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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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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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도 사이록은 졸고 있었다.

일등 항해사는 고급 선원의 장이며 배에서 선장 다음가는 발언권자이다. 선장이 병마에 시달린다거나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라거나 사이렌의 노랫 소리에 홀려 투신을 감행한다거나, 어쨌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일등 항해사는 그의 임무를 대신하게 되며, 따라서 배의 업무에 대해서라면 선장만큼이나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배가 항해중일 때의 일이다. 배가 당장의 항해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일등 항해사는 일반 선원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다음 항해 계획 같은 것은 선장과 선주의 몫이지 선원의 몫이 아니다. 적어도 자이펀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이시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점들을 돌아다니며 소란을 부릴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 다면 지난 10년간 계속 품어온 소망에 따라 전설의 검법 ‘사이의 수평선을 완성시킨다는 명목 하에 사막으로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그 소망이 이루어질 날이 올지는 상당히 의문이지만).

그러나 이시도는 항구에, 정확하게 말해서 레드 서펀트 호의 갑판 위 포마스트에 기대앉아서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 면 그의 선장이 레드 서펀트 호의 선장실에 틀어박혀 있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선장의 호흡을 훔치기 위해 찾아드는 암살자들을 단신으로 물리치 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며 이시도는 결심을 단단히 했다.

하지만 이시도의 훌륭한 결심이 지켜지기엔 봄날 오후의 햇살이 너무 감미롭다. 짭짤한 바닷바람은 여인의 너울처럼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고 뱃 전에 걸터앉은 갈매기들마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삐이걱.

가볍게 불어온 미풍에 포마스트의 야드가 가느다란 불평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이시도는 발치를 뒹굴고 있는 자신의 목검을 내려다보다 가 다시 게으르게 몸을 뒤집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갑판 위는 아무리 잘 봐줘도 깃털 침대라고는 할 수 없다. 부두 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방향 없이 흩어지며 이시도의 귀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 잠 한숨 자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기에 이시도는 쏟아지는 수마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을 내맡겼다.

“이시도 씨, 내려가서 자도록 해요. 그렇게 누워 자다간 화상 입겠습니다.”

이시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햇살 속에서 늙은 선원의 얼굴이 검게 떠올랐다.

“아아, 괜찮아. 자는 거 아니야.”

“침이나 닦고 그렇게 말해요.”

이시도는 귀찮다는 듯이 팔을 들어올려 입가를 대충 닦았다. 결과적으로 더욱 볼썽사납게 되어버린 이시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늙은 선원은 빙긋 웃었다. 늙은 선원은 들고 있던 통을 내려놓고는 그 위에 주저앉았고 이시도는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

“그 각도 좋은데…………… 그림자가 생기는군.”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건지 말해 보십시오.”

“뭘……? 글쎄. 내가 뭘 기다리고 있지.”

늙은 선원은 다시 피식 웃었다.

“누가 복수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시도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선원은 멀리 부두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시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결투의 복수를 하러 온다고 이시도 씨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장님에게 복수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잖아요.”

“기습할 수도 있잖아…………. 복수보다 더 간편한 방법을 원하는 친구도 있을걸……”

“암살이라면 밤에 올 겁니다. 낮에 부두 관리들의 눈을 피해서 중무장을 들고 올 수는 없을 걸요.”

“놈들은 명가의 패거리들이라고…., 음.”

“이시도 씨. 명가인 만큼, 만일 습격할 거라면 반드시 밤에 올 겁니다.”

“알아, 알아……. 밤에 오겠지, 뭐.”

이시도는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몸을 뒤집었다. 늙은 선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섰다. 깔고 앉았던 통을 다시 어깨 위로 들어올리 던 늙은 선원은, 멀리 부두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이시도는 한쪽 눈만 가늘게 떠서 늙은 선원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늙은 선원은 부두 쪽에서 출발하는 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시도 씨. 내 말을 취소해야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무슨 말이야?”

