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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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펀 국방부 건물은 하탄의 궁전 바로 뒤에 위치한다. 실제로 하나의 부지라고 착각할 정도로 바싹 붙어 있기 때문에 국방부 건물이 하탄의 궁전 의 부속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탄의 궁전과 국방부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점은 오랜 세월에 걸쳐 명가들의 지적을 받아온 사항 이었지만(군권을 마음대로 다루는 국방 대신이 반역을 도모했을 경우 하탄은 그의 손아귀에 있게 된다.) 대대로 하탄들은 자신이 군대의 강력한 힘에 기대어 있다 고 여기길 좋아했다.
‘언젠가 하탄은 큰코 다치게 될지도 몰라.’
국방부 건물의 고색창연한 복도를 걸어가며 함은 그렇게 되뇌었다. 함은 둥글고 거대한 창문 너머로 밤의 여왕의 망토 아래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 는 하탄의 궁전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진짜 에메랄드와 황금이 박힌 둥근 모스크는 낮에는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의 광채를 뿜어낸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밤이면 바라보는 자로 하여금 눈을 뜬 채로 꿈속을 거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저 아름다운 건물이 여기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 많은 부대도 필요없겠지. 어떤 나라의 어떤 쿠데타든지 간에 모든 쿠데타는 수도 방위군에 의해 일어나는 법이야. 그런데 하탄은 겁도 없이 국방부 건물, 그러니까 수도 정화대 사령부가 있는 곳 바로 코앞에 거주하고 계시지 않는가.
전쟁이 끝나면 국방부 건물의 이전을 상주해 봐야 될지도 모르겠군.
국방 대신 함이 반역을 일으킬 까닭은 없다. 다만 못된 짓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함은 반역자가 된 척하며 스릴을 즐겨보는 것일 따름이 다. 함은 스스로의 장난에 머쓱해하며 국방부 대신의 방, 즉 자기 방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당연히 문이 열릴 거라 생각하고 앞으로 걸어가려던 함은 하마터면 문에 부딪힐 뻔했다. 당황하며 멈춰 선 함은 문이 적의 장수나 되는 것처럼 험악 하게 쏘아보았다. 사람이 다가섰는데 문이 열리지 않다니? 자이펀에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문을 여닫는 노예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지거 나 자살에의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함은 허리에 찼던 검을 천천히 뽑아들고는 문에 귀를 가져갔다.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그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조심해.’ 함은 귀를 가져가며 동시에 기감을 확장 시켰다.
얕은 신음 소리.
문 저편에서 마치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함은 당황했다. 이게 뭐지? 이렇게 희한한 신음 소리는 전장에서도 듣지 못했다. 괴로움에 못 이겨 내뱉는 신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신음 소리는 참을 수 없는 쾌락에 젖어………………
함의 얼굴이 붉어지며 동시에 창백해졌다. 왈칵! 함은 문을 연다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상당히 흥분된 감정 속에서 시도했고 그래서 문은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하게 열렸다.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함의 책상에는 젊은 여인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앉아 있었다. 함은 뒤미처 책상 위에 젊은 사내가 길게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아차렸다. 여인은 그에게, 정확하게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두 팔로 여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뒤집힌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듯한 애달픈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함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생명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그 장면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요괴적인 아름다움이 있 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여인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사내의 팔은 여인의 목을 놓지 않으려는 듯이 잠깐 따라 올라왔지만 곧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털썩. 나무토막보다 더 생기 없는 모습으로 떨어진 사내의 팔은 책상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고개를 돌린 여인은 함을 바라보며 혀로 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그리고 여인의 눈을 똑바로 보게 된 함은 몽환적인 최면 상태에서 벗어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함은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더러운・・・・・・ 내 방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시오네는 포만감에 젖어 게으른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일어서서 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스르륵. 시오네의 발자국 소리에 함은 고개를 돌려 시오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라.”
“두려운 거야?”
이번엔 함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손에 검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함은 재빨리 검을 들어올려 시오네를 겨냥했다. 번쩍이는 검광을 본 시오네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을 뿜었다. “샤아앗!” 시오네는 매섭게 으르렁거리곤 몸을 낮추며 두 팔 을 등 뒤로 돌렸다. 함은 시오네가 몸을 낮춤에 따라 검을 든 팔을 천천히 낮추며 검끝이 계속 시오네의 목을 겨냥하도록 했다. 시오네의 눈에서 검푸 른 빛이 번득였다.
“네가 내 그림자라도 찌를 수 있을 것 같아?”
시오네의 입가로 짧은 비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함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게 그림자가 있었나?”
“크캬아아악!”
시오네는 두 팔을 맹포하게 펼치며 포효했지만 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함의 검 끝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시오네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함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주위에서 다시는 이런 행동, 용납 못해.”
“카아악! 용납하지 않겠다면 네가 어쩔 테냐!”
“300년간 빌붙어 왔다면 인간 앞에 겸손할 줄 아는 것이 좋을 텐데.”
“흥! 넌 네가 먹고 마시는 것을 존경하나?”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은 내 삶의 대가지. 하지만 넌 살아 있지 않지.”
시오네는 갑자기 똑바로 섰다. 그녀는 비웃는 눈으로 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자랑스럽다.”
“그래서, 죽을 수 없는 나를 그렇게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그렇다.”
“어리석은 자기애…………. 개는 꼬리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그래서 그토록이나 꼬리를 붙잡아 보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너는 죽을 수 있다 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군. 지독하게 유치한 종족 같으니.”
함의 눈썹이 짧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시오네는 이미 흥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함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음껏 흡혈을 마친 시오네는 감정이 상 당히 고조되어 있었고, 따라서 싸움을 벌일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 점은 함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났을 때 그 동작은 함을 놀 라게 만들었다. 시오네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물러났고 함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책상 옆의 쿠션에 기대앉아 두 다리를 바닥에 쭉 펴고 있었다. 함은 검을 내려 검집에 꽂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녀를 대적할 수 있을까.
