절벽이나 불구덩이로 걸어가든, 신경 쓰지 않게 되겠지.” 그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속눈썹에 어리는 촛불 빛을 보며 그란은 음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오산이었나 보다.”
“무슨 말이지?”
운차이는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고스빌을 떠나올 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미를 위해서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야. 그것보다는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렸지. 그녀 가 우리와 동행이 된다면 행동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보다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계산적인 생각. 알겠나.”
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군.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니까.”
“동료라면……, 그래. 미래를 본다면, 예를 들어 그 다음날 앰뷸런트 제일이 구덩이에 발이 빠져 발목을 부러뜨리는 일이라도 발생할 것 같다면 미는 미리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동료의 이름으로 그런 희망쯤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한 거지.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후작?”
“그래.”
“그런데?”
“잘못 생각한 것 같아. 그녀는 우리에 대한 동정심이 없을 거야. 아니, 동정심은 있을지 몰라도 말해 주지는 않겠지. 어쨌든 자기 아버지를 죽게 내 버려둔 여자였으니까. 그녀가 비정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나로선 상상도 되지 않는 슬픔을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해졌다는 말이다. 그녀는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어쨌든 이젠 말해 줄 수도 없게 되었지.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니까.”
“으음.”
그란은 운차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운차이는 그란의 목이 굳어버리는 일은 확실히 방지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란은 자신의 생각에 피 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가 말한 그 장님 속의 정상인 말이다.”
운차이는 파이프를 문 채로 눈만 추켜올려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원래 장님인 사람은 사물을 못 봐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겠지. 하지만 정상인이 어느 날 장님이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운차이는 부지불식간에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자세를 바로잡는 자이펀 검사의 예 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란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겠군. 원래 미래를 모르는 우리와는 다르군. 갑자기 미래를 못 보게 되었다면, 우리가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보다 훨씬 더 큰 불안감을 느 끼겠군.”
“그렇게 생각되는데.”
“그란 자네는 확실히 인정머리라는 면에서는 나보다 낫군. 검술도 그 정도 되면 좋으련만.”
“……꼭 독기 묻은 말 한 마디씩 달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거냐?”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이프를 다시 물며 의자에 몸을 파묻는 운차이를 바라보며 그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전혀 미소 지을 수 없었다. 두 가지 의문은 도저히 풀 수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는 원론적인 문제였고, 한 가지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왜 미는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을까?
후작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주블킨 일레드마. 턴빌에 딱 두 명 있는 의사 중 선배에 해당하며, 자신의 학식은 높다고 믿으며 자신의 치료비는 낮다고 믿는 공정 무쌍한 사내는 황당했다. 어젯밤 운차이인지 우마차인지 하는 미친 녀석이 문을 잘라놓고 들어섰을 때 주블킨은 그것이 다시는 겪기 어려운 진귀한 경험이 될 거라 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밤, 간신히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기대어놓은 문이 다시 쪼개지고 말았을 때, 주블킨은 의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서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이 무슨 정신 나간……”
주블킨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들어선 사내는 인사를 하거나 말을 꺼내거나 숨을 돌이키기 위한 단 한 순간의 정지도 없이 그대로 걸어와 주블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도 사내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콰광! 테이블이 나동그라지고 약무더기가 휘날리고 진료 기록들이 춤을 추고 발길에 걷어채인 의자가 요란 스럽게 굴러갈 때도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주블킨은 발버둥조차 칠 수 없이 황급하게 뒷걸음질 쳐야 했다.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던 주블킨은 사내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드문드문 새치가 섞인 밤빛 머리카락뿐이었다.
쿠쾅! 사내는 주블킨의 뒤통수가 벽을 들이받으며 장엄한 충격음을 울려퍼지게 만들었을 때 겨우 멈춰 섰다. 그러고는 주블킨이 눈앞을 맴도는 아름 다운 별들과 이름 모를 새들의 날갯짓을 멍하게 바라볼 틈도 주지 않고 곧장 그를 밀어올렸다. 놀랍게도 주블킨은 두 발이 허공에 뜬 채 사내의 오른 손과 벽 사이에 끼어버리고 말았다. 사내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누가 아파.”
