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99화
1599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4)
“사형!”
참회동에서 나와 산 아래를 내려다본 혜방이 얼굴을 굳혔다.
‘이곳까지⋯⋯!’
“적도들이 숭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혜방은 본능적으로 반장을 취하며 불호를 외었다.
산 아래서부터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을 오르는 이들이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이 함부로 뿜어 대는 살기에 피부가 베일 것만 같았다.
지금 하남에서 날뛰고 있을 사파 무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들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목표는 실로 명백하다.
“사형. 어찌⋯⋯.”
소림은 방어에 적절한 곳이 아니다. 수많은 향화객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많은 이들을 받기 위해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고, 그 흔한 절진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사실 자부심이기도 했다. 천하의 누구도 감히 소림을 노릴 수 없다는.
그러나 그 자부심이 지금은 소림의 목을 더욱 옥죄고 있었다.
“사형!”
“아미타불.”
혜방이 불호를 외어 사제를 진정시켰다.
“어찌 하는 게 옳을지는 나 역시 모르겠다.”
“⋯⋯예?”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구나.”
혜방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경내에 있을지 모르는 향화객들을 모두 찾아 대피시키거라. 무고한 사미승들과 학승(學僧)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 사형!”
소림은 사찰이다. 무학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고는 하나, 소림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무학을 익힌 건 아니었다.
아직 무학을 익히지 않은 동자승들과 불법에만 매진하는 이들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대피시키기로 한다는 건⋯⋯.
“설마 우리가 저들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저들은 아마 사패련의 명을 받아 이곳으로 온 것이겠지.”
혜방이 이미 생각해 둔 것처럼 차분히 대답했다.
“그런 이들이 단순히 불공을 드리려 들렀겠느냐. 소림을 멸할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 말이 맞다.
저 패군 장일소라면 애초부터 소림을 지울 수 있는 이들을 보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곳에 남아 있는 소림의 힘은 본디 전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장로들이 부재하다는 것과 하남에 난립하는 사파 무리를 무찌르기 위해 외부에 나가 있는 이들마저 고려하면 남은 힘은 채 삼 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림이라 해도 삼 할의 전력이라면 덤벼 보려는 문파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학승들에게 부탁하여 장경각에 있는 경전들도 소림 밖으로 내보내라!”
“겨, 경전들을 말입니까? 그럼 비급들은⋯⋯.”
혜방이 사제를 가만히 보았다. 그 눈길이 잔잔하였다.
“비급이 경전보다 중하더냐?”
잠시 침묵하던 사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형. 부처께서 전하신 말씀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 그러면 됐다. 서둘러라.”
“예!”
사제가 신법을 펼치며 멀어지자 혜방이 작게 불호를 외었다.
‘여래시여⋯⋯.’
그저 불법을 좇고 싶었다.
독선에 젖어 변해 가는 방장과 불자의 본분을 지키려 들지 않는 이들에게서 벗어나, 잡히지 않는 ‘정도’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미타불.”
혜방은 이 역시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이곳에서 숨죽이는 것도 불자의 본분은 아니었을진대.’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본디 불도란 고행 속에서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은 그저 참선(參禪)만으로는 마주할 수 없다. 부처가 그들을 굽어살피듯, 그들 역시 비탄에 빠진 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산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저 시린 살기는 규율과 존중이라는 변명으로 자기 자신을 이 작은 경내에 가둔 그들에게 여래가 내리는 벌이리라.
진정으로 불법을 궁구하는 이에게는 방장의 권위도, 소림이라는 이름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르지 않은 인내는 그저 외면일 뿐이다.
“아미타불.”
이게 진정 소림의 운명이라면, 그들이 저지른 업의 대가라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리라.
“조금 늦었구나.”
항상 깨달음은 늦게 찾아오는 법. 하나 늦게라도 알았다면 그거로 족하다.
혜방의 발이 천천히 옮겨졌다.
잠시 후.
도열한 무승들이 긴장된 얼굴로 북문(北門)을 주시했다.
농도가 짙어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러 왔다.
얼마나 숱한 살업(殺業)을 진 이들이기에 이런 피비린내를 풍긴단 말인가?
“아미타불⋯⋯.”
여기저기서 마음을 다스리는 불호 소리가 흘러나왔다.
쾅!
이윽고, 굳게 걸어 잠근 산문이 터져 나가며 수두룩한 무인이 부서진 산문을 통해, 또는 벽을 뛰어넘어 소림 안으로 난입해 왔다.
전신을 검붉은 천으로 뒤덮은 그 무인들은, 기묘한 기세와 이질적인 분위기가 무인이라기보다는 광인 집단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뿜어내는 살기가 등골이 저릿할 정도로 강렬했다.
결코 쉬이 볼 상대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 있는 이들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순간 밀려드는 암담함에 혜방은 저도 모르게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노력한다고 해서 메꿀 수 있을 만한 격차가 아니다.
‘사미승들을 미리 대피시키길 잘했구나.’
적어도 무고한 목숨이 사라지는 건 막아 냈다. 이곳에 남은 건 이제 그 죄를 짊어져야 하는 이들.
하지만 죄에 비해 감당해야 할 형벌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소림을 방문하신 객들께선 누구이신지요?”
그 목소리에 몇몇 시선이 혜방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저 많은 이들 중에서 고작 몇 명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사람답지 않은 반응이다.