시오네는 쿠션에 기대어 누운 채 왼팔을 들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어올린 손이었지만 시오네의 눈은 달이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 끝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함은 시오네 가 자신의 왼손 검지손톱을 달빛에 이리저리 비춰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앞쪽 2큐빗도 되지 않는 곳에는 온몸의 피를 빨린 채 죽어넘어진 시체가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어 함은 그 광경에서 한가로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뭐하는 거지?”
시오네는 별 대답 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손톱에 비치는 반사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보석이나 꽃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자기 손톱을 그렇게 바라보는 시오네의 모습에는 특이한 순수성이 있었다.
함은 말없이 다가서서 손수 노예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이 녀석이 내 방을 관리하던 녀석인가. 살아 있을 적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을 죽고 나서 이렇게 본다는 것, 그리고 그 만질 수 없이 움직이던 몸을 만진다는 것은 함에게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시체는 묵직했고, 차가웠으며, 실감이 넘쳤다. 죽고 나서야 이렇게 실감 넘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함은 별말 없이 시체를 들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이펀식 창문은 굉장히 높고 넓기 때문에 함은 별 무리 없이 시체를 바깥으로 집어던질 수 있었 다. 함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오네를 돌아보았다.
“본 자가 있나?”
“없으니 걱정 마. 으음……………, 졸린데.”
“졸리다고? 밤에 활동하는 네가?”
“아니. 피곤해서 그런 것이 아니야. 따스한 피가 혈관을 돌면서 차가워진 몸을 덥히는 감각은…………, 넌 봄날의 햇볕 아래에 누워본 적이 있겠지? 그 비슷한 거야. 다른 사람의 몸을 돌던 피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와서 내 피와 뒤섞여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만.”
함은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달래기 위해 책상 옆에 놓은 조그만 티테이블 앞에 앉았다. 티테이블에는 몇 개의 술병과 술잔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 다. 아마도 죽은 노예가 정리해 둔 것이리라. 바닥에 정좌한 함은 술잔을 채워 빠르게 들이키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비운 술잔을 바라보며 함은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지?”
“부탁? 뭐더라…. 킬킬킬!”
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들어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쿠션 속에 푹 파묻힌 채 시오네는 정말 즐거운 듯이 미소짓고 있었다.
“아, 내 모습이 이상하지? 취한 것 비슷한 거야. 흐음. 조금 전의 그 노예 녀석은 정말 기운이 넘치더군. 들어봐, 들어봐. 음음. 그 피가 지금 내 머릿 속까지 올라왔나 봐. 그 녀석의 피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머릿속이 멍해지는데? 깔깔깔!”
시오네가 크게 웃자 그녀의 몸이 쿠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가 시오네의 다리가 달빛 아래 하얗게 드러났지만 함은 아 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저건 육식 동물이고 괴물이다. 함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촛대를 끌어당겼다. 시오네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불? 켜지 마.”
“난 빛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이야.”
“웃기고 있네. 웃긴다고, 하하하! 너는 어둠 속에서 만들어졌어. 네 어머니의 그 어둡고 축축한 뱃속에서. 그러다가 느닷없이 빛 속으로 쫓겨났지. 그래서 평생 동안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갈팡질팡하게 되는 거야. 뭘 잃어버렸는지 몰라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얼떨결에 철학을 만들고 마법 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나라를 세우고 전설을 만들겠지만, 끝까지 네가 뭘 잃어버렸는지는 알지 못할 거야. 그러다가 죽기 직전에야 깨닫지. 네가 잃어버린 것, 네가 쫓겨났던 그 어둠의 세계. 그래서 넌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란다. 깔깔깔!”
“심심한 모양인가 본데, 그렇더라도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 빨리 대답해.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음……, 아. 그 신차이? 어제 출발했어.”
함은 당황했다.
“어제?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어쨌든 닐림의 아이 중에서 하나를 붙여 보냈고 육전대에도 몇 명 보내달라고 했지. 말 잘 듣던데.”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닐림의 날개의 이름을 빌린 것은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국방 대신의 명령으로 그 친구를 동북 항로로 파견하기는 어려웠 을 것이다. 많은 명가들의 원한을 산 사나이를 국방 대신이 사사로이 보호한다는 의심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 하지만 닐림의 날개의 이름이라면 어떤 명가도 함부로 불평을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 상황은 어떻게 보면 희극적인 면도 있다. 신차이 선장의 분노도 닐림의 날개 때문이고, 그의 도 피도 닐림의 날개 덕분이니까.
“육전 대원들에게는 명령을 잘 전달했겠지?”
“응.”
“그럼 동북 항로의 일은 그 친구가 잘 처리해 주기를 기대해야겠군. 그 친구가 그에게 따라다니는 이야기만큼이나 대단한 사나이라면 잘 조사해 주 겠지.”
“확신이 없어 보이는군?”
“사실 그 친구에게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 신차이라는 친구는 감정이 너무 격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사촌 동생의 원한 때문에 그런 일을 벌 였다는 것을 보면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지. 바다 위에서는 성격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동북 항로의 일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거야?”
아무래도 말이 길어지겠군. 함은 이번엔 불쾌감을 억누르기 위해 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천천히 술잔을 채워든 함은 술잔을 든 팔을 세운 무릎 위 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짚어 편한 자세를 취했다.
청백의 달빛 이외에 아무런 조명도 없는 방안에서 비스듬하게 앉아서 마주보고 있는 국방 대신과 뱀파이어 사이에는 묘한 평온함이 감돌았다. 인간 은 술에 취하고 뱀파이어는 피에 취했기에 주위를 감도는 기류는 부드러웠다. 술 한 모금을 머금어 입을 따스하게 한 함은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쟁을 끝내면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지. 우스운 일인데, 군대가 개척한 길은 대상들에게 좋은 교역로가 될 것 같은 전망이야. 푸른 산맥 일대에 대해서는 이제 유례없이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으니.”
