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83화
1583화.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3)
타탓! 타다닷!
작은 발이 쉴 새 없이 땅을 박찬다.
키이이이!
이름 그대로 한 줄기 흰 뇌전이 된 백아가 가공할 속도로 대지를 가르며 나아갔다. 솟아오른 바위는 뛰어넘고, 앞을 막는 거목을 날래게 피하며, 쉬지 않고 말이다.
파앗!
그리고 그 뒤를 몇몇 인영들이 뒤따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는 유이설과, 표정을 굳힌 청명, 그리고 힘겨운 기색이 역력한 진금룡과 이송백까지.
“자, 잠시…….”
이송백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 앞으로 달려가는 이들의 등을 응시하면서도 입에선 연신 벅찬 숨이 쏟아져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다리에는 감각이 없다. 정상적인 상태여도 힘에 겨울 만한 강행군이다. 그 정도 속도를 부상 입은 몸으로 유지해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청명이 분명 뒤처지면 두고 가겠단 말을 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전력으로 달릴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이렇게 급한 것일까?
상황이 급박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전해 들은 상황을 두고 보자면 승패가 명확하지 않은가?
만인방과 흑귀보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상대는 소림과 팽가, 그리고 공동이다. 전력만 놓고 보자면 구파의 패전은 말도 안 된다.
게다가 그들이 맞닥뜨렸다는 호북 땅은 드넓은 평원이다. 장일소가 이용할 만한 지형지물이 없는 곳이라면 그 승패야 더욱 명약관화가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급히 가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기에?
“도자…….”
청명을 부르기 위해 그가 손을 뻗은 순간, 누군가가 이를 거칠게 후려쳤다.
“사, 사형?”
진금룡이었다.
그 역시 힘겨워 보이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이송백과는 달리 두 눈에 오기가 들어차 있었다.
“우는소리 할 바에는 엎어져라!”
“…….”
“우린 종남이다.”
칼날 같은 말에 이송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옳은 말이다. 저기에 있는 게 청명뿐이라면 모를까, 두 사람과 같이 싸웠던 혜연과 유이설도 달리고 있다.
부상 때문이라는 변명은 치졸할 뿐이다.
“죽어도 따라가겠습니다.”
“입 다물고 달려라!”
“예!”
이송백의 얼굴에 다시 단단한 결의가 들어찬다.
평소라면 힘겨워하는 그들에게 몇 번은 시선을 주었을 청명이, 지금은 시선을 오로지 앞으로만 고정시킨 채였다.
뿌득.
청명은 제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속으로 욕지거리했다.
‘멍청한 새끼!’
법정이 이번만은 침묵하지 않으리란 것 정도야 그 역시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급하게 날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시주.”
그때, 사뭇 심각한 혜연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묻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말을 꺼내고도 혜연은 어물거렸다. 껄끄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답을 듣기 두려워서일까?
“……승패는 어찌 되겠습니까?”
흡사 뒤틀고 비집어 간신히 꺼낸 듯한 목소리였다. 청명의 얼굴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래도 전력은…… 전력은 확실히 구파 쪽이…….”
“전쟁은 전력 따위로만 하는 게 아니야.”
청명의 입에서 시리고 냉정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혜연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세상 모든 전쟁이 가진 전력대로 승부가 나는 것이었다면, 지금껏 천우맹은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어야 정상이다.
전력은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
“먼저 간다.”
“예?”
파아아앗!
그 순간 청명이 빛살이 되어 박차고 나갔다.
“사질!”
키이이이이!
유이설과 백아가 놀라며 그를 불렀지만,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은 섬전이 되어 앞으로 내달렸다.
뿌득.
앞니가 아랫입술을 파고든다.
‘사패련이 불리하다고?’
전력으로는 불리하다. 심지어 그런 곳에서 맞붙는다면 당연히 승산이 없다.
‘그걸 그 미친놈이 몰랐을 리 있나?’
사람들은 그놈을 광기에 차 날뛰는 마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사실 장일소는 자신이 원하는 때를 잡기 위해 수년을 침묵할 정도로 냉정한 사냥꾼이다.
그런 놈이 움직였다? 그것도 자신이 불리한 땅으로?
반드시 뭔가 있다. 청명도, 법정도 상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망할 중놈!’
법정도 분명 뻔히 알 텐데, 그깟 공명심에 눈이 멀어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더 빨리!’
파아아앗!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려 내달렸다. 불길하리만치 검은 구름이 넘실대고 있는 서쪽 땅으로.
* * *
“크핫!”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사방에서 뜨거운 피가 쏟아지고, 삶이 끊기는 단말마가 귀청을 때린다.