“내가 아픈데.”
사내는 씨익 웃으며 주블킨의 멱살을 놔주었다. 아니, 놔줄 듯이 손을 꿈틀거렸다. 주블킨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려는 순간 밤빛 머리의 사내는 다시 밀어붙였다. 쿠쾅! 주블킨은 허파가 터지는 듯한 충격 속에서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는 음정의 변화가 거의 없이 낮고 쉰 목소리 로 말했다.
“누가 아파.”
“여자, 검은 머리 무녀.”
주블킨은 허덕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사고를 뛰어넘어 단숨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사내는 씁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필 그 무녀란 말이지.”
그제서야 주블킨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두 번이나 짓찧어진 뒤통수는 틀림없이 살갗이 벗겨져 있으리라. 두 눈 가 득히 눈물이 그렁했던 주블킨은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눈을 깜빡여서 눈물을 짜내었다. 쿠쾅!
“내가 영감 마누라야. 왜 눈짓을 하고 지랄이야. 얼마나 아파. 약을 가져다줘야 하나.”
사내는 의문문을 마치 평서문처럼 발음했지만 주블킨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힘으로 잡아 끌어올려진 옷깃은 마치 교수대 밧줄처럼 주블킨의 목을 졸라왔다. 주블킨의 볼은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고 그의 입은 한 모금의 공기를 찾아 거칠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피가 흘러 목을 적셔오는 가운데 주블킨은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서 대답했다.
“아, 아니……. 약은 안 써.”
“왜지.”
“놔두면 나을 테니까.”
“약을 가져다줘. 빨리 나을 수 있는 처방이 생각났다고 말해.”
“무, 무슨 약을?”
“먹으면 사나흘 동안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는 약 있나.”
네가 찾아가서 지금 내게 하고 있는 짓을 해줘라, 사흘이 아니라 3년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게 될 거다. 주블킨은 속으로 그런 악담을 퍼부어대었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퍽 유감스러운 결과를 불러왔다. 쿠쾅!
“아직 생각이 안 떠오르나.”
“이, 있어. 있다고!”
“좋아. 당장 가져다줘.”
“다, 당장?”
“그래.”
“아, 알았어.”
당장 좋아하시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당장 경비 대원들을 불러올 테다. 그러나 주블킨은 이어진 사내의 행동을 보며 자신의 계획을 전면 재검토 해야 되었다. 사내는 여전히 오른손으로 주블킨을 붙잡아 올린 채 왼손을 품속으로 가져갔다. 다시 끄집어내어진 손에는 얼핏 보아도 열 개는 넘을 듯한 금화가 쥐어져 있었다. 사내는 그 금화를 바닥에 떨어뜨렸고 금화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굴러갔다. 댕그랑, 데구르르. 사내는 금화 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주블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전부 네 것이다.”
주블킨은 심한 갈등을 느껴야 했다. 그러자 사내는 주블킨의 고민을 상당 부분 덜어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사내는 정확한 발음과 적당한 높이의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 너의 아내, 너의 자식, 너의 손자까지 모조리 죽이겠다. 약속할 테니 믿어도 좋아.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라는 평 판을 받고 있지.”