시오네는 빠르게 상체를 세웠다.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이 함을 겨냥했다.
“무슨 말이지? 전쟁을 끝내다니?”
“끝낼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 좀 넘었지.”
“어떻게 끝낸다는 말이야, 어떻게!”
함은 술잔을 다시 3분의 1쯤 비웠고 그 시간은 시오네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바이서스 군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었던 캇셀프라임과 지골레이드는 사라졌어. 우리들에게는 퍽 우울한 일이지.”
“뭐야?”
“캇셀프라임이나 지골레이드는 우리들을 위협하는 힘이었지만 동시에 바이서스 군을 나태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했지. 두 드래곤이 사라진 지금 바 이서스 군의 입장은 흔히 말하는 배수진이야. 게다가 너희 닐림의 날개에서 조장한 붉은 땅 작전도 한몫을 톡톡히 했지. 바이서스 군은 이제 진짜 전 쟁을 하고 싶은 결심이 단단히 섰을걸. 쥐도 도망갈 곳을 남겨놓고 모는 법이라고 했지. 하물며 바이서스는 쥐가 아니지, 타성으로 싸워왔기에 실력 발휘를 못하던 사자에 가깝지.”
함은 별 감정도 없이 담담하게 적국을 칭송했다. 시오네는 함의 감정을 읽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절벽에 몰린 사자에게 돌을 던진 자가 받아야 할 대가는 크겠지.”
“지금 자이펀에는 승기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동북 항로의 문제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야.”
“너, 일스를 칠 계획 아니었나? 육전 대원들에게 내린 명령은 그럼 뭐지? 왜 일스로의 침투 가능성을 점쳐 보라는 그 따위 명령을 내린 거야?”
“다행이군…………..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시오네는 입을 다물었다. 함은 즐거운 듯이 미소지었다.
“고마운 일이군. 모두들 내가 일스를 쳐서 바이서스를 우회 침입하려 한다고 믿어주면 좋겠는데.”
“그럼 그건 기만이야?”
“어느 정도는. 그 작전은 누구든지 추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별로 재미가 없어. 하지만 사태가 여의치 않다면 시도해 볼 생각은 가지고 있지.”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함은 대답을 잠시 보류한 채 시오네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폈다. 시오네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그녀는 함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짐작하고 있는 것 이 틀림없고, 그래서 함은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돌릴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했다.
“휴전.”
시오네는 아무 말 없이 매섭게 함을 쏘아보았다. 함은 손에 쥔 술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스 병탄을 통한 우회 침입의 가능성으로 바이서스를 긴장시키고, 휴전을 제안할 생각이다. 그래서 네게 한 가지 부탁이 있지.”
시오네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부탁이라고?”
함은 갑자기 빙긋 웃으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넌 물론 그런 경험은 없겠지.”
“어떤 경험?”
“중매를 서 본 적이 있나?”
시오네는 잠시 말도 못 꺼낼 정도로 당황해서 함을 바라보았다. 함은 낄낄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 농담이야, 농담, 나는 데밀레노스 공주를 시집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 잠깐. 데밀레노스 공주? 닐시언 국왕의 여동생 말이야?”
“그래. 그녀가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함은 장난기도 없는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욕설을 퍼부어줄까 생각하던 시오네는 문득 함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공주의 결혼이라면 상당히 중요 한 국가적 행사이다. ‘비록 귀국과 우리나라가 전쟁중이긴 하지만, 귀국의 국가적 경사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잠정적인 휴전을 제안하고 싶 소.’
“무슨 말인지는 알겠군. 그런데 내게 중매를 부탁한다면 난 너를 멍청이로 볼 수밖에 없는데.”
“다행이군.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비록 적국의 공주님이긴 하지만 너 따위를 매파로 보내는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
시오네의 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함은 그것을 못 본 체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럼 뭘 부탁하겠다는 거지?”
술잔을 내린 함은 다시 뜬금없는 말을 했다.
“결혼은 갑작스럽게 하기 힘들어도 장례식은 갑작스럽게 할 수도 있지.”
“뭐?”
“데밀레노스 공주를 살해하고 싶다는 말이야.”
시오네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함을 바라보았다. 함이 한 말들은 그 온화한 어조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충격적인 내용뿐이었다. 바이서 스를 칭송하고 휴전 따위의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꺼냈을 때부터 시오네는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데밀레노스 공주를 암살한다는 말이 나오 자 시오네는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물론 뱀파이어에게 윤리적인 이유에서의 경악이 있을 까닭은 없다. 시오네는 자이펀 인인 함이 여자를 암살하 겠다는 말을 태연하게 한 것에 놀란 것이다. 함은 그런 시오네의 얼굴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너는 암살자고 뱀파이어야. 살해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시오네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분노를 표현할 겨를도 없이 상당히 얼빠진 어조로 질문하고 말았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데밀레노스 공주가 암살되면 바보라도 자이펀을 의심할 텐데?”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휴전 제의를 거부한다면 놈들은 멍청이지.”
“아무리 휴전을 원한다고 해도 국민들의 눈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그건 네 수완의 문제야. 살해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나? 자연사로 말이다. 너는 마법사며 뱀파이어다.”
시오네는 잠시 함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구한다면 방법이야 찾을 수 있지.”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쩌다가 적국 공주님의 결혼까지 고려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외무부의 몇몇 똑똑한 친구들과 손잡고 데밀 레노스 공주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어. 헤게모니아나 일스의 적당한 공작, 후작 등에 대해 알아보고 있지. 하지만 나는 급할 때 쓸 수 있는 수단도 있 었으면 해. 그러니 너는 데밀레노스를 자연사처럼 살해할 방법을 알아봐 줬으면 한다. 이해했나?”