“지금 우리 배를 향해 오고 있는 보트가 보입니다. 그런데 파도를 가르는 것은 노일 테지만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것은 뭘까요.”

이시도는 벌떡 일어섰다.

목검을 주워들고 곧장 뱃전으로 달려간 이시도는 뱃전 위로 길게 몸을 내민 채 부두 쪽을 응시했다. 과연 잔잔한 수면을 가로지르며 레드 서펀트 호 를 향해 곧장 노 저어 오는 보트가 보였다. 노를 젓고 있는 것은 보통의 선원으로 보였지만 그 위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네 명의 사내들은 일반적인 선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록 보통 뱃사람들처럼 머릿수건을 질끈 묶고 가벼운 셔츠 차림을 하고 있다지만 그 앉아 있는 자세는 아무리 봐도 선원의 자세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딱딱하고 절도 있는 모습. 게다가 모두들 등에 걸머메고 있는 것은 분명히 롱 소드였다. 반사광이 눈을 어지럽히긴 했지 만 이시도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군인인가?”

이시도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말했다. 군인이 선원들처럼 저렇게 머릿수건을 묶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항해중인 배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선박 을 찾아온다면 반드시 정복을 하고 있어야 되는데, 그때 그의 곁으로 다가선 늙은 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예. 육전대군요.”

“육전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육전대라니, 그 녀석들이 우리 배에 뭐하러?”

이시도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저 보트가 다른 배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이시도는 찜찜한 기분으로 팔짱을 낀 채 늙은 선원에게 말했다.

“선장님께 보고해.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늙은 선원은 대답도 없이 곧장 주승강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팔짱을 단단히 낀 이시도는 되도록 상대가 위압감을 느끼길 바라며 턱을 불쑥 내민 다 음 멀리 수평선 위를 떠가는 구름을 향해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보트가 뱃전 바로 아래에 이르도록 그쪽으로는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보트는 뱃전 앞에서 멈춰 섰다. 노를 젓고 있던 선원 중 하나가 일어서며 두 손을 입 앞으로 모아 외쳤다.

“실례하겠소! 레드 서펀트 호에 승선을 요청합니다!”

이시도는 마치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분을 밝히시오.”

“아, 나는 졸란 항구의 세관원 치터리 무스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내 부하들이고.”

이시도는 기분이 더욱 지저분해졌다. 부하 좋아하시네. 육전대원들이 비밀리에 찾아오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되자 이시도는 늙 은 선원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육전 대원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이런 화창한 봄날에 저런 표정들을 하고 있을까.

“나는 레드 서펀트의 일등 항해사 이시도 사이록이오. 그런데 용건은?”

세관원 치터리 씨는 상냥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오. 입항 허가서에 문제가 좀 있어서 말이오.”

“뭐요? 그렇다면 내가 세관에 출두하지. 입항 허가서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요?”

“아아,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소. 몇 가지만 물어보면 되거든.”

이시도는 여기서 더 압력을 넣을 것인가, 그렇잖으면 일단 압력을 줄이고 상황을 두고 볼 것인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그의 고민 에 별로 구애되지 않았다.

“아아, 그럼 번거롭게 올라올 필요도 없겠군. 거기서 물어보시오.”

치터리 씨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이시도는 세관원 치터리보다는 그 뒤에 앉아 있는 네 명의 육전 대원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시도로서는 실망스 럽게도, 육전 대원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치터리의 목소리에서 상냥함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원래부터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어투를 구사하던 이시도는 더욱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 했다.

“그럼 돌아가시오. 이 배는 화물선이나 여객선이 아니오. 어선이나 밀수선 따위는 당연히 아니며, 게다가 ‘군함’도 아니오.” 

이시도는 군함이라는 말 에 강세를 두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배는 자유 무역선이오. 아무나 도시락 싸들고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그런 배가 아니라는 말씀이 지.”

