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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56~1457화


1456화. 고작은 아닐 거예요. (1)

“대공자님. 이제 어찌해야…….”

조웅은 총관의 물음에 선뜻 답을 내어 놓을 수가 없었다.

사패련이 성도에 진입하고 당가가 불탄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껏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상회 내에서 숨만 죽이고 있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조웅의 물음에 총관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파로 보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파라면 어떤? 혹 하오문이나 수로채 같은 곳입니까?”

“죄송합니다……. 바, 밖을 자세히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거기까지는…….”

“……그렇습니까.”

조웅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인방은 아닐 것이다. 당가를 추적해 간 만인방이 돌아왔다면 성도가 이리 조용할 리 없으니까.

보나 마나 인근 강남의 중소 사파들이 이 기회를 틈타 몰려들었거나, 만인방이 아닌 다른 사패련 소속 문파들이 도착한 것이겠지.

물론 어느 쪽이든 사해상회의 입장에서는 암담한 일이었다.

“대공자님……. 저희는 이제 어찌합니까?”

재차 들려온 물음에 조웅이 슬쩍 돌아보니 식솔들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떨고 있었다.

당연히 불안할 것이다. 청성과 아미가 멸문하고 당가가 도주해 버린 이상, 이 사천 땅에 그들이 비빌 언덕은 더 이상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사천을 장악한 사패련이 굳이 그들의 목숨까지는 바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허무하구나.’

창고에 곡식과 재물이 그득그득 쌓여 있으면 무엇 하는가? 그 명성이 사천에 울리면 무엇 하는가?

무도한 창칼 앞에서는 그 모든 게 무의미할 뿐이다.조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나마…… 아버님이 상행에 나가 계시는 게 다행이구나.’

그의 아버지와 상회의 핵심 행수들은 지금 매화도 인근의 보급을 위해 상행을 나간 상황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저들에게 인질로 잡힌다고 해도, 사해상회의 이름을 이어 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만일의 경우에는…….

조웅이 나름의 결심을 가슴속에 서늘히 세우고 있는 그때, 총관이 더듬더듬 물어 왔다.

“대, 대공자님. 그…… 혹시…….”

“왜 그러십니까?”

“누, 누군가 우릴 구하러 오지는 않습니까?”

“…….”

“아니, 아니요. 사해상회가 아니라 해도, 청성과 아미가 저리 당했는데 구파일방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곳으로 와 저들을 몰아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조웅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쉬이 이곳으로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 어찌…….”

조웅은 굳이 자세히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야 모두의 속만 갑갑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청성과 아미 중 한 문파라도 남아 사패련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면 구파도 당연히 전력을 급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천에는 남은 것이 없다. 심지어는 당가마저 불탄 실정이다.

얻을 것 하나 없는 무주공산을 되찾기 위해 멸문을 각오한 전쟁을 벌인다? 과연 저 잇속 빠른 구파가 사천에 그만한 가치를 둘까?

아닐 것이다, 아마도.

“희망을 품는 건 좋지만, 과한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마음만 상하실 겁니다.”

“……구파가 오지 않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총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쉬이 포기하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천우맹은 어떻습니까?”

“…….”

“천우맹도 오지 않는 것입니까?”

조웅이 잠시 침묵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총관은 그런 그의 마음도 짐작하지 못하는 모양으로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저희가 천우맹에 입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운남 차 무역 일로 거래하던 관계 아닙니까? 더구나 제가 알기로는 조걸 소공자님이 계시는 화산이 천우맹의 수장 격이라고…….”.

“…….”

“여기가 조걸 소공자님의 집 아닙니까? 그런데 설마 우리를 그냥 버려두겠…….”

“걸이 녀석은 화산의 삼대제자입니다.”

조웅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조금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무리 걸이 녀석이 화산오검이니 어쩌니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다지만, 세상 어느 삼대제자가 그런 대사에 목소리를 낸단 말입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조걸이는 그리 멍청한 아이가 아닙니다. 성격이 조금 급할 뿐, 셈은 언제나 저보다 더 빠른 아이였습니다. 억지를 부린다 해서 지금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거란 사실은 녀석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말을 끝낸 조웅의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상회에 남아 있는 이들의 수는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이곳에 남아 있었다면, 상회의 핵심이라 할 만한 행수들이 이곳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천우맹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을까?

조웅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설사 상회가 온전하다고 해도, 이깟 작은 상회 하나를 구하기 위해 사패련과 맞설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런 건 그저 부질없는 미련일 뿐이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예, 대공자님.”