시오네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훗. 그녀의 입장으로 본다면 결혼식 아니면 장례식이군. 어느쪽으로든 처녀는 죽는 건가?”
“죽음 아니면 남자와의 결혼이야. 어쨌든 그녀는 대륙을 구하는 세기의 신부가 되는 거지.”
함은 무뚝뚝한 말투로 시오네의 농담을 맞받았다. 시오네는 그런 함을 바라보며 다시 키들거렸다.
‘멍청한 놈. 네 말은 맥락이 닿질 않아. 조금 전 넌 바이서스가 진짜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어. 그런 상황에서 왕족 암살이 일어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겠지. 너와는 다른 목적이지만…………….’
“충심으로 노력해 드리지.”
“지금 당장 노력해 주겠나?”
“뭐?”
“용건은 끝났으니 돌아가 달라는 말이야.”
“아아, 그래 알았어. 무섭단 말이지. 하하하!”
시오네는 웃으며 일어났다. 함을 한 번 쳐다본 시오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함은 바닥에 앉은 채 시오네가 박쥐로 변해 밤하늘 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이 마르군.’
전선에 있는 동안 함은 완전한 금주 상태였다. 갑자기 마신 술은 그의 목을 타게 만들었고 함은 천천히 세 번째로 잔을 채웠다. 술잔을 채운 함은 그 것을 다리 옆에 내려놓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시오네가 사라져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뱀파이어가 바이서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멸찬 증오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픈 생각도 없다. 하지만 시오네는 바이서스가 파멸하는 길이 라면 자이펀이 공멸하든 말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을 더욱 험악하게 만들 수도 있는 공주 암살이라면 발벗고 나설 것 이다.
‘내가 쓰는 도구들은 하나같이 비뚤어졌고 증오에 가득 차 있군.’
그 신차이 선장도 그렇고, 저 시오네도 그렇다. 함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그 스스로 자신을 위해 활동하게 만드는 자신의 능력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신차이는 동북 항로를 담당하고, 시오네는 바이서스를 담당한다. 국방 대신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외부적인 문제들은 모두 타인에게 맡겨두고서, 이제 나는………….
함은 바닥에 놓아두었던 술잔을 들어올렸다.
신차이 선장의 행동은 그 스스로의 분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이펀 사회가 전쟁 동안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나타내는 사회 현상이기도 하다. 하탄의 말씀인 법률, 라센 법이 희롱당하는 것은 명가들이 이 전쟁 동안 그들의 입지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조사해 보자. 아마 도 수많은 범법이 드러날 것이다. 당신들이 전선에서 나를 불러들인 것은 당신들의 발밑을 파낸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자이펀을 상대하는 것이다.
쳉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에 든 미의 셔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셔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파가 나란히 앉은 채 그녀의 발치에 웅크리고 앉은 아달탄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침울하고 고요한 표정으로 섣불리 말도 못 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네리아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알고 있었다.
쳉은 앞으로 4년 후 페스트에 걸려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의 파는 쳉의 죽음, 미의 죽음, 그리고 조카의 죽음을 차례로 본 다음 목을 매달고 자살 할 것이다. 이름만 전해 들었을 뿐 보지 못했을 때도 그것은 사무치도록 무서웠다. 하지만 직접 쳉과 파를 보게 되자 네리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파의 모습을 보게 되자 네리아는 그녀가 밧줄에 목을 건 채 공중에 떠서 대롱거리는 모습까지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미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느껴온 것은 이런 것이었어? 어떻게 죽어갈지 아는 사람을 눈앞에서 바라봐야 되는 기분, 그러면서 말하지 않는 이 기분이?”
왈칵 고개를 돌린 네리아는 그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란은 네리아의 눈에 어린 눈물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짐짓 목소리를 바 꿔 명랑하게 말했다.
“아! 샌슨은 이럴 때 이런 식으로 말한다던데.”
“응?”
네리아는 턱을 쑥 내밀고 발뒤꿈치를 들며 어깨를 뒤로 젖혀보였다. 샌슨의 모습을 알고 있는 운차이와 그란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네리아는 목소리마저 굵직하게 바꿔 말했다.
“어, 그러니까, 자, 내가 질문하고 넌 대답한다. 대답이 시원찮으면 그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따라서 헛소리는 열 번까지 할 수 있을 거야. 자를 게 더 없어지면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걸 자르겠다.”
“멋진 친구로군! 만나봤으면 좋겠소.”
파하스는 이렇게 말하며 즐거워했지만 그란은 뜨악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담화를 저 유년기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하는가?”
“아니, 뭐……………, 참고하라고. 안 될깡?”
“저 유년기에게 혼절 발생이 추측된다.”
“유년기가 아니라 꼬마야, 꼬마. 저 꼬마 기절할 거라는 말 아냐?”
“응? 아, 꼬마. 기절.”
그란이 말하는 그 ‘유년기’는 지금 사방 모든 곳으로부터의 공격을 막겠다는 듯이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사방 모든 곳에서 공격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행은 헤게모니아 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소년은 헤게모니아 어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했기에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점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돌맨 할슈타일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렇게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채 돌맨은 무의식중에 입가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일행에게 붙잡히는 과정에서 거칠게 반항하다가 입은 상 처였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 동작은 마치 ‘나는 상처를 입었어, 건드리지 마.’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하스는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운차이 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럼 저 할슈타일인가 하는 꼬마가 너희들이 쫓던 그 반역자 일행 중 하나란 말이야?”
“그래.”
“원참. 바이서스 꼬마들은 조숙하기도 하군. 저 나이에 반역까지? 혹시 실연 경험은 없는지 궁금하군.”
“반역의 수괴의 양자야.”
“뭐라고?”
