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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86화


1586화.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6)

“저…….”

과연 ‘충격’이라는 말만으로 이 광경을 본 심정을 모두 표현할 수 있을까.

드넓고 척박한 대지에 거대한 손자국이 새겨졌다. 마치 반고(盤古)가 남긴 자국처럼 거대하면서도, 부처의 의지가 담긴 듯 신성한 흔적이었다.

종리형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저, 저게…… 법정.’

땅에 새겨진 상흔 따위는 놀랍지도 않다. 아니, 당연히 놀라운 광경이지만, 그 흔적을 만들어 낸 이가 법정이라 당연한 결과에 가깝다.

법정이 누구인가? 바로 중원 무학의 태산북두로 불리는 천년소림의 방장이다.

일개 장로조차 타 문파의 제일고수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무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소림이다. 그 소림의 방장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한 문파의 장(長)이 되는 이가 반드시 그 문파에서 가장 강한 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으나, 법정은 어쨌든 무위의 측면에서도 강함을 인정받았다.

당대의 천하제일인의 가장 가까운 이가 법정이라는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종리형이 놀란 까닭은, 법정이 보인 무학의 위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어처구니없는 운용 때문이었다.

평범한 이는 평생을 수련해도 단 하나도 제대로 깨우치기 어렵다는 소림의 칠십이종절예. 그 절예 중에서도 재능과 불심을 모두 갖춘 소수 중 소수에게만 최상승의 무학이 허락된다.

그런데 그런 무학들이 걸음마다 뿜어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워낙 움직임이 자연스레 이어져서 그 강함을 모두 실감하기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칠십이종절예라 하여 다 같은 무학인 게 아니다. 그 모든 절예가 각기 다른 무학이었다. 다른 무학이기에 내력의 운용도 다르고, 끌어 올려야 하는 내력의 종류도 다르다.

그런데 법정은 마치 그 모든 무학을 한 무학 안의 다른 초식을 사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연계하고 있다.

대체 얼마나 무학에 통달해 있어야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게 진정한 소림의 힘인가?’

종리형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만일 그가 저 법정의 앞에 섰다면 과연 몇 초식이나 버틸 수 있었을까?

소림의 방장. 천하를 이끄는 거인.

그 거대한 이름이 오히려 법정이라는 ‘무인’의 가치를 얕잡아 보게 했던 것이 아닌가?

‘이래서야 끼어들려고 해도…….’

최소한의 명분조차 확보할 수 없다.

상대는 악명 높은 사패련의 수괴다. 정정당당한 일대일 승부를 굳이 고집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리 일방적으로 승부가 흘러간다면 굳이 끼어든 이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팽엽도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지금 종리형은 저 장일소가 분전해 주기를 바라야 한다. 장일소가 너무 쉽사리 당해 버리면 모든 영광은 소림이 독차지할 것이고, 공동과 팽가는 이곳에서 흘린 최소한의 피 값마저 회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결국 쓸데없이 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않는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초조함에 애가 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도 없다. 종리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패군이라 해도 법정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턱.

법정의 장력에 튕겨 나가며 드러누웠던 장일소가 땅을 움켜잡듯 짚었다.

“흐음…….”

그러더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덮고 있던 화장은 얼룩덜룩 지워졌고, 상징 같던 면류관은 어디론가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적포도 군데군데 찢겨 나가고 먼지를 뒤집어썼다.

척 보아도 꽤 낭패당한 모습이다.

심지어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딱히 대단한 축에도 못 들 것이다. 소림의 내가중수법은 자비로우면서도 잔인하다. 상대의 내부를 파괴하는 무학은 분명히 저 강건한 육체의 내부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종리형은 다음 순간 눈을 의심했다.

엉망진창이 된 장일소의 자세와 눈빛이……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루와 권태, 나른함 등이 여전히 스며 있었다.

마치 이런 상처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니, 그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다는 듯 말이다.

순간 종리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묘한 섬뜩함이 온몸에 번진다.

“이런, 이런…….”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은 장일소가 흘러내린 제 앞머리를 느긋하게 뒤로 쓸어 넘겼다.

“꼴이 엉망이 됐구나.”

일방적이다 못해 처참하게 밀린 직후다. 그런데 장일소의 손짓에는 분명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허세? 오기? 아니, 아니다. 저건 꾸며낸 게 아니다.

이 광경에, 심지어는 법정조차도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안색을 굳혔다.

“늙어 빠진 대머리 중놈이라 외양에 신경을 안 쓰고 다녀서 그런가……. 영 배려가 없네. 그래서야 어디 ‘자비’를 논할 수 있겠니?”

장일소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선 자리에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그래도 소림 방장 자리에 그냥 오른 건 아닌 모양이야. 혓바닥을 워낙에 잘 굴려 대길래 그 재주로 얻은 자리인가 했는데.”

“아미타불.”

불호를 왼 법정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장일소를 주시했다.

저자에게 여유 부릴 여지가 있는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의 공격은 장일소에게 분명히 먹혀들었다. 저 육신에 새겨진 상처와 창백해진 안색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인가, 저 여유는?

상황이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외려 그렇기에 법정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육체가 가진 여력에서 나오는 여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익숙한 것인가?’

만일 법정이 장일소와 같은 상황에 몰렸다면 그 낭패감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상황 자체를 딱히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수없이 몰려 보았을 테니까.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러 왔는지. 자신보다 더한 강자들을 얼마나 숱하게 꺾어 왔는지.

귀주의 작은 문파로 시작했던 만인방이 천하를 오시하는 세력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어 왔을지 말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상황 따위야 그리 특별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그대의 삶에 있었던 요행이 오늘도 반복되진 않을 것이외다.”