숨이 자꾸 가빠지는 것은 소진되는 내력 때문인가? 아니면 뛰는 심장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터질 것 같은 머리 때문일까?
“으아아아아!”
허공을 격한 도가 또 한 사람의 목을 끊어 낸다.
살면서 수없이 들어 왔다. 사람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 귀하다고. 세상 어느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중한 것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니다. 그들이 알던 세상과 그 안에서 따랐던 법칙 같은 건 없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오직 하나.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대적 법칙뿐이다.
“후욱! 후욱!”
핏발 선 눈을 돌리며 다음 먹잇감을 찾는다.
적의 피로써 도를 붉게 물들일수록 돌려받을 영광이 커진다. 그 영광에 한 방울을 더해 줄 희생양을 끊임없이 찾을 수밖에.
그 광기 어린 눈빛이 멈춘 건 바로 그때였다.
“패……군?”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래도록 모두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자. 그리고 어느새 이 광기 어린 전장의 목적이 되고 만 자.
사패련의 련주, 패군 장일소.
그가 지금 이곳을 향해 제 발로 달려들고 있다. 양손에 그의 독문무공인 청염살강(靑炎殺鋼)의 푸른 염강(炎鋼)을 피워올린 채 말이다.
처음에는 부정했다. 그러고 나선 의심했다.
하지만 모든 의혹이 걷힌 순간, 그 광경을 목도한 모두의 피가 여느 때보다 더 뜨겁게 끓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목을 베는 것만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을 내어 줄 자!
“……장일소.”
누군가가 신음처럼 흘린 목소리가 전장에 퍼져 나갔다. 주변의 끔찍한 소음 사이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장일소오오오오오오!”
그 소리는 이내 절규가 되었다.
증오를 품은 자, 원한을 품은 자, 탐욕에 자신을 잃은 자, 타오르는 정의감에 취한 자, 너절한 우월감을 받아들인 자…….
그 모든 이들이 갈구하듯 장일소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얽혀 오는 이들을 피아를 막론하며 밀어 내고, 끌어내 가며.
“뭐, 뭣들 하는 거냐?”
전장의 흐름이 급격하게 변했다.
이는 가장 앞서 있던 종리형도 당황할 만큼 극심했다. 착실하게 따르던 검수들이 순간 불에 홀린 불나방처럼 날뛰기 시작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해라! 이런, 빌어먹을. 진정하란 말이다!”
종리형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아수라장이 된 전장에서 그의 목소리 따윈 흔적도 없이 묻혀 버렸다. 자신이 내지르는 소리가 제 귀에도 잘 안 들릴 지경이다.
“이익……!”
종리형이 앞서 나가려는 제자의 어깨를 잡아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그의 손은 두 개뿐이다. 수많은 제자를 이런 식으로 모두 막을 순 없다.
그가 저를 두고 달려 나가는 제자의 상기된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아니, 잔뜩 취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종리형은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이, 이런…….’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대형을 무너뜨리지 마라아아아!”
그는 다급히 악을 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공동의 대형은 본디 적을 꿰뚫기 위해 화살 같은 모양새를 이루었다. 하나 이 상황에서 그의 명이 모두 전달될 리가 없는 데다가, 그 대형조차도 이미 한참 전에 멀어져 있었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뒤틀려 버렸는가? 그가 앞으로 치고 나갈 때?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때?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며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그러나 일순의 한기는 이윽고 들려온 고함에 날아가 버렸다.
“놈의 목을 베라! 기껏해야 사파 놈일 뿐이다!”
“비켜라! 내가 벤다!”
“아아악!”
종리형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는 분명히 생각했다. 법정이 아니라 그 역시 장일소의 목을 벨 수 있다고.
그런데 그 말인즉, 다른 이들 역시 얼마든지 장일소의 목을 벨 수 있다는 의미다.
종리형이 미리 약조된 대형을 무너뜨렸듯이, 다른 이들 역시 그의 명을 무시하고 장일소를 노릴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종리형과 같은…… 사람이니까.
무인이란 하찮은 명성 하나에 그 목숨까지도 기꺼이 걸곤 한다. 그런 이들이 저 지독한 유혹을 버텨 낼 수 있겠는가?
“노, 놈의 수작질에 말려들지 말란 말이다!”
종리형은 이제 제자들을 향해 악을 써 대고 있었다.
물론 들릴 리 없다.
모두가 보았고, 또 들었다. 장문인이 이미 약조된 사항을 어기고 욕망에 휩쓸리는 모습을 말이다.
단 한 번이다. 살면서 두 번은 오지 않을 기회다.
본디 그들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을, 주어지지 않았어야 할 기회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자중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심지어 상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여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사파 놈들이다.