“달리 갈 곳이 없어 따라다닌 것일 거라는 말이다.”
“아아, 그래? 그럼 살살 달래면 말을 들을 것 같은데, 자네들의 얼굴로는 그게 어렵겠군. 내가 해볼까?”
운차이는 ‘꼭 포로 앞에서 웃기는 재롱을 떨어야 되나?’ 등으로 생각했지만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고 싶다면.”
운차이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파하스는 예의 그 화려한 동작으로 돌맨의 시선을 붙잡으며 걸어갔다. 돌맨은 다가서는 파하스를 보며 한껏 긴장하 여 몸을 더욱 심하게 웅크렸지만 파하스는 싱긋 웃으며 유창한 바이서스 어로 말했다.
“이봐, 젊은 친구. 어떤 사람들과 나누느냐에 따라 잠깐의 시간도 수십 년의 우정에 값할 수 있지. 나와 이야기 좀 할까?”
돌맨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고 그란과 네리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저런 식으로 돌맨을 웃긴다면 녀석의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겠군.’ 운차이가 이런 괘씸한 생각을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파하스는 운차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다시 돌맨에게 말했다.
“나는 파하스라고 하네. 젊은 친구의 이름은 뭐지?”
“웃기지 마,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운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웃겼군.’ 이런 모욕적인 언사에 충격을 받은 파하스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며 돌맨을 바라보았다. 돌맨은 사나운 표정으로 파하스를 쏘아보며 다음에 뭐가 날아올 것인지 추측해 보았다. 주먹일까? 발길질일까? 그러나 파하스는 대시인이었다.
“아아, 이름을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니었네. 인사를 나누자는 거였지. 할슈타일 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상대는 감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파하스는 자신이 성질을 참고 있다는 것을 과격하게 드러내며 말했다(어 깨는 부르르, 이를 악물며, 왼손은 희게 변할 정도로 꽉 쥐고, 오른손은 칼자루로 갈 듯이 움찔움찔.). 돌맨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파하스는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씩 웃던 파하스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주저앉았다. 돌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 파하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 나는 앉았다. 팔짱도 꼈고, 도망치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지. 네 입 속에 든 검과 내 입 속의 검으로만 싸우자. 어때?”
“뭐라고 떠드는 거야?”
돌맨은 짐짓 사납게 말하려 했지만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인지라 위압감이 전혀 없었다. 파하스는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하지. 그리고 하나가 해결된 다음에 그 다음 것으로 넘어가고. 그러나 항상 시간은 아끼도록 하지. 대화의 규칙은 이 정도로만 해두자. 그럼 시작하겠어.”
돌맨은 입술을 깨문 채 파하스를 쏘아보았다. 파하스는 빠르고 박력 있게 질문했다.
“왜 미 양을 납치했지?”
이 질문은 돌맨과 파하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주의를 단숨에 집중시켰다. 대시인다운 흡인력이라고 할까. 바이서스 어를 모르는 파는 그러지 않았 지만 쳉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돌맨을 바라보았다. 돌맨은 턱을 가슴에 파묻으며 파하스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파하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였다.
“나는 자네들이 쫓기고 있다고 들었네. 쫓기는 자들이 납치 따위의 고차원적인 활동을 시도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걸세. 그렇잖은가? 인질이 필요했다? 이건 아냐. 왜냐하면 자네들의 추적자는 자네들의 소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구태여 소재를 드러내며 인질을 만든다는 것은 광 인의 소행이지. 즉 이 납치의 본질은 자네들에게 미 양이 필요하다는 거야. 단순하지.”
쳉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잠깐, 파하스. 바이서스의 반역자들에게 왜 헤게모니아의 무녀인 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고요히 앉아 있던 쳉이 너무나 느닷없이 말했기 때문에 네리아는 깜짝 놀랐다. 파하스는 쳉을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돌맨을 바라보았다.
“나는 반역을 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반역자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군. 여기 어디 반역자 있나?”
“있다.”
이번엔 파하스가 놀랄 차례였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농담에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파하스는 기막힌 표정으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 란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파하스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네가 설명해. 어휘가 모자란다.”
운차이는 흔쾌히 그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란은 반역자였어.”
그리고 운차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기다리던 그란은 곧 운차이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나도 가능하다.”
“그럼 직접 하지 그랬나.”
그란은 신음을 토한 다음 방안의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자란 헤게모니아 어로 꿋꿋하게 자기변호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란이 ‘나는 할슈타 일 후작에게 가족을 희생당하고 귀족인 그를 벌주기 위해 반역자와 손을 잡았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유피넬의 저울대는 공정하여 후작 자신이 반역 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의 몸이나마 그를 추적하는 것으로 내 죄과를 씻는 것과 동시에 묵은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다.’는 내용의, 상당히 복 잡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그야말로 상당히 복잡하게 말하고 나자 네리아는 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이 불행한 이야기를 들으며 배를 붙잡고 웃는 어마어마한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파하스는 초주검에 가까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그럼, 그란, 도망 중인 반역자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빠른 말, 막대한 돈, 안전한 장소.”
파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쳉을 돌아보았다.
“그중에서 미 양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뭐지?”
“하나도 없습니다만.”
“아냐, 있어!”
네리아는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돌맨에게 다가섰다. 돌맨이 흠칫하는 사이에 네리아는 벼락처럼 말했다.
“그거지? 신스라이프의 문제! 요 꼬마야, 내 말이 맞지?”
사람들은 네리아의 말에 돌맨의 표정이 확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네리아는 득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지? 미는 과거 아무 때나 볼 수 있어. 그렇다면, 신스라이프가 살아 있던 당시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문제의 답도 볼 수 있겠지. 그렇 지? 그걸 노린 거지? 그럼 그 재산을 가질 수 있어. 막대한 돈!”
