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60화
1660화. 나는 그런 멍청한 놈들을 좋아하지. (5)
석상처럼 선 사내가 말없이 눈앞의 산을 응시했다.
호북성 균현.
본래는 천하에 딱히 이름 알릴 일이 없었을, 무한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마을이다. 하나 그 이름을 강호의 모든 이가 알게 된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그 뒤로 우뚝 솟은 산 때문이었다.
무당산(武當山).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장막처럼 겹겹이 드리운 명산(名山)으로, 그 깊은 골짜기들은 아주 오랜 과거부터 숱한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무당이란 이름 아래 살게 했다.
세상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이, 인간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찾으려는 이, 세상에 없는 고행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열려 하는 이…….
그런 이들의 삶과 길이 얽혀 무당(武當)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세상은 무당산을 도가의 성지라 하여 현악(玄嶽)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무당산이 지금 사내의 손아귀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왔다.
호가명의 두 눈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스쳤다.
언제고 이 세상을 련주의 발아래 두고자 했다. 그 계획은 지금까지 문제없이……. 아니, 더없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지금 사패련의 기세는 천하를 뒤덮을 만큼 웅대하고, 해낸 일은 역사를 다시 쓸 만큼이나 대단했다.
하지만 이를 냉철하게 해낸 이, 호가명도 지금의 광경을 앞에 두니 그 감회가 남다르다는 말 외로는 제 감정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정말 상상했던가? 정말로 꿈꿨던가?
이 칼날이 다른 곳도 아닌 균현을, 무당산을……. 저 무당파를 똑바로 향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말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문파를 짓밟았다. 수많은 이들을 꿇렸다. 그중에는 무당과 쌍벽을 이루는……. 아니, 오히려 무당보다 더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던 소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밀고 들어온 소림을 맞아 분쇄하는 것과, 무당의 본거지로 직접 쳐들어가 칼날을 겨누는 게 어찌 비견될 수 있을까.
전자야 소림의 권(拳)이 사패련을 노린다면 언제고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후자는 본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귀주의 더러운 뒷골목에서 장일소를 처음 만났던 그때, 꿈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몽상(夢想)에 미래를 걸어 보기로 결심했을 때…….
아니, 심지어 만인방을 만들고 끝내 사패련이 결성되었을 때도 정말 이날이 올 거라고 믿은 적이 있었던가?
호가명은 묵직한 숨을 토했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떠도 저 산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했다.
마침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수백 년간 세상을 지배해 온 구파일방과 단순히 싸우는 것을 넘어, 그들의 심장에 사패련의 새파란 칼날이 닿았다.
드디어…….
“흐음. 무당이라…….”
바로 그 순간, 가볍게 흘러나온 비음이 감흥에 젖어 있던 호가명을 현실로 되돌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장일소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지금 장일소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래도 걸렸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호가명의 손끝은 살짝 떨렸다.
장일소의 말투는 딱히 새로울 게 없다는 듯 선선했다.
이건 허세도, 배짱도 아니다. 나른하게 가라앉은 듯한 장일소의 목소리도, 요사하게 빛을 발하는 눈도, 심지어 은은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입꼬리마저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가명아.”
“…….”
“가명아.”
“예, 련주님.”
호가명이 깊이 고개 숙였다. 지금은 제 감상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쩔 셈이더냐?”
장일소의 물음에,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일소는 그가 익히 아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봐 오고 있었다. 장난기와 호기심이 섞인, 익숙한 표정이었다.
싸움을 앞두었을 때, 특히 커다란 적일수록 장일소는 호가명에게 종종 저리 묻곤 했다. 호가명이라면 저들을 어찌 상대할지 궁금한 것처럼. 혹은, 호가명의 생각이 자신과 같을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응? 어쩌는 게 좋을 것 같니?”
장일소는 장일소다. 뜬금없지만, 이 순간 호가명은 그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는 걸 확인한 기분이었다.
호가명은 목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정중함을 담아 대답했다.
“상대는 무당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입니다. 성급히 공격했다가는 설령 승리한다 해도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장일소는 이렇다 할 큰 반응 없이 그런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정석대로라면 최대한 느긋하게 공략해 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호가명의 시선이 무당의 산세로 향했다.
수두룩한 기인이사가 굳이 저 산을 찾았다는 건, 산 곳곳에 깊은 골짜기와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이 즐비하다는 의미다.
공격하는 측에서 볼 때, 그토록 끔찍한 지형은 없다.
더구나 상대는 이 무당산을 제집 삼아 살아왔다. 분명 호가명이 짐작하기 힘든, 지형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최대한 느긋하게 공략해 가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심정으로.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이 질문도 예상했다. 애초에 장일소의 눈빛은 그런 뻔한 대답을 기대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으므로.
호가명이 차분히 답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우회(迂廻)입니다.”
“우회?”
“예.”
호가명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함정을 판 채 기다리고 있다면 굳이 그곳에 뛰어들어 줄 이유가 없습니다. 내버려 두고 가면 그만입니다.”
장일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두고 가자?”
“예.”
“흐음……. 무당을 두고 가자? 그게 정말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하니?”
장일소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되물으니, 호가명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부연했다.
“놈들은 이미 우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달아나지 않고 저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서?”
“그건 놈들에게 우리와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명예든, 복수든 다를 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저들이 우릴 절대 순순히 보낼 리 없단 사실입니다.”
“…….”
