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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45화


1645화. 그래서 즐거우십니까? (4)

“장문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지만, 전쟁은 현실이 아닙니까?”

한 노검수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적개심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지만, 확연히 호의 어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노골적인 견제심과 미미한 호승심.

아니, 어쩌면 불경하지만 ‘질투’라 불러야 할 감정인지도 몰랐다.

“현실이라 하셨습니까?”

“예.”

푸른색 무복을 입은 노검수가 차가운 눈으로 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각 문의 제자들은 제 스승을 따르는 법입니다. 어미 없는 새끼 새들이 가면 어딜 가겠습니까? 둥지에서 떨어져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물론 각 문의 제자를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건 문파의 선인들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가능한 일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각 문의 제자들은 제 삶을 문파에 내건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어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노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사내가 눈을 감았다. 노검수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장문인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무당은 제자를 따로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제 뜻 이전에 제자들이 그걸 원치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또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관을 쓴 도사였다.

“확실히 어려운 요구이지만…… 화산 장문인께서 하시는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장문인!”

노검수가 화들짝 놀라 외쳤지만, 그 또 다른 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노검수와 달리 여유가 가득했다.

“많은 이들의 동조를 구하기 위해서는 본보기를 보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문인께서 결심하시고 화산의 제자들을 내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화산의 검수들이 저희 무당의 지휘를 받는다면 제가 확실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장문인.”

“그리된다면 화산 장문인께서 추진하시는 바에도 확연히 힘이 실리지 않겠습니까?”

여유 가득한 눈빛. 하지만 그렇다 해서 호의가 깃든 건 결코 아니리라.

그 눈빛을 빤히 보던 청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화산은 제자들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장문인께서도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닙니까?”

청문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마찬가지?

무엇이 마찬가지란 말인가? 화산은 가장 선두에서 적의 예봉(銳鋒)을 꺾어 내고 있고, 이들은 그 뒤를 지원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 것을.

선봉에 선 화산의 손실이 크니 각 문에서 제자들을 차출해 지원해 달라는 게 그리도 어려운 요구란 말인가?

참담한 심정을 꾹 누르는 청문을 향해 계속해서 말이 쏟아졌다.

“그게 강호를 위한 일이고,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라면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급격한 변화를 추구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청문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논리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홀로 목소리를 높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저희 무당은 장문인의 뜻에 동조하기 어렵습니다. 본디 문파란 가족이자 집과 같은 곳. 서로 함께 싸울 때 그 힘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면.”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무언가 말하려던 청문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 잘 이해했습니다.”

제대로 논의조차 해 보지 못하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셈이건만, 청문의 얼굴에 아쉬움이나 껄끄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리될 일이 그리되었다는 듯한 담담함뿐이었다.

속을 읽기 어려운 평온한 분위기에 눌린 이들은 제 발 저린 듯 크흠 헛기침을 해 댔다.

“그럼 오늘 해야 할 논의는 모두 한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 말한 무당 장문인이 겸연쩍은지 지나가듯 덧붙였다.

“전시에는 논의할 시간도 줄여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터이니.”

그가 굳이 묻지 않은 변명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장문인들도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세를 과시하듯 줄을 이어, 하지만 달아나듯 빠르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문 앞까지 다가선 무당 장문인이 걸음을 멈추더니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청문을 돌아보았다.

“굳이…… 노파심에 한 말씀을 드리자면 말입니다.”

“…….”

“화산 장문인의 총기와 현명함을 천하의 누가 인정하지 않겠냐마는, 한 번씩은 과히 앞서가는 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 같은 범부(凡夫)들은 장문인의 식견을 따라가기에 벅찬 감이 있으니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숱한 시선이 청문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불편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다 제가 아직 모자란 탓입니다.”

“……별말씀을.”

무당 장문인이 짧게 포권으로 예를 표하고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의 입가에는 작은 승리감이 피어 있었다.

덜컥.

단호하게 문을 열어젖힌 무당 장문인이 보무도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아니, 내디디려 했다.

열린 문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엇?”

“이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수장들의 회의가 이뤄지는 곳에 감히 말도 없이 방문한 이에게 무례를 따져 물으려던 이들은 순간 조개처럼 입을 닫았다.

문을 막고 선 이가 무당 장문인을 응시했다. 눈빛이 서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딱히 기세를 뿜은 것도, 살기를 흘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당 장문인의 몸은 금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하게 경직됐다.

얼음처럼 굳어 버린 그를 일별한 사내가 느릿하게 말했다.

“아주 깨끗들 하시군.”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제 의복, 다음으로는 문을 막고 선 이의 의복으로.

더러움 한 점 없이 말끔한 그들의 의복과는 달리, 문을 막고 선 이의 옷은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얼룩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그저 헛기침을 뱉거나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수련도 좀 하고 그러시지요, 장문인들. 무인이라는 양반들이 그렇게 살이 올라 있으면 마교 놈들도 어디 장원의 지주인 줄 알고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

살이 올랐다는 말은 당연히 사실과 다르다. 그들은 이미 절정에 오른 무인이고, 수련을 조금 게을리했다 해서 체형이 바뀔 일은 없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이를 지적하거나 무례함을 따져 묻지 못했다.