치터리는 울컥하는 표정으로 이시도를 쏘아보았지만 특별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고요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지만, 자유 무역선이든 뭐든 세관원에겐 다 똑같은 배일 뿐이오.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용건은 크게 고함지를 용건은 아니 오. 내가 노예들의 수화를 배우지 않은 바에야, 이 아래에서 어떻게 내 용건을 조용히 말할 수 있겠소? 부탁이니 승선을 허가해 주시구려.”

이 친절하고 공정한 태도는 이시도에게 꽤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이시도는 지금껏 친절하고 공정한 세관원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관원이라는 것은 거짓말이군.’졸란의 항구에서 ‘감히’ 세관원을 사칭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누구일까. 게다가 네 명의 육전 대원들과 동행하고 있고, 이시도는 잠시 고민하다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갑판 위에는 선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 다. 모두들 부두로 나가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날씨가 너무 더운지라 노예들에 의한 하역 작업도 밤에 이루어진다.

이시도는 결심했다.

“물론 당신 혼자서 올라오라고 하면 그건 어렵다고 하겠지요?”

치터리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상당히 의미 있어 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와 여기 네 명만 올라갈 거요.”

“좋소. 잠시 기다리시오. 사다리를 내려드리지.”

이시도는 손수 밧줄 사다리를 들고 와서 뱃전으로 내려주었다. 도와줄 생각은 없었기에 이시도는 조금 물러나서 목검을 어깨에 얹고는 기다렸다.

자칭 세관원이라는 치터리 이외에 네 명의 육전 대원들은 익숙한 솜씨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네 명의 육전 대원들이 갑판에 올라 일렬로 늘어 서자 이시도는 위축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치터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이시도에게 다가왔다.

“귀함에 대한 승선 허가에 감사합니다.”

“체류하시는 동안 모쪼록 유익하고 유쾌하시길.”

이시도는 대충 예법에 맞게 대답한 다음 과장되게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충분히 주의 깊게 말했다.

“육전대에서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한데.”

치터리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신차이 발탄 선장님께 볼일이 있소.”

“흠. 치터리는 당신 본명이오?”

“그렇소. 하지만 육전 대원은 아니오. 당신은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서 하탄에 봉사하고 있소.”

“그래요……”

상상 속의 암살자를 물리치기 위해 갑판에서 불침번 노릇을 자원하고 있을 만큼 나름대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이시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장의 결투 때문에 육전대가 움직인다는 식의 상상의 비약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배가 뭔가 군부의 청탁이라도 받게 되는 걸까? 이 시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밤안개를 가르며 바이서스의 항구로 야간 침입을 감행하고 있는 레드 서펀트 호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바이서스에는 항구라 불릴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래서 치터리는 조금 불편한 헛기침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시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치터리에게 사과했다. 그때 주승강 계단 쪽에서 늙은 선원이 올라왔다. 늙은 선원은 배에 찾아든 손님들을 향해서는 일별도 보내지 않고서 곧장 이시도를 향해 걸어왔다.

“모셔오랍니다.”

이시도는 레드 서펀트 호를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그 선장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좀 덜할지 몰라도 이시도는 언제 어느 때라도 이 배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결투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선장실로 네 명의 육전 대원과 한 명의 가짜 세관원을 안내하면서, 이시도는 이 배가 강인하고 무시무시하고 집념 있는 선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바다의 성곽처럼 보일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심정이 되었다. 그 심정 때문에 이시도는 햇살을 피해 중갑판에 내려와서 늘어져 자고 있는 노예나 선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이를 갈아대었다. 어쨌든 너무도 방만한 자세로 늘어져 있었 던 것이다. 이시도는 캡스턴에 기대어 졸고 있던 선원 한 명을, 옆에서 보고 있는 치터리 씨가 동정을 느낄 만큼 끔찍스러운 욕설로서 꾸짖어준 다음 선장실로 걸어갔다.

