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62화
1662화. 그곳이 어디든. (2)
무당. 현악(玄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도교의 성지.
그 신성한 산이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진정한 참상은 불타는 산이 아니라, 그 산을 딛고 선 이들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무당의 상징과도 같은 소나무가 새겨진 송문고검(松紋古劍)이 사파인의 목을 단번에 뚫어 냈다. 일말의 자비도 깃들지 않은 쾌속한 검격. 그러나 검의 끝은 그 속도에 걸맞지 않게 눈에 보일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검 주인의 두 눈도 마찬가지였다. 무당 이대제자 진립(眞立)은 전에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물론 지금 달려드는 놈들 따위야 적수라 부를 정도도 아니다. 무당의 이대제자로서 수십 년간 갈고닦아 온 검은 긴 봉문을 통해 한층 더 단단해졌다. 어중이떠중이 잡졸 같은 사파 놈들이야 두셋이 아니라 열이 달려들어도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 있었다.
그러니 진정한 문제는 사람이 아니다.
“사제! 부, 불길이 오고 있네!”
“압니다, 사형!”
문제는 저런 잡졸들에게 발목이 잡힌 짧은 와중에도 화마가 산 전체를 시시각각 집어삼켜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무학을 익힌 절정의 고수라지만, 맹렬히 번지는 불길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쉬울 리 있겠는가.
불이 더 번져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빼내야 한다.
“사제, 당장 물러나야 하네!”
“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적들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카앙!
다급하게 발을 빼내려던 진립이 움찔하며 급히 검을 쳐 올렸다. 어디선가 돌연 도 한 자루가 그의 정수리를 쪼개 버릴 듯 날아든 것이다.
“이, 이익!”
진립의 속은 불길에 휩싸인 무당산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러는 사이에도 불길은 더 커지고, 더 많은 사파 놈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 지독한 놈들이⋯⋯!’
화마를 뚫고 나오느라 의복 곳곳에 불이 붙은 사파 놈들이 바닥을 굴러 불을 끌 생각도 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무당의 검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광경은 정말이지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살 익는 냄새, 나무 타는 냄새가 뒤섞이며 코가 마비될 듯했다.
등허리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세상은 사파 놈들을 두고 하나같이 오합지졸이라 비웃는다. 그러나 저렇게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맨몸으로 헤치며 공격해 오는 이들을 두고 단순히 오합지졸이라 할 수 있을까?
“⋯⋯제! 사제!”
“아, 알고 있다니까⋯⋯.”
“아아아악!”
그 순간 들려온 비명에 진립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옆구리에 검이 박힌 채 비명을 내지르는 이의 모습이 눈에 틀어박히듯 들어왔다. 진립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터졌다.
“사, 사혀어어어어엉!”
생각해 보면 이곳에 있는 이들의 처지야 누구 하나 진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와중에 물러서지 않으려는 진립까지 신경 쓰느라 사형은 정작 자신의 사각에서 날아드는 검을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켜라! 으아아아아!”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린 진립이 횡으로 검을 그어 앞을 막는 이를 대번에 둘로 갈라 버리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사형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도를 가까스로 쳐 내었다.
카앙!
손아귀에 느껴지는 묵직한 힘에 진립은 순간 직감했다. 만일 자신이 한순간만 늦었더라면 사형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고 말았을 것이다.
휘청이는 사형을 온몸으로 부딪치듯 옆으로 밀어 내고 쓰러진 진립은 바닥을 내구르며 적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평정심은 잃은 지 오래다. 숨쉬기가 곤란할 만큼 짙어지는 탄내와 더불어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까지 밀려든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몸을 굴려 상체를 다시 세우니 머리 위로 삼 장은 치솟은 불길과 금방이라도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아져만 가는 연기의 장막이 보였다.
그리고 진립은 떠올렸다.
‘흑룡채⋯⋯.’
하늘에 닿을 듯 가팔랐던, 절벽이란 이름의 절망을. 그 절벽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던 자신을 말이다.
겹쳐졌다. 저 뜨거운 불과 그때의 차가웠던 장강이.
절대 같을 수 없는 것들이건만, 지금의 그에겐 다르지 않은 것만 같았다.
“사, 사제⋯⋯. 립아.”
그때, 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립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사형! 정신 차리십시오! 바로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직⋯⋯ 아직 나도 싸울 수 있⋯⋯.”
“가만히 계십시오!”
진립이 버럭 소리치고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정말로 과거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퇴로는 좁아지고 있고, 적을 상대하는 건 생각과 달랐다. 적들은 그들에게 익숙지 않은 싸움을 강요해 온다.
그래. 사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야만 한다. 바로 진립이 과거와 달라졌으니까.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장강에서 그저 공포에 떨기만 했던 진립은 여기에 없다. 그가 여전히 과거와 다르지 않다면, 그 절치부심의 봉문은 대체 뭘 위한 시간이었단 말인가.
“웃기지 마라! 이 사파 놈들아!”
진립이 악을 쓰며 검을 날렸다.
같은 시각, 무당의 곳곳에서 진립의 상황과 비슷한 격전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불길이 무당의 중심까지 닿지도 않았건만,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우드드득!
검을 잡은 허공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비열한⋯⋯.”
알고 있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 있어 비겁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아니, 있다 하더라도 화공(火攻)은 결코 그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허공이 끝내 이 말을 뱉고야 만 건, 이번 화공이 그만큼 무당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금방이라도 검을 부러뜨릴 듯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 순간에도 사형들은 소란스레 동요하고 있었다.
