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57화
1657화. 나는 그런 멍청한 놈들을 좋아하지. (2)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머리가 쫓아가질 못했다.
“자, 잠깐!”
제갈자인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은 이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막아야 한다. 적이 파 놓은 함정으로 뛰어드는 이유가 ‘함정째로 깨부수면 그만이다’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초, 총사! 우선은…… 침착하시고!”
“부당주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바로 당원들을 소집해. 일각(一刻) 준다!”
“예!”
“알겠다고!”
“움직여!”
심지어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착석해 있던 부당주들이 벌떡 일어나 쏜살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 어엇?”
제갈자인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넋을 놓았다. 청명의 말이 이어졌다.
“당주님들께서는 곧장 호북으로 갈 수 있게 준비를 마쳐 주십시오. 지금 바로, 최대한 빨리!”
“알겠네.”
“총사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당주들도 즉시 몸을 일으켰다. 당군악과 맹소, 풍영신개가 바로 반응하자 종리곡이 조금 늦게 몸을 일으켰고, 이내 모용위경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었다.
“필요한 지원은 지원단을 맡고 계신 황종의 단주께서 뭐든 해 주실 겁니다! 서두르세요!”
“그러지.”
당주들도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폭풍 같은 찰나가 지난 후, 이 자리에 남은 건 현종과 청명, 그리고 두 군사뿐이었다.
“녹림왕!”
“우 군사라 부르시죠, 총사.”
임소병이 촤악 부채를 펼치더니 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부채 위로 드러난 그의 두 눈에 짙은 웃음이 어렸다.
“그게 아니면 제(第)일 군사도 좋습니다.”
청명은 말없이 그를 슬쩍 쏘아보더니 제갈자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놈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을 분석하고 예측해서 내게 보고해 주세요.”
“당연히 그러긴 하겠습니다만…….”
따악.
청명이 손가락을 튀기자 창밖에서 금빛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머리 위로 한 바퀴 돈 금조(金鳥)가 청명의 손등 위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보고는 이놈으로.”
제갈자인은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청명이 내민 금조를 받아 들었다.
“만리금구……입니까? 이건 개방의…….”
“신경 쓰지 마세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맹에서 쓰기로 했으니까.”
“아…….”
멍하니 새를 보던 제갈자인이 아차 하는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자, 잠시만……! 이 녀석이 제게 와 있으면 각 당에는 어찌 명을 내릴 생각이십니까?”
“괜찮아요. 또 있으니까.”
“예?”
“이리 와!”
청명이 크게 외치기 무섭게 닫혀 있던 문이 텅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흑과 백이 뒤섞인 섬전 같은 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 듯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렇게 삽시간에 청명의 몸을 타고 오른 무언가가 어깨에 안착하더니 고개를 바짝 들었다.
“……족제비?”
심지어 화산의 검은 무복을 입은 새하얀 족제비다.
제갈자인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스쳤다. 청명은 족제비의 턱을 손가락으로 투박하게 긁어 주며 말했다.
“속도로만 따지자면 새보다 빠르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아…….”
제갈자인은 조금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저를 잊으신 것 같은데?”
임소병이 펼쳤던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지금 내리시는 명은 사실 제일 군사인 제게 내리실 명이 아닌지?”
‘제일’을 말할 때 힘이 실리고 있었다. 킥킥대며 웃는 그를 잠시 보던 청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군사.”
“예!”
“넌 따라와.”
“……예?”
“넌 나랑 같이 간다.”
툭.
부채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임소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요? 제가 왜……?”
“여긴 제갈 가주님이 계시니 넌 필요 없어. 따라와. 너는 현장에서 지휘한다.”
“아, 아니, 총사! 군사가 뭔지 모르십니까? 군사는 모름지기 쩌어어 뒤에서……. 예? 뒤 말입니다! 뒤에서 손짓하는 사람이지!”
“잔말 말고 따라와. 뒈지기 싫으면.”
……임소병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사실 현장으로 가는 것은 나름 감수할 수 있다. 전선에서 지휘하는 군사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문제는 지금 그가 배정받은 위치가 다름 아닌 저 망할 도사 놈의 곁이라는 사실이다.
천우맹을……. 아니, 현 강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저 망할 도사 놈이 있는 곳이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곳임을 결코 부정하지 못할 터.
한데 그런 곳에 데려가겠다고? 임소병은 생각했다.
‘차라리 칼 물고 엎어지는 게 낫지!’
저 정신 나간 화산의 광인들도 버티지 못하는 곳을 그처럼 연약한(?) 문사더러 무슨 수로 버티란 말인가?
“그, 그 자리는 아무래도 저보다는 제갈 가주께서 가시는 게…….”
“잔말 말고 따라붙어.”
“……눼.”
임소병은 결국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한 번만 더 거부하면 주먹이든 발길질이든 칼이든 반드시 날아온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자, 잠시만요, 총사. 이건…….”
“맹주님.”
제갈자인이 무어라 한마디라도 해 보려던 그 순간, 청명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현종을 향해 포권 했다.
“화산 제자, 청명. 무당을 지원하기 위해 출진하겠습니다. 승인을!”
얼굴에 일순 걱정이 스쳤지만, 현종은 이내 이를 지워 내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탓.
몸을 돌린 청명이 활짝 열린 문을 잠시 응시하다 바람처럼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는 일조차 없었다.
“어…….”
제갈자인은 거의 혼백이 빠진 얼굴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끄응. 돌겠네.”
이제 제갈자인이 붙잡고 늘어질 수 있는 건 임소병뿐이었다.
“자, 잠시만. 녹림왕.”
가뜩이나 근심에 잠겨 있던 임소병이 뚱한 얼굴로 답했다.
“예?”
“이,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입니까?”
