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91화
1591화. 부처도 너를 버린 거란다. (1)
“아⋯⋯미⋯⋯.”
완성되지 못한 불호가 입 안에서 스러진다.
반장을 한 손끝이 덜덜 떨린다. 법정은 이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어찌⋯⋯ 이게, 어떻게⋯⋯.”
하지만 깨달았다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돌이킬 수 없어진 제 처지를 뼈저리게 절감(切感)하며 몸을 떨 뿐.
도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제갈세가와 모용세가는 그가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였다. 그들이 이 전장에 도착할 수 없다고 여기도록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법정이 조심스럽게 흘린 빈틈이었다. 장일소는 분명 그 빈틈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런데 그 일부러 만들어 낸 틈에 박힌 장일소의 송곳니가 그의 내장까지 파고들고 만 것이다.
“어떻게!”
법정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장일소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오히려 질문해야 할 건 나란다.”
그러더니 사색이 된 법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확신했지?”
“⋯⋯.”
“내가 모를 것이라고, 나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고, 네가 내 머리 위에 있다고 말이다. 대체 무슨 자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
법정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장일소의 얼굴에 어린 명백한 비웃음이, 법정에게 제 실수를 깨닫게끔 했다.
바깥에서 대국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법이다.
그렇기에 숱한 이들이 장일소에게 농락당하는 동안, 그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법정은 되레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저런 뻔한 수에 당하는 이들이 우둔한 것이라고. 자신은 절대 장일소의 수작질에 당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장일소가 눈앞에서 묻고 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확신을 품었느냐고. 진흙탕에 발이 잠긴 채 걸어 보지도 않은 이가 어찌 자신만은 늪 속에서도 평소처럼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느냐고.
“나, 나는⋯⋯.”
시운을 기다리며 와신상담했다고 믿었고, 법정은 그 모든 시간을 두고 인내라 칭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이 이젠 되레 법정을 지옥 같은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다.
으레 자잘한 패배는 부족한 실력에서 나온다.
하지만 길이길이 남을 대패는 근거 없는 확신에서 시작한다.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 알고도 자신만은 다르리라 믿었던 게 법정의 패착이었다.
“네가 왜 졌는지 듣고 싶니?”
“이, 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란다.”
장일소의 번뜩이는 눈이 법정을 꿰뚫듯 응시했다. 그 속내를 샅샅이 파헤치고 해부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장일소의 두 눈이 법정의 것보다도 훨씬 더 고승 같았다.
“너는 네가 용기를 냈다 여겼겠지만, 아니지⋯⋯. 너는 그저 커다란 그림자에 신음한 것뿐이란다. 그래서 그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확신이란 이름의 만용을 부린 게지. 그게 사실은 도피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나는⋯⋯.”
“알잖니.”
장일소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귀를 괴롭히는 비명, 수많은 이들의 죽음.
세상을 덮친 거대한 겁화처럼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만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알고 있잖니, 그렇지?”
법정의 손이 자잘하게 떨렸다.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장일소가 말을 꺼낸 순간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렴. 내가 왜 그를 저 먼 곳까지 끌어냈을까?”
법정의 몸이 얼어붙는다.
“두려워서? 놈이 없는 동안 천우맹을 집어삼키려고?”
장일소의 두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럴 리가 있겠니. 고작 이유로 그런 게 아니란다.”
“그 입 다물라!”
법정이 주먹을 내지르며 성마르게 거대한 권력을 내뿜었다.
장일소의 입에서 나올 말을 짐작하여, 그 말만은 틀어막고 싶다는 듯.
하지만 성급한 권력은 장일소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푸른 강기에 맞닥뜨리며 방향이 틀어졌고, 애꿎은 땅만 파헤쳤다.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고, 법정은 이를 악문 채 앞으로 돌진했다.
아직 아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장일소만 죽일 수 있다면, 저 마귀 같은 놈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이 모든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다. 그는 아직 패한 것도, 궁지에 몰린 것도 아니다!
“패구우우우우우운!”
소나기 같은 권력이 장일소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장일소는 딱히 급한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공격을 맞받았다. 그리고 법정이 듣고 싶어 하지 않던 그 말을 기어이 내뱉었다.
“그래야 네가 올 테니.”
“닥쳐라!”
“너는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렇지 않니? 그와 비교당하지 않을 기회는, 네게 드리운 그림자를 벗어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겠지.”
“닥치지 못할까!”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적으로 뿜어진 권력이 장일소를 뒤로, 또 뒤로 밀어 낸다.
하지만 법정의 두 눈엔 조금씩 초조함이 깃들었다.
소림의 권은 본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사실이 이토록 답답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더 강해야 한다. 더 빨라야 한다. 더! 더!
제압하는 게 아니라, 저 마귀를 죽여 버려야 한다.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한다. 저 요사스러운 혀를 더 이상은 놀리지 못하도록!
“사실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었잖니? 네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하찮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니⋯⋯.”
장일소가 귀기 어린 얼굴로 씨익 웃었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거란다.”
“아아아아!”
법정에게서 폭발적인 권력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웅혼하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빠르고 강하기는 하나, 소림의 근본에선 벗어나 있었다.
이윽고,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기 가득한 권이 장일소를 뒤덮었다.
“하하하핫!”