“화공이라니! 허어,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애초에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무당이 얼마나 넓은 줄 모르십니까? 이 산 전체를 불태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벌어지고 있지 않으냐!”
“사패련이니까⋯⋯ 사패련이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저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틀린 말이 아니다. 확실히 사패련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그도 그럴 게, 이 넓은 산에 모조리 불을 놓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심지어 기동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을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지휘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당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이야 없다 해도 무당산에 초옥을 짓고 사는 이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들을 모조리 태워 죽이겠다는 짐승 같은 각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원시천존⋯⋯. 원시천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 없⋯⋯.”
“지금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무엇 하는가? 저들의 잘못을 성토할 때가 아니라 대책을 세워야 할 때가 아닌가!”
허담이 고함치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허담도 말을 계속 이어 가지는 못했다.
말이야 바른말로, 눈앞을 온통 살라 먹으며 다가오는 불바다와 그 위로 치솟는 거대한 연기 벽 앞에서 어찌 대책을 빠르게 낼 수 있겠는가.
점점 커지기만 하는 저 재앙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 물러나야 합니다!”
“뭐?”
“산 뒤쪽은 아직 불길이 옮겨붙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모두를 이끌고 몸을 빼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다 죽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우린 이곳에서 저들과 맞서기로 결정하지 않았는가?”
“이건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적과 싸우겠다고 했지, 산불에 타 죽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 봐야 고작 불일 뿐이네! 산이 타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우리가 불에 타 죽기야 하겠는가?”
“그게 무슨 안일한 말씀이십니까? 그럼 저놈들은 구경만 한단 말입니까? 불이 문제가 아니라, 저 불과 함께 놈들이 우리를 노린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허평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산을 덮고 있는 수림들이 모두 타 버리고 나면 몸을 피할 곳도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 개미 떼 같은 놈들과 어찌 맞서란 말입니까? 이건 개죽음입니다!”
“그래서? 달아나자는 것이냐?”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지금은 일단 몸을 빼고⋯⋯.”
“장강에서처럼 말이냐?”
허평이 움찔했다.
“⋯⋯그, 그건⋯⋯.”
“그러니까 장강에서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하며 몸을 빼자는 것 아니냐? 그때는 쏟아지는 바위와 기름을 예측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이번에는 저놈들이 불을 지를 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다 하란 말이냐?”
허담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을 강호인들이 납득해 주기를 바라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무당은 적을 앞에 두고 달아나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담으란 말이냐?”
허평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리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사실 틀린 주장은 아니므로.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 누구도 무당의 입장을 헤아려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비웃고 멸시하기 바쁘겠지. 무당이란 작자들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이들이라고. 적만 보면 꽁무니를 빼기 바쁜 비겁한 놈들이라고 말이다.
치욕의 봉문이었다. 그러나 그리되고 나면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날을 갈아 온 그 시간마저도 무의미해질 터다.
아니, 오히려 봉문을 하지 않는 쪽이 나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기껏 봉문까지 하고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단 소리나 듣게 될 테니까.
“하, 하지만⋯⋯.”
허평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뻔한 결과를, 있는 눈을 감은 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예? 사형!”
이 말에는 허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죽어서 명예를 지킬 것인가, 살아남아 오욕을 뒤집어쓸 것인가.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은 무당의 제자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선택이 아니다.
개죽음당해 잊히고 말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나중에 죽기 위해 명예를 거름통에 처박을 것인가.
아무리 그들의 결심이 단단했다 한들, 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결정을 내려야 할 허산자가 지금 이곳에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임시로 장문을 맡은 허산자가 있었다 해도 시선이 향한 곳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모두의 시선 속, 허공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령 개죽음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 사제⋯⋯.”
허공. 허자 배에서 가장 어린 이. 그렇기에 앞으로 수십 년은 더 무당의 중심이 되어야 할 이.
그가 입술을 짓이기던 걸 풀며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곳에 서 있습니다. 명예롭게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죽음일지언정 살아 치욕을 당하지는 않겠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허공이 장로들을 쏘아보았다.
몇몇 얼굴에는 낙담이 어리고, 또 몇몇 얼굴에는 각오가 어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방어선을 뒤로 물리십시오. 어차피 이리되었다면 매복은 무의미합니다.”
“뒤로? 어디까지?”
허공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향했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무당의 산세 중에서도 가장 험한 곳으로.
“백안암(白顏巖)에 진을 칩니다.”
“아⋯⋯!”
백안암은 높고 길게 이어진 절벽이 흡사 새하얀 얼굴을 보는 것 같다 해서 무당의 제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사제, 그 말은?”
“예.”
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에 이리된 것, 입장이 한번 바뀌어 보는 것도 좋겠지요.”
과거 장강에서와는 완벽히 반대다. 이번에는 저들이 절벽을 오를 시간이다. 무당이란 이름의 절벽을.
“가십시다, 사형들!”
“알겠네!”
허공이 즉각 땅을 박찼다. 몇몇 장로들도 각오를 굳히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백안암이라.”
“가시지요, 사형.”
그 뒤를 따르는 몇몇의 눈에는 분명 있어서는 안 될 두려움이 맺혀 있었다.
‘그저⋯⋯ 그저 개죽음이 아닌가?’
아직도 망설임에 발이 떨어지질 않던 한 사람이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그 중앙을 검흔처럼 가르고 간 긴 균열도 함께.