파하스는 자기 무릎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그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네리아의 추리에 감탄하는 모습이 나타났 다. 하지만 돌맨만은 얼굴을 찡그린 채 네리아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하스는 네리아를 향해 박수를 치며 연극조로 말했다.
“너무하오, 그랑엘베르여! 당신은 수많은 처녀들에게 나눠줬어야 할 덕목을 저 레이디에게 모두 소모했음이 분명하오! 놀랍습니다, 네리아 양. 기막 힌 추리입니다!”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네리아를 향해 운차이 역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밤낮 없이 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추리지.”
“운차이, 너!”
파하스는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네리아와 운차이의 소란을 무시하며 돌맨을 향해 말했다.
“자, 할슈타일 군. 자네는 말하지 않았지만 첫 번째 질문은 해결되었네. 부정할 텐가?”
“멍청이, 마음대로 생각해.”
“아, 좋아.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자네는 버림받은 건가?”
파하스는 두 번째 질문에서도 대시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단숨에 돌맨의 의식을 파고든 파하스의 질문은 돌맨을 고 함지르게 만들었다.
“아냐!”
“좋아, 역시 뭔가 보장받은 것이 있었군. 그렇지 않다면 자네 같은 소년에게 그런 힘든 일을 시킬 수는 없었겠지. 뭐라고 그러던가? 구출해 주겠다 고? 그건 아니겠지. 구출해 줄 바에야 처음부터 다른 녀석에게 그 일을 시키면 되니까. 술 한 병이면 충분해. 거리의 적당한 주정뱅이 하나에게 셔츠 를 들려준 다음 죽을힘을 다해 튀게 만들면 되지. 그렇다면? 아아. 미 양이 인질인가. 인질 교환? 그렇다면 그 후작 나리는 예절바른 친구가 되는군. 미 양을 잠시 빌려쓰는 대신 너를 담보로 맡긴다는 말이 되나. ‘미 양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 마십시오. 여기 그녀의 안전 보장을 위한 담보물을 보 내드립니다.’이런 내용의 서한 없어?”
돌맨은 불공평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말한 것은 짧은 단어 하나뿐이었는데 파하스는 수십 단어로서 대답해 왔으니까. 네리아는 머리를 과장 되게 휘두르며 불평했다.
“파하스, 너무 빨라요. 천천히 가요.”
파하스는 네리아에게 사과하느라 다시 상당한 단어들을 소모했다. 그 시간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파하스의 말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그란 은 빙긋 웃었다.
“당신 높이 영리하군.”
“그럴 때는 보통 ‘매우’라는 말을 쓰네, 그란.”
“아, 매우 영리하군.”
파하스는 다시 돌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너로 하여금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붙잡혀 봐야 인질 교환으로 다시 풀려날 수 있다는 믿음이겠군. 알았어. 소중한 인질이니 잘 모셔드리지.”
파하스의 말이 끝나자 운차이는 몸을 일으켰다.
“턴빌 시청에 다녀오겠다. 후작이 언제 어디서 그 문제에 도전하는지 알아보겠어. 그건 턴빌 시청이 관리해 온 재산이니 비밀로 할 수는 없겠지.”
운차이가 일어나자 쳉 역시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고 싶습니다.”
“좋으실 대로.”
그러자 파와 파하스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네리아 역시 일어섰다. 운차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주위를 주욱 둘러보더니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운 차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녀와. 나를 감시의 책무에 있게 하지.”
혼자서 지키고 있겠다라. 돌맨 ‘할슈타일’과 그란 하슬러 둘만 이 방에 남아 있는다는 말이지. 운차이는 그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할슈타일이라는 이름을 증오한다고 하더라도 설마 양자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
“좋아, 다녀오겠다. 애한테 맞지 않도록 조심해.”
그란은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들이 방을 나서자 그란은 묵묵히 의자를 들어올려 방문 가까이에 놓고는 그 위에 앉았다. 돌맨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란의 행동을 바라보았 다. 그란은 돌맨을 흘긋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바이서스 어로 말했다.
“침대에 앉아도 좋고 의자에 앉아도 좋다.”
“뭐라고?”
“그렇게 불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즐겁지는 않을 텐데. 편하게 있어도 좋다는 말이야.”
돌맨은 그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선 돌맨은, 그러나 침대나 의자로 향하는 대신 똑바로 선 채 의자에 앉은 그란을 바라보았다.
“당신, 경계를 안 하는군? 나를 묶어두거나 해야 되지 않아?”
“묶여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냐?”
“내가 당신을 해치우고 달아나면 어쩔 테야? 당신, 의자를 옮기면서 검을 챙기지 않았군.”
돌맨의 말대로 그란의 검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위치는 돌맨과 그란의 중간쯤 되는 곳이었다. 그란은 싱긋 웃었다.
“좋을 대로 해봐.”
“…..별명이 핫소드지?”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
“그렇더라도 칼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 그렇잖아?”
그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맨이 정말 검을 움켜쥐고 그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생각이 있다면 저렇게 주절주절 말했을 리가 없으니까. 내가 좀 도와줘 볼까.
그란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섰다. 돌맨은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래서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 어버렸다. 그런 그를 본체만체하며 그란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돌맨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
테이블을 덮칠 듯이 와락 달려든 돌맨은 그란의 검을 나꿔챘다. 그란은 조용히 멈춰 섰고 돌맨은 떨리는 손으로 후다닥 검을 뽑아들었다. 잠시 동안 돌맨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만이 방안의 고요를 어지럽혔다.
“자, 이제 검을 쥐었군. 어쩔 거지?”
“비, 비켜! 문에서 비켜. 저쪽 벽으로 가서 붙어 서! 그럼 해치지 않겠어!”
“그렇게 못하겠다면?”
“찌를 거야!”
“그러곤?”
“뭐? 찌, 찌르면 죽는 거지 그러고라니?”