총관이 대답했다. 하지만 조웅의 그 말은 총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이들을 지켜야 한다.’

아마 지독한 고초를 겪게 될 것이다.

다행히 장일소가 그들에게서 관심을 끊었지만, 사패련의 마두들이 사해상회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굳이 조걸을 논하지 않더라도 사천당가 휘하에 있던 상단을 어찌 대할지는 빤하지 않은가.

진흙을 씹는 심정으로 버텨 내야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먹구름이 물러갈 테니까.

조웅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식솔들을 단단히 단속하셔야 합니다.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아직 무척 위험한 모양입니다.”

“소란이라니요. 쥐 죽은 소리도 안 나던뎁쇼?”

“예?”

“그렇잖습니까? 사파 놈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돌아다니는데 누가 소리나 낼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말이 맞긴 합니다만…….”

조웅이 다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 소리가 저한테만 들리는 겁니까?”

“예? 그게 무슨……?”

“아니, 들어 보십시오. 아까부터 뭔가 소란스럽지 않습니까? 밖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데?”

“아, 그, 그러고 보니?”

총관이 눈을 슬쩍 부릅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개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상회 바깥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정확하게 어떤 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분주하고 다급하게 느껴지는 소란이었다.

“무슨 일이 나기는 한 것 같습니다.”

“호, 혹여 구파가 구원을…….”

그 말에 조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일은 없다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사과를 받으며 조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마 사파 놈들끼리 서로 싸움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범이 자리를 비웠으니 몰려든 개들끼리 시비가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위, 위험합니다, 대공자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혹여 만인방이 없는 틈을 타 약탈이라도 벌이고 있는 거라면 이리 잠자코 있을 일이 아니잖습니까?”

총관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입술을 살짝 깨문 조웅이 대문 쪽으로 향했다. 산산조각 부서진 대문 대신 임시로 세워 둔 목판을 살짝 밀어 내고 그 사이로 몸을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이윽고 상회 바깥에 난 대로로 고개를 내민 그는 최대한 눈을 가늘게 뜬 채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주시했다.

‘무슨 일이지?’

단순히 사파 놈들끼리 시비가 붙은 거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약탈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면 식솔들 모두 지하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게 하고…….

“응?”

수많은 상황에 대한 대책을 일일이 고심하던 조웅의 눈이 순간 조금 커졌다. 저 앞에 저기…….

“어……?”

그리고 눈이 이내 찢기기라도 할 듯 부릅뜨였다.

“어어!”

저, 저게 대체 무슨 일인가?

❀ ❀ ❀

도한곡(都寒谷)은 제 처지가 극히 불만스러웠다.

‘빌어먹을.’

물론 이해는 한다.

성도는 넓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니 성도를 완벽히 점령했다고 한들, 아직 모두의 목에 목줄까지 채운 것은 아니다. 점령했다 해서 완전히 발을 빼 버린다면 이들은 우리가 무너진 가축들처럼 성도를 빠져나가려 들 것이다. 그런 이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성도를 지킬 이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대다수의 감시 병력은 미리 귀주에서 소집한 흑도방파 놈들이 채우고 있지만…….

‘그게 더 문제지.’

아무리 길들여도 사파는 사파다. 이 빌어먹을 놈들은 잠시만 느슨하게 풀어 놓아도 제 본성을 주체하지 못한다.

마치 도박에 중독된 놈들이 패가망신할 것을 알면서도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양민들에게 손대면 죽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금만 수틀려도 다짜고짜 칼을 휘둘러 대고는 한다.

그놈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남을 이는 필요했다. 문제는 왜 그 ‘남을 이들’에 도한곡 그 자신이 포함되었는가다.

물론 평소였다면 그 역시 이토록 불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성과 아미를 치면서 피 맛을 한껏 보고 나니 누군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을 매달려야 하는 이 상황이 영 성에 차질 않았다.

‘반만 있어도 충분할 것을.’

귀주 일대에서 불러들인 흑도방파 놈들의 수만 해도 오백이 넘어갈 텐데, 여기에 굳이 만인방 일 개 대가 남을 필요가 있는가?

“빌어먹을……. 대주를 잘못 만나서.”

그가 속한 만인방 염왕대(閻王臺)가 다른 대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그저 대주가 다른 대의 대주들에 비해 명성이 부족할 뿐이다. 그 작은 차이가 자신을 집 지키는 개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퉷.”

신경질적으로 침을 뱉은 도한곡이 고개를 들었다.