주블킨은 상대가 아주 모범적으로 미친 녀석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주블킨은 미친 녀석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의사였다. 그래서 주블킨은 사내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치료도 미뤄놓은 채 정성스럽게 약을 조제할 수밖에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을 조제하면서 주블킨은 사내를 흘끔흘끔 보았다. 그러다가 사내의 손을 보게 된 주블킨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사내는 조 금 독특하게 생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손등 윗부분은 쇠고리로 촘촘하게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주블킨은 그 장갑을 다른 곳에서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주블킨은 고민해 보려 했지만 사내의 눈빛이 순간 번득였기에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는 못했다. 사내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조제 과 정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학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의 기색을 살피던 주블킨은 결심했다. 사내는 주블킨 일레드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주블킨은 동정심이나 정의감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구겨진 자존심을 위해서, 그저 신경을 안정시켜 졸음이 오게 만들 정도의 약을 만들었다. 망할 녀 석. 이건 네 녀석이 원하는 대로의 약효를 낼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어. 그 무녀의 정신이 어느 정도로 민감하고 세심할지에 따라 전혀 엉뚱한 효과를 내게 될지도 모르지. 사내는 알지 못했지만 주블킨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 나를 죽이겠다고? 좋을 대로 해봐. 이 나이에 이런 수모를 당하 고 더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러나 내가 너에게 한방 먹였다는 사실은 변함없을걸?
주블킨은 냉혹한 미소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약의 조제를 마쳤다.
“내가 가져다줘야 되나?”
“당연하잖아, 이 미련한 늙은이야.”
“좋아. 가져다주겠어. 그럼 이제 저 돈은 내 거지?”
말을 꺼내던 주블킨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아무 대답 없이 주블킨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주블킨의 모습이 이상 스레 침착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주블킨은 사내의 눈치를 살피고 싶었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며 불안하게 말했다.
“이 약을 가져다주고 난 다음에?”
사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주블킨은 그만 무릎을 꿇어버리고 싶어졌다. 젠장, 알아차렸어! 일부러 약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척하며 나를 시험 한 거였어. 저 완전히 미친 녀석은 이제………………
“이만 가보겠다. 그러나 그 무녀가 혼절하지 않으면 다시 찾아오지.”
사내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들어왔을 때처럼 앞의 장애물 등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단호하고 멈춤 없는 걸 음걸이로 문을 나가버렸다.
남겨진 주블킨은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내는 마치 찾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조금 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마치 못된 페어리의 장난으로 꾸게 된 악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 지만 방 안을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금화와 작업대 위에 놓인 약은 사내의 방문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었다.
주블킨은 갑자기 자신이 퍽 늙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턴빌의 여관가. 시원하게 뚫린 대로.
오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무엇이든 그것은 삶의 애증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이 벼락 맞을 양반아, 다 늙어빠져서 오입질이냐!”
“더러운 입 다물 지 못해, 이 주책바가지 여편네야!”
언제든 잃지 않는 한 조각의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이어지고 “얼씨구, 연놈 잘 붙어다닌다. 에 라이, 자식아. 뼈 삭겠다.” 정겨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돌아올 그때까지 사람들은 힘써 일할 것이다. “으아악! 소매치기야! 저놈 잡아라!” 어쨌든 턴빌이 지상 낙원은 아니다.
지상 낙원이 아닌 도시의 공중누각이 아닌 여관의 2층 창문에서 성인(聖人)이 아닌 자가 대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섞여 있는 새치를 제외하면 사내의 머리카락은 결이 고른 밤빛이다. 주블킨 일레드마의 악몽이며 운차이 발탄의 짜증거리, 그리고 그란 하 슬러의 원수라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자랑하는 사내는 건너편의 펍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 한때 바이서스에서 파티나 무도회를 여는 귀족들은 초대객 명단의 상위 3위 안에 반드시 이 이름을 기재했다. 바이서스 300년의 역 사에서 그런 일이 중단되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명문가의 마지막 후예는 사라져가는 권력과 소멸되어 가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불장난 을 저질렀고, 지금 반역자의 입장으로 머나먼 헤게모니아의 지저분한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뒤쫓는 것은 전향 간첩과 전직 반역자 와 나이트호크.
운차이의 예상은 틀렸다. 후작은 그들의 코앞에 숨어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운차이와 그란이 미를 네리아에게 맡겨두고 턴빌 시내를 그토록 돌아 다녔지만 후작의 자취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것은 후작이 남달리 대담하기 때문은 아니다. 후작은 그들이 고스빌에서 이렇게 빨리 추적해 올 줄은 몰랐다. 살인 사건에 휘말려서 장기간 고스빌에 발이 묶이게 될 줄 알았던 그 일행이 바로 건너편의 펍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후작은 가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생동감에 넘치는 턴빌의 대로를 사이에 두고 도망자가 추적자를 감시하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물끄러미 시야에 들어온 모든 정물과 동물을 차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사내는 그런 후작을 바라보다가 아쉬 운 듯한 어투로 말했다.
