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43화
1643화. 그래서 즐거우십니까? (2)
“……즐겁냐고?”
피가 차게 식는다.
장일소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저 장일소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적의를 보일 리 없다고 믿고 있음에도.
저 짧은 한마디만으로 피가 식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가명아.”
수없이 들어 온 말이다. 오래도록 들은 목소리다. 장일소는 그토록 오래 호가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지금 저 목소리에 어린 울림은 지금껏 들어온 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적어도 호가명은 누구보다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더냐?”
장일소의 눈빛이 호가명을 옥죄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가명은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금 련주께서 즐거우신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호가명!”
장일소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물론 아주 조금 커진 것뿐이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 삽시간에 찾아온 긴장감이 공기를 팽팽하게 했다.
호가명을 빤히 주시하던 장일소가 한쪽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제 얼굴을 쥐어 눌렀다.
“별 의미도 없는 소리를 하려고 이 이른 새벽부터 나를 찾아왔더냐?”
“의미가 없습니까?”
호가명이 담담히 묻자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장일소의 눈이 흉포한 이리처럼 번뜩였다.
“가명아…….”
“련주님께는 그런 것이 이제 하찮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하핫.”
장일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즐거운지가 중요하다는 거냐?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얼마나 급박한지보다?”
“예.”
협의의 여지는 고사하고, 바늘 하나조차 들어갈 틈이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장일소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그게…… 네가 그 냉철한 머리로 내린 결론이니?”
“…….”
“응? 가명아? 대답해 보렴. 그게 네 잘난 머리로 내린 결론이냔 말이다. 이제 와 이 압박을 버텨 내지 말고 쾌락이나 좇는 돼지가 되라는 게 네 결론이냐 물었다. 정말 그러니?”
지금 장일소의 눈에 어린 감정이 경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옅은 실망이 어려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실망이라…….
언제부턴가는 단단한 신뢰로만 가득했던 눈이 이제는 실망을 머금는다. 이 모든 상황은 어쩌면 호가명이 스스로 자처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가명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압박이라 하셨습니까?”
“…….”
“처음 련주님과 함께할 때, 련주님은 이제 제가 지옥을 겪게 될 거라고 하셨었지요.”
장일소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실로 지옥에 비견할 만큼 힘든 길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리될 걸 알면서도 련주님을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련주님께서는 제가 그때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여유를 가지라는 말 말이더냐?”
“아니요. 련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지옥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즐거울 거라고 했던 그 말 말입니다.”
장일소가 침묵에 빠졌다. 호가명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 련주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던 이유는, 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련주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련주님은 지옥 한복판에서도 적을 조롱하며 웃을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련주님도 과연 그러합니까?”
장일소가 대답 없이 호가명을 노려보았다. 아니, 어쩌면 대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호가명이 말하려는 바를 장일소쯤 되는 이가 모를 리 없다. 애초에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이리 격한 반응을 보일 리도 없다.
“그래서?”
장일소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덜미를 잡아채어 물어뜯을 것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즐겁지 않다고 하면? 뭘 어쩌라는 거지?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란 말이냐? 아니면 여기서 다 내려놓고 술이나 퍼먹을까? 응?”
호가명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 대화로 확실히 직감할 수 있었다.
그 광경. 그날의 광경.
호가명조차 꿈에서 다시 볼까 두려워하는 그 광경에서 장일소는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이 있다면 싸운다.”
“…….”
“실력으로 이기지 못하면 계략을 쓰고, 계략으로도 안 된다면 독을 쓰고, 지독한 함정을 파고, 인질을 잡고, 상대의 발가락을 핥아 대며 방심하게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이긴다.”
장일소의 얼굴이 점점 더 차게 굳었다.
“그게 제가 아는 패군의 방식이었습니다.”
“…….”
“이기지 못한다고 해서 달아날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이기려고 악을 쓰고, 그래도 이기지 못한다면 별수 없다고 웃어 버리는 사람이 패군이었단 말입니다!”
“호가명!”
장일소의 입에서 끝내 고함이 터졌다. 호가명 역시 또렷하게, 하지만 절박하게 외쳤다.
“대체 당신이 본 게 무엇이기에 항거조차 포기하는 겁니까? 그 패군이! 그 장일소가 싸울 의지조차 잃고 달아나게끔 한단 말입니까!”
채앵.
장일소의 손에 쥐여 있던 술병이 깨지며 조각조각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손을 타고 술이 줄줄 흐른다. 주향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퍼져 나갔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금을 긋는 듯했다. 쩌적쩌적 소리를 내며, 차가울 만큼 무참하게.
“……잘도 떠드는구나.”
손에 묻은 술을 건성으로 털며 장일소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눈에 보이는 것과 내 눈에 보이는 건 다르단다.”