“그…….”

껄끄러운 표정으로 문을 막아선 사내를 바라보던 이들이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 검존.”

매화검존 청명은 대답 없이 입을 연 이를 노려보았다. 이에 움찔한 이가 입을 꾹 닫고 청명의 시선을 피했다.

청명의 입에서 피식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미 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한낱 미물인 새도 제 새끼가 위험하면 목숨 걸고 뱀과 싸웁디다. 뒤에서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검존. 우리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문이 막힌 이들이 분분히 뒤를 돌아보았다. 매화검존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 시선을 받은 청문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청명아. 장문인들께 무례한 언동은 삼가거라.”

“…….”

“비켜 드려라. 어서.”

청문을 흘끗 본 청명이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겨 섰다. 딱 한 사람이 좁게 지나갈 만큼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리고 장문인들을 빤히 보았다. 지나갈 테면 지나가 보라는 듯.

“청명아!”

다시 한번 터져 나온 호통이 있고서야 청명은 길을 완전히 열어 주었다. 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숨길 생각은 없는지 팔짱을 끼고 문틀에 삐딱하게 몸을 기댔다.

“크흠.”

무당 장문인이 어색하게 괜한 한마디를 흘렸다.

“그럼.”

모두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많은 이들 중 누구도 제 옆에 선 청명과 눈을 마주치는 자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겨우겨우 회의실 밖으로 나선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듯 멀어졌다.

“후우.”

그리곤 회의실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지고서야 뒤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무례한……!”

“어찌 저리 방자하다는 말입니까?”

그제야 분분한 성토가 터져 나왔다.

“장문인! 정말 이리 계속 참아 주실 것입니까? 저자의 무례가 도를 넘지 않았습니까?”

무당 장문인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그럼 뭘 어쩌겠습니까?”

“그간의 무례에 대해 징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징죄라…….”

무당 장문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도 받아들일 사람에게 물어야 하는 법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저자가 어떤 자인지.”

그 말에는 다른 장문인들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죄도 받아들이는 이에게 내릴 수 있다.

다소 이상한 말이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매화검존 청명.

세상은 천하삼대검수라 부르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천하삼대검수라는 말이 얼마나 허울뿐인지.

천하삼대검수에 포함된 다른 이들과 청명의 무위에는 현격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한 차이가 있었다. 다른 이들은 감히 청명과 검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런 이에게 누가 죄를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실력으로는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렇다면 권위와 명분으로 찍어 눌러야 하는데, 저 매화검존은 권위라는 게 먹힐 사람이 아니었다.

천하의 난봉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작자.

화산 장문인 청문이 저자를 억제해 주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번은 사달이 나도 났을 것이다.

다른 장문인들의 얼굴에 짙은 불만이 어린 걸 보며 무당 장문인이 말했다.

“게다가 그 벌이 우리에게 꼭 이로운 것도 아니지요.”

“으음…….”

그 말에 동조하는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매화검존이 정말 벌이라도 받아 자리를 비운다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건 바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다.

그걸 알기에 이곳의 누구도 불만을 털어놓는 이상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냥을 잘하는 사냥개는 성질이 조금 포악해도 좋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더는 사냥을 하지 않게 될 때 그 사냥개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장문인들의 표정이 슬며시 풀렸다.

“지금은 그저 질 좋은 고기를 던져 주는 것만 생각하시지요. 그게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알겠습니다.”

뻔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고 나니 슬그머니 어색함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모두 서둘러 인사를 건네며 흩어지려던 찰나.

“하지만, 정말 괜찮겠습니까?”

“검존 말이오?”

“그게 아니라, 그…… 화산 장문인이 했던 말 말입니다.”

개방의 방주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전방에 선 화산에서 부상자가 속출해 인력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거짓은 아닐진대…….”

“물론 화산 장문인이 거짓을 논할 사람은 아니지요.”

“그러니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지원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무당 장문인이 길게 자라난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원시천존. 전방에 설 수 있는 문파가 화산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화산의 힘이 모두 소진되면 그때 다른 문파가 나서면 그만입니다. 굳이 저들을 돕기 위해 다른 문파들이 힘을 쪼갤 필요는 없지요. 그게 더 온당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개방 방주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다른 문파들이 화산 같은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지금 이 사람은 정말 그게 될 거라고 여겨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문파란 쪼개면 쪼갤수록 약해지는 법입니다. 마교의 여력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이상, 우리도 함부로 전력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화산이 힘이 빠진다면, 그때는 저희 종남이 앞에 서겠습니다.”

“아니, 그건 저희 공동의 역할이지요.”

호기롭게 떠드는 장문인들을 보며 개방 방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막상 일이 닥쳤을 때, 정말 나설 이들이 하나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대놓고 한숨을 내쉴 수는 없다. 이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건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시선이 저도 모르게 떠나온 회의실로 향했다.

‘장문인……. 검존.’

그 눈빛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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