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05화
1605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10)
“일백?”
당군악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백이 넘는 고수⋯⋯.”
섣불리 반박이나 의심의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곳의 분위기가 겨우 봉합된 참이니 말이다.
“좀 더 자세히.”
청명이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자 모용위경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게 전부이니. 놈들이 별안간 우리 앞을 막아섰고,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마지막쯤에는 또 별다른 움직임 없이 물러가 버렸습니다. 목적은 다 달성했다는 듯.”
임소병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래서?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도 달아나는 걸 그냥 구경이나 하고 계셨다?”
“그럼 어찌해야 했단 말입니까?”
그 날카로운 질문에 반응한 건 모용위경이 아닌 제갈자인이었다.
“적의 정체도, 실력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돌진하는 건 병법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임무가 그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본대를 구원하는 것이었을 때는 더더욱!”
임소병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두어 번 부치다 이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탐탁지는 않지만, 제갈자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제갈세가와 모용세가가 그곳에서 전력으로 싸웠다고 한들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테니까.
그 의문에 휩싸인 적의 전력이 저들이 말한 대로였다면 말이다.
“제갈과 모용이라는 두 가문을 상대로 시간을 끌 수 있을 만한 전력이라⋯⋯.”
누군가가 중얼거린 소리에 두 가주의 얼굴이 슬그머니 붉어졌다. 치욕적인 말이었지만, 또 동시에 사실인지라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헤아리던 백천이 입을 뗐다.
“복면을 쓰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렇소이다.”
“그건 조금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오?”
제갈자인이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상대가 아무리 화산의 장문대리라고 해도, 이제 겨우 이립이 되었을 이다. 그런 이에게 추궁 아닌 추궁을 당하며 유쾌할 리 없었다.
“복면을 쓴다는 건 제 정체를 숨기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그들은 사파. 얼굴을 훤히 드러낸다고 해도 우리가 알아볼 리 없는 이들 아닙니까?”
그 말에 제갈자인이 흠칫했다.
“⋯⋯사파에 따라서는 복면을 기본으로 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 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백에 가까운 고수가 모두 복면을 썼다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갈자인이 입을 다물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놓쳤지만, 그가 생각해 보아도 확실히 이상했다.
대개 실력이 있는 이들은 정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이들은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도 하나같이 정체를 숨기려 들었다.
“군사.”
백천이 임소병을 돌아본다. 사파의 생리는 임소병이 가장 잘 알 테니 그에게 묻는 게 맞는다는 듯.
그 시선을 받으며 임소병은 고민하는 듯 부채 끝으로 제 목 옆쪽을 툭툭 찔러 댔다.
“흠, 보통 내부의 적을 제거하는 암살단 같은 이들은 정체가 드러나면 보복을 당할 수도 있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기도 합니다. 그게 습관처럼 굳어졌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닌데⋯⋯.”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한 전력을 내부 단속용으로만 돌릴 수 있다면 사패련이 진즉에 천하를 다 먹고도 남았겠지요. 그리고 애초에 사패련은 그런 방식으로 권력다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결론은 하나군요. 저들은 우리에게 그 정체를 감출 필요가 있는 이들이었다.”
순간적으로 회의실 안에 서늘한 냉기가 퍼졌다.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야 제각각이겠으나,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제갈자인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껄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백천은 그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 전에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무학에 특징은 없었습니까?”
“⋯⋯딱히.”
워낙 덤덤하게 물으니 제갈자인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사용하는 병기 같은 건?”
“그것도 마찬가지요. 검, 도, 창, 그리고 권까지. 온갖 것들이 혼재되어 있었소. 나도 알아내려 해 보았으나 무기로 특징을 잡아내는 건 불가능했소.”
임소병이 무언가를 낚아챈 듯 물었다.
“온갖 병기가 다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만한 명을 받아 함께 움직이는 집단이?”
순간 제갈자인이 말을 잃었다. 임소병이 지적한 게 무엇인지 이해한 것이다.
제갈세가와 모용세가의 앞길을 막는 건 그 거대한 전장의 판도를 판가름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작전이었다.
그렇다면 사패련에선 당연히 그 임무를 맡을 이들도 신중하게 선정했을 터.
몇 개의 무력대를 합했다 해도, 적어도 서로 이견이 나지 않도록 비슷한 색을 맞추려고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다양한 무기가 섞여 있었소. 마치⋯⋯ 일부러 익숙지 않은 무기들로 위장한 것처럼.”
제갈자인이 뭔가 이해한 듯 중얼대기 시작한다.
“사용한 무학도 이렇다 할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웠소. 그저 내력이 강대하고 초식이 정교했기에 고수라는 걸 알았을 뿐, 어떤 뚜렷한 색깔 같은 것이 없는⋯⋯.”
제갈자인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잘게 떨리던 눈빛이 백천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이윽고 자연스레 모두가 백천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대다수는 그저 백천이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모용위경은 그 와중에도 이러한 현상이 황당했다.
‘고작 서른밖에 되지 않았을 화산의 일대제자를⋯⋯.’
이 정도 신분을 지닌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백천의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결국 결론은 하나뿐이군요.”
“아니, 잠시만!”
제갈자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계시오, 장문대리?”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론이 그것뿐이라면 고심해 봐야 할 일입니다.”
“아니!”
제갈자인의 손이 살짝 떨렸다.
화산의 이 젊은 장문대리는 과격하다 못해 뒤가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 지금 그가 꺼낼 말이 얼마나 커다란 여파를 가져올지 모르는 걸까.