그럼 꼭 장문인이 아니더라도 저 장일소에게 닿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그 몸에 상처를 새겨 넣고, 목을 베어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만큼 더없는 업적이고 영광이다.
그 기회를 잡을 이가 꼭 장문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피처럼 붉은 장포가, 넘실대는 저 불길이.
한번 눈이 멀어 버린 불나방들의 눈에 다른 광경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나부끼는 붉은 장포와, 그에게로 아귀다툼하며 나아가는 또 다른 경쟁자들이 보일 뿐이다.
‘나, 나도……!’
“나다! 내가 한다!”
“비켜라!”
“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렇게 타오르는 욕망을 더욱 부추긴다. 번지게 하고, 더 극심히 타오르게 한다.
“장일소오오오오오오!”
이것은 비단 공동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
팽엽 역시 이성을 잃고 날뛰는 팽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도를 추구하는 면에서만큼은 사파를 능가한다는 하북팽가. 그들의 두 눈에 광기가 잔뜩 차 있었다. 본인들도 어쩌지 못한 욕망이다. 하물며 권위가 약한 가주의 명으로 통제할 수 있을 리 없다.
쐐기형으로 나아가던 이들의 대형 끝이 제멋대로 뒤틀린다. 비틀거리는 적을 꿰뚫던 창끝이 수십 줄기로 갈라져 형용할 수도 없는 형태로 얽혀들었다.
그 혼란을 뚫은 어떤 이의 도가 마침내 장일소를 향해 날아든다.
“네 목을 내가……!”
패애애애앵!
가공할 속도였다. 시퍼런 도의 날이 장일소의 새하얀 목을 향해 직진했다.
콰앙!
하지만 그 순간, 도를 날린 이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간다. 뇌수와 붉은 피가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
“흐음.”
순간적으로 주위가 잠깐 조용해졌다.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한 사람을 가볍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을.
그가 중얼거렸다.
“아프잖니.”
그러더니 손바닥을 내보였다. 상대의 도를 막아 내느라 얕은 상처가 생긴 것이다.
또옥.
흰 손가락을 타고 흐른 피 한 방울이 땅으로 떨어진다.
장일소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 상처를 보더니 혀로 흐르는 피를 핥았다. 실로 위압적이고 섬뜩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를 본 모두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피를 흘린다. 상처를 입는다.
평범한 팽가의 도에도 저 거인이 피를 흘렸다.
그렇다는 건 그들의 검도, 그들의 도로도 저자의 목을 꿰뚫을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흐아아아아아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진정하란 말이다! 이 어리석은…….”
“장문이이이이인!”
그때, 누군가가 종리형의 어깨를 콱 잡아당겼다. 공동의 장로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 지금 이게 보이지…….”
“멍청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진정은 무슨 진정입니까! 우리가 진정할 동안 소림이나 팽가가 가만있을 것 같습니까?”
종리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가십시오, 당장! 저자의 목은 우리 공동이 베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양보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종리형은 보았다.
그가 공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와중에도, 팽가와 소림의 무인들은 저 장일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이래서는 진형이…….”
“이런 답답한!”
결국 초조함을 참지 못한 장로가 벌컥 화를 냈다.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결국 저자의 목을 베는 전쟁입니다! 모두가 죽어도 저자를 죽이면 이긴 거고, 모두가 살아도 저자가 살아 나가면 진 전쟁이란 말입니다!”
“나, 나는…….”
“비키십시오! 그럼 저라도 가겠습니다!”
장로가 종리형을 밀치고 앞으로 달려갔다. 종리형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으아아아아! 장일소!”
“죽어라아아아아!”
수십의 검, 수백의 칼이 장일소를 향해 날아든다. 장일소가 웃었다.
“이런, 이런.”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아악!
장일소를 둘러싼 새파란 염강(炎鋼)이 광포하게 휘몰아치며 그에게 쏟아지던 이들을 일거에 휩쓸어 날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악!”
푸른 불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응축된 강기(鋼氣)다. 휩쓸린 이들은 말 그대로 속절없이 육편이 되어 튕겨 나갔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단다.”
“아…….”
그의 앞에 멍하니 굳어 버린 이의 얼굴을 덥석 움켜잡으며 빙긋 웃은 장일소가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퍼석!
그의 손안에 흡사 붉은 꽃이 피는 듯했다.
“걱정 마렴.”
장일소의 두 눈에서 요사스러운 안광이 피어올랐다.
“내가 이 목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줄 테니. 너희가 원하는 대로 말이다.”
붉은 장포를 펄럭이며, 장일소가 다시 앞으로 뛰어들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전장에 맴돌았다.
여기저기서 붉은 꽃이 검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피와 욕망을 먹고 자란, 탐욕스러운 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