“선장님,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만.”

“들어오게, 이시도 군.”

신차이 선장은 선장실 가운데 선 채, 문이 열리며 먼저 이시도가 들어서고 그 다음 작은 몸집의 사내와 네 명의 육전 대원이 들어서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몸집 작은 사내가 먼저 앞으로 다가서더니 꽤 화려한 동작으로 두 팔을 내밀며 말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는 단 하나의 쇠사슬.”

신차이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입을 쩍 벌린 이시도와는 달리 신차이는 별다른 내색 없이 내밀어진 사내의 두 팔을 마주 쥐어 가볍게 포 옹하며 말했다.

“나를 묶어 모든 이 앞에서 당당하게 한다. 어서 오십시오. 신차이 발탄입니다.”

“치터리 무스입니다.”

신차이는 선장실 바닥의 쿠션을 가리켰다. 네 명의 육전 대원들은 태곳적부터 그렇게 앉아야 된다고 믿어왔다는 것처럼 벽 가까이에 앉아서 스스로 를 대화에서 격리시켰다. 이시도 역시 지금껏 신경 써왔던 육전 대원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대신 경이에 찬 표정으로 치터리를 바라보게 되었다.

저 인사말은 치터리 무스가 닐림의 프리스트인 것을 나타낸다. 해풍이 어루만지고 그림 오세니아가 단련시킨 이시도의 발랄한 정신 속에서도 닐림 의 프리스트라는 것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한없이 강력한 공포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시도의 뇌리에는 벽 쪽으로 물러나 앉은 육전 대원이 들 어올 틈이 없었다.

그 상황은 신차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과정은 조금 달랐다. 신차이는 치터리가 육전 대원들을 소개하지 않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네 명의 육전 대원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저들은 타오르는 횃불일 뿐이다. 그리고 홰를 쥔 자는 닐림의 프리스트 치터리 무스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선장실의 문이 열리며 어린 노예가 들어섰다. 노예가 정교한 손놀림으로 모든 이 앞에 다과와 음료를 내놓고 사라 지자 신차이는 입을 열었다.

“드시지요. 그런데 이 회동은 닐림의 인도입니까?”

“아니오, 선장님. 저는 그저 인솔자일 뿐입니다.”

“자유는 나의 인솔자이기도 합니다.”

신차이의 말을 가벼운 맞장구로 여기고 지나칠 뻔했던 치터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겉으로 보기에 신차이의 말은 자유 무역선의 선장이 쇠사슬과 자유의 닐림의 프리스트에게 하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치터리는 말 뒤의 의미에 곧장 도달했다. ‘나는 자유로운 뱃사람이며, 따라서 종교 계나 군부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소.’ 치터리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앞에 놓인 잔을 살짝 들어올렸다. 입을 조금 적시는 사이에 치터리는 적당한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자유는 만인의 인솔자니까요, 선장님.”

“용건을 듣고 싶습니다.”

신차이의 단도직입적인 태도에 당황한 치터리는, 또다시 잔을 드는 대신 이시도를 흘긋 바라보았다. 곧이어 들려온 신차이의 말은 이시도를 매우 행 복하게 만들었다.

“저 친구는 이 배의 일등 항해사이며, 나는 그에게 격에 맞는 대우를 해주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용건이 워낙 그런지라……”

신차이는 팔짱을 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시도는 아쉬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장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밖에 일도 좀 있고요.”

“아니. 거기 앉게.”

신차이의 말은 치터리와 이시도를 동시에 놀라게 만들었다. 신차이는 이시도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치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다시 말을 전해 주는 것은 귀찮아. 그러니 그냥 여기서 듣고 가는 것이 좋겠군.”