결국 노여움 반, 두려움 반으로 그가 외쳤다.
“말을 삼가시오, 장문대리!”
백천이 차분한 눈으로 제갈자인을 보았다. 그리고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패련이 처음부터 그만한 힘을 더 가지고 있었다면, 전쟁을 이런 방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자인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부인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니 가능성은 둘뿐입니다. 하나는 제갈가주님과 모용가주님이 말씀하신 상황 자체가 거짓일 경우.”
“말을 조심⋯⋯.”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갈자인이 노기를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뒷말을 짐작하는 이들도, 그렇지 못한 이들도.
심지어는 서두를 꺼냈던 백천조차도 차마 쉬이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결국 정적을 깨고 입을 연 건, 가장 거리낌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이, 청명에게로 집중되었다.
“⋯⋯사숙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그거네.”
청명과 백천의 눈이 마주쳤다.
“없는 전력이 갑자기 나타날 리는 없고. 장일소가 그만한 전력을 숨겨 놓을 정도로 사정이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었으니, 그 전력은 사패련 내부에서 온 게 아니다.”
백천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외부에서 새로 합류한 이들이라면 굳이 우리에게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들은 우리가 아는 이들이다.”
침묵 속에서, 청명은 선선히 입을 뗐다.
“고로.”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비록 숨 막히도록 무거웠으되 말이다.
“배신자가⋯⋯.”
청명이 이곳에 앉은 이들을 훑어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 앞에 모두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있다.”
“⋯⋯.”
“맞아?”
심드렁한 청명의 물음에 백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자.
생각지도 못했던 그 세 글자는 모두를 감당키 어려울 만큼 큰 충격에 빠트렸다.
그 순간, 종남 장문인 종리곡이 차갑게 일갈했다.
“헛소리!”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였다.
“억측이 과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군. 배신? 그 말은 우리가 아는 이, 우리가 아는 문파가 배신을 하고 장일소의 개가 되었다는 소리인가?”
“개가 되었다기보다는 손을⋯⋯.”
“같은 말이겠지.”
종리곡이 신경질적으로 백천의 말을 잘라 냈다.
“보자 보자 하니 끝도 없이 가는군. 앞뒤만 따져서 끼워 맞추면 뭐든 말이 되기 마련 아닌가.”
“장문인. 그렇지만 이건⋯⋯.”
“그만.”
종리곡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백천의 발언을 잘라 버렸다.
“어린아이가 어설픈 논지나 펼칠 자리가 아니다.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물러나 있는 게 낫겠군. 맹주께서도 이런 황당무계한 발언은 통제해 주셔야 합니다.”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날카롭게 한마디 하려는 찰나, 다른 사람이 선수 쳐서 종리곡의 말을 받았다.
“물론 장문인의 말씀이 지극히 옳으십니다만, 그저 무시할 만한 말은 아닐 듯합니다. 제가 겪은 바에 따르면 화산 장문대리의 식견은 생각보다 참고할 만합니다.”
종리곡이 순간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누구도 감히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종리곡이 화내지 않은 이유는⋯⋯.
“⋯⋯너는 저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느냐?”
“예.”
그 말을 한 게 진금룡이었기 때문이다.
진금룡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아무리 황당한 추측이라고 해도, 그 이유 외에는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렵다면 응당 고려해 보아야겠지요. 진실일 가능성이 가장 클 테니 말입니다. 황당무계하지만⋯⋯ 화산 장문대리의 발언은 분명 논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종리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배신이라니⋯⋯.”
“⋯⋯.”
“누가?”
종리곡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 목소리에 어린 건 의문이었고, 분노였으며, 또한 부정이었다.
“대체 누가⋯⋯ 누가 배신을 했단 말인가? 대체 누가 그런 짓거리를!”
물론, 누구도 감히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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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저벅.
환한 한낮의 태양 아래, 한 사내가 커다란 전각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검은 복면으로 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웅장한 전각의 입구에 선 사내는 문을 막고 있는 위사들을 노려보았다. 위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복면인을 경계했다.
“군⋯사를 뵙고 싶다.”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위사들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불가하다. 돌아가라.”
그러나 복면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을 허리에 찬 철검에 올린 채 서늘한 눈으로 위사들을 응시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들여보내라.”
안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위사들이 뒤로 한 발씩 물러섰다.
끼이이익, 소리와 함께 전각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오.”
복면인은 열린 문을 잠깐 응시하다 들어섰다. 임시로 차려진 집무실의 먹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무슨 일이지.”
호가명은 서류를 작성하는 자세 그대로 시선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련주를 뵙고 싶소.”
“지금 련주는 누구도 만나지 않으신다.”
“호가명.”
뚝.
내내 물 흐르듯 움직이던 호가명의 붓이 그제야 멈췄다.
“우리가 네 개라도 된 것 같나?”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면인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약속을 지켜라. 그 목에 칼이 박히기 전에.”
잠시 복면인을 물끄러미 보던 호가명은 곧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시선을 내리고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전달은 해 두지. 돌아가라.”
복면인은 호가명의 정수리를 한참 빤히 노려보다 획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슬쩍 본 호가명은 피식 웃었다. 그의 입가에 어린 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개라⋯⋯.”
그 비웃음은 이내 진짜 웃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개는 충성스럽기라도 하지.”
붓을 내려놓은 호가명이 느릿하게 책상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