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17화
1617화. 끊을 각오는 있어. (2)
회의실에 앉은 조걸의 입에선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응, 이 망할 놈이…….”
결국 청명은 날이 밝도록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놈이 없는 놈의 방에서 놈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이들은 하나같이 닭 쫓던 개 꼴로 터덜터덜 나와 회의실에 착석한 참이었다.
“하여간 사람 엿 먹이는 데는 뭐가 있다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형?”
조걸이 짐짓 너스레를 떨어 봤지만, 윤종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굳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슬쩍 한마디 더 던져 볼까 하던 조걸은 이내 그만두었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긴 하네.’
지금 이 자리에는 그들뿐 아니라 천우맹에 소속된 문주들도 모여 있다. 게다가 얼굴이 하나같이 심각하게 굳어 있지 않은가.
평소 회의가 시작되기 전이면 작은 담소라도 나누며 미소 짓던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문 채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분위기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조걸이라도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해는 되었다. 솔직히 청명이 놈이 던져 놓은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되려나?’
어제 새벽에 청명이를 잠시라도 만날 수 있었다면 대충 예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엔 놈에게서 아무런 말을 미리 듣지 못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도통 감도 잡히질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던 그때였다.
닫힌 문이 열리며 청명이 걸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너…….”
조걸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를 하려 했지만, 윤종이 그의 어깨를 콱 잡고 지그시 눌렀다. 닥치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뜻이었다. 조걸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청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제게 할당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놈?’
조걸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솔직히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으로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른 문주들도 침묵을 지키는 청명을 힐끔거렸다. 그들 역시 조걸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그때, 다시 한번 문이 활짝 열리며 현종과 당군악이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현종이 문주들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며 상석으로 향했다. 그리곤 자리를 채운 이들을 쭉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오신 것입니까?”
그러자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제갈자인이 슬쩍 빈자리를 일별하고는 말했다.
“아직…… 종남의 종리 장문인께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으음, 그렇습니까?”
약속된 시간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다. 종리곡쯤 되는 이가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는 건, 애초에 이 회의에 참석할 의지가 없다는 쪽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일이다. 현종은 남몰래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종남은 두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현종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들…… 간밤에 깊이 고민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총사가 낸 안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회의실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간밤에 긴 고민을 했을 게 분명하지만, 선뜻 가장 먼저 나서서 입을 열려는 이가 없는 것이다.
잠시 기다리던 현종이 재차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총사의 의견에 다소 무리한 면도 있지만, 천우맹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장문인의 협조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나왔다. 현종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 눈빛에 희미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고 나오는 첫 의견이 대개 결과에 큰 영향을 주기 마련이니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발화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현종은 사실 내심 안심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눈높이. 야수궁주 맹소였다. 그는 청명 녀석과 친분이 두텁지 않은가. 그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궁주님.”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남만야수궁의 입장을 먼저 전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맹소가 특유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좌중을 한번 돌아본 그의 시선 끝에는 청명이 놓였다.
“야수궁은 총사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예?”
저도 모르게 반문해 버린 현종이 흠칫하며 얼른 입을 닫았다. 어떤 말이 나오건 함부로 의견을 내거나 반응해서는 안 되건만, 맹소의 대답이 너무 뜻밖이라 그답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정작 맹소는 그런 현종의 실수 따윈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총사께서 말씀하신 바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지금 천우맹에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 역시 알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다’와 ‘할 수 있다’는 다릅니다.”
맹소의 눈과 청명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 가운데, 임소병이 온당히 나와야 할 질문을 해 주었다.
“혹여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맹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신뢰겠지요.”
“신뢰라 하시면?”
맹소의 시선이 앉아 있는 중진들에게로 향한다.
“이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기는 하지만 결국 저는 새외의 사람입니다. 영원히 중원인이 될 수는 없지요.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여기 계신 분 중에서는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그리 탐탁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몇몇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그 말 자체가 영 기분이 좋지 않아서인지, 그게 아니면 내심을 찔린 것이 민망해서인지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현종이 조금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궁주님.”
“아니,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맹소는 더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총사께서 운남에 찾아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중원인들과 벽을 세우고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리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으음.”
몇몇 이들이 침음을 흘렸다. 맹소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꿔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벽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벽이.”
“…….”
“야수궁은 그 벽을 넘으려 애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야수궁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궁도들은 야수궁이 아닌 남만인이라는 표찰을 달게 될 것입니다. 궁도들이 그 상태로 다른 중원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맹소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확히 현종에게 향했다.