“련주님.”
“내가 느낀 걸 네가 똑같이 느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쉽게 말하지는 못할 거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렇습니까?”
호가명의 두 눈에 옅은 빛이 어렸다.
장일소는 알 수 있었다. 그 눈에 어린 감정이 무엇인지. 지금 자신의 눈에 어린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감정.
“그 말인즉, 지금까지 련주님께서는 적당히 상대할 만한 이들만 적으로 돌려 왔다는 뜻이로군요.”
손을 닦아 내던 장일소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독사 같은 눈빛이 호가명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 했지?”
“제 말이 틀렸습니까?”
“가명아.”
장일소의 얼굴에 귀기가 어렸다.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란다. 아무리 너라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어.”
“아니요. 선을 넘은 건 제가 아닙니다. 련주님이시죠.”
장일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진득한 미소가 실로 섬뜩했다.
“그래. 계속해 봐라.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꾸나.”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싸움 자체를 포기하는 게 패군의 방식이었습니까?”
“아니.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내 방식이지. 하지만 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게 옳으냐? 돼먹지 않은 방식으로 부딪혀 처참히 깨지기라도 할까? 어차피 죽을 테니 더 빨리 죽어 버리기라도 할까?”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
“제가 아는 패군의 방식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이길 확률이 일 할밖에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이 할의 확률을 찾아내는 게 만인방의 방식이었고, 패군의 방식이며, 또한 장일소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파 놈들과 손을 잡으십시오.”
역정을 내려던 장일소가 움찔 굳었다.
다시금 정적이 둘 사이에 고였다. 한참의 침묵 끝에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정파 놈들과 손을 잡으십시오.”
“……하. 하핫.”
장일소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공통의 적이 없다면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공통의 적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들도 ‘그자’의 존재를 이해한다면 련주님의 손을 잡을 겁니다. 그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니까요.”
장일소가 입을 다물었다.
“싸워서 이길 확률이 부족하다면 이길 확률을 높인다. 그게 장일소의 방식이라면, 저들과의 연합은 지금 가장 확실하게 이길 확률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그럼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호가명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일소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호가명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장일소가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이야 그리 드물지 않다. 어쨌든 그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이니까.
하지만 지금 장일소가 내보이는 거부감은 껄끄러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역겨움에 가까웠다.
사람이 뱀을 두려워하고, 벌레를 싫어하는 것 같은 생리적인 거부감. 지금의 장일소에게서 엿보이는 건 바로 그런 종류의 거부감이다.
잠시 후, 장일소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련주님.”
“가명아, 가명아. 느닷없이 꿈을 꾸었다더니 정말 꿈같은 이야기만 해 대는구나.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했더니.”
장일소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게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명아. 그렇게 보고도 놈들을 모르느냐? 그 돼지 놈들이 내 말을 믿으려 하겠느냐? 이런 상황에?”
“…….”
“아니, 믿는다 치자. 놈들이 내 말을 믿어 주었다 치자꾸나. 그러면 그놈들이 정말 나와 손을 잡으려 들 것 같으냐?”
이번에는 호가명이 침묵할 차례였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장일소가 짙은 비웃음을 흘렸다.
“원한이란 때로는 이성을 뛰어넘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만은 죽이겠다는 것들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그런데…… 저들이 정말 살아남기 위해서 나와 손을 잡으려 들겠느냐?”
“놈들도 머저리는 아닙니다.”
“병법은 책 속에 있는 거란다. 하지만 사람은 책 안에 살지 않아.”
“…….”
“내 손에 친지를 잃고, 내 손에 문파를 잃은 이들이 저곳에 즐비하다. 그런데 놈들이 ‘대의’라는 웃기지도 않는 두 글자를 위해 내 등을 지켜 준다고?”
장일소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언제 등을 찔릴지 몰라 걱정해야 하는 동료 같은 건 확고한 적보다 더 못한 법이란다. 발밑에 두지 못한다면 동등한 상대 같은 건 무의미하다는 걸 왜 모르니?”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이상하다고?”
“말씀만 듣고 있자면 정파 놈들과 절대 연합을 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막상 련주님께선 이미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
“과거 항주에서는 놈들과 손을 맞춰 싸우셨는데, 이제 와 같은 방식을 다시 취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장일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호가명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때와 사람이 달라지신 겁니까?”
장일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하지만 호가명 역시 마찬가지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보거라.”
“련주께서 변한 것이냐 물었습니다.”
“너…….”
새파란 장일소의 눈빛과 굳은 호가명의 눈빛이 맞부딪쳤다.
단 한 번도 없었던 광경이다.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립’.
언제나 같은 곳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이 순간 아주 조금, 하지만 확실하게 어긋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