“그게 뭔 소립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되니, 안 되니, 이게 옳니, 그르니, 내도록 옥신각신했었는데…….”
“아아, 그거요?”
임소병이 다시 한번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의견이야 나눌 수 있는 거죠. 생각하는 바는 제각기 다르니까.”
“……예?”
“하지만 중요한 건 결정이 내려진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겁니다. 그걸 위한 편제가 아닙니까?”
뭐 이런 뻔한 걸 물어보느냐는 의미가 가득 담긴 임소병의 얼굴을 보며 제갈자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결정이 내려진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말이야 옳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게 말처럼 쉬우면 대체 어느 문파에서 내적 갈등을 겪느라 골머리 썩겠는가.
사람이 백이면 생각이 백 가지이고, 천이면 천 가지의 생각이 있기 마련.
그런데 그 중구난방으로 난립하던 의견들을 단숨에 하나로 모아 버린다고?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
“고민은 격렬하게, 행동은 단순하게.”
임소병이 떨어뜨렸던 부채를 주워서 접더니 문밖을 내다보았다.
“저 양반이랑 지금까지 얽혀 왔던 사람들이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방식이니까요. 그리고…… 흐음. 뭐, 이건 굳이.”
임소병은 더는 말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듯 제갈자인을 두고 밖으로 나섰다.
남겨진 제갈자인은 멍하니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임소병이 다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얼버무렸던 뒷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이제는 천우맹의 방식이라는 건가?’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이게 정말 이루어진다면? 저 어중이떠중이들을 다 긁어모아 뒤섞어 만든 당들이 조금 전 눈앞에 벌어졌던 일처럼 청명의 말 한마디에 바람처럼 움직일 수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뒤의 일은 감히 예상하기도 어려웠다. 그건 병법을 다루는 이들이 꿈에서도 바라는 이상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높은 이상이기에, 오히려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을 때의 파급력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 그럼 나는 대체 뭘 해야…….”
“정보각입니다.”
“예?”
제갈자인이 획 뒤를 돌아보았다. 현종이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개방이 모아 온 정보와 각 당이 보내오는 정보가 청명이 녀석이 만들어 둔 지부를 통해 이곳으로 모일 것입니다. 군사께서는 그것을 다뤄 주시면 됩니다. 그에 더불어 보급이나 지원 등, 후방에서 도맡아 진행해야 할 부분도 군사께서 통솔하시게 될 겁니다.”
“아…….”
“어쩌면 여기에서의 싸움이 더 격렬할지도 모릅니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제갈자인이 말없이 현종을 바라보았다.
함정일지도 모르는 곳으로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상황이건만, 현종의 입가에는 외려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저 미소는 단순한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저것은…… 제갈자인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깨닫는 순간, 제갈자인의 눈에 현종이 한층 더 크게 다가왔다.
“후…….”
제갈자인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의관을 정제하고 현종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그러고는 허식이 아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맹주님.”
“저야말로.”
제갈자인의 인사를 받아 준 현종의 눈이 그를 넘어 활짝 열린 문으로 향했다.
“집결했습니다.”
“제길, 우릴 뭐라고 해야 하지? 을(乙)? 을당도 집결 마쳤습니다!”
“정(丁)당도 모두 집결했습니다!”
“이쪽도!”
화음으로 접어드는 길.
작은 마을의 진입로에 불과하지만, 저 화산으로 향하는 길이기에 누군가에겐 유명했고, 누군가에겐 의미 깊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아릿했던 길이다.
그곳에 수많은 이들이 도열해 있다.
평범한 문파의 대연무장보다 족히 세 배는 더 크게 지어진 연무장에도 다 도열할 수 없었던 천우맹의 당들이. 화음으로 향하는 길목에 도열해 선 것이다.
그들의 앞에는 각 당을 이끄는 당주와 부당주가 서 있었다.
그 의미는 세간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컸다.
천하는 그간 수많은 침입과 환란을 겪어 왔고, 그때마다 강호는 힘을 합쳐 적을 막아 왔다.
그러나 그 언제, 어떤 순간에도 문파라는 벽을 완전히 허문 적은 없었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서로 다른 무기를 쓰고, 서로 다른 호칭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한데 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이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다만 그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을 이가 한 명 있다. 그가 도열한 천우맹도들 앞에 곧게 섰다.
검은 화산의 무복을 입은 청명은, 모두를 한번 훑어보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눈에는 불안이 깜빡거리고, 누군가의 눈에는 각오가 이글거린다. 아마 청명의 내심도 저 눈빛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의 시선이 문득 뒤로 향했다.
화음으로 향하는 길과 그 뒤로 우뚝 솟은 화산의 모습이 보였다.
화산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이는 곧 화산을 등지고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길은 언제나 양방으로 열려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이 길을 통해 나아갈 것이며, 또한 걸었던 길을 다시 되걸어 돌아올 것이다.
과거와는 다르다. 그때와는 다르다.
다시 앞을, 천우맹도들을 보는 청명의 두 눈에 더 이상의 흔들림은 없었다.
부족하다고 해도, 아직 모자라다고 해도, 나아감에 있어 망설임은 없다. 완벽을 논할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음을 이제는 알기에.
탁.
청명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돌아올 때는.”
“…….”
“전쟁을 끝낸 뒤다.”
이는 곧, 전쟁의 끝을 보지 않고서는 다시 이 땅을 밟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말뜻을 이해한 모두의 얼굴에 의지가 팽팽히 차올랐다.
“출발한다!”
“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다란, 하지만 정제된 함성을 질러 낸 천우맹의 맹도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지시할 것도, 지시받을 것도 없다.
목표는 한 곳, 무당.
천하의 미래를 결정할 승부가 벌어질 바로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