“남만야수궁이 운남을 떠나 이곳으로 온 건 천우맹과 화산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신뢰를 보여야 한다는 말은 저희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현종은 희미하게 탄식했다. 솔직히 맹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어쩌면 구파와 천우맹의 사이보다 더욱 먼 것이 새외와 중원의 관계일 수도 있거늘…….
그 순간 한 사람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저희도…….”
“말씀하시지요, 설궁주님.”
설소백이 슬쩍 현종과 청명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빙궁도 야수궁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게…….”
설소백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 갔다.
“빙궁이 화산에 은혜를 입어 천우맹과 함께하고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중원 분들께는 딱히 은혜를 입은 바가 없고,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라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오히려 멀고도 먼 사이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빙궁이 북해에 들어오는 모든 중원인을 배척하던 게 고작해야 몇 해 전까지의 일이다.
“그런 분들의 명을 받는 건 빙궁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 물론 만약에 그…… 저희가 화산이나 남만야수궁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면 이 안건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부분을 고려해 주신다면…….”
현종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찬성의 여지를 두긴 했지만 결국 저건 없느니만 못한 여지다. 누군가가 원치 않는 이의 명을 받아야 하고, 또 누군가는 원하는 이의 명만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부터 또 새로운 벽이 생겨나고 말 테니.
벽을 허물기 위해 새로운 벽을 만들어 내는 그런 황당한 일을 할 순 없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설소백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동시에 자신의 실책을 새삼 깨달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천우맹에 새로이 합류한 이들에게로 쏠려 있었다. 진짜 천우맹의 맹주라면 이미 마음을 함께한다 여겼던 이들에게도 그들만의 사정과 입장이 있다는 걸 놓쳐서는 안 되었다. 당장 어젯밤에라도 저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는데…….
회의장 안에 짧은 침묵이 고였다. 분위기가 이리 흘러가게 둘 수는 없다는 듯 당군악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희 사천당가는 총사의 의견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평소 그의 성격처럼 간결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추궁하는 듯한 시선이 모이자 당군악은 부연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천우맹 부맹주의 자리를 내어놓으려 합니다.”
“가주님?”
현종은 화들짝 놀랐다. 당군악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래야 공평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제 권한을 내려놓는데 사천당가는 천우맹의 직위를 통해 안위를 도모할 수 있다면, 이는 공평치 않습니다. 제 결심은 확고하니 맹주님께서는 더 만류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단호한 어조였다. 그리고 이는 누가 봐도 청명의 주장에 힘을 싣는 행보였다.
“남궁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당군악은 제 차례는 끝났다는 듯 남궁명에게 물었다. 남궁명이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남궁세가의 결정권자가 아닌지라 일단 관련 사안을 소가주께 전했습니다. 답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고작 반나절 만에 의견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안건은 아니니까.
“그런 관계로 남궁은 우선 보류하겠습니다.”
“장로께서 결정하시긴 어렵습니까?”
“아시다시피…….”
당군악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외의 두 문파가 돌아선 이상 청명에게 가장 우호적인 문파는 사천당가와 남궁세가다. 한데 그중 남궁세가마저 발을 빼 버린다면 이곳에 남은 정파 중에 청명의 우호 세력은 딱히 없다는 말이 된다.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습관적으로 또 나누고 있었군.’
벽을 허물기 위해 벌이는 일이건만 당군악은 이 순간에도 청명이라는 이를 기준으로 오른편과 왼편을 구분하고 있었다. 숨을 쉬듯 자연스레 말이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이게 가능하기는 할까? 의미가 있기는 할까? 그래도 청명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 중 하나일 자신마저도 이렇게 청명의 뜻대로 움직이질 못하는데?
함께 사선을 넘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여겨 온 새외의 동료들조차 조금 상황이 달라진 것만으로 새로운 선을 긋고 있는 마당에?
‘이보게…….’
당군악의 안타까운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허공만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이 회의가 지지부진하게 끝난다면, 단언컨대 천우맹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공연히 서로가 가진 속내를 드러내고 묻어 둔 상처를 후벼판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린 셈이니.
그리고 어쩌면 이 행위 자체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청명이라면 이를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도 의아할 정도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회의실의 모든 기류가 그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자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당군악이 손끝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사람이란 보통 조금 더 머릿수가 많은 쪽으로 쓸려 가는 성향이 있다. 전반적으로 이리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흔들리던 이들도 마음을 정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때쯤엔 누구라도 청명의 손을 들어줘야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늦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막 들어선 이에게로 집중되었다.
종리곡이었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냉정하고 서늘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종남의 장문인을 보며 당군악의 눈빛이 암담하게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