“무녀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 병에 걸렸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후작님.”
후작은 잠시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뒤의 사내가 뭔가 다른 말을 떠올렸을 때 후작은 갑작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지. 궤헤른.”
“그 자이펀 녀석이나 핫소드가 병에 걸렸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럼 녀석들을 처리해 버리기 쉽지 않겠습니까.”
“녀석들을. 천만에.”
“예?”
후작은 몸을 돌려 궤헤른을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녀석들이 좋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들이 좋다고. 보수도 없고 보람도 없는 일에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 바보는 항상 나를 즐겁게 만들거든. 그란인가 하는 그 녀석은 디트리히의 아버지이지. 좋아, 녀석은 보람이 있다고 치지. 하지만 자이펀 녀석은 왜 그러는 거지.”
“길시언…… 왕자의 복수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멍청이지. 그럼 그 붉은 머리는?”
“그 암고양이는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목적이 희미합니다.”
“전부 낭만주의자들이야. 난 그런 녀석들이 정말 좋아. 하하하!”
후작은 말을 마치며 환하게 웃었고 그 웃음을 바라보며 궤헤른은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후작은 얼굴의 웃음을 지우지도 않은 채 말했다.
“녀석들은 내 거야.”
“예?”
“궤헤른, 말을 실수한 걸세. 저렇게 높은 원동력을 내가 왜 쉽게 포기해야 되지. 자네는 차넬이 말한 상황과 행동의 관계도 듣지 못했나.”
“들어봤습니다.”
후작은 궤헤른의 대답을 무시하며 말했다.
“궤헤른 자네는 나에게 있어 양성 원동력일세. 내 일을 돕고 있으니. 그리고 저기 저 펍에 웅크리고 있는 녀석들은 음성 원동력이야. 내 일을 훼방 놓고 있어. 하지만 훼방은 적극적인 힘의 활용이야. 분명히 발휘되고 있는 힘이고, 그런 것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어. 멍청한 녀석들이나 훼방꾼을 싫어하지 현명한 자는 누구나 훼방꾼을 환영해. 그건 활활 타오르고 있는 힘이거든. 내게 있어 가장 쓸모없는 녀석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저렇 게 게걸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버러지들이야!”
후작은 다시 몸을 돌려 대로를 가리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런 녀석들이라면 나는 수백, 수천 명이라도 죽이겠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채로 살아가는 녀석들이라면.”
궤헤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많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궤헤른은 거북한 기분을 느 끼며 후작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저걸 봐.”
궤헤른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후작의 옆으로 다가서서 아래쪽 대로를 바라보았다. 황혼으로 붉게 물드는 대로 저편에서 머리에 붕대를 두른 늙은 사내가 손에 뭔가 꾸러미 같은 것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의 걸음걸이는 매우 이상했고 궤헤른이 보기 시작한 후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두 번 이나 다른 사람과 부딪혔다. 세상의 근심 걱정은 혼자 다 짊어진 듯한 표정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지경이었다.
“저게・・・・・・ 누굽니까?”
궤헤른의 질문은 후작을 기분 좋게 한 모양이다. 후작은 싸늘한 미소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하나의 양성 원동력이지. 원래는 버러지였지만, 나에 의해 의미를 가지게 된 녀석이지. 녀석은 자칭 의사야. 다리 부러진 말을 가진 농부에게 엉 터리 약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팔아먹고, 집안일이 하기 싫어서 병이 나버린 아낙네의 손목을 쥐며 은근한 즐거움을 맛보던 녀석이었겠지. 쓰 잘 데 없는 버러지 녀석. 하지만 나는 녀석에게 힘을 주었고, 그래서 녀석은 지금 저렇게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지.”
