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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31화


1631화. 모두 사라져 버리기 전에. (1)

졸졸졸.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잔에 호박색 술이 차오른다. 지극히 평범한 방과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천하의 일품인 것이 그 향만으로도 완연히 드러나는 술이 넘치도록 부어졌다.

졸졸졸.

하지만 잔을 다 채우고도 술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결국 넘친 술이 쟁반까지 쏟아져 내렸다.

이를 보는 몇몇 이들의 시선엔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이것은 명백한 긴장이었다.

저도 모르게 식은땀까지 흘리던 쥐 상(相)의 노인이 술병을 쥔 이의 눈치를 연신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궁…주님…….”

째애앵!

그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양, 사내가 쥐고 있던 술병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구, 궁주님!”

노인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정작 이 상황을 빚은 자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며칠이더냐?”

제 손을 적시고 줄줄 흐르는 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가 거친 손길로 술잔을 움켜잡았다.

“피는 끓을 대로 끓었고, 승기는 이미 완벽할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하는 일이라고는 이 남루하기 짝이 없는 방에 틀어박혀 술이나 퍼먹는 게 고작이라니.”

“……송구합니다, 궁주님.”

“우습단 말이다, 내 꼴이. 이러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닐진대.”

사내, 남해태양궁주 진평의 눈가가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마치 이 술잔 같다. 술잔이 이 남루한 방에 어울리지 않듯, 그 또한 이런 곳에 머물 인물이 아니다. 중원의 대지에서 거칠게 종횡무진 날뛸 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 먼 길을 올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남해에서 왕과 같이 살던 그가 이 남루한 초옥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는 꼴이라니! 중원을 짓밟아 주길 기대하던 왕족들이 이 사실을 알면 그를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태양궁주가 잔을 단숨에 비웠다.

주향이 입 안 가득 감돌았지만, 그는 분노로 향을 제대로 느끼지조차 못했다.

“이토록 지지부진한 것이 중원의 방식인가?”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되었다.

대승을 거둔 작자는 방에 틀어박혀 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대패를 한 놈도 제 본거지에 처박혀 죽자고 입씨름만을 해 대고 있다지 않는가?

물론 큰 싸움 뒤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강(小康)이 뒤따른다지만, 이건 그가 보기에 소강이라고 칭해 줄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책임한 침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극도로 불편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답답한 것이 당연합니다, 궁주.”

“……무슨 소리냐?”

“중원의 힘이 임읍보다 강대하다지만, 그건 나라와 나라, 지역과 지역을 비교했을 때의 일일 뿐입니다. 저들 중 궁주만 한 인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모자란 이들의 처사가 궁주의 눈에 차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온당한 일이옵니다. 그러니 너무 답답해하지 마시옵소서. 적은 그래 봐야 기품조차 갖추지 못한, 저열한 이들끼리 벌이는 이전투구의 생존자들입니다. 힘과 명성을 갖추었다 해서 감히 깊이까지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달콤하다.

당연하다. 애초에 저들의 존재 가치는 오직 그것이니까. 평소였다면 진평도 저 말에 금세 기분을 풀고 껄껄 웃어 버렸을 것이다. 하기야 저 비천한 사파 놈들이나 미련한 정파 놈들이 뭘 알아서 그의 눈에 흡족하도록 차겠느냐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농으로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아마 지금 제 처지가 이 술잔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어울리지 않는 데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누군가 술을 따라 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술잔 말이다.

태양궁주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 착한 아이로구나.

술잔이 잘게 떨렸다.

착한 아이. 살아생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

왕족으로 태어난 그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모두에게 우러름을 받던 존재였다. 태양궁으로 입문하지 않았다면 못해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만큼 고귀한 신분을 쥐고 태어났다.

그런 태양궁주가 한낱 천것에게…….

“궁주. 저들을 신경 쓰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지금은 저들이 우매하여 모르는 것뿐입니다.”

“……닥쳐라.”

“이내 저들도 궁주께서 얼마나 찬란하고 위대한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 비천한 고개를 조아리게…….”

쾅!

그 순간 커다란 폭음과 함께 노인이 뒤로 나뒹굴었다.

탕. 타당.

옥으로 만든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만 조금 전 담겨 있던 호박색 술이 아닌…… 붉은빛 액체를 가득 묻힌 채로.

으드드득.

태양궁주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이를 갈아붙였다.

“그 주둥아리 다물라 했다.”

명백한 살기에 질린 이들이 잽싸게 머리를 아래로 처박았다. 감히 눈이라도 마주칠까 떨면서.

태양궁주는 자잘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얼굴을 훔쳤다.

‘패군…….’

살아생전 그에게 이만한 굴욕감을 준 이가 또 있었던가?

이 와중에 더욱 굴욕적인 건, 저 장일소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음에도 그를 찾아가 일갈조차 못 하는 제 처지였다.

어째서인가?

애초에 태양궁은 사패련에 굴복했던 게 아니다. 설령 굴복했다 한들,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입 한 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발언권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곳에서 잠자코 칩거하고 있는가? 어째서?

태양궁주는 신음했다. 분노했고, 또한 절망했다.

그 답을 모르지 않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술을 더 가져와라.”

“…….”

“당장!”

“예! 예! 궁주!”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이들이 기겁하여 문 쪽으로 달려갔다. 누가 먼저 나가나 경쟁이라도 하듯 달린 그들이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엇!”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패…….”

