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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75화


1575화. 고작 여우는 아니지. (5)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윤종은 쓰러진 흑룡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죽어서도 감지 못해 부릅뜬 흑룡왕의 두 눈에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결말, 죽음.

그러나 누구에게나 이르게 느껴질 그 결말이 마침내 흑룡왕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묘한 이질감이 윤종의 가슴속에 파고든다.

흑룡왕 적세광을 숭배하던 이도, 심지어 손가락질하고 욕하던 이도 그가 강호를 호령한 일세의 거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침내 이곳에서 숨이 끊겼다.

“어…….”

털썩.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윤종의 귀로 누군가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조걸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일어나!”

그러자 쓰러져 있던 백천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주저앉은 조걸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조걸을 일으켰다.

“아직 안 끝났다!”

으르렁대듯 말한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주위로 던졌다.

흑룡왕이 이끌고 온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이 망연히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하나야 딱히 위협적이지 않으나, 그들이 모였을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어 보았다.

그런 놈들이 이 상황에서 어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강건함을 유지해야 한다. 설령 그게 허세일지라도 상관없다. 흥분한 짐승들에게 등을 보이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을 테니까.

“검을 들어!”

백천의 거친 목소리에 탁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해졌다.

만신창이가 된 검수들과 혜연이 서로 등을 맞대며 들끓는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등만은 반드시 지켜 내겠단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수적들의 시선은 애초에 그들에게로 향해 있지 않았다.

“흐, 흑룡왕이…….”

“……이럴 수가.”

차갑게 식어 가는 흑룡왕의 시신을 보며 수적들의 얼굴은 점점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흑룡왕. 실로 포악한 지배자였다.

적어도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에게는 말 그대로 왕이자 황제였다.

흑룡왕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가 이리 허무하게 갈 거라 여긴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을 터.

눈앞에 시신을 두고도 믿기 어려운 죽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걸 나보고……. 뭘…….”

“지, 진짜 죽은 건가?”

“복수…….”

웅성대는 소리가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넓게 번져 나갔다.

당혹, 분노, 공포,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숱한 감정까지.

수천이 모였으니, 그 자리를 타고 흐르는 감정 역시 수천의 갈래로 나뉜다.

그러나 이 혼란은 길지 않을 것이다. 이내 모두의 감정이 한곳으로 모일 테다.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탁류가 되어.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 같은 그들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진 건, 다름 아닌 백천이었다.

콰앙!

백천이 쓰러진 흑룡왕의 시신을 걷어찬 것이다.

“사숙!”

“무, 무슨 짓을!”

사자의 시신을 욕보이는 건 금기(禁忌) 중 금기. 도사를 자칭하는 이는 물론이고, 사람이라면 할 짓이 아니었다.

텅!

그러나 백천은 흑룡왕을 욕보이고자 한 게 아니다.

그의 진의는, 걷어차인 흑룡왕의 시신이 적나라하게 널브러질 때 드러났다.

“으…….”

“히익……!”

처참한 시신의 꼴이 만천하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 광경을 보고도 흑룡왕의 죽음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수적들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백천은 땅에 떨어진 언월도를 가볍게 훌쩍 주워 들고 수적들을 겨누었다.

그 눈빛이 한없이 차가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뒤늦게 백천의 의도를 알아챈 오검은 재빨리 기세를 끌어 올려 힘을 실어 주었다.

“으……. 으으!”

“다, 달아나라!”

“흑룡왕이 죽었다! 흑룡왕이!”

“우, 우리도 다 죽을 거야! 장강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서!”

균형이 무너지는 건 일순간이었다.

금이 가서 터져 버린 둑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물이 터져 나올 방향 정도는 돌릴 수 있다.

수로채의 혼란이 만들어 낸 급류는 다행히도 백천의 일행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쏟아졌다. 백천이 그들의 공포에 불을 지른 덕이다.

“으아아아아!”

구름처럼 몰려 있던 수적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로 밀치고 뒤엉키는 꼴이 흡사 범을 맞닥뜨린 양 떼 같았다.

긴장을 풀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던 백천이 마침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언월도를 슬며시 내렸다.

털썩.

그게 신호라도 된 양 조걸이 도로 주저앉았다. 이번엔 조걸뿐만이 아니었다. 꾸역꾸역 버티던 다른 이들도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단번에 끊기듯, 한계까지 유지되었던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살았다.”

“진짜……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이 자식들아. 아직 긴장 풀지…….”

한마디 하려던 백천이 순간 휘청했다. 언월도를 땅에 꽂아 가까스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린 백천이 우르르 흩어지는 수적들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모르겠다, 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누가 덜하고 더하다 판가름할 수도 없을 만큼 하나같이 꼴들이 엉망이었다.

“남궁 시주. 괜찮으시오?”

“……괜찮아 보이십니까?”

“농을 할 힘이 있는 것 보니 죽진 않으시겠군요.”

“그…… 편견을 깨 드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혜연이 남궁도위를 챙기고 나섰다. 목소리는 평온하고 태연했지만, 남궁도위의 상처를 동여매고 내력을 불어넣는 손길은 신속, 정확했다.