“날 찌르고 나면 그 다음엔 어쩔 거지. 후작의 위치를 아나?”
돌맨은 잠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평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돌맨은 그의 눈빛 속에 동정심 같은 것이 담 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하스는 네게 그것을 묻지 않았지. 기억나지? 파하스 역시 짐작했겠지. 그리고 나 역시 짐작해. 틀림없이 후작은 네게 자신의 소재를 가르쳐주지 않았을 테지. 자, 그럼 나를 죽이고 나서 어떻게 후작을 찾아갈 거지?”
돌맨은 덜덜 떨면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 그대로다. 그란을 죽이고 여기서 나가봐야 돌맨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왜 무턱대고 검 을 움켜쥐었지?
“넌 압박감 때문에 필요성과 가능성을 헷갈려버린 거다. 먼저 검을 쥐면 나를 죽일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나를 죽일 필요성은 없어. 멍청이처럼 굴 지 말고 검을 내려놔라. 후작이 인질 교환을 요청할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 아냐.”
‘그렇지 않다면, 그래. 너 역시 후작이 너를 구해 줄 거라고는 믿지 못하는 것이겠지? 나도 그렇게 짐작해.’그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너는 그 거짓말을 믿을 도리밖에 없지. 불쌍한 녀석. 하지만 넌 그 거짓말을 믿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돼. 네겐, 그리고 내게도 마찬가지 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니까. 그래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우리는 미보다는 행복한 거지.’
돌맨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침대로 걸어가서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한참 동안 어깨를 떨었다. 그란은 그를 내버려둔 채 상념에 잠겨들 었다. 불안이 없겠지만, 동시에 희망도 없는 미에 대해서.
‘미래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그녀의 행운이 아니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기에 행복한 것이 아닐까?”
“글레이브가 좀 짧아. 흐으응!”
변한 모습 때문에 크게 의기소침해 있던(게다가 자신의 동의 하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뭐라고 화를 낼 수도 없었던) 루손이 입을 연 것은 변신이 있고 사흘 뒤 였다. 그 동안 그럭저럭 변신한 오크라기보다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새 몸에 익숙해진 루손은 레이저를 향해 글레이브를 들어올 리며 이렇게 말했다.
“콧소리는 내지 마. 넌 그저 몸에 익은 기억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짜 콧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닐 텐데.”
루손은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도톰한 입술이 더욱 도드라졌고 커다란 눈은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대로 예쁘장한 모습이었고, 레이저는 루손이 오크식으로 미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후우. 글레이브가 짧다. 쓰기 불편해.”
“그래서?”
“늘여줘, 넌 마법사잖아.”
“그런 곳에 마법을 쓰느니 그냥 하나 새로 사는 것이 낫겠어. 설마 오크식 글레이브는 구하기 어렵겠지만 다른 무기는 구할 수 있겠지.”
“인간처럼 검을 쓰라고? 그건 싫다!”
“그럼 저기 도착한 다음 대장장이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적당한 길이의 자루로 바꿔달라고.”
레이저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턴빌 시의 건물들을 가리켰다. 한 사람(?)이 발걸음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 비해 볼 때 둘은 꽤 빠른 속도 로 걸어와 턴빌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이 오솔길만 빠져나가면 곧장 턴빌이다. 루손은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너 바보냐! 저기 들어가려면 글레이브가 필요해서 그렇게 말한 거잖아!”
“아…………, 이런. 제발, 루손, 넌 지금 인간의 모습이야. 네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거라고.”
“제길, 불안하단 말이야! 네 마법이 갑자기 깨지거나, 아니면 다른 마법사가 날 알아보거나, 어쨌든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쩔래!”
레이저는 옆을 지나가는 여자를 바라보며 저 여자가 혹시 오크가 변신한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하는 마법사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말도 안 돼. 그건 편집증이야. 오크를 여자로 변신시키려고 마음먹을 정도로 미친 녀석이 아니라면 그런 의심을 할 리는 없겠지. 나는 그런 녀석을 하나 알고 있는 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내 말을 믿어.”
“그렇다면 내 글레이브를 들고 너 혼자 들어가. 그리고 그것을 내 팔길이에 맞춰 수리해서 가지고 나와. 그때까진 난 저기엔 가지 않겠어. 알았어?” “이런 젠장!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다시 왕복하라고? 그렇게는 못해. 게다가 곧 해가 진단 말이야!”
그때였다. 레이저는 루손의 눈이 갑자기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루손은 레이저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해진 레 이저는 몸을 돌렸다.
턴빌에서부터 몇 명의 사람들이 말에 탄 채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멀긴 하지만 레이저와 루손은 턴빌로 들어가는 오솔길 가운데 서 있었기 때 문에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곧장 마주치게 될 형편이었다. 루손은 두말없이 길 옆으로 달려갈 자세를 취했지만 레이저가 먼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하려는 거야?”
“멍청하긴, 어서 숨어야지!”
“제발, 루손! 너 지금 인간의 모습이란 말이야. 아무 걱정 말고 그냥 걷는 것이 더 나아. 저쪽에서도 이미 우리들을 봤을 거라고. 숨는 것이 더 이상 해 보일 거야.”
공포 때문에 혼란스러운 정신이긴 했지만 루손은 레이저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그, 그런가?”
“그래. 젠장. 벌써 의심하겠다. 어서 걸어, 어서! 아니, 글레이브는 내려! 그게 뭐야? 싸움 거는 것처럼 보이잖아!”
루손은 그제서야 자신이 글레이브를 두 손으로 쥔 채 앞으로 겨냥하며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손이 글레이브를 내리고 나자 두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식별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루손은 다시 길 옆의 숲으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그리 고 레이저는 미심쩍은 시선이 되었다.