현재 그가 서 있는 곳은 성도로 진입하는 거대한 성문. 이곳을 향해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는 고작 열?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다. 꽤 멀리서 왔는지 하나같이 두터운 피풍의를 머리까지 두르고 있었다.

짜증 나는 건, 분명 도한곡을 보았을 텐데도 딱히 서두르는 기색이 없어 보이는 점이었다. 늦을 대로 늦어 도착하는 주제에 말이다.

우득.

‘버러지 놈들이…….’

그 역시 사파지만, 저런 들개 같은 사파 놈들을 보면 위장이 뒤틀렸다.

두 눈으로 살기를 뿜으며 도한곡은 제 허리춤에 찬 도를 움켜잡았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짓을 하면 본보기 삼는다는 핑계로 저놈들의 피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너희.”

“예?”

성문을 통과하려던 그들이 도한곡의 부름에 멈칫했다.

“어디 소속이냐?”

“……예?”

“어느 방 소속이길래, 고작 열댓 놈이 왔느냐 이 말이다!”

“아…….”

선두에 선 놈은 말끝을 늘이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도한곡이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일단 한 놈의 목부터 날려 버리고…….

“소속은, 어……. 화산?”

“……뭐?”

순간 도한곡은 저도 모르게 멍하게 되묻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어, 그리고 남궁세가, 야수궁, 빙궁이요.”

도한곡의 얼굴이 이내 한껏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이,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나를 놀리…….”

하지만 그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에서 돌연 환상처럼 피어난 섬전이 여지없이 그의 목 한중간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끄…륵…….”

도한곡의 두 눈 가득 불신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검을 날린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 불신은 경악과 공포로 바뀌었다.

“아, 당가를 빼먹었네.”

선두에 선 이가 머리까지 뒤집어쓴 피풍의를 벗고는 웃었다.

“열댓은 맞는데, 고작은 아닐 거예요. 좀 과하게 왔거든요.”

털썩.

도한곡의 몸이 땅에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싸늘히 식어 가기 시작했다.

“에이. 좀 더 듣고 죽지.”

아직 소개할 사람이 많은데.

청명이 쓰러진 도한곡을 넘어 활짝 열린 성도의 대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뭐, 괜찮겠지. 알아봐 줄 사람은 아직 많으니까. 자, 그럼 어디…….”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뒤틀리듯 올라갔다.

“날뛰어 볼까?”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피풍의를 벗어 던졌다. 허공에서 펄럭이며 떨어지는 피풍의를 뒤로하고 그들이 성도로 들어섰다.


1457화. 고작은 아닐 거예요. (2)

산봉우리들이 구름 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천혜의 절경이 굽이굽이 이어진 곳. 세상이 천자산(天子山)이라 부르는 산봉우리들을 한 남자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구름을 뚫고 솟은 긴 봉우리로 향했다.

산이 구름 위까지 닿은 광경은 그렇게까지 드물지 않다. 그럼에도 새삼 저것이 남달라 보이는 건, 저 날카로운 산봉우리가 마치 하늘을 찔러 대는 창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혹자는 이 땅을 그리 부른다. 하늘에 억눌려 있던 땅이 칼을 들어 올린 곳. 역심(逆心)의 대지라고.

그림 같은 장가계를 배경으로 선 호가명을 부관들은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불안이 어려 있었다.

“⋯⋯왜 여기에 진을 치신 거지?”

“그러니까.”

남경에서의 대치 후 줄곧 사천을 향해 이동하던 호가명이 장가계에 도달한 이후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니, 움직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잠시 쉬어 가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쉬는 와중에도 진을 짜는 것은 의심받을 일이 아니라 찬사를 받아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기이한 것은 그들이 이곳에 진을 친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점이다. 결코 길다고는 할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천금에도 비견될 수 있다. 그런 시간이 바로 이 장가계에서 허무하게 낭비된 것이다.

“⋯⋯한시바삐 사천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래야지. 련주께서 사천과 운남을 점령하고 계시는데⋯⋯.”

부관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최대한 빨리 사천으로 가는 게 우선인데, 또 그들이 아는 걸 군사인 호가명이 모를 리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호가명은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불안한 눈으로 호가명의 등을 바라보던 이 중 하나가 살짝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혹⋯⋯.”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입 처닫아라.”

흘러나오던 말이 급하게 틀어막혔다.

꿀꺽.

하지만 그 의미마저 지워 낼 순 없었던 모양으로,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드리워졌다.

‘군사께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은 군사전을 보좌하는 부관들이니까.