장일소가 커다랗게 웃으며 법정의 권을 맞받았다.
끝을 모르고 폭주하는 기운과, 치솟는 살의.
그 가운데서도 전장의 광경은 법정의 두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보고 싶지 않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구파의 제자들과, 광기 어린 움직임으로 그들을 물어뜯는 사파 무리.
구파가, 그것도 자신이 이끄는 구파가 이런 광경에 처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이는 익히 들어오던 것보다도 더 끔찍하지 않은가.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고 만 참극이다.
마음이 흔들리자 권을 뻗는 손도 흔들린다. 물처럼 흘러야 할 내력이 뚝뚝 끊기며 권로를 이탈했다.
법정의 마음속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다.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이 광경에서 달아날 방법은 없다. 그의 과신과 모자람이 빚은 지독한 현실이 그가 쌓아 온 모든 걸 허물어뜨렸다.
노승의 얼굴이 아수라처럼 일그러진다. 그가 믿고 따르던 부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를 더없이 고아하게 해 주던 황포도, 파르라니 깎은 머리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살심을 감춰 주지 못했다.
“장일소오오오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권이 쏟아져도 장일소는 내내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인간이다.
고아함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드글드글 끓고 있다.
전쟁이란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다.
세인들은, 상대의 수를 읽는 건 상대보다 뛰어나야만 가능하다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상대의 마음과 그 안에 들어찬 욕망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어질 행동 따위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장일소가 팠던 함정은 결코 남해태양궁 따위가 아니다.
화산검협을 저 안휘로 이끈 것 자체가 함정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크게 의미 없겠지만, 법정에게만은 더없이 치명적인 함정.
장일소의 눈에는 보였다. 저 안에 가득 찬 열등감. 화산검협 이상 가는 공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을 소림이 독식해야 한다는 탐욕.
그 모든 것이 모두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닥쳐라! 닥치란 말이다!”
그러니 장일소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매사에 고매한 척 굴어 대는 저 고승이 사실은 이 천하를 통틀어 가장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었다는 게 얼마나 우습고도 가여운 일인가?
실로 추악하고 우스꽝스럽다!
“아하하하하하하핫!”
정말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우습다.
법정의 권은 더욱 짙은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권력 속에서 그의 살기 어린 얼굴이 유독 도드라졌다.
장일소는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저자는 알고 있을까? 지금 제 얼굴이 어떤지. 그토록 잡아 죽이고자 하는 마귀가 다름 아닌 제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면 그때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패구우우우우운!”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눈이 마라(魔羅)처럼 새빨개진 법정이 장일소의 머리를 향해 연신 주먹을 내리친다.
형(形)도, 의(意)도, 심지어는 식(式)조차 사라진 마구잡이식 권. 그저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휘둘러지는, 권조차 아닌 그저 주먹질.
장일소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주먹이 연신 장일소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어깨가 으스러지고도 남을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 웃음이 문제다. 저 비웃음이 법정을 더욱 미치게 했다.
“닥치란 말이다! 그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닥치⋯⋯.”
법정이 불자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말을 쏟아 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후우우웃!
법정의 입에서 돌연 시뻘건 피 분수가 솟구쳤다.
“커, 커헉⋯⋯.”
그의 주먹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고 만다.
‘뭐⋯⋯.’
암습? 중독? 아니, 아니다.
법정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몸에서 역류하여 입을 통해 쏟아진 피가 앞섶을 진득하게 적시고 있었다.
피의 색은 검으나, 중독으로 탁해진 것이 아니라 투명하게 검다.
이는 극심한 내상의 증거였다.
‘이, 입(入)⋯⋯.’
“흐음?”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춘 법정을 보며 장일소가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귀기 어린 미소였다.
“이런, 이런. 입마(入麽)라니⋯⋯.”
저벅.
장일소는 법정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시시하기도 하지.”
“쿨럭! 쿨럭! 네, 네놈이⋯⋯. 쿨럭!”
법정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연신 기침을 토해 내고 피를 쏟느라 항변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때 장일소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법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일소가 말했다.
“부처도 너를 버린 거란다.”
그 말이 천둥처럼 법정의 귀를 때린다.
“으, 으으⋯⋯.”
소림의 무학은 결코 살심과 함께할 수 없는 무학.
조금 전 법정이 한 모든 것이 소림 무학의 근본에 어긋난다. 가장 정심(正心)해야 할 무학을 짙은 살심에 휩싸여 마구잡이로 쏟았으니 입마(入魔)가 오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
부처가 그를 버렸다는 말이 그저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네 부처가 정말 악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그가 멸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너인 모양이구나. 네가 나를 죽일 짧은 시간조차 허하지 않는 걸 보니.”
“쿨럭!”
법정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피의 역류는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운을 끌어내려 할 때마다 진기가 가닥가닥 끊기고, 단전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내가⋯⋯.’
입마(入磨). 불가에서는 수행자가 불심에서 벗어났단 증좌가 된다.
법정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 주화입마가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원인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아, 아미⋯⋯.”
그의 입은 끝끝내 한 번의 불호조차 내뱉지 못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피와 허물어지는 육체가 그의 뜻을 모조리 배반한다.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법정은 장일소가 푸른 강기를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장일소의 그 강기가 흡사 불화(佛畫) 속 후광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