말은 전부 다섯 마리였다. 다섯 명의 기수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여행가들이나 모험가들이 무장을 갖추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다섯 명의 사내들은 보통의 여행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모두 사나운 얼굴에 건장한 체구였다. 설마 이렇게 도시에 가까운 곳에서 산적이나 강도는 아니겠지.
레이저는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험가 정도 되는 자들이라고 판단하고는 그대로 걸어갔다. 하지만 루손으로선 다섯 명이나 되는 인간 칼잡이들이 자 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태연하게 걷는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이윽고 두 무리의 거리가 20큐빗 정도로 가까워지자 서로의 얼굴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저는 사납기 그지없어 보이는 기수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조금 외면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다섯 번째 기수가 들어오자 레이저는 고개 돌리는 것을 멈추고 말 았다.
다섯 번째의 기수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쥔 채 다른 손으로는 커다란 꾸러미 같은 것을 안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꾸러미 아래쪽으로 사람의 다리가 내 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바라본 레이저는 사내가 시트로 둘둘 말다시피 한 여자를 안아든 채 힘든 자세로 말을 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저러지? 병자인가? 호기심이 동한 레이저는 선두의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어, 실례하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지나치려 했던 선두의 사내는 레이저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찌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을 멈추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대로 지나치려는 건가? 레이저는 당황해서 옆으로 비켜섰다. 루손 역시 재빨리 레이저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아, 잠깐만요. 저기 뒤의 저 여자분은 어디가 아픈 겁니까?”
레이저의 질문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사내는 입술을 굳게 닫아건 채 그대로 레이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내들도 그 뒤를 따 라 지나갔다. 레이저는 당혹한 표정으로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사내들은 그대로 레이저와 루손이 걸어왔던 쪽을 향해 사라져갔다. 원, 지독하게도 무뚝뚝한 녀석들이다. 그런데 아픈 여자를 데리고 어디를 저렇게 가는 거지? 그때 루손이 레이저의 등을 후려쳤고 레이저는 깜짝 놀라버렸다.
“뭐, 뭐야?”
“정말이야! 눈치채지 못했어. 아무도! 히야!”
루손은 펄쩍펄쩍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자, 이제 걱정 말고 들어가자. 알았지?”
“좋아.”
아직도 불안감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루손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기분으로 레이저의 말에 대답했다. 레이저는 한 번 더 사내들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턴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루손 역시 그 뒤를 따랐지만 아직도 흥분감이 가시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 다.
“굉장하군, 네 마법 말이야. 인간들이 날 보고도 그대로 지나치다니, 햐! 이건 정말이지 어떤 오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걸.”
“흐음. 턴빌에 들어가거든 네게 거울을 한번 보여줘야겠다. 아직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군.”
“거울?”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고 싶을 때 사용하는 도구야. 음, 그러니까 글레이브 날에 흐릿하게 비치는 영상이 있잖아?”
레이저의 말을 들은 루손은 자신의 글레이브를 들어 그 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투박한 글레이브의 표면에는 흐릿한 색깔 정도밖에 비춰지지 않았 다.
“거울은 그것을 훨씬 선명하게 비치도록 만든 거야.”
“아아. 그래? 신기한 것이 다 있군. 그게 어떻게 보이지?”
레이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몸을 돌렸다. 땅을 바라보던 레이저는 루손에게 말했다.
“루손, 뒤로 돌아 네 그림자를 봐.”
루손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훤칠하고 마른 몸매의 그림자가 손에 글레이브를 든 채 깜짝 놀라고 있었다.
“아아! 인간의 그림자잖아?”
레이저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 옆에는 멋진 갬블러의 그림자로군. 거울은 저런 거야. 저렇게 시커멓지는 않고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점이 다르지만.”
레이저의 농담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루손은 그것이 자기 그림자인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움직였다. 물론 그림자는 루손 의 행동을 정확하게 따라했다. 레이저는 홀린 표정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 루손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자, 어서 가자. 저 그림자도 우리를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을 테니 어서 가 쉬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림자가 혼자 걸을 리는 없으니까 우리가 부지런 히 가야지.”
“응? 아, 그렇지는 않아.”
“뭐야?”
“나크둠이 해준 이야기가 있어.”
루손이 나크둠의 이름을 말하자 레이저는 다시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시체도 못 가지고 나왔어. 나크둠은 무너진 바위굴 속에 남아서 외롭게 부패 하고 있겠군.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정신없이 바라보던 루손은 레이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음. 그래. 나크둠이 말해 준 수수께끼가 있지. 그림자는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잖아? 사람이 걸어가면 그림자도 걸어가고, 사람이 멈추면 그 림자도 멈추지. 그렇지?”
“그렇지.”
“네 말대로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잖아.”
“그래. 그런데?”
“그런데 그림자를 혼자 걷게 하는 방법이 있거든.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그림자만 움직이게 하는 거. 어떤 방법일 거 같아?”
레이저는 나크둠이 설마 마법을 쓰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크다운, 그러니까 별로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대답일 텐데.
“모르겠는데. 그런 방법이 뭐야?”
“간단하지. 등 뒤에서 누군가 횃불을 들고서는 움직이는 거야. 횃불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림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지. 자 기는 가만히 있는데도 말이야. 그렇지?”
“하하. 그렇군.”
레이저는 실없이 웃어버렸다. 레이저가 웃자 루손은 기세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그림자도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저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우리 그림자를 위해 해를 움직여줄 리는 없잖아. 그러니 우리가 부지런히 걸어야지. 자, 어서 가자고.”
“응.”
루손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에 활동하는 그였기에 자기 그림자를 볼 기회는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레이저도 자신의 그림자 를 바라본 기억은 별로 없었지만, 걸어가면서 레이저는 다시 나크둠에 대해 생각했다.
나크둠. 실없기는. 하하.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서 횃불을 움직여 그림자를 움직이게 한다고요?
레이저는 잠시 떠오른 생각을 지워버리며 턴빌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