지금의 호가명은 단순한 군사가 아니다. 그는 지금 무려 사패련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권을 손에 쥐고 있다.

물론 강호의 병권이라는 게, 군권처럼 절대적인 명령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간 사파에서 벌어졌던 숱한 일을 보아 온 부관들은 한 가지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눈치를 보던 부관 중 하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네. 군사께서 어떤 분이신데.”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무슨 소린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말인가?”

부관들이 다시 일제히 입을 닫았다.

물론 그들도 안다. 처음부터 다른 마음을 품는 이는 없다는 것을. 지금껏 그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 오직 그 하나뿐이다.

“그리고⋯⋯ 너희도 알 텐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해남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호가명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호가명의 분전에 장일소가 어떤 답을 내어 놓았는지.

그들이라면 어떨 것인가?

정말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이전과 같이 장일소를 철석같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호가명 역시 하나의 ‘수단’으로, 언제든 버리는 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뒤에도?

그들이라면⋯⋯.

“생각하지 마라.”

책사란 어떤 일을 알면 그 가능성부터 검토하는 이들이다. 자연스렵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하려 할 때, 누군가가 거칠게 그들을 다잡았다.

“우리끼리 논의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해 가지 않는 일이 있다면 군사께 직접 여쭤보면 될 일.”

말을 한 이가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남은 이들도 반쯤은 등 떠밀리는 느낌으로 그를 따라 호가명에게로 다가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그들에게는 마치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호가명의 지척까지 도착한 이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잠시 오간 눈짓 끝에 한 부관이 짜내듯 입을 열었다.

“저⋯⋯ 군사.”

“⋯⋯.”

“사천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호가명은 그저 처음처럼 말없이 봉우리만 응시할 뿐이었다. 부관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정말 호가명이⋯⋯.

“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순간, 호가명의 입에서 마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예?”

“가지 않는다면 어찌할 셈이지?”

호가명이 천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철갑이라도 씌운 듯 딱딱한 얼굴에, 부관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훑었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듯한 그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과 긴장을 주었다.

“대답해라.”

부관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패련의 절반을 휘두를 권한을 손에 넣은 이가 련주와의 합류를 거부한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게 둘일 리 있겠는가?

차가운 호가명의 눈빛을 본 이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구, 군사. 어찌⋯⋯.”

“다시 말하지.”

“⋯⋯.”

“내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천으로 갈 생각이 없다면 너희는 어찌할 것이냐?”

처음 던졌던 질문보다도 조금 더 명확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 의미를 모를 수 없다. 한 군의 운명을 결정하는 책사들이라면 더더욱.

‘저, 정말로⋯⋯.’

몸 안의 피가 한꺼번에 식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다. 생각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질문이 던져진 이상, 이 말을 들어 버린 이상 그들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극심한 갈등 앞에 모두가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격하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그저 군사를 따를 것입니다.”

호가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나를 따른다? 그게 무슨 의미지?”

“마, 말 그대로입니다! 군사께서 뜻을 정하신다면, 그게 무엇이든 그저 따를 뿐입니다.”

교묘한 말이었다.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호가명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호가명의 입가에 너무도 드물게 미소가 그려졌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로군.”

부관들의 등골을 타고 한기가 흘렀다. 저 말이 호가명의 생각을 내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정말 군사께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찾을 때가 아니다. 대답이 늦으면 늦는 만큼 명줄이 줄어들 게 분명하지 않은가?

“저, 저는⋯⋯.”

부관 중 하나가 이어서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군사!”

누군가의 커다란 외침이 그들의 사이로 떨어졌다.

“려, 련주! 련주께서 오십니다!”

“뭐?”

눈을 부릅뜬 부관들이 당혹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련주라면 장일소를 말함이다. 그런데 그 장일소가 왜 이곳에 온단 말인가?

호가명이 따로 보고한 적이 있던가?

아니, 그런 적은 없다. 그들은 남경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호가명과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련주께서 어떻게 알고 이곳으로 온다는 말인가?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으로 련주께서 오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릴!”

“저, 저기입니다!”

부관들의 시선이 황급히 움직였다. 정말로 한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다가올수록 그 색(色)이 확연해졌다.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려, 련주님⋯⋯.”

장일소가 아닐 리 없다.

물론 저런 복색을 할 이가 장일소뿐은 아니란 게 남경에서 이미 증명되었지만, 감히 사패련이 거한 곳에서 허락 없이 장일소를 흉내 낼 간 큰 이가 세상에 있겠는가?

부관들이 당혹한 얼굴로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군사⋯⋯. 련주께서⋯⋯.”