이시도는 난감한 표정으로 선장과 치터리를 번갈아 보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올리고 있었다. 반면 치터리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이 를 갈기 시작했다. 성깔 있는 친구로군, 머맨의 핏줄이라더니. 치터리는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부하 선원에 대한 신뢰감이 몹시 보기 좋군요. 잠시나마 의심을 품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이제 저는 선장님께서 이시도 씨를 신뢰하시는 것만큼이 나 그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이군요.”

“그럼 용건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레드 서펀트 호의 다음 출항 일정은 정해졌습니까?”

“아니오.”

“잘됐군요. 혹시 요 근래 대륙 동북 항로에서 일어나곤 하는 괴변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입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여러 가지로 바쁜 일이 있어 그 소식은 접하지 못했군요.”

신차이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이시도는 치터리가 하는 말을 당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결투를 벌일 때가 아니면 거의 배에서 죽치고 살다시피 한 선 장과는 달리 이시도는 입항하자마자 뱃사람들이 들르는 주점에 여러 번 찾아갔고, 그래서 뱃사람들로부터 그 소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선장님. 요 몇 주 전부터 헤게모니아 쪽을 향하는 동북 항로 상선들이 실종되곤 한답니다.”

신차이는 처음으로 이시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실종이라니. 그냥 사라졌단 말인가?”

“예. 아무 흔적도 없이 그냥 사라졌습니다. 위치가 위치다보니 바이서스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바이서스에는 자이펀의 상선을 공 격할 만한 해군력이 없지 않습니까.”

“일스는?”

이번에는 치터리가 신차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일스가요? 설마요. 일스 대공이 무슨 이유로 자이펀의 상선을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그에겐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저스티스 기사단이 바다 위를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신차이 역시 별 의미 없이 한 질문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치터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추측도 없나 보군요.”

“예. 그래서 저희들은 레드 서펀트 호가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시도가 당황해서 뭐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신차이는 손을 조금 들어올려 이시도를 제지하고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벽 쪽에 앉아 있던 육전 대원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희라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닐림의 종단입니까?”

“아니오.”

“그럼, 해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란 말입니까.”

치터리는 잠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로서 신차이를 바라보다가 짐짓 대수롭잖다는 투로 말했다.

“닐림의 날개입니다.”

다음 순간, 육전 대원들은 위협에 대한 반사 작용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치터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선장실을 가득 메워버린 신차이 선장의 살기는 육전 대원들을 극도의 긴장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프리스트인지라 기감은 대수롭지 않은 치터리조차도 신차이 선장의 기세에는 움찔 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 보오.”

높낮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차이 선장의 눈빛은 그대로 두 개의 대거가 되어 치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듯했다. 치터리는 절대로 그 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침을 삼킨 다음 말했다.

“닐림의 날개의 이름으로 레드 서펀트 호에 의뢰하는 겁니다.”

“레드 서펀트 호에 의뢰한다고?”

“예?”

“글쎄. 나는 당신들이 레드 서펀트 호보다는 ‘나’를 겨냥해서 이런 부탁을 하고 있다고 추측하는데.”

“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시오.”

치터리는 자신이 하탄의 궁전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꼈다. 신차이 선장의 말투는 완벽한 명령이었다. 불편한 심정으로, 치터리는 준 비해 두었던 말을 시작했다.

“먼저, 레드 서펀트 호는 자이펀의 선단에서 가장 유명한 배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주로 그 선장의 추문으로 유명하지요. 머맨의 자식이 이끄는 배라고. 배가 가라앉아도 그 선장은 살아날 거라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더군요.” 치터리가 다시 말을 이어나가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레드 서펀트 호는 가장 유명한 자유무역선이며, 그 선원들의 용맹함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모험들은 모든 뱃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2년 전 적도 항해에서 가져오신 그 놀라운……”

“당신은 닐림의 프리스트 맞습니까?”

“예?”