궤헤른은 잠자코 기다렸다. 후작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은 그 검은 머리 무녀에게 약을 가져다줄 거야. 무녀는 그것을 먹고 사흘 정도는 곯아떨어져 버릴 테고.”
“예? 아니, 왜……”
“내겐 그 무녀가 필요해.”
“왜 필요하십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궤헤른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에 앞서 보다 잘 보기 위해 창틀에 손을 짚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궤헤른은 그를 말리고 싶었지 만 포기하고 말았다. 후작은 길 저편에서 걸어오는 의사 주블킨의 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문제.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 뭐지.”
궤헤른은 당황했다. 후작은 갑자기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궤헤른 역시 그 문제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편두통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고민을 했지만 아직도 해답은 떠올리지 못한 터였다. 궤헤른은 힘없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미래로 흐르는 것이라면 많습니다만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 뭐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추억이나 회상, 기억, 역사. 뭐 이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고정이지.”
“예?”
“문제. 미래로 향하는 흐름은 뭐지.”
궤헤른은 후작이 말한 ‘고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작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아, 저……”
“변화지.”
궤헤른은 후작의 말을 말장난으로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중요한 의미가 담긴 말로 생각해야 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궤헤른이 아는 후 작은 말장난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궤헤른은 다시 고민해 보아야 했다.
“예. 과거는 변화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 되고…………, 미래는 변화할 수 있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시간의 들판이겠지요.”
후작은 여전히 궤헤른의 대답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질문했다.
“마지막 문제. 시간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흐르지.”
“예? 저, 시간은 미래로 흐르는 것 아닙니까?”
“자넨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
후작이 움켜쥐고 있던 창틀은 이제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끄구구구굿. 궤헤른은 불안한 표정으로 후작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작의 손은 이제 창틀의 나무속으로 파고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대로를, 정확하게는 그 건너편의 펍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 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와서 과거로 가는 것이네. 알겠나.”
“예?”
“미래는 우리에게 계속 다가오고 있네. 과거는 우리에게서 계속 멀어지고 있고, 자네는 그 간단한 사실도 모르나. 시간과 사람을 혼동해선 곤란해. 그래, 사람은 늙어가지. 자기중심주의에 입각해 시간은 미래로 간다고 헷갈려버리기 좋은 대목이야. 모든 것이 미래로 가니까 시간도 그럴 거라고 아 무 생각 없이 믿고 있는 거지. 하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봐.”
후작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 어딘가에서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려는 듯이.
“모든 것이 미래로 간다는 것은 뭘 의미하지.”
“그것은……”
“시간이 과거로 가고 있다는 뜻이지. 미래로부터 흘러온 시간은 현재를 지나치는 순간 과거에 가서 고정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째 논리의 유희처럼 느껴집니다.”
“닥치고 들어.”
궤헤른은 흠칫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지만 후작은 여전히 창틀을 짚은 채 하늘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설명해 줬으면 알아야 되지 않나.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라는 것은 시간이다. 이제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 뭔지에 대해 생각해 봐.”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궤헤른은 약간 도전적인 태도로 말했다.
“말씀하셨잖습니까. 모든 것은 미래로 흐른다고.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면, 예, 모든 것은 미래로 흐르겠지요.”
“그 모든 것이 뭐지.”
궤헤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의 말투에 섞여 있는 미미한 짜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과연 후작은 궤헤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했다. “현재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곳은 바로 현재야. 자넨 과거의 책상다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래의 사과를 먹을 수는 없어. 이 정도면 모든 설명이 되 지 않았나.”
콰지지직! 기어코 후작은 창틀의 나무를 한 움큼 뜯어내었다. 목소리는 전혀 높이지 않은 채, 후작은 찬란해 보일 정도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흐름의 교차점이라고 했지. 과거를 향해 흘러오고 있는 미래의 시간과, 현재에 살며 미래를 향해 흘 러가고 있는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 바로 그거야.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것. 그것은 바로 퓨처 워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