“이대로 우리가 우회해 가면, 놈들은 우리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 산에 들어앉아 구경이나 했다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 목소리는 냉정하고 담담한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굳이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을 것. 그리고 놈들을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끌어들여…….”
호가명의 차가운 눈길이 무당산 쪽으로 향했다.
“짓밟고 뭉개는 것입니다.”
“하……. 하하하핫!”
장일소가 흥미진진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몸을 휘감은 장신구들이 호응하듯 짤랑짤랑 경쾌하게 흔들렸다.
“과연…… 좋은 방법이로구나.”
장일소의 칭찬에 호가명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의견을 내는 것은 그다. 하지만 결정하는 건 장일소다. 이건 그들 사이에 있어 변치 않는 법칙이었다.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조금 부족해.”
호가명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제가 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란다.”
장일소가 무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가명을 바라볼 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얼굴이 점점 귀기를 머금기 시작하며 입꼬리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확실히 그리되겠지. 우리가 저들을 두고 간다면 말이다. 네 말은 한 치의 틀림이 없다.”
“하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싸움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적을 죽이는 것과 적을 없애는 것. 지금은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없애는 싸움을 해야 할 때란다.”
장일소의 시선이 무당산의 정상 쪽으로 향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보였다. 저 우거진 소나무들 너머로 존재하는 고풍스러운 전각의 형상이.
“알겠니? 단순히 뒤쫓아 오는 놈들을 짓밟고 죽인다고 해서 무당이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그저 피해를 조금 입을 뿐이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돼. 이제는 보여 줘야 한단다. 우리의 앞을 막아선 이들이 어찌 되는지.”
“…….”
“그래야 내 앞에 선 이들이 그 머리에 제 잇속 대신 공포를 채우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가명아?”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련주님께서는 저 산을 짓밟길 원하시는군요.”
“그렇단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호가명은 장일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한동안 무당을 응시했다. 푸르른 소나무가 가득해, 마치 녹색의 옷을 입은 듯 보이는 산이다.
그 순간, 그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공기가 칼날처럼 호가명을 훑고 지나간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뭐지?”
호가명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함정을 더 이상 함정이 아니게끔 만드는 것.”
말뜻을 이해한 장일소의 두 눈이 그믐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 * *
무경은 슬쩍 소매를 잡아당겨 잘게 떨리는 손끝을 감추었다.
‘빌어먹을.’
조금 전부터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사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두려움을 몰랐다. 열기가, 분노가 그의 두려움을 집어삼켰으니까.
하지만 막상 적이 몰려오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잊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번져 오며 끝내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다. 나는 무당의 제자다.’
속으로 몇 번이나 연거푸 되뇌었다. 그리고 짧게 도경의 구절을 암송했다. 검수에게는 부동심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특히나 지금처럼 매복하여 적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맡은 상황에선 더더욱.
“사, 사숙…….”
그때. 함께 매복한 사질, 진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찾았다.
“괘, 괜찮을까요?”
무경은 슬쩍 사질을 돌아보며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가장했다.
“걱정할 것 없다.”
“하, 하지만…….”
“다른 곳이면 몰라도 이 무당산에서라면 천하의 누구도 무당을 도모할 수 없다. 사패련이 아니라 구파일방 전체가 몰려와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이건 안심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짙게 우거진 숲, 마치 거인이 할퀴어 낸 듯 깊게 파인 협곡, 자연적으로 생겨난 수십 개의 동굴, 거기에 수백 년간 무당으로 모여든 도인들이 수련을 위해 만들었던 인공적인 은신처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진 무당산은 천혜의 요새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무당의 제자들은 무당산을 집 앞마당처럼 훤히 알고 있다.
‘그래. 우리는 누구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 우린 무당의 검수들이니까.’
허공 사숙이 항전을 말한 데는 이런 계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잘만 하면 원군이 오기까지 버티는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저들에게 막대한 타격까지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장강에서 잃은 명예를 되찾는 데 이곳보다 적절한 장소는 없으니까.
“사숙.”
“걱정할 것 없다. 우린 할 수 있다.”
“그게…….”
“이런 지형에선 머릿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확고한 각오와 목숨을 걸 의지뿐이다.”
무경이 자신을 다잡듯 말했다. 하지만 진해의 목소리는 한층 더 불안해졌다.
“그, 그게 아니라 사숙…….”
“응?”
“아,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냄새 나지 않습니까?”
“냄새? 냄새라니, 그게 무슨…….”
순간 무경의 얼굴이 일변했다.
그도 맡은 것이다. 코를 찌르는 이질적인 냄새를. 평생 그가 누벼 온 이 무당산에선 결코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다.
‘이, 이건!’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 그게 무엇인지 알아챈 순간, 무경은 자신이 매복 중이었단 사실도 잊은 채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 안 돼! 이, 이건 기름…….”
화르르르르륵!
마치 그 말에 맞장구라도 치는 듯, 눈앞에 펼쳐진 산 아래가 거짓말처럼 붉게 물들었다.
결코 단풍이 들지 않는 푸른 소나무. 수백 년간 자라나 우거지고 굽이친 그 나무들이 긴 세월 단 한 번도 물들지 않았던 색으로 휘감긴다.
“부…… 불…….”
잠깐 넋을 놓고 있던 무경이 저도 모르게 목이 터지도록 고함쳤다.
“불이다! 화공이다아아아아아아아! 놈들이 불을 놨다아아아아아!”
그가 온 힘을 다 짜내어 외친 목소리가 매캐하게 솟구치는 연기와 함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嚆矢)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