화려한 적포에, 만지면 분이 묻어 나올 듯 새하얀 얼굴, 흑단 같은 머리카락, 색 옅은 눈동자, 그리고 섬뜩하리만치 붉은 입술까지.

코앞에서 장일소와 마주한 그들은 마치 뱀을 만난 쥐 떼처럼 굳어 버렸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제 앞에 선 이들을 한차례 훑었다.

“흐음.”

살짝 비틀려 열린 입술에서 달뜬 듯한 비음이 흘러나온다.

“비켜 주겠니?”

그러나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귀로 분명 말을 들었음에도 그 말은 ‘의사’로서 그들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저 공포였을 뿐.

장일소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모셔라.”

태양궁주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이들이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분분히 좌우로 물러난다. 이윽고 열린 길을 따라 장일소가 느리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끼익. 끼이익. 찰박.

그의 붉은 꽃신이 바닥을 내디디다 이내 흥건히 고인 피 섞인 술 웅덩이를 밟았다. 장일소는 바닥에 떨어진 술잔과 절명한 듯 쓰러져 있는 이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과격하기도 하지.”

이윽고 그 시선은 태양궁주에게로 향했다.

“갑갑한 모양이군?”

“누구 덕분에.”

대답이 짧게 흘러나왔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그 갑갑함을 수하에게 풀어서야 쓰겠니? 쯧쯧. 못났구나.”

태양궁주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노린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인지 말 한마디, 짓는 표정 하나하나가 모조리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껏 승기를 잡고도 주색에 빠져 시간을 날려 버린 졸장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소만?”

“흐으음?”

태양궁주의 반박에 장일소의 눈이 요사스레 빛났다. 섬뜩한 살기가 스쳤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태양궁주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그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장일소의 두 눈은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호선은 조롱 같기도, 도발 같기도 했다.

“주색(酒色)이라……. 아니지. 아니야. 이왕이면 풍류(風流)라고 해 주려무나. 그게 더 고상하게 들리지 않니.”

태양궁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차라리 저치가 대놓고 화를 내고, 노기를 뿜어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장일소는 연신 웃어 대고 있다. 마치 태양궁주 따위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처럼. 다 자란 어른이 새파란 아이를 상대하며 굳이 대놓고 신경전을 걸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눈빛 자체가 그에게는 익숙지 않다. 아니, 익숙해질 수 없고, 익숙해져서도 안 되는 눈빛이다.

“보아하니 내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구나. 그럼…… 우리 대단하신 궁주께서는 어찌하길 원하셨을까?”

태양궁주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몰라서 묻는 것이오?”

“그럼 아는데 물을까?”

태양궁주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물러난 건 이해할 수 있다. 그건 확실히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적은 대패했고, 지휘 체계 자체가 붕괴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취약한 틈을 타 공격을 이어 가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일 터.

장일소의 이유도 알 수 없는 칩거 때문에 사패련은 기껏 잡은 승기를 놓쳤다. 완벽하게 승리할 기회를 말이다.

그럼에도 태양궁주가 침묵하는 이유는 그 사실을 장일소가 모를 리 없다고 그 역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양궁주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 때, 장일소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승기라……. 걱정할 것 없단다. 네 우려처럼 승기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이제 더 확실한 승기를 잡을 기회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지.”

“……무슨 소리요?”

“알고 싶니?”

장일소가 태양궁주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그 순간 태양궁주 진평은 숨통이 턱 막혀 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자…… 뭔가…….’

다르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분명히 무언가 달라졌다.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순 없지만, 이전의 장일소가 주었던 위압감은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까? 이전의 장일소가 그 품 안에 비수를 감추고 웃는 이였다면, 지금은 그 비수를 바로 목 앞에 들이민 사람 같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목이 잘려 나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했다.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한단다.”

“무……엇을?”

“너는 뭘 원하지?”

뜻을 곧장 알 수 없는 말에 태양궁주의 눈에 의혹의 빛이 들어찼다.

“말해 보렴, 네가 뭘 원하는지. 그럼 네가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을 방법을 내가 알려 줄 테니까. 그 대가로…… 넌 아주 작은 것만 내놓으면 된단다.”

“련주…….”

“시간이 없어.”

그 말이 방 안에 아주 짧은 정적을 가져왔다. 찰나였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이한 정적을.

그리고 그 순간 태양궁주는 보았다. 항상 요사스레 웃던 장일소의 얼굴에 어린 새파란, 날것의 귀기를. 마치 눈길 닿는 모든 것을 베어 낼 것 같은 섬뜩한 살기를.

“이제 서둘러야 한단다. 무너지기 전에. 내가 손에 넣어야 하는 것들이, 네가 손에 넣어야 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기 전에.”

“련…….”

“차라리 잘되지 않았느냐?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모두 잃는다고 해도 아까울 것 하나 없잖니? 안 그래? 하하. 하하하핫. 하하하하핫!”

장일소의 말이 빠르게 쏟아질수록 태양궁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체 이자는…….’

장일소는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위태롭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가 태양궁주를 마치 핥는 듯이 훑어보았다.

“어서 말해 보려무나. 시작의 축포는 네가 울려야 할 테니까.”

태양궁주의 입이 홀린 듯 서서히 열렸다.

그 모든 광경을 문턱에서 지켜보던 호가명의 눈빛이 아주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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