“쇠사슬 이외에 다른 무엇이 당신을 묶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칭찬을 하고 겸양을 표시했다 치고, 본론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는 치터리의 귀로 이시도의 아주 불쾌한 킬킬거림이 들려왔다. 그 선장에 그 항해사로군. 어련히 비슷한 작자들끼리 모였을까. 신차이 선장은 한결같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닐림의 날개가 왜 나를 원합니까.”

치터리는 준비해 두었던 말 중 먼저 꺼내기로 계획했던 말들을 모두 건너뛴 다음 되도록이면 거론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말을 꺼내었다.

“당신이 앞으로 명가의 무덤을 얼마나 만들지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추방이오? 사지(死地)로의?”

“그런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신차이 선장은 빙긋 웃었다.

운차이 발탄이 독자였는데도 닐림의 날개, 그 죽음의 부대로 끌려갈 수 있었던 것은 신차이 발탄이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탄의 가문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발탄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된 남자가. 그렇다면, 거꾸로 말해서 운차이가 떠난 지금 신차이 선장은 발탄의 독자인 셈이다. 가문을 끝장내는 것을 살인과 마찬가지로 여기는 자이펀 사회에서 신차이 선장의 처리가 골치 아파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닐림의 날개에 대한 입대 요건을 만족시키는, 그렇지만 운차이를 희생물 삼아 입대하지 않은 자손들이 있는 명가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 하고 있음에도 신차이가 지금껏 안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공식적인 결투였다는 점보다는 신차이가 독자라는 점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이 자이펀 식의 사고방식이며 그 사고방식 안에서 신차이는 자신의 분노를 한 점 에누리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너희들이 발탄 가문을 끝장냈다면, 나 역시 너희 명가들을 끝장내 주겠다.’

그러나 그런 결투의 끝이 결국은 이런 형태로 다가오게 될 것은 신차이 역시 잘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순순히 따를 생각은 없었다. 신차이는 어두운 미소로 치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의미 외에, 다른 의미는 무엇이오?”

대답하기에 앞서 치터리는 경외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신차이는 그것이 꾸밈없는 경외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아함을 느꼈다. 치터리는 순수한 찬탄으로 말했다.

“당신은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를 파멸시켰고, 그의 이빨로 배의 의장을 삼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이펀에 바다의 역사가 길었다 하더라도 오 직 당신뿐입니다.”

이시도는 다시 엄청나게 행복해졌다. 그가 따르는 선장에 대한 이 경탄은 그에게 한없는 자부심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차이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만용과 혈기의 산물이었고, 내게 끔찍한 추억으로 남은 것이오. 나는 목검으로 놈을 찌른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수백 번에 걸쳐 죽음을 보 았소. 결코 자랑스럽지는 않소.”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알면서 발휘하는 용기가 진짜 용기겠지요. 자신이 죽는다는 것조차도 망각한 채 설치는 것은 만용이나 자포자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차이는 잠시 무슨 말로 대답을 삼을까 고민하면서 치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동북 항로에 서펀트라도 출몰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추측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가장 유명한 배를 지휘하며, 자 이펀의 선단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을 가진 선장입니다. 이 정도면 닐림의 날개에서 당신에게 의뢰하기로 결정한 요건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신차이는 다시 고민했다. 사실, 충분하지 않소. 프리스트 치터리.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닐림의 날개가 레드 서펀트를, 신차이를 지적할 까닭은 없 다.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금 당장 실토하게끔 압력을 가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두고 관찰할 것인가. 신차이는 눈을 조금 돌려 육전 대원을 바라보았다.

육전 대원……, 암살일까. 아니면 호위일까. 저 말없는 이들의 존재가 신차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육전 대원이 움직인다는 것일까. 닐 림의 날개와 육전대는 편성 체계상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립된 부대들이잖은가. 그때 신차이보다 더 육전 대원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이시도가 질문을 하고 말았다.