“……으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당연히 이어지는 건 아…….”

“퉷!”

법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일소가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시커멓게 죽은 피가 땅에 스며들었다. 이를 본 장일소가 깔깔 소리 내어 웃어 댔다.

“아아, 미안하네. 조금 역겨워서 그만. 내가 사실 피를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패군.”

색 옅은 눈이 법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눈꼬리가 느긋하게 휘어졌다.

“너무 그리 잘난체할 것 없단다. 이제 겨우 시작이잖니?”

까드득.

장일소의 주먹에서 소음이 흘러나왔다.

“요행이라…….”

이내 그는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졌다.

“어디 확인해 보렴!”

쿠웅!

가공할 속도였다. 그의 주먹을 타고 길게 이어진 푸른 염강이 마치 한 쌍의 날개처럼 활짝 피어났다.

“소용없는 짓을.”

법정이 단호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나한권. 모든 소림권의 기초.

기초이기에 특별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그 어떤 무학보다 더 위협적이다. 특별하지 않다는 건 모자람도 없다는 뜻이므로.

약점 없이 단단한 무학을 내세운 건 변칙적인 장일소를 상대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이곳에서 반드시 장일소를 찍어 누르겠다는 의지의 발현과도 같았다.

고오오오!

다리를 넓게 벌린 법정이 자세를 낮추며, 쇄도하는 장일소를 응시했다. 마치 태산이 자리한 듯한 무거움.

하지만 장일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법정에게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장일소의 주먹이 직선으로 뻗어진다. 그 주먹을 곧게 세워진 법정의 팔뚝이 단단히 막았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가공할 충격이 주변을 덮쳤지만, 그 결과는 명백했다. 태산처럼 단단히 방어를 굳힌 법정의 팔뚝이 장일소의 주먹을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이다. 거친 장일소의 염강도 법정의 웅혼한 내력을 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장일소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회수되더니 이내 법정의 팔에 연이어 세 번의 권을 꽂아 넣었다.

쾅! 콰앙! 쾅!

거대한 폭음이 연달아 터진다. 법정의 몸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건 육체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가 발 디딘 대지는 내려치듯 쏘아지는 장일소의 권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의 눈에 짧은 당혹감이 어렸다.

소림의 권은 하체에서 시작된다. 하체를 단단히 고정하고, 상체는 그저 그 힘을 받아 분산할 뿐이다.

하지만 순간 두부처럼 짓물러 버린 땅은 그의 하체를 충분히 받쳐 주지 못했다.

말 그대로 찰나의 변수였다.

그리고 이만한 경지에 오른 이들의 격전에서는 이런 사소한 변수 하나가 구르는 눈덩이처럼 크게 부푸는 법이다.

법정은 빠르게 몸을 뒤로 물리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다. 장일소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그런 그에게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결코 잡아 낼 수 없는, 아주 잠깐의 틈이었다. 그러나 장일소는 그 찰나를 짐승처럼 물고 늘어졌다.

“하압!”

법정이 단번에 주먹을 내지른다. 열두 번의 권격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하고 쾌속한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내지르기였지만, 법정의 손에서 펼쳐지며 천하무쌍의 신공절학이 된다.

그러나 땅에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채 펼친 나한권은 제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쿵!

짧은 충격음이 울렸다. 하나, 실제로는 거의 열두 번의 격타음이 거의 동시에 겹쳐 터진 것이었다.

법정의 권격을 모조리 받아친 장일소의 두 눈이 뱀처럼 사특한 빛을 뿜었다.

“이놈!”

법정이 재차 발을 내뻗으려는 순간, 장일소가 법정을 그대로 올려 찼다. 사타구니를 노려오는 장일소의 각법에 법정은 내뻗던 다리를 재빠르게 회수해 무릎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완벽한 방어였지만, 그 대가로 법정의 몸은 허공으로 좀 더 떠올랐다.

내력으로 아무리 억누르고 버틴다 해도, 장일소의 발끝에 어린 힘을 무시하고 내려서는 건 불가능했다.

“그거 아니?”

그 순간, 장일소의 섬뜩한 목소리가 법정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무리 강해도 말이다.”

화아아악!

장일소의 두 손에서 새파란 불꽃이 솟구쳤다.

“써먹지 못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란다!”

장일소의 손바닥이 법정을 향해 쇄도했다. 흡사 맹수의 발길질 같았다.

법정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손가락 끝으로 새하얀 지력을 내뿜는다.

일지선(一指禪)!

좋은 선택이었다. 내력의 수준이 동등할 때, 장력은 하나의 점에 집중한 지력을 막아 내기 어렵기 마련이다. 하물며 내력이 월등한 법정의 지력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또한 어리석은 선택이기도 했다.

제 손을 향해 날아드는 지력을 보며 장일소가 웃었다. 그러더니 오히려 손에 어린 염강을 풀어 버렸다.

법정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뭣?’

콰득!

날카롭고 강한 지력이 장일소의 손을 쉽사리 꿰뚫고 만다.

만일 장일소가 내력이 실린 손으로 막아 냈다면 꿰뚫리지 않고 몸이 밀려났을 터. 그리고 그랬다면 법정은 공세를 이어 갈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대항하는 대신 내어주기를 택했다.

그로 인해 장심(掌心)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지만, 그 대가로 법정의 시간을 빼앗은 셈이다.

“순진하기도 하지.”

한번 지력을 내뿜은 손이 텅 빈 채 멈춘 시간,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은 장일소가 손에 재차 불꽃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불꽃은 법정의 가슴에 일직선으로 작렬했다.

콰아아앙!

새파란 불꽃 뱀이 찬란한 서기를 머금은 생불(生佛)의 가슴을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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