호가명으로부터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직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 상황을 환영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커다란 혼란이 그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정작 호가명은 딱히 감정 변화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다가오는 장일소를 응시했다.

“때맞춰 오셨군.”

“⋯⋯.”

“묻겠는데, 너희는 누구의 명을 듣는가?”

“⋯⋯구, 군사?”

“대답해라.”

부관들이 빠르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들이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군사의 명입니다.”

“그럼 됐군.”

호가명이 장일소를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설마⋯⋯.’

부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군세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장일소가 이끄는 이들은 하나같이 정예 중의 정예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 흑귀보와 남은 만인방, 그리고 남경으로 모여든 중소문파를 온전히 끌고 온 이곳의 군세는 장일소가 이끄는 이들을 수로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호가명이 마음을 먹는다면?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저벅. 저벅.

호가명은 몇 걸음 나가지 않아 그곳에 섰다.

느릿하게 다가온 장일소 역시 호가명에게서 꽤 거리를 두고 섰다.

정적 속, 장일소의 두 눈이 호가명과 그의 뒤에 선 이들을 응시했다. 무척 묘하게도 이곳에 포진한 이들이 마치 그를 노리는 것처럼 진을 짜고 있었다.

명만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수 있을 것처럼.

장일소의 시선이 하늘을 찔러 대는 듯한 봉우리들에 잠시 가 닿았다가 이윽고 다시 호가명에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는 호가명에게로.

“⋯⋯묻자꾸나, 가명아”

장일소가 스산한 눈으로 호가명을 노려보았다.

“왜 사천으로 오지 않았니?”

호가명은 대답 없이 장일소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러자 장일소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내 말이 안 들리니?”

“⋯⋯어째서냐 물으셨습니까?”

마침내 호가명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삼스럽습니다, 련주님.”

“흐음?”

“제게 이유를 물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련주님께서는 이미 미루어 짐작하실 텐데요. 이전에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

“제가 어찌 행동하건 련주께서는 그에 맞춰 저를 쓰실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굳이 보고가 필요하겠습니까?”

호가명의 대답에 장일소의 입가가 선명하게 비틀린다.

“그게⋯⋯ 네 대답이니?”

“그럼 안 되는 것입니까?”

호가명이 감정 없는 눈으로 장일소를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로 뒤에서 호가명을 지켜보는 이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비명이 이 침묵을 깨뜨리고, 그들이 알던 모든 걸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끄응⋯⋯.”

장일소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하지 않니. 뭐 그리 귀찮은 일이라고.”

장일소가 다소 과장되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부관들은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 호가명의 입이 담담히 열렸다.

“어차피 오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쯧쯧. 융통성이 없는 건지, 융통성이 과한 건지. 하여튼 문제로구나.”

“잠시.”

“음?”

그때 짧게 양해를 구한 호가명이 가장 먼저 그를 따르겠다 한 부관을 돌아보았다. 호가명의 차디찬 시선 앞에 놓이자 부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역시 제 운명을 직감한 것이다.

“구, 군사!”

파아아앗!

호가명이 날린 장력이 부관의 목을 여지없이 잘라냈다. 단면에서 뿜어진 붉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쯧. 축포치고는 과한데.”

“죄송합니다. 그저⋯⋯.”

“됐다. 이유가 있겠지.”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원래라면 결코 허락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천하의 누구도 감히 장일소의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 장일소 역시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한 이가 호가명이라면 말이 다르다.

이유조차 듣지 않는다. 이 무례를 저지른 이가 호가명이라면 말이다. 오직 호가명만이 장일소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군사 호가명, 련주님을 뵙습니다.”

호가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깨달았다.

그들의 앞에 선 이가 누구인지, 이 사패련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구인지 말이다. 호가명의 뒤에 포진한 사패련 소속의 모두가 장일소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땅이 울릴 듯 어마어마한 목소리였다.

장일소는 그 광경을 보며 슬쩍 웃더니 호가명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지척에 이르자마자 호가명의 어깨를 꾹 잡았다.

“속에 불만이 꽤 찬 모양이구나.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끄응. 됐다. 까딱했다간 사흘 밤낮은 들어야 할 텐데. 그냥 영원히 묻어 두거라.”

장일소의 눈길이 죽어 널브러진 이의 시신에 짧게 닿았다. 붉은 입술에 조소가 맺혔다.

“꿈은 분수에 맞게 꿔야 하는 법이지.”

낮은 그의 목소리가 열기로 가득 찬 세상을 차갑게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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