그 광경을 말없이 보던 윤종이 슬쩍 조걸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괜찮으냐, 걸아?”

“예, 사형.”

조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널브러진 흑룡왕의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지금이라도 흑룡왕이 벌떡 몸을 일으켜 그들을 덮쳐 올까 겁이 난다는 듯.

“죽은 거, 맞겠죠?”

“아마도.”

“지긋지긋한 새끼…….”

하긴, 아무리 질긴 목숨이라고 해도 심장이 꿰뚫렸는데 살아남을 순 없다. 물론 윤종 역시 금방이라도 흑룡왕이 다시 일어나 날뛸 것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애를 먹일 줄이야…….”

천하의 흑룡왕을 쓰러뜨리고 할 말은 아니었다. 이 말을 들은 누군가가 손가락질하며 욕한다 해도 온당한 반응이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오검의 입장은 달랐다.

제힘을 모두 갖춘 흑룡왕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흑룡왕은 팔 한쪽을 잃어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그런 이를 베어 내는 데 이만한 고생을 해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전장은 그런 곳이니까.”

그러나 진력이 난다는 듯 고개를 젓는 조걸도,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윤종도 이제는 안다.

전장의 향방이 반드시 가진 힘에 따라 갈리는 게 아님을.

‘자칫했으면 놓쳤겠지.’

더한 강자도 상대해 보았다.

흑룡왕은 물론 대단하지만, 설령 그가 온전한 몸이었다 해도 항주의 주교에 비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껏 오검이 상대해 온 강자와는 다른 강점이 있었다.

체면을 돌보지 않는 교활함과, 달아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 그리고 큰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뜻한 바를 관철해 내는 저돌적인 면까지.

‘강호에선 그런 걸 두고 노련함이라 부르지.’

그런 의미에서 적세광이 보여 준 모습은 강호가 논하는 ‘노련한’ 강호인의 모습에 걸맞을지도 모른다.

두려운 건 그의 무위가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람 자체였다.

그때 조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음?”

그는 뭔가 이해가 안 간단 얼굴로 쓰러진 흑룡왕의 시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돌아온 걸까요?”

윤종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보았다. 흑룡왕은 결국 포위를 뚫었었다. 그대로 내달렸더라면 흑룡왕은 저 수적들의 바다에 제 몸을 밀어 넣고 결국 달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처 입고 지친 이쪽은 그런 흑룡왕을 다시 잡기 어려웠을 것이고.

물론 흑룡왕이 입었던 상처도 끔찍한 지경이었지만, 달아나기만 했다면 그럼에도 살아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다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조걸이 대답을 구하는 듯 윤종을 보았지만, 윤종 역시 딱히 해 줄 대답이 없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피를 너무 흘려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그럴까요?”

“그래. 그리고…….”

윤종이 쓰러진 흑룡왕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설령 놈이 달아났다고 해도, 결국 놈은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따라붙어 그 숨을 끊어 놓았을 테니까.”

“사형이요?”

“글쎄? 나는 몰라도…….”

윤종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끝엔 흑룡왕의 언월도를 전리품처럼 잡고 지친 몸을 기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윤종의 눈이 여러 빛으로 물들었다.

“……저 양반이라면 그렇게 했겠지.”

“…….”

윤종의 말에 백천을 바라본 조걸이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네요.”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 * *

서걱!

“끄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수적이 피거품을 쏟았다. 빛이 꺼져 가는 두 눈엔 허망함이 깃들었다.

“왜……. 어째서…….”

장강수로십팔채를 구성하는 열여덟 개의 수채. 그중에서도 거대한 위세를 자랑하는 적교채(赤蛟埰)의 채주, 탁탑혈부(托塔血斧) 반위공(潘偉塨)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 무게를 온전히 실은 검이 살짝 휘었다.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몸뚱이가 스르륵 검을 타고 흘러 털썩 엎어진다.

“끄륵…….”

아직 채 숨이 끊기지 않은 그의 눈에 비친 건 수많은 시신이었다. 이 숲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도 남을 만한 시신과 핏물.모두 흑룡왕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던 적교채의 수적들이다.

그들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한 사람의 검에 그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다.

“어째……서 네놈이…… 여기…….”

푸욱!

무어라 중얼거리던 그의 목을, 비정한 검이 꿰뚫어 버렸다.

한차례 발작처럼 부르르 몸을 떤 반위공의 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사파 새끼가 지껄여 대기는.”

그 어떤 감정도 없이 그 모습을 일별한 청명이 시선을 돌렸다.

빼곡한 숲, 그 사이로 얼핏 너른 들판이 보인다. 청명이 그 먼 곳을 향해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여우 새끼라…….”

촤악!

암향매화검이 허공을 내그으며 휘둘러지자 맺혀 있던 핏방울이 흩날렸다.

검집에 스르릉 검을 가볍게 밀어 넣은 청명은 주변을 짧게 살핀 후 들판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걸음이 멈추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청명이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중얼거렸다.

“……고작.”

묘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고작 여우는 아니지.”

입가에 마침내 시원한 미소가 피어난다.

“이제는 말이야.”

한결 가벼워진 그의 걸음이 망설임 없이 내디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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