“궁금한데요. 닐림의 날개의 의뢰라면, 저분들은 이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차이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일등 항해사를 잘 골랐다고 생각될 때 모든 선장이 느끼는 기쁨과 유사한 것이었다. 치터리는 그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오. 저분들은 저와 함께 갈 것입니다.”

“당신과……?”

“예. 닐림의 날개에서는 저희 종단과 육전대에 부탁한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레드 서펀트 호에 승선하여 신차이 선장님의 탐색에 조언을 하고 관찰 하는 임무입니다. 그리고 여기 육전대의 경우에는 군부의 대표 자격으로 승선할 것이며, 주된 임무는 탐색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에서 레 드 서펀트 호와 그 승무원들을 보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겨우 네 명으로? 물론 육전 대원들의 용맹함이야 잘 알고 있소만 차라리 군함이라도 몇 척 파견해 주면 훨씬 더 좋겠다고 생각되는군요.”

이시도는 불평스럽게 그렇게 말했으나 돌아온 것은 치터리와 신차이 선장의 미소뿐이었다. 신차이는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시도 군. 동북 항로에 군함을 파견하는 것은 일스와 헤게모니아를 자극할 것 같은데.”

‘아, 이런! 생각이 짧았군요. 실언이었습니다.’에 해당하는 말을 빠르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정치적 감각이 이시도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시도는 우물거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어………… 뭐, 그렇군요. 그럼 이분들은 군함을 이용할 수 없으니 우리 배를…………… 이용하시는 것이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나를 자이펀에서 쫓아내겠다는 거지. 신차이는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여러 가지 원인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로군. 하지만 그렇게도 많은 원인이 있는데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군.

첫째, 동북 항로의 문제에 닐림의 날개가 나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해군이나, 아니면 선주 연합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어쨌든 일개 특수 부대에 불과한(?) 닐림의 날개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닐림의 날개가 직접 나서는 대신 닐림의 프리스트와 육전 대원을 파견한 까닭은 무엇인가.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좀 혼란스 러울 수도 있지만, 닐림의 날개와 닐림의 종단 자체는 원칙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자는 자이펀 군의 한 특수 부대의 이름일 뿐이며, 후자는 닐림을 섬기는 종교 집단이다. 물론 하탄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면 닐림의 날개는 하탄 직속의 특수 부대이며 닐림은 하탄을 수호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것 은 형이상학적인 관련성일 뿐이다.

셋째, 왜 나인가. 신차이는 일단 이 점에 대해서는 치터리의 설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껄끄러우니까 먼 바다로 쫓아내는 것은 충분히 말이 된다. 그리고 국제 문제 때문에 군함을 파견하기 힘든 곳이라서 레드 서펀트 호를 선택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레드 서펀트는 자유 무역선이며 치터리의 말대로 가장 유명한 자유 무역선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거절하겠소.”

치터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뭐라고 반박의 말을 하려 했지만 신차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 배는 내 배가 아니오. 선주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오.”

치터리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아아, 그런 것이라면, 예. 당연히 그렇지요. 물론 선주님께는 허락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선주님께서도 당연히 허락하 실 겁니다. 어쨌든 이 배는 화물선이나 여객선이 아니지요. 어선이나 밀수선 따위는 당연히 아니며, 게다가 ‘군함’도 아니잖습니까. 이 배는 자유 무 “역선이지요.”

신차이는 치터리의 화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시도는 당연히 잘 이해했다. 신차이는 콧방귀를 뀌는 이시도를 흘긋 바라보다가 다시 치터리에게 말했다.

“물론 이 배가 자유 무역선인 것은 맞는 말씀이오. 그래서 나는 다른 배의 선장들보다는 보다 많은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는 것도 맞는 말이고. 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원칙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선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나는 이 배를 어디로도 끌고 갈 수 없소.”

“걱정 마십시오. 그 허락은 제가 선주님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장님의 의향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신차이의 대답은 그 대답에 앞서 그가 거쳤던 방대한 사고와 추리에 비한다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했다.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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