“지금 소림은 객을 받고 있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무미건조한 반응과 창백한 안색, 감정 없는 얼굴.
‘마치 시신 같구나.’
분명 강시는 아닐진대, 이들은 너무나도 기괴하다. 그 혜방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사형⋯⋯.”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흘린 신음 같은 목소리에 혜방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알지만, 방장이 없는 지금 그들은 마지막까지 소림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혜방이 다시 입을 열기 전, 누군가가 대신 먼저 말했다.
“부처의 뜻은 널리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녹슨 경칩이 긁히며 움직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히 그 목소리를 낸 이에게로 향했다.
옷 사이로 드러난 부위를 모조리 붉은 붕대로 칭칭 감은 사내가 혜방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림이 피에 젖는다면 다들 알게 되겠지. 그 말이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중얼거림에 가까운 그의 말에, 혜방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이 그를 절로 움츠러들게 만든 것이다.
“아미타불.”
떨리려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혜방이 괴인에게 말했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 먼 서장에 중원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있다고.”
“흐.”
그 말에 괴인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불자란 것들은 말을 괴이하게 돌려 하는 재주가 있군. 사교(邪敎)라는 좋은 말을 두고 말이지.”
“⋯⋯아미타불.”
“상관없다. 우리를 어찌 부르든 오늘 소림의 운명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너희는 먼저 간 사형제들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 순간 혜방이 움찔했다.
“먼저⋯⋯ 간?”
“그럼? 우리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혜방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거짓일 게 분명하다. 그 먼 곳의 소식이 저들에게 먼저 전해질 리 없다.
하지만 그 거짓 속에도 진실이 있다. 만약 저들이 사패련이 보낸 이들이라면, 절대적인 확신이 있지 않은 이상 이만한 패를 뒤로 돌려 소림을 노린다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방장⋯⋯.’
혜방의 손끝이 떨려 왔다. 이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안타까움이었다.
‘결국은 그리될 것을 어찌⋯⋯.’
혜방이 탄식하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괴인이 말했다.
“확실히⋯⋯ 너희는 그 멍청한 방장 놈에 비해 조금은 생각이 있는 놈들 같군.”
괴인, 혈교주가 앞으로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하지만 결과가 같다면 결국 다를 게 없지.”
“그렇다 한들 소림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당연히 그래야지.”
혈교주가 앞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시체처럼 서 있던 혈교도들이 폭발하듯 살기를 일제히 뿜었다.
삽시간에 휘몰아치는 피비린내와 짙은 살기.
혜방의 얼굴이 일순 암담하게 물들었다.
“죽어라. 오늘 소림이란 이름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강시 같은 혈교도들이 도열한 소림의 무승들을 향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 ❀ ❀
“⋯⋯소림?”
“예.”
현종의 두 눈이 떨린다.
혜연은 숫제 혼이 달아날 것 같은 얼굴로 제 오른쪽 손목을 콱 움켜잡았다.
“사패련이 소림을 노린다는 말이냐?”
청명이 으득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놈의 방식이니까요. 가장 약한 곳을 노릴 겁니다.”
소림. 강호에서 그보다 강인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모든 건 상대적이지 않은가. 그 강함을 믿고 주력을 전장으로 내보내 소수만이 남은 소림은 장일소에게는 더없이 먹음직스러운 먹이일 것이다.
그 약점을 장일소가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럼 소림은⋯⋯?”
“도, 도장!”
혜연이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예?”
그리고 눈을 번뜩이며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적을 읽을 수 있는 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 ❀ ❀
콰아아앙!
한 줄기 유성이 아래로 내리꽂힌다.
“잠깐!”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던 혈교도들이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혈교주의 시선 역시 무언가가 내리꽂힌 그곳으로 향했다.
검이었다. 그것도 딱히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하지만 혈교주의 예리한 눈은 그 손잡이에 새겨진 작은 문양 하나를 기민하게 포착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뒤쪽의 전각, 정확히는 그 지붕으로 향했다.
그러자 지붕 위에서 한 남자가 비조처럼 강하하여 내려섰다.
타악!
날개처럼 부풀며 펼쳐졌던 하얀 무복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혜방은 눈을 홉뜨며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 뒷모습의 주인을. 그 이름을.
“배, 백천 도장!”
턱.
땅에 꽂혔던 제 검을 다시 움켜잡으며, 백천은 혜방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빚을 갚으러⋯⋯. 아니.”
그러더니 슬쩍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친구를 구하러 왔습니다, 스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무리의 무인들이 전각 뒤에서 솟구쳐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미리 힘 좀 빼지 마라, 멍청아.”
조걸과 윤종이 화산과 남궁의 제자들을 이끌고 당도한 것이다.
혜방은 순간 밀려드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간신히 안 늦었다, 빌어먹을! 어디서 행패냐. 이 망할 새끼들아!”
“⋯⋯행패는 네가 부리고 있다고, 걸아.”
여느 때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사질들의 모습에 피식 웃은 백천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혈교주를 보았다.
“소림의 이름을 지우겠다고?”
“⋯⋯.”
“소림에는 빚이 없지만, 소림의 사람에게는 빚이 있다. 와 봐라. 내가 먼저 상대해 줄 테니까.”
백천의 검 끝이 혈교주의 목을 겨누었다.
“⋯⋯이건 말이 다르군.”
감아 놓은 붕대 너머로도 확연히